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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했는데 첫사랑이 수상하다-155화 (155/189)

155화. 분기점: 겹그믐의 날 (2)

“크레벨 소공작 오셨습니다.”

“앗, 주인님, 그러면 저는.”

“으응, 그래. 라구 경에게 안부 전하고.”

오며 가며 라구와 함께 안면을 익히기야 했지만, 라이언은 아직도 데메트리안이 어려웠다. 맨 처음 그 존안을 뵌 날에 무섭게 느꼈던 것이 아무래도 컸다.

라이언이 그렇게 잽싸게 짐을 챙겨 답삭 일어났을 때쯤.

“좋은 오후야.”

“응, 왔어?”

“아, 안녕하세요! 저, 안녕히 계세요!”

곧 데메트리안의 키를 따라잡을 수 있을 정도로 기다란 라이언 소년은 이편저편으로 허리를 꾸벅이다가 잽싸게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그게 잠깐의 폭풍과도 같았을까.

라이언이 앉았던 자리에 데메트리안이 앉자마자 하녀들이 새로운 다기와 함께 원래 있던 화병 대신 꽃이 장식된 화병을 내왔다. 수국과 리시안셔스 등 여름꽃들이 풍성하게 꽂혀 있었다.

“웬 꽃을 다 가져왔어? 매번.”

“기대하라고 했잖아.”

“……그건 다 마치고 나서라며.”

데메트리안의 맞은편에 앉아 두 사람이 대화를 주고받는 양을 쳐다보던 미라벨이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렸다.

‘로이한테서 적당히 관계가 풀렸다고 이야기는 들었지만, 막상 직접 보니 적응 안 되네…….’

데미 공자는 로이 앞에서만 바보같이 굴며 쩔쩔매는 모습이 딱인데 말이다.

라이언이 먹던 것을 치우고 손님의 지위에 걸맞은 화려한 다과상을 차리고 나가는 하녀들도 비슷한 심정이었다.

정말 우리 아가씨께 본격적으로 구애하시는 거야?

상황 정리나 제대로 하고 오셔야지 않을까?

저번에 본인 정혼자께서 다녀가신 건 아시나 몰라.

스칸다르 왕자파는 쇠하고 말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혼자 있는 크레벨 소공작파가 흥한 것도 아닌 것이었다.

“오늘 물의 날도 아닌데, 어떻게 이 시간에 왔어?”

“응, 지나가다가 보고 싶어서.”

“어어, 저, 파이겐 경 왔죠? 그럼 저는 대련이나 하고 있을까아……?”

미라벨이 못 참겠다는 듯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클로에가 빤히 기대하는 답이 있으면서 묻는 꼴을 보자니, 괜히 제가 다 창피해지는 것이었다. 대거리하는 두 사람은 멀쩡한데 미라벨 혼자 몸 둘 바를 몰랐다.

“왜, 아마 다음 주 일 얘기하려고 온 걸 텐데.”

“아냐, 됐어. 공자님, 저는 로이 통해서 들을게요?”

“네, 파이겐 경도 작전에 대해서는 알고 있습니다. 아주 깊이까지는…… 몰라도.”

“네에, 네.”

다음 주 겹그믐의 날에 대신전 잠입하는 작전에 대해서는 알아도, 클로에와 데메트리안이 주신의 신비를 겪었다는 내용에 대해서는 모른다는 말이었다.

탁, 소응접실을 빠져나간 미라벨이 문을 닫자마자, 데메트리안은 클로에가 앉은 상석에 최대한 가까이 옮겨 앉았다. 서로 다른 의자에 앉아 있어 어쩔 수 없는 간격이 아쉽다는 양 클로에 쪽을 향해 바싹 돌아앉은 채였다.

“스칸다르의 왕자가 어제 귀국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어. 대니얼을 통한 거니까 확실해.”

“……2황자 전하께서도 이 일을 아셔?”

“아니, 말 못하지. 프레더릭 전하가 그런 일에 휘말리셨다고는…….”

휘말렸다니, 퍽 온건한 표현이네. 클로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저만 해도 프레더릭이 50퍼센트와 100퍼센트의 확률에 대해 고민하는 걸 듣고도 그가 국란을 초래할 사건에 가담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으니까.

‘기껏해야 조금 위험한 정쟁에 몸 던지시겠거니 했지…….’

동생으로서 제 형을 믿는 마음이야 오죽하겠는가.

“그럼, 그 분리 독립파 수장의 증언이…… 맞아떨어진 거네.”

“응, 믿고는 있었어. 그간 고민이 많아 보였었거든.”

데메트리안의 말을 들으며 클로에가 다시금 고개를 끄덕였다.

‘왕자님께서 분리 독립파의 배후일 줄은 몰랐지만…….’

데메트리안으로부터 분리 독립파의 배후가 뷔욘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클로에는 정말 아연실색했었다.

‘모피 케이프를 들여왔다는 그 행상이 분리 독립파였다니……. 어쩐지, 그래서 소개를 안 해 주셨나.’

클로에는 기실 오래간 뷔욘을 의심해 왔었다. 어쩌면 대축일에 대신전에서, 손님과 똑같은 생김새의 안톤미오노를 본 순간부터.

다시 반복될 미래를 위해 애써 모른 체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데메트리안이 의심의 물꼬를 터 준 그 순간, 클로에는 제가 얼마나 오래간 미심쩍은 마음을 외면해 왔는지 깨달았다.

‘정말로 성배 도난에 왕자님이 얽혀 있고, 심지어 분리 독립파의 배후이기까지 하다는 확언을 들으니 마음이 꽤…….’

실망하게 될까 봐 외면했던 일들이고, 정말로…… 실망하고 말았다.

그때 슬며시 제 손을 잡아 오는 손길이 있었다.

어느새 제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서 앉아 있는 데메트리안. 그의 낯이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제 낯빛이 흐려졌던 모양이었다.

연유를 묻지 않아 주는 것이, 그 나름의 배려일 거였다.

그것이 고마워서 클로에는 부러 발랄한 목소리를 내었다.

“난 분리 독립파가 독립하고서 아무도 정계에 얼굴을 내밀지 않아서, 다들 평민인 줄 알았지 뭐야.”

“그러면?”

“분리 독립파가 여러 귀족 가문이 규합해서 만든 세력이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작위가 유지되었고.”

클로에의 말에, 데메트리안은 경시청에서, 공작저의 서재에서 대면했던 이올린 한센을 떠올렸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허름한 차림새였지만 형형한 눈빛만큼은 일견 기품이 있어 보이기까지 했던 그녀.

“……독립운동을 벌이자면 막대한 금액이 필요했을 테니까.”

“응, 현 왕이 등극하면서 스칸다르 왕실이 독립에 미온적으로 굴기 시작했잖아? 귀족들도 덩달아 선을 그어서 후원이 끊겼다 들었거든. 그래서 가산을 탕진했으니 귀족 행세를 못하게 돼서 정계에 복귀하지 않은 줄로 생각했었어.”

제 이야기를 진지하게 경청하는 데메트리안의 낯을 바라보며 클로에는 조심스레 덧붙였다. 거기에는 요 며칠간 휘몰아쳤던 뷔욘에 대한 실망감이 배어났다.

“하지만 지금 보면 왕자님을…… 군주로 섬기기 어려웠을 수도 있겠네.”

거기까지 말한 클로에는 얼마간 말없이 입술만 깨물었다.

그녀의 침울한 기색을 안타까워하던 데메트리안은 슬며시 손을 뻗었다. 담백한 척 가닿은 그의 엄지에, 클로에의 아랫입술이 잇새에서 빠져나왔다.

“네 말이 맞아.”

그 광경이 자못 만족스러워, 데메트리안의 눈매가 야트막하게 휘었다.

“소신 있게 단체를 이끌고 있었는데, 인신매매며 환각제 밀수며 구휼 기금 도적질이며…… 테러도 최근 들어 대인 테러가 늘어났잖아? 그 강직하고 자존심 센 이가 힘들 법했지.”

강직하고 자존심 세다라. 클로에는 저도 모르는 사이 데메트리안이 그런 평가를 내릴 수 있을 만큼 분리 독립파의 수장과 여러 번 접촉했음이 또 놀라웠다.

[이제 다 됐어, 분리 독립파에서 도와주기로 했어!]

지난 주말 데메트리안과 헤어지고 돌아와 목욕을 마치고서 노곤해 있을 때, 갑작스레 울린 통신구에서 새어 나온 흥분한 목소리.

헤어질 때까지만 해도 분리 독립파가 양동작전에 활용될 듯하니 그들과 말을 맞춰 놓으면 좋을 텐데……라며 아쉬운 소리를 한 그였던 것이었다.

[분리 독립파에서 겹그믐의 날에 신전에 소란을 일으키는 역할을 맡게 되는 걸 시인했어.]

그리고 어제, 분리 독립파의 수장을 만나고 돌아온 데메트리안은 다시금 잔뜩 흥분한 기색으로 보고해 왔다.

[납치한 이들을 작전에 활용할 모양이야. 일부러 스칸다르인 평균 신장에 맞는 이들로만 모집했대.]

그 말을 들은 클로에는 안톤미오노의 키가 제국인치고 스칸다르인만큼 훤칠했던 것을 떠올렸다.

[오늘 아침 왕자가 귀국했는데, 함께 돌아간 스칸다르 사절도 일부는 납치된 이들을 변장시킨 거래. 그들 대신 남는 사절들은 돌아간 척하고 고티유에서 할 일이 있다고.]

뭐든 다 말한다더니, 진짜였구나…….

그 변화가 조금 간질간질하면서도, 그 내용이 시사하는 바가 많아 클로에는 자못 심각해졌더랬다.

그리고 분리 독립파의 수장이 털어놓은 이야기가 진실이라 판명해 주듯, 대니얼이 뷔욘을 비롯한 스칸다르인들이 귀국편 포털을 탔다고 확인해 주었다.

“왕자님의 눈을 피해 너를 만난 거라더라니……. 정말 왕자님이 고티유를 떠난 날이었네.”

“감시하는 건 아니겠지만, 원체 중대한 일이라 그쪽에서도 공을 많이 들이고 있을 테니까. 그리도 그리던 독립을…… 이룰 수 있는 방편이니.”

“분리 독립파 수장도 어려운 결정을 내렸네. 방법이야 조금 굴욕적이라도 천 년을 기다린 독립을 쟁취할 기횐데.”

“그래서 실제로 분리 독립파 내부에 파벌이 갈라졌던 모양이야. 아무리 왕실 직계의 후원이라지만 이런 지령까지 수행할 건 아니다, 그래도 독립만 이룰 수 있다면 좋다……. 기존의 단원들은 대부분 전자였대. 슈바츠 거리 작전에서 꽤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그중에 오래된 단원은 몇 없었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얻은 독립이 아니라 정정당당한 방법으로 쟁취한 독립만이 진정한 독립이라고 생각하는 거구나.”

귀족 출신인 그들의 마지노선이, 이따금 일으키던 테러 정도였나…….

“루카에게는, 이야기했어?”

“일단 이번 주중에 만나러 가겠다고 연락을 보내 놨어.”

“편지로 이야기하기에는 역시 내용이 좀 무거운가……?”

다소 조급한 듯이 말하는 클로에의 말소리에서, 데메트리안은 그녀가 이 일에 얼마나 열중해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그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배었다.

“겹그믐의 날에는 원래 사제들도 휴식하고 성소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 관례인 만큼, 제대로 설득해야 하니까.”

그리 말하며 데메트리안은 품에서 상자 하나를 꺼냈다. 그의 손안에 들어가는 크기에 벨벳으로 감싼 것이, 누가 봐도 장신구가 들은 거였다.

클로에는 마른침을 삼켰다.

혹시, 지금……?

그녀의 긴장한 기색에서 데메트리안은 제 모양새가 그러한 것을 눈치챘다.

‘마음만은 굴뚝같지만, 당장 중요한 건 따로 있으니까…….’

그가 열어 보인 벨벳 상자 안에는 알 굵은 라피스라줄리 반지가 하나 있었다.

그것이 남성이 연모하는 이에게 선물할 법한 디자인이 아니어서 클로에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잠시 어리벙벙했다.

이것이 일종의 프러포즈인 건데 상황도, 둘의 관계도, 시간과 장소와 반지 모두 엉망인 걸까, 아니면 애초에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닌 걸까……?

“딱 한 번 마법 방어진을 펼칠 수 있는 반지야.”

아, 역시.

클로에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녀의 낯에 적이 안도하는 빛이 스쳐, 데메트리안은 제가 너무 거창하게 행동했음이 미안해졌다.

“그 일행에 마법사가 있어. 공격형 마법사는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서…….”

데메트리안이 그것을 직접 꺼내서 끼워 줄 기세라, 클로에가 냉큼 제 손으로 그 반지를 집었다. 두꺼운 금반지에 엄지손톱만 한 라피스라줄리가 박혀 있었다.

“말만 들어도 꽤 고급 마법일 것 같은데……. 내가 마력이 없는데, 그런 마법도 마도구로 가능한 걸까?”

“그래서 라구 경이 평소보다 더 많은 비용을 청구했지.”

“뭐, 이런 거까지…….”

그 반지를 제 검지에 끼우고 여러 각도로 비춰 보면서 클로에가 웅얼거렸다. 동료가 앓아누워서 이인분의 일을 하느라 고생인 와중에, 기껏해야 이틀 만에 이 작업을 마쳤어야 할 라구에게 퍽 미안해졌다.

클로에의 낯이며 목소리에 불만족한 기색이 없어, 데메트리안은 슬며시 덧붙였다.

“……이런 거라도 있어야 그나마 안심하는 내 마음만 알아주면 돼.”

그날부터 데메트리안은 마치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매일같이 궁정백저에 들렀다. 자연히 사용인들도 들떴다.

오늘도 선물 상자 가지고 오신 거 봤어?

응, 봤어, 봤어. 도대체 뭘까? 폼폼한테도 안 보여 주신다던데.

그 대공녀는 정말로 아가씨랑 친해지러 오셨던 거였나?

매번 데메트리안은 크고 작은 상자를 갖고 방문하여 사용인들의 궁금증만 더 부채질했다. 그 상자 안에 담긴 것의 정체가, 그 누구도 상상 못할 거였음에도.

“엘타늄 금속에 경량화 마법을 건 단도 세트야. 저번처럼 단도 개수 모자라서 고민하다가 더 위험해질 수 있으니까. 파이겐 경이 슈바츠 거리에서 네 거 수습하면서 기억해 두었대서 비슷하게 만들었어. 영 손에 안 맞으면 이 마정석만 옮겨 달아도 효과 있을 거래.”

“아르칸 소가죽으로 만든 갑옷이야. 곰베르 산맥에만 서식하는 소인데 얇으면서도 방어력이 좋대. 더울까 봐 체온 조절할 수 있는 마법을 걸었어. 네 사이즈를 정확히 몰라서 끈으로 조절할 수 있게 했고.”

“라이언 군네 가게에 의뢰해서 네 활동복 좀 새로 맞춰 봤어. 나중에 승마용으로도 입을 수 있고, 여기에 검대를 달 수도 있고 주머니도 많아서……”

“아니, 이런 거 말고, 루카랑 제대로 이야기됐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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