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클로에의 선택, 그리고… (12)
“……로이?”
저를 노려보는 클로에의 날카로운 기색에 데메트리안은 움찔 놀랐다.
“나는 아르투젠에 남기로 했어. 그 선택지를 열어 준 건 너일지 몰라도, 선택한 건 나야. 그 선택은 모든 걸 너한테 내맡겨 놓고 기도나 하며 상황이 달라지기만을 넋 놓고 기다리는 게 아냐.”
클로에의 눈동자가 진하게 빛났다. 그것은 데메트리안이 오래간 후회하며 기억하던 것과는 역시 한참 다른 기색을 띠고 있었다.
제게 무엇을 해주길 바라던 그때와 지금의 클로에는 분명 달라졌다.
그때에 머물러 있는 건 나뿐인가……. 데메트리안이 침음을 삼켰다.
‘하지만 다시 그런 일이 생긴다면…….’
주제넘을지 모르지만 마음이 그랬다.
한껏 흐려진 그의 낯에 고민이 스치는 것이 선연해, 클로에는 욱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 머뭇대는 기색에 화를 내게 될 것만 같아 클로에는 다시금 시선을 저 아래로 돌렸다.
밤에도 휘황찬란한 저들의 고향. 저 거리에서, 그 거리를 누비는 마차 안에서, 누군가의 집에서, 어느 저택의 연회에서 쌓았던 그들의 추억.
지키고 싶은 순간들, 새로이 쌓아 가고 싶은 이야기…….
“한 번 더 기회를 줄게. 똑바로 지켜.”
“로이.”
“그러면 고민해 볼게.”
“……고민?”
데메트리안의 목소리가 어색하게 울렸다. 곧바로 짐작되는 것이 있었으나, 그럴 리가……?
그것이 자못 답답하여, 클로에가 터뜨리듯 내뱉었다.
“난 널 좋아해. 좋아하지 않은 적이 없어.”
데메트리안을 노려보는 클로에의 눈동자엔 수많은 감정이 일렁였다. 그것은 대체로 원망이었다. 이마저도 굳이 말로 해 줘야 아냐는 듯한…….
너도 그렇잖아?
그 말을 들은 데메트리안은 너무 놀라 심장이 떨어질 것 같았다. 갑작스럽게 밀려오는 기쁨이 너무도 격하여, 오히려 고통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입을 열어 보았지만……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될 때를 위해 만들어 두었던 수많은 그럴싸한 말들이 휘발되고 말았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뱉은 건, 날것의 감정이고 말았다.
분명히, 다시는 후회하지 않기로 했는데…….
“……내가 이렇게 완벽하지 않은데?”
어렵고도 어려운 자학의 외마디. 그의 얼굴은 확연한 고통에 물들어 있었다.
“무슨 소리야?”
“내가 너를 놓친 것만 몇 번이야. 너를 떠나보냈고, 멀리서 보고도 닿으면 안 되었고, 매일 밤 꿈속에서…… 몇 번이고 널 놓쳤어. 울고 있는 널 보고도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어. 그런데 또……”
와인 잔을 쥔 그의 손등에 힘줄이 불거졌다.
“너를 위험에 처하게 만들고…….”
이처럼 그가 자신의 속마음에 대해 토로한 적이 지금껏 몇 번이나 있었을까. 이미 사라진 그 시간에 루카 앞에서 술에 취해서나 주절대던 것들이었다.
그것을 멀쩡한 정신에, 제가 잘 보이기를 바라마지 않는 사람 앞에서 내뱉는 것……. 크디큰 괴로움일 수밖에 없었다.
힘겹게 말을 잇던 데메트리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
“더 이상 나는, 네가 바라는 사람이 아닐 것 같아서…….”
그 찡그린 틈으로 희미한 물기가 반짝였다. 그걸 보는 클로에는 마음이 속절없이 안타까워졌다.
완벽해서, 글쎄.
오라비뿐 아니라 또래의 그 누구보다 데메트리안은 평생 완벽했다. 실제로 그가 누구보다 크나큰 성취를 이루는 인물이기야 했지만, 클로에가 사랑하는 그의 완벽함은 그런 데 있지 않았다.
서로에게 넘치거나 모자람 없이 꼭 알맞은 사람이어서, 귀찮아하는 척하지만 속으로는 다정하게 굴어 줘서, 제게만은 장난기 어린 소년 같은 미소를 보여 줘서.
아니, 그 모든 이유를 떠나서 제가 한순간도 좋아하지 않은 적 없는 인물이기 때문에…….
완벽해서 좋아한 것이 아니라, 좋아하다 보니 완벽하게 느껴진 거였다.
‘왕자님 또한 나름대로 완벽한 부군이었는걸.’
그때 생각하기에는 말이지.
그런 생각에 이르러, 클로에는 조금 씁쓸해졌다가…… 마음을 다잡았다. 눈앞에 있는 것에 집중하기로.
클로에의 손이 그의 뺨에 내려앉았다. 아닌 척 가닿은 엄지 끝에, 달빛에 번진 물기가 배어났다.
“그런데도, 나는.”
몇 번이고 제게 다시 내밀어 주는 그녀의 손을 꼭 쥐어, 데메트리안은 제 심장 가까운 곳으로 가져갔다.
거기에는 충성을 서약하는 기사와도 같은 경건함이 배어 있었다.
“자꾸만 너를 바라게 돼서…….”
그 애처로운 말소리.
클로에는 하릴없이 웃음이 나고 말았다. 그녀의 눈가에도 똑같이 물기가 배어났지만, 그건 슬픔으로 인한 것도, 억울함에 기인한 것도 아니었다.
제 연심조차 똑바로 읊지 못하는 저 바보 같은 말소리를 결국에 듣게 되어서…….
저에게만 보여 주는 저 허술함이 저들의 관계를 특별하게 만들어 주었음을, 왜 모르는 걸까.
“그러니까, 왜 위선을 떠는 건데? 왜 내 행복을 너와 만들게 해 달라고 말하지 않는 건데? 네가 지금 해야 할 건 마음에도 없는 양보가 아니라, 애걸복걸 아니야?”
“아주 마음에도 없는 건……”
아니었어, 그렇게 말하려다 말고 데메트리안은 제가 얼마나 심각한 자기기만에 빠져 있었는지 깨달았다.
“그래. 내가 미래를 바꿨다는 걸.”
“우리가.”
“우리가 바꿨다는 걸 확인하고, 그러고 나면……”
목이 메어 와, 데메트리안은 마른침을 힘겹게 삼켰다. 몇 번이고 생각한 풍경이지만, 클로에의 앞에서 제 마음을 이야기하는 건 정말로 처음이어서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캄포와의 정혼이라거나, 클로에가 스칸다르로 갈 수밖에 없는 미래 같은, 두 사람의 관계를 엉클어뜨렸던 곤란한 것들은 더 이상, 아무런 고민거리가 되지 않는 그 풍경…….
“라쥐르에 가자.”
갑자기? 클로에의 눈동자에 물음표가 들어찼다가, 이내 떠오르는 말소리가 있어 귀 끝이 붉어졌다.
‘나도 가 보고 싶네, 라쥐르.’
스무 살로 돌아오고서 얼마 안 되었을 때 그와 저녁 외출했던 날, 마레와 라쥐르에서 라쥐르 음식에 대한 추억에 빠졌던 바로 그날.
그에게 이런 열망이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하던 시절…….
“네가 여름 휴가에 다녀올 때면 늘 말하던 그 바다에서, 네가 했다던 대로 해가 기울 때쯤 나가서 물놀이하고, 저녁엔 해산물 구이 먹고, 밤엔 네 외할아버지와 라쥐르산 스위트와인을 마시고.”
한번 속내를 내뱉은 그의 말소리는 멈출 기미가 없었다. 그것이 웃기고도, 한편으로 애잔하여 클로에는 실소를 머금었다.
“네가 리도테 영애들과 다녀와서는 재밌었다 하던 크리켓 경기도, 오페라도 함께 보러 가고 싶고, 보란 듯이 너와 어디에나……”
“그런 건, 다 끝나고 얘기해.”
거절인가? 순간 멈칫했던 데메트리안은 그녀의 말소리에 배어난 웃음기를 되새기고는 애써 안심했다.
“아무리 캄포 대공녀가 혼약 따위 관심 없다는 듯이 굴어도, 맹세가 문제잖아. 크레벨이 거기에 뭘 걸었는진 모르겠지만……”
“원로원 의장직과 그란펠트의 장원.”
곧바로 돌아오는 답에 클로에가 토끼 눈을 떴다.
“이젠 너한테 뭐든 다 말하려고.”
“……포부가 좋네.”
클로에의 입가에 다시금 실소가 흘렀다.
“하지만 나는 스칸다르에 가지 않겠다고 한 거지, 그 모든 곤란을 알고서 네 곁에 남겠다고 한 게 아니니까.”
“사실, 이런 얘기를 하면 바보같이 들릴지 모르겠는데…….”
“데메트리안 크레벨.”
“응…….”
클로에가 다그치듯 말하자 데메트리안이 멋쩍은 듯 고개를 떨구었다. 뭐 이리, 자꾸만 서툴게 굴게 되는 걸까.
무엇 하나 조심스럽지 않은 것이 없어서…….
“그때, 주신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아.”
“그때? 지금으로 돌아올 때?”
“응, 그게 확실히 기억은 안 나지만…… 사실 나는 정혼을 당연히 파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 맹세에 대한 걸 완전히 까먹고 말이야. 그래서 아버지께 말씀드렸을 때.”
“공작님께? 말씀드렸다고?”
“응, 5월에. 내가 널 자꾸 곤란하게 하는 것 같아서…….”
네가 울었잖아, 거기까지 말한 데메트리안이 눈치 보듯 클로에의 안색을 살폈다. 클로에는 기가 차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벌써 두 달도 전에, 나한테는 아무 말도 안 해놓고.
“별거 아니야. 그냥 혼약을 물려 달라고만 했어. 루이에게 후계자 자리를 주셔도 감내하겠다고 했고.”
“그게 어떻게 별게 아냐……?”
“……정말로 그러지는 않으시겠지만, 그래도 각오를 보이려고.”
클로에는 다시금 헛웃음을 지었다.
‘정말, 혼자서 이래저래 노력하고 계셨구먼.’
그러고 보면 탄신연 때 저를 보는 크레벨 공작의 표정이 조금 딱딱했던 것도 같고…….
“아무튼, 그때 아버지께서 맹세 이야기를 하시길래 그제야 내가 맹세를 잊고 있었던 게 떠오른 거야. 그래서 혼란스러워졌고, 계획을 완벽하게 재수립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거기까지 말한 데메트리안은, 제게 답을 바라던 클로에의 눈동자를 배신했던 일을 떠올렸다. 클로에의 손을 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래서 그때 네가 이 일에 대해 물었을 때 제대로 답하지 못했던 거야. 정말 미안해.”
“……그래.”
클로에는 놀란 마음을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원로원 의장직과 그란펠트의 장원이라. 중앙 정치의 거두인 크레벨 공작가 권세의 근본과, 그 재산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알짜배기 땅이었다.
‘있으나 마나 한 캄포의 황위 계승권에 비하면 감내할 위험이 큰데.’
그걸 지키고 싶어 안달인 루시엔이 들으면 불쾌해할 생각을 클로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루카와 대축연 날 만나기로 한 약속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도 그렇고…… 무언가 있는 것 같아.”
데메트리안이 지나가듯 꺼낸 이야기를 클로에는 곰곰 따져 보기 시작했다.
‘루카 돌아와 있느냐고 물어봤을 때 데미가 모른다고 해서 좀 이상했었지.’
루카를 귀찮아하는 척하면서도 그와 성실하게 연락을 주고받는 그인데 말이었다.
‘어쩐지 답장도 한 새끼가 코빼기도 안 비추더라니.’
루카가 흘린 말 또한, 지금 그의 말을 듣고 보면 어딘가 맞닿는 부분이 있었고…….
“그래서, 무슨 말을 들었는데?”
“당신의 아이를 위해 나한테 기회를 주겠다고……. 아마, 내가 이 일을 어떻게든 잘 해내면 맹세를 무효화해 주시리라는 언약이 아니었을까.”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의 이야기에 클로에는 깜짝 놀랐다.
아, 하지만, 정말로 생각지 못했느냐면……
‘사도의 힘이 개입했을 때 무언가를 되돌리는 일이 일어났지.’
그래서 정전에 기록되지 못한 에르드교의 비사들을 탐독하던 일이 떠오른 것이었다.
시간을 되돌리는 이야기는 사도들의 힘과 연관되어서만 기록돼 있었고, 때문에 황궁 도서관에 간다면 교리학이나 신성력에 관한 책들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당신의 아이라니……?”
“나는 그게 죽은 신관을 이야기하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살아 있었다며.”
클로에는 제가 수년 뒤 셰비크의 왕궁에서 마주치게 될 그 손님을 떠올렸다. 스칸다르식으로 수놓인 비단을 겹겹이 두르고 다녔지만 비쩍 말라, 악의적인 미소를 보내던 안톤미오노의 모습.
독립국 스칸다르의 초대 왕의 손님으로서 궁인들에게 깍듯이 대접받았지만, 늘 어딘가 성마르고, 또 한편으로 주기적으로 왕궁에 찾아와 환각제를 태워야만 했던…….
“……그분이 후회하셨을지도.”
“어쩌면 성배를 의인화하신 걸 수도 있고.”
데메트리안의 추측에 클로에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뭐, 주신과 연관된 많은 것들은 상징투성이였으니까.
클로에는 부러 발랄하게 목소리를 내었다. 스칸다르로 가지 않겠다는 다짐 정도는, 그의 결심이 치를 대가에 비하면 퍽 가벼운 것이었다.
“뭐, 무언가를 약조하신 게 아니라도 성배 도난을 막으면, 주신께서도 정상 참작해 주시지 않으실까?”
“……그렇지 않더라도 상관없어.”
결의에 찬 얼굴로 중얼거리던 데메트리안은, 가슴께에 쥐고 있던 클로에의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너무 오래간 그러고 있어서 잊고 있는 줄 알았던 것이었다.
천천히, 고개를 그 위로 숙여, 그의 입술이 클로에의 손바닥에 내려앉았다. 소리 없이 맞닿은 그 감촉은 오래간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게 다 끝나면…… 기대해.”
“기대하라고 하는 것부터가 이미 글러 먹었어.”
클로에가 작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데메트리안은 수년의 긴장을 조금, 내려놓을 수 있었다.
***
설레는 마음을 안고 귀택한 데메트리안을 반긴 것은 한 통의 서신이었다.
문장 없이 봉랍된 그 서신을 보자마자, 데메트리안은 그것이 제가 오래간 고대해 온 것임을 알았다.
「제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궁금해하시는 일에 관해 상의드리고자 합니다.」
그 아래로 적혀 있는, 분리 독립파 수장의 이니셜.
모든 것이 다 맞아떨어진 완벽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