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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했는데 첫사랑이 수상하다-154화 (154/189)

154화. 분기점: 겹그믐의 날 (1)

7월의 셋째 주 빛의 날, 새벽 5시.

열일곱 해에 걸친 고티유 생활을 청산하는 스칸다르 왕자의 귀국이 조용히 이루어졌다.

고티유에 온 것부터가 볼모라는 불명예로 인한 것이었고, 귀국 또한 당당히 볼모 기간을 종료하고 돌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가 성년이 되기 한 해 전에 제도에서 테러를 일으킨 것을 시작으로, 스칸다르에 대한 귀족 사회의 반감이 조금이라도 누그러들세라 분리 독립파가 주기적으로 말썽을 부렸다.

그렇게 자꾸만 늘어난 볼모 기간.

황제가 그럼에도 스물 훌쩍 넘은 그를 귀국케 할까 말이라도 꺼낼라치면 스칸다르를 못마땅해하는 중앙의 귀족들이 불충을 무릅쓰고 부득불 만류했다.

그렇게 추가로 머무른 기간이 7년.

‘황자만 더 빨리 회유되었더라면, 진즉 돌아가는 건데.’

마차의 창밖으로 고티유 외성의 포털 집결지가 보이는 풍경을 무감한 눈으로 훑으며, 뷔욘 스칸다르는 그렇게 생각했다.

‘……딱 그 정도만일세. 보물고로 통하는 길목에 경비병을 세우지 않는 것.’

마지막으로 황제를 만나러 간 날, 최후의 다짐을 받기 위해 찾아간 황자궁의 응접실에서 고통스러운 낯으로 중얼거리던 프레더릭의 모습.

그것으로 뷔욘은 별궁의 손님으로 지내며 그의 비위를 맞추던 어린 시절의 굴욕감을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이런 결정 하나 내리는 게 지지부진하니 제 동생에게 밀리는 거지.’

대강의 상황이 그렇게 정리되면서 그는 귀국을 결심할 수 있었다.

부왕이 위독하니 왕세자 책봉을 받아 후계를 안정시키기 위해……라는 구실로.

‘‘진짜’로 귀환할 때쯤이면 슬슬 돌아가실 테니, 부왕과 마주할 일도 별로 없겠고.’

돌아가지 않은 것도 그의 의지, 돌아갈 수 있는 여건을 만든 것도 그의 의지.

아르투젠에서 더 이상 저를 잡지 않도록, 부왕과 최대한 마주치지 않도록.

모든 것이 퍽 마음에 들었다.

“달링, 곧 다시 돌아오시는 거, 맞죠?”

뷔욘의 옆자리에 앉은 헬레네가 그를 향해 돌아앉아 몸을 기울여서는 반짝이는 눈망울로 올려다보았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뷔욘의 눈빛이, 저 멀리 외성의 그림자를 보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제가 저번에 멜하운 출장 가서 돌아오시는 포털 아주 잘 만들어 놨다니까, 참. 아가씨 이러실까 봐서.”

그들의 맞은편에 앉은 다갈색 구불구불한 머리칼의 여성이 유들유들한 목소리로 말했다. 경칭과 반말을 섞는 제 말투에 대해 그녀는 늘 ‘마법사란 종족은 본 데 없이 자라서’라고 농을 치곤 했다.

“고티유를 떠나시는 것이 이번이 처음이니 걱정되어서 말이에요.”

“거사가 코앞인데 별걱정을.”

“어머머, 풀벌레 경, 경의 주군이 말하는 거 들었어? 매번 참 박정하시단 말이야?”

뷔욘의 짤막한 한마디에 마법사가 제 옆의 남자, 연둣빛 머리칼의 디에크 쪽으로 기대며 호들갑을 떨었다.

제 앞에서 주군의 정혼녀가 교태를 부리건 말건 관심 없던 디에크의 턱이 불거졌다. 그 위로 거의 다 아문 전투의 흔적이 인상을 퍽 험하게 만들었다.

“거사를 앞두고 있어서 예민하신 것뿐이야.”

“그 거사에 제가 아주 큰 역할을 한다는 건 안 잊었지, 아가씨? 제가 친위대 기사님들 대신 돌려보낼 인간들도 섭외해, 왕자님 위장 귀국 마무리한다고 이 새벽부터 따라 나와. 저번에 마력 떨어져서 엄청 고생했다고.”

“그래, 그래. 경이 없었으면 달링이 위장 귀국 계획 못 세웠다는 것도 다 알아. 아버지께서 돈으로 다 인정해 주실 거야.”

“길드장 할망구한테 반이나 뜯기는 돈 말고, 아가씨의 격려, 칭찬, 뭐 이런 거 말이야.”

마법사가 떼쓰듯 하는 말에 헬레네가 그녀를 밉살스레 흘겼다. 마법사가 저를 좋아해서 이런저런 선물을 해 주는 것은 고마웠지만, 정인 앞에서 선을 넘는 건 안 될 일이었다.

“그래, 거사만 끝나면. 내가 스칸다르의 왕후만 된다면, 경을 왕후 전담 마법사로서 인정해 줄게.”

제 나름대로 선을 그으며, 헬레네는 다시 뷔욘을 올려다보았다.

왕후라…….

헬레네의 말을 못 들은 척 다른 곳을 바라보면서도 그 말소리를 곱씹는 뷔욘은 오늘도 다른 이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달링, 전담 마법사 같은 건 셰비크에 어울리지 않나요?”

그의 가느스름한 눈매가 스르륵 헬레네 쪽을 향했다.

“그럴 리가.”

그가 외면하려 한 것이 ‘전담 마법사’가 아니라 ‘왕후’ 쪽에 있음을 모르는 헬레네가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워어, 워.”

그때, 마부가 말 어르는 소리가 나며 조금씩 마차의 속도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새벽의 포털 집결지는 한산했다. 휴가철이어서 낮에는 여행 떠나는 사람들로 붐비겠으나 시간이 일렀고, 무엇보다 스칸다르행이었다.

스칸다르의 포털 기착지인 멜하운으로 향하는 포털 입구 앞에 알레지오의 마차가 멈춰 섰다. 그 뒤로는 오랜 외유를 즐기고 귀국하는 스칸다르 사절단과 그들을 호위하는 왕실 친위대의 기사들이 따랐다.

“그럼, 친위대 기사님들과 대화 좀 하러 가 볼까?”

장난스레 그리 말하며 마차에서 폴짝, 뛰어내리는 마법사의 머리칼은 어느새 하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말이었다.

***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너무 늦게 다니지 말고.”

“그럼요, 어머니. 너무 걱정 마시고 즐겁게 다녀오세요. 제가 애도 아니고.”

“아쉴 혼자 놓고 가는 것보다 더 걱정이야. 지난번 일도 그렇고.”

“헤헤, 안 그럴게요.”

라쥐르로 여름휴가를 떠나는 궁정백 부부를 배웅하러 나와, 클로에는 멋쩍게 웃었다.

매해 여름이면 라크루아들은 다 함께 궁정백부인의 고향인 라쥐르의 공작성으로 여름휴가를 떠나곤 했는데, 올해는 클로에가 휴가라곤 거의 없는 말단 관료인 에티엔과 고티유에 남기로 한 참이었다.

이전의 스무 살 때는 라쥐르로 떠났었지만, 이번엔 해야 할 일이 있었으니까.

클로에는 지난 주말 데메트리안과 리비에라강 남쪽의 언덕에서 대화를 나눴던 일을 떠올리며, 더욱 생글생글 웃었다.

“어머니 말씀이 맞아, 누나. 사고 치지 말고.”

평소 제 누나에게 까불대던 아쉴이 제법 의젓한 목소리를 내었다.

어허, 요 녀석 봐라?

클로에는 잠깐 황당함을 느꼈지만, 이내 작게 웃고 말았다. 아쉴의 새침한 낯이 묻지 않아도 첫눈에 반한 대공녀와 제 누나가 친밀해 보이니 잘 보이려 함이 자명했던 것이다.

“알았어, 도련님. 알았어요, 어머니, 아버지. 걱정 마시고, 도착하셔서 편지하셔야 해요? 할아버지께 안부 전해 주시고요.”

“그래. 매사에 조심, 또 조심하고.”

“네에에, 걱정 마세요, 정말.”

클로에는 마음이 콕콕 찔리는 것을 애써 무시하며 부러 발랄한 목소리를 내었다.

분명, 데메트리안을 따라 겹그믐의 날에 대신전에 숨어든다면 안전과는 거리가 먼 일을 하는 것이리라.

클로에의 꾸민 듯 생글대는 얼굴을 한참 바라보던 궁정백부인이,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유모 말 잘 듣고.”

그리 한숨처럼 내뱉은 말은 퍽 의미심장하게 울렸다.

요즘 들어 욕심 좀 부리고 산다고 기꺼워했더니, 그 즐거움이 이 애에겐 과했나. 아니면 앓아 본 사람이 더 잘 앓는다고, 일탈의 즐거움을 조절하기엔 어린 날의 경험이 부족했던 걸까.

데메트리안 그 아이가 이리 마음을 바꿔 먹을 줄 알았더라면 진작 캄포와의 맹세에 대해 알아봐 둘 것을 그랬나.

딸이 큰 위기에 처했었음을 알고 나니 걱정과 후회가 날로 더했다.

‘그 왕자가 어제 귀국하는 포털을 탔다니까, 당분간은 안심해도 될까……?’

천진한 낯을 한 딸애는 상상도 못할 생각을 하며, 궁정백부인은 짤막한 수심에 잠겼다.

‘스칸다르의 왕자가, 좀 위험합니다.’

며칠 전,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며 누아제트 남작부인이 이른 새벽부터 찾았던 날. 그냥 넘어가려다가 새로운 정황이 포착되어 보고한다며 꺼낸 이야기는 꽤 충격적이었다.

‘왕자가 알레지오 후작가의 후원을 받고 있는 듯합니다. 사업적으로 교류하는 것이야 알고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도 교류하는 걸 최근에 파악했습니다. 높은 확률로 그 영애와 혼약까지 맺은 것으로 보입니다.’

‘알레지오 영애가 왕자와 말레카의 왕녀를 연결하고 있습니다. 말레카의 왕녀가 궁에서 외출하여 따로 만난 적도 있다 하니, 무언가 거래가 있는 것이라 의심됩니다.’

크레벨 소공작과 농브르 간에 독점하기로 한 정보였지만, 길드장의 주군에게는 공공재나 마찬가지였다.

‘연인도 있는 자가 도대체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애먼 로이를 꼬드기려 했을까.’

분명 과한 선물을 하고 제게까지 잘 보이려 한 것을 보면 나름 진심이기는 한 모양이었는데.

‘로이와의 소문을 왕실저에서 낸 것부터가 꺼림칙하긴 했지만…….’

왕자는 떠났지만 그의 음모는 고티유에 남아 있을지도 모를 일. 그 흉계가 제 딸과 닿아 있지는 않을까 걱정이어서, 궁정백부인은 남작부인에게 농브르의 단원들을 다 써서라도 단단히 지키라고 해 둔 차였다.

‘크레벨 쪽에서도 움직이고 있다고 하니, 사위조차 못 되는 애에게도 기대를 걸어야 하는구먼. 정말…… 자식들이란.’

올해 들어 성인인 딸애에 대해 걱정하게 된 것이 즐거워 궁정백부인은 빙긋이 웃었다.

“다음 달에 건강하게 만나자.”

“네, 즐겁게 보내시다 오세요.”

궁정백 부부와 그 막내아들, 그리고 그들의 한 달짜리 짐을 실은 마차가 마침내 외성의 포털 집결지로 떠나자, 클로에는 낯빛을 싹 바꾸고 저택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주인님, 몸은 좀 괜찮으세요? 편찮으시대서 연락받고 놀랐어요. 여름 감기는 개도…… 아, 아니에요.”

제멋대로 놀리던 입을 제 손으로 때리며 라이언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아무리 주인님이 잘 대해 주셔도 유분수지…….

클로에가 제일 먼저 불러들인 것은 라이언이었다. 태양절 연휴만 쉬라고 해 놓고서 그 직후 외출 금지령이 걸린 바람에 덩달아 라이언도 얼마간 만나보지 못한 차였다.

‘라구 경이야 의무 복무 기간이 떠나면 고티유를 떠나겠지만, 라이언은…… 의상실에서 옷을 배우면서도 병행할 수 있지 않을까?’

스칸다르로 떠나지 않기로 다짐하고 나니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제 사업을 그만두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드는 감상은, 명백한 즐거움.

“앤지네 작업은 잘돼 가고 있어?”

“네, 순조로워요. 아, 지난주 내내 라구 경께서 꽤 바쁘셔서 마정석들이 조금 늦게 도착했어요.”

“라구 경이? 바빠?”

“길드 동료분이 편찮으셔서 이인분의 일을 도맡으셨대요. 마법사마다 전공이 다른데 익숙지 않은 작업을 하느라 고생하셨다고.”

“……꽤나 친해졌구나?”

“헤헤, 라구 경이 저 같은 어린 애도 워낙에 잘 대해주셔서 말이죠.”

어느 날 데메트리안과 착각했을 만큼 훌쩍 큰 소년이 헤헤대며 말하자니 조금 어색한 것이었다.

“라구 경께서는 마도구 제작 전공이었다고 하시네요? 워낙에 다양한 마도구를 만드셔서 저는 전문 분야 같은 건 따로 없는 줄 알았어요.”

“술식만 받으면 다 만들 수 있나 봐. 참, 라구 경에게 그거 돌려줘야 하는데.”

“나한테 있어. 다녀올게.”

클로에의 말에 미라벨이 눈을 찡긋하며 소응접실을 떠났다. 메리앤과 슈바츠 거리로 외출하면서 빌린 환영 마도구를 아직까지 돌려주지 못한 것이었다.

미라벨이 제 방에서 가져와 건네는 것을 본 라이언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손거울이네요? 앞에 자개 장식은 최신 유행이고…… 전혀 마도구처럼 생기지 않았어요.”

“응, 환영 마법을 걸었대. 상대가 누군지 잘 못 알아보게 한다고.”

“아아, 그러면 그 동료분이 술식을 걸어 주셨나?”

“그 동료분?”

“라구 경이 대신 일해 주셨다는 그 동료분이 환영 마법 전문이라고 하셨어요.”

똑똑.

그때, 소응접실 문을 두드리고서 집사가 들어왔다. 궁정백 부부와 비슷한 연배의 집사는 다소 의뭉스런 미소를 입가에 띄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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