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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했는데 첫사랑이 수상하다-152화 (152/189)

152화. 클로에의 선택, 그리고… (11)

클로에의 말을 들은 데메트리안은 얼마간 멍한 표정이 되었다. 제가 방금 들은 말을 곱씹느라…….

“그 말은.”

“내 결정은 너와 무관하게 내린 거라고. 네가 정혼자가 있든 말든, 네 마음이 어떻든, 내 마음이 어떻든. 네 말대로……”

거기까지 말하고 나니 목구멍이 메어 왔다. 그러지 않으려 했는데, 이미 눈시울이 붉어지고 말았다.

아잇, 참.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생각하며 클로에는 재빠르게 내뱉었다.

“그래, 네 말대로 안 행복했어.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고티유에 돌아와 보니 그게 행복은 아니었어.”

그리 말하는 아랫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역시 마음대로 되지 않는 목소리도 덩달아 떨렸다.

생각으로 담아 둔 거야 몇 달이 된 일이지만, 입으로 내는 건 처음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눈가에 고이는 것이 있어, 데메트리안은 재빨리 손을 뻗었다. 제가 이럴 계제나 되는지 싶으면서도…….

몇 달 전 클로에가 갑작스레 떠난 원로원의 응접실에서 거둬 주지 못했던 눈물이었다.

눈 밑에 와닿는 그의 엄지가 홧홧하게 느껴져, 클로에는 그의 손을 쳐내고 말았다.

“……미안.”

허공에 민망하게 멎은 손을 말아쥐며 데메트리안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어려운 걸 기억하게 하려던 건……”

“네가 뭘 어째서 기억하기 싫은 걸 억지로 들춘 게 아니야. 그땐 나름대로 잘 지냈다고 생각했다고.”

데메트리안이 대신 바구니에 있던 냅킨을 꺼내 클로에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정말…… 그 모든 순간에 무언가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모든 게 미안한 것처럼, 모든 게 제 책임인 것처럼.

클로에가 냅킨으로 눈가를 콕콕 찍어내는 걸 보는 그의 낯이 또 안타까움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네가 미안할 일이 대체 뭐가 있는데?”

“그건……”

“물론 아주 없진 않지. 너 혼자서 다 하려고 나한테 숨겼잖아. 아직도 내가 처음 만났을 때의 네 살배기로 보이나 본데.”

“아냐. 아니야, 그런 거.”

“그렇게 취급한 셈이야. 그때…… 스칸다르에서나 지금이나 나한텐 똑같아. 아무것도 결정할 권리 없고, 아무것도 모른 채……”

목구멍까지 다시금 치받는 것이 있어 클로에가 잠시 훌쩍였을까. 데메트리안의 낯이 한층 더 음울하게 굳었다. 스칸다르에서나 지금이나 똑같다라…….

그가 어느 부분에 상처받았는지 알았지만, 그걸 굳이 정정해 줄 마음이 없어 클로에는 내처 말을 이었다.

“어떻게 아무것도 모른 채 행복할 수 있겠어?”

거기까지 말한 클로에는 입을 다물었다. 입술 안쪽 살을 꾸욱 씹는 그녀의 눈시울에 다시금 눈물이 차올랐다.

그건 슬퍼서도, 그 시절이 억울해서도 아니었다.

‘그냥…… 그냥,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거야.’

그렇게 짐작할 엄두도 못 내는 데메트리안은 다시금 죄책감의 나락에 빠졌다.

그녀를 어린애 취급하는 것도 아니고, 연약한 유리 세공품 취급하는 것 역시 아니었다. 신뢰하지 못하거나 의지할 수 없어서는 더더욱 아니었다.

제 소임을 다하지 못하여 그녀를 잃고, 불행하게 만들었다 후회하고, 참담해한 세월이 너무도 길었을 뿐이었다. 일종의 관성이랄까.

얼마간 침묵이 이어진 뒤.

“그러니까, 우선 네 계획을 알려 줘. 원한다면 안 갈 수 있다며.”

“응, 네가 원하는 대로.”

“……가고 싶지 않아.”

클로에는 눈물을 꾹 눌러 참으며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데메트리안의 눈동자에 달빛이 이지러졌다.

그 낯을 흘끗 본 클로에는, 그가 저와 같은 시공간에 대해 생각하고 있음을 알았다.

스칸다르에 가지 않을 수 있도록, 무슨 핑계라도 만들고자 했던…… 그들이 지난 세월에서 마지막으로 만났던 원로원 응접실.

그에게 무의미한 짐을 지웠다 생각하여, 또 그녀의 청을 받아주지 못했다고 생각하여 서로에게 미안한 일을 했다고 오래간 후회했던 바로 그 시간.

“데미, 그건 지나간 일이야. 난 더 이상 곱씹지 않기로 했어. 네가 지금 해야 할 말은 미안하다거나, 뭐 그런 게 아니야.”

그런 건 네 얼굴에 쓰여 있어서 궁금하지도 않다고 생각하며, 클로에는 데메트리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단호하게 빛나는 에메랄드빛의 눈동자……. 그녀의 눈망울은 데메트리안이 오래간 자책하며 회상하던 것과 전혀 다른 빛을 띠고 있었다.

어떤 용단을 요구하는 차분한 빛.

가라앉았던 그의 낯에 결기가 실렸다.

“이번 겹그믐의 날에 성배가 도난당할 거야.”

“겹그믐……의 날? 이번 달 마지막 주?”

데메트리안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 왕자님이 연관돼 있다는 거야? 아르투젠에선 뭔가 밝혀졌었어?”

“내가 개인적으로 알아본 거야. 이상하게 아귀가 맞아떨어져서.”

“아귀가? 어떻게?”

“1황자 전하께서 성배 환수 협상을 완수한 공로로 황태자에 책봉되셨잖아.”

그랬댔지,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올해 겹그믐의 날에 1황자 전하께서 신전에서 밤샘 기도를 올리실 차례인데, 마침 그날 도적 떼가 들고 말야.”

“……맞아, 그랬지.”

“그리고 신관 하나가 죽게 돼. 보물고를 담당하던.”

“설마.”

어느새 눈물이 쏙 마른 클로에의 눈동자에 심각함이 어렸다.

“그분, 내가 스칸다르에서 봤어.”

“안 죽었다고?”

“머리를 밀고 다녀서 스칸다르인이 아니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이번에 봤더니 보물고 담당이래서, 사실 나도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였거든.”

“그래, 마법으로도 머리색은 못 바꾼다니…….”

데메트리안의 낯이 진지하게 굳었다. 그의 낯에도 역시, 죄책감으로 침울해졌던 기색은 지워진 지 오래였다.

미간을 단단히 굳혀 둔 그의 모습에서 클로에는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리운 풍경이었다.

크레벨 공작저에 놀러 갔을 때 그의 서재에 가면, 그가 꼭 이런 표정으로 제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아카데미의 공부나 진작부터 도맡기 시작한 공작가의 일에 집중해 있던 그 얼굴…….

무엇엔가 골몰하여 굳은 양이 보기 좋으면서도, 제게 시선을 보내 주길 바라며 방해하게 되는 그 얼굴이었다.

“그를 협박하여 보물고를 열게 하고 살해한 줄 알았는데.”

“루카가 대신전에 오면서 대신관 후계 구도에서 밀려난 분이라고 생각해. 루카를 꺼리시는 것 같았거든.”

“그럼 이번 탄신연 때도……”

“루카 옆에 성수 들고 있던 그분이야.”

제가 맞추었던 퍼즐이 조금 더 정교하게 맞아떨어지는 것에, 데메트리안의 낯이 미세하게 밝아졌다.

“그렇다면 그때 살해된 건, 체격 비슷한 다른 이겠군. 높은 확률로 인신매매단이 납치한 이겠지.”

“……아마, 그분을 회유하는 과정에서 블라테르 약초 섞은 물담배로 중독케 했는지도 모를 일이고.”

클로에는 안톤미오노와 마주쳤던 셰비크 궁정의 응접실 풍경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 눈매가 가느스름해졌다.

“그러니까 너는 1황자 전하랑 왕자님이.”

“확실해. 그걸 알고서 1황자 전하께 일종의 거래를…… 청했었거든.”

“거래를?”

클로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눈물 자국 말라붙은 눈가가 버석거렸다.

이 시절로 돌아오고서 처음 보는 데메트리안의 모습이 너무도 많았다. 누구에게 아쉬운 소리 한번 안 해 봤을 이가 저를 보겠다고 얼토당토않은 부탁을 했다질 않나, 정도가 아닌 길은 없는 길이라고 생각하던 이가 물밑 거래까지 청하고.

‘말이 거래지, 결국 협박이잖아?’

그녀의 눈동자에 담긴 의아함이 무엇인지 알아, 데메트리안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프레더릭 전하가 그걸 인정했어?”

“응. 부인하지 않고서 내 청을 받아들였거든.”

“아무리 그래도, 좀 위험한 생각 아냐……?”

“스칸다르와 전하가 연결돼 있다는 정황도 포착한 게 있어.”

“지금?”

“응, 지금.”

클로에의 낯이 황망함으로 물들었다.

제가 알게 된 그 연결고리에 대해, 데메트리안은 굳이 먼저 입을 열지 않는 편을 택했다. 그걸 이야기하자면 뷔욘과 알레지오 후작 영애와의 관계도 언급해야 하는데, 그에 대해 클로에가 상처받을까 봐서였다.

스칸다르에서의 생활이 조금 불행했을지언정, 그와 다시 관계를 맺으려던 것을 보면, 어쩌면…….

스물셋으로 돌아와 드는 익숙한 열패감이었다.

다행히도 클로에는 자세한 사정에 대해 묻지 않은 채  넘어갔다.

‘50퍼센트의 확률을 100퍼센트로 끌어올려 줄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영애라면 투자하겠나?’

데메트리안의 확신은 몰라도, 어느날 엿봤던 프레더릭의 고뇌가 갑작스레 떠오른 것이었다.

“그래서 너의 계획은, 겹그믐의 날에 성배가 도난되는 걸 막는 거고?”

“그날의 경비 기록을 알아봤어. 기록은 깔끔했지만, 신전 경비대 대신 경비를 맡았던 1황자 전하의 친위대가 이상하게 배치돼 있었다고 하더라.”

“그러니까 프레더릭 전하께서 성배가 도난될 수 있도록 방조했다는 건 거지?”

“보물고 담당 신관도 미리 회유해 뒀으니.”

제가 생각하던 건 회유가 아니라 처리였지만.

“그러면 왕자님을 묶어 둬야 하는 거 아냐? 그 호위, 체포 안 됐던데.”

“폐하께서 왕실저 수색령을 내려 주시지 않으셨어. 귀국하는 걸 일부러 막지 않으시려는 것 같아.”

일이 일어난 뒤에 잡아야 차후에 독립할 엄두도 내지 못하게 할 수 있으니, 차라리 잘된 일이란 합리화도 마친 상태였다.

스칸다르가 독립한대도, 그건 뷔욘이 왕일 때의 일은 절대 아니었다.

거기까지 이야기한 두 사람은 생각에 빠졌다. 가운데 놓아둔 말린 과일과 치즈 조각을 조금씩 집어 먹거나 미지근해진 와인을 입에 머금으면서, 서로가 나눈 이야기들을 곱씹었다.

와인을 한 잔씩 더 비웠을 때쯤.

언덕 아래 고티유 시내에 시선을 붙박아 둔 채 클로에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시선은 제도 서편에 자리한 대신전 쪽에 가닿아 있는 듯도 했다.

“그럼 겹그믐의 날에 신전에 잠입할 거야? 스칸다르 측도, 1황자 전하도 모르게? 혼자서?”

“파이겐 경이랑 둘이서겠지. 도적 떼를 써서 양동작전을 펼친 걸 보면 보물고에 잠입한 인원은 극소수일 테니까. 보물고 담당까지 회유해 놓았다면 더더욱.”

“그래서 성배가 도난되는 걸 막으면, 내가 스칸다르에 가지 않아도 되는 거고.”

“맞아.”

네가 다시는 볼 수 없는 곳에서, 네가 바라던 행복을 갖지 못한 채 살아가지 않아도 되는 거야.

손에 쥔 잔을 만지작거리며, 데메트리안은 기도하듯 제 소망을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시간을 거스르기 전에는 잠들기 위해 독주를 약처럼 찾아 마셨는데, 그녀와 함께하니 와인의 맛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주신께서 시간을 돌리시면서 제 모든 병증도 거둬가 주셔서였으나, 그는 한편으로 클로에와 떨어지지 않아도 되는 미래를 꿈꿀 수 있게 되어서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생각을 다 해 뒀으면서, 아무것도 모르게 하려고 했어? 완벽해 보이고 싶어서?”

“미안해. 그땐 너도 그리된 줄 몰랐으니까.”

“미안하단 말 좀 그만해.”

툭툭대며 말하는 기색이 또 그리운 시절을 연상케 하는 구석이 있어 데메트리안은 엷게 웃었다.

“……할 거면 확실히 하면 좋겠어. 내가 따라가게 해 줘.”

“로이.”

“오늘 봐. 나랑 터놓고 얘기하니까 도움 되는 게 많잖아.”

“그거야  그렇지만…….”

“왕자님 주변의 사람들을 내가 잘 알아볼 수도 있고 말야.”

데메트리안은 거기에 반박할 수 있는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간격을 두기 위해 와인 잔에 입을 묻었다.

아무래도 싫었다.

사실 그는 매일같이, 무너지는 벽 너머로 떨어지는 클로에를 잡지 못해 헛손질하는 악몽을 꾸곤 했으니까.

“다시는 너를 위험에 처하게 만들지도, 잃을까 전전긍긍하고 싶지 않아.”

클로에는 여전히 먼 곳에 시선을 둔 채로 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그 옆모습이 일견 완고해 보여, 데메트리안은 슬그머니 덧붙였다.

“잃는다는 건…… 네가 바라는 모습으로 행복한 너를 영영 못 본다는 의미고.”

거기에 데메트리안은 욕심을 보태, 제 마음을 덧붙여 보았다.

“내 곁에서가 아니라도, 네가 원하는 곳에서라면, 네가 바라던 대로 살 수 있다면 어디서라도……”

“너 되게 말 이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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