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클로에의 선택, 그리고… (10)
우웅 울린 통신구를, 데메트리안은 떨리는 마음으로 쳐다보았다.
제가 바라는 말소리일까, 예상 못한 건 아니지만 바라지는 않았던 이야기일까…….
잠시 머뭇대던 그의 손이 거침없이 통신구의 버튼을 눌렀다.
이미 그녀가 결정을 내렸다면, 머뭇거린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으니까.
[마음을 정했어. 만나서 얘기하고 싶어. 내일 21시에 그…… 네 건물에서 만나.]
통신구 너머로 전해져 오는 목소리를 들은 데메트리안은 심장이 목구멍에서 꼴딱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내일 밤.
다음 주 중에 네가 편한 날, 혹은 주말 중 네가 편한 때, 아무 때나 네가 좋을 때. 그런 배려심 가득한 제안이 아니었다.
지금껏 클로에가 그와 만나기를 청할 때와는 사뭇 다른 통보에, 데메트리안은 설레는 한편으로 미안함에 가슴 저몄다.
제게 실망을 안기지 않을 것이기에 배려하지 않는 것이다. 동시에, 지난 시간 내내 그녀와 만날 때 늘 제 편한대로였다는 증명이었다.
‘……이제라도 알았으니까.’
어떤 이름으로든, 깊이 헌신하여 보답하면 되는 거였다.
제게 기회를 준다면. 제게 곁을 내어주든, 그러지 않든…….
“응, 알았어. 기다리고 있을게.”
언제든 네가 편할 때 오면, 거기에 내가 있도록.
생략한 그 말을 마음속에 깊이 새기며 데메트리안은 통신구를 든 손을 말아쥐었다. 마음이 속절없이 설렜다.
[응, 알았어. 기다리고 있을게.]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정말 금세 돌아온 답변이었다. 기다린 게 맞기야 하겠지만…….
미세한 설렘이 깃든 그의 목소리를 듣고서 클로에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실마리를 다 줘 놓고서 기대하지 못한 척은……. 약았어, 데메트리안 크레벨.’
모든 것을 다 짐작하게끔 알려주고서 마치 칼자루를 쥐여주는 것처럼. 물론 무엇을 선택할지는 클로에 자신이 결정한 게 맞으나…….
평생 제가 기꺼이 휘둘려 온 데메트리안 크레벨은 결국 제가 그에게 동조할 것을 알고 있는 거였다.
그는 늘 옳았고, 저에 대한 것 또한 대부분 그러했다.
그가 괘씸하다는 이유로 제가 마음에도 없는 선택을 하지 않을 걸 아는 거였다.
그녀의 선택을 존중한답시고 답을 미룬 데메트리안이 들으면 기겁할 이야기였지만, 클로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정말로 데미의 추측대로.’
클로에는 제가 스칸다르에서 행복하지 않았음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곳에 갈 일만 없다면, 제가 책임질 일만 일어나지 않는다면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그리고 제가 꾸리고 있는 고티유에서의 새로운 삶이 퍽 마음에 든다고.
그 시절의 지식을 활용한 것이기야 했지만 가문의 울타리 밖에서 제가 무슨 역할을 하고 있다는 감각, 거기서 만난 루시엔과 같은 친구, 그리고 정략혼이 아니라도 제국과 가문에 이바지할 수 있다는 것.
무엇 하나 놓치고 싶지 않았다.
오래간, 정말 오래간 접었던 마음이지만, 가능하다면…….
이튿날, 클로에는 가족들과 만찬을 마치고서 저택을 빠져나갔다. 데메트리안이 선물해 준 마차를 타고서였다.
‘오래간 동업자들을 못 봐서요, 저녁에 잠시 보기로 했어요.’
빤히 보이는 거짓말을 궁정백부인은 넘어가 주었다. 클로에도 제 어머니가 모른 척해 준다는 것을 알았다. 미라벨로부터 더 많은 호위가 뒤따르게 되었다는 말을 들은 것이었다.
‘당분간은 우리 엄마 동료들이 따라붙을 거래. 나 못 믿겠다고.’
남작부인이 농브르를 운영하는 것은 몰라도 무언가 밤의 일을 지속하고 있는 것은 알아, 클로에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너도 아는 사람들이야? 우리 따라올 거라는 유모 동료들.”
“직접 본 적은 없는데……. 엄마랑 엄청 오래 함께했다나 봐.”
“그래애, 귀찮아지게 됐네.”
미라벨이 민망한듯이 말하기에, 클로에는 과장하여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미라벨이 제 잘못으로 이리된 것도 아니면서 심히 멋쩍어하니 덩달아 미안하던 참이었다.
“뭐, 네가 믿음직해지면 되는 일 아니겠어? 달리기도 더 빨라지고 말야.”
“그럼, 그럼. 조금만 기다려.”
미라벨이 씨익 웃어 보였다.
제 막무가내로 인해 징계를 받고 또 어쩌면 자존심 상할 처분을 받게 되었지만, 미라벨은 단 한 번도 원망하는 적이 없었다.
‘라비를 스칸다르에 데려가지 않는 미래가 아니라, 라비와 떨어지지도 않고 함께 불행해지지도 않는 미래…….’
그 미래가 정확히 어떻게 펼쳐질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클로에의 마음이 여지없이 설렜다.
마차가 데메트리안의 건물 뒤편 공지에 다다랐을 때, 데메트리안이 이미 거기에 나와 있었다.
언제부터 기다린 걸까.
그는 그저 제 마차에 기대어 서 있을 뿐이었지만, 클로에는 그가 분명 꽤나 오래간 그러고 있었을 거라 생각했다.
“좋은 저녁이야. 왜 나와 있어? 안 더워?”
“응, 좋은 저녁. 밤인데, 뭐.”
늘 그랬던 것처럼 미라벨이 폴짝 뛰어내리는 것을 지켜보고서, 제게 손을 내밀어 주는 데메트리안.
이렇게 밖에서 따로 만난 것이, 돌이켜 보면 아이펠의 마장에서 이후로 처음이었다.
클로에는 얼마간 그 손을 맞잡지 못하고 그의 낯을 살폈다. 그의 얼굴엔 혹여라도 제 손을 또 무시할까 걱정하는 듯, 자못 긴장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양 가볍게 쥐고서 마차에서 내렸을 때.
잡은 손을 놓지 않으려는 듯 꼭 쥐어 오는 느낌에, 일부러 피했던 눈길이 그에게로 향했다.
감격한 듯이 눈초리를 가늘게 휘고 있는 그 미소. 그가 그토록 순전한 기쁨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대축연에서 함께 첫 춤을 췄을 때, 독서회 날에 꼭 그런 미소를 짓고 있었더랬다.
그것이 정말 반갑다……라는 생각이 들자 뾰로통한 마음이 되어, 클로에는 잽싸게 제 손을 빼내었다.
“들어가자.”
건물 입구 쪽으로 가기 위해 클로에가 몸을 홱 돌렸을 때, 데메트리안이 다리를 내뻗어 재빨리 따라잡았다. 그녀의 앞을 가로막듯 선 그는 그녀의 손을 쥐어 올리며 어깨 근처를 감싸 뒤돌게 했다.
“밤 나들이 가자.”
“그냥 안에서……”
“날도 덥고 말이야. 오랜만에 바람 쐬고 싶어서.”
마도구 제작을 취미이자 직업으로 삼은 마법사와 함께 꾸리고 있는 공간이었다. 한여름에도 더울 일이 없었으나, 그의 빤한 수작에 클로에는 헛웃음 지으며 넘어가 주기로 했다.
어쨌든, 그에게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리라.
마차가 향한 곳은 리비에라 강 남쪽의 언덕이었다. 꼬박 2주 전에 클로에가 메리앤과 함께 나들이 갔던 바로 그곳이었다.
그곳의 분위기가 퍽 낭만적이어서, 클로에는 다시금 새초롬한 마음이 되었다.
“네가 이런 데도 다 알았어? 네 머릿속에 행선지란 황궁, 아카데미, 뭐 그런 데만 입력돼 있는 줄 알았는데.”
“도시 행정학 수업에서 들어서 알고야 있었지. 언덕이 높게 발달해 있으니 자연적으로 발생한 성곽이나 마찬가지라 경비가 다른 데에 비해 느슨하다고.”
그리고, 네가 평생을 살아온 도시의 전경을 보여주고 싶어서 왔어.
그 말을 숨겨둔 마음으로, 데메트리안은 그저 부드러운 미소만 지어 보일 뿐이었다.
서책 속 활자로만 알던 지역에 어떤 감정의 신비를 바라며 왔다. 반짝이는 것을 눈에 담는 것만으로도 조금 관대해지지 않으려나, 고향의 풍경을 본다면 없던 미련도 생기지 않으려나.
그 생각을 되새기는 것만으로도 데메트리안은 무력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시내에서 이곳까지 나오는 30분 동안, 그는 바깥 풍경만 구경하고 있는 맞은편의 제 아가씨를 꼼꼼히 눈에 담았다. 여름밤의 습기 머금은 바람이 그녀의 머리칼을 간질이는 것을 보며, 스칸다르에서 겪은 적 없을 고향의 여름 기후에 고마워졌다.
그녀의 눈에 스치는 풍경의 편린들이 그리운 감상을 안겨주기를.
어제 그녀의 연락을 받은 순간부터 그녀가 꽤나 긍정적인 답을 마음에 담았음을 짐작했지만서도, 수년을 품어 온 죄책감은 그에게 어떤 안심도 선사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윽고 마차 길이 닦인 가장 높은 곳에서 마차가 멈춰 섰다.
“밖에 나갈래, 여기 있을래?”
“밖에?”
“너랑 이렇게 밤에 마차 타니까 옛날 생각나서.”
그 말에 떠오르는 추억이 있어 클로에의 가슴이 욱신거렸다.
정략혼이 결정된 날, 룩소르 후작가에서 열린 무도회가 끝난 뒤 언제나처럼 데메트리안이 바래다줬던 그 밤.
밤의 요정이 치는 장난을 핑계로, 취기를 핑계로 서로가 어깨를 맞대고 있을 수 있던 그 시절.
스무 살로 돌아오고서는 얽히고설킨 감정의 타래를 풀지 못해 맘 편히 함께했던 시간이 없었다.
그 녹진한 그리움에, 클로에는 단단히 세워 두었던 가시를 조금 누그러뜨렸다.
“어디, 네가 준비한 대로.”
주말의 첫날 밤에 잠긴 고티유 시내. 군청색으로 물든 밤하늘 아래로 마정석의 불빛이 불야성처럼 전역을 밝히고 있었다.
프란츠 광장을 끼고 앙헬라타 대로와 필립 1세 대로가 만나는 곳에 자리한 사교클럽, 거기서부터 서남쪽으로 넓게 펼쳐진 슈바츠 거리까지가 개중에 가장 밝았다. 북쪽으로는 사교계에서 권력 좀 있는 어떤 댁에서 연회를 열고 있는지 에델타뉴 산자락을 따라 불빛이 띠를 이루고 있었다.
서민들도 귀족들도 제집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지 어둑한 구역이 하나 없었다.
대륙에서 가장 번성하고 화려한 도시.
그 도시의 가장 높은 곳에서 전경을 굽어보며, 클로에는 손에 쥔 잔에 담긴 화이트 와인만 홀짝였다. 제가 좋아하는 상큼한 풍미의 남대륙산 와인을 냉장한 바구니에 챙겨 온 성의가 있었다.
그들은 아이펠 장원의 호수에서 썼던 피크닉 매트 위에 앉아 있었다. 제가 자란 도시를 내려다보는 그 시선의 끝에 피크닉 매트의 체크무늬가 걸릴 때마다 그날의 실망감이 떠올랐다.
결국 다시 그와 대화를 하겠다고 앉아 있는 이 상황에 대한 씁쓸함도 함께…….
‘바로바로 털어놨으면 그럴 일 없었잖아.’
그 뾰족한 생각에 이르러, 클로에는 제 옆에 앉아 있는 이의 낯을 흘겨보았다.
내내 외면하고 있던 그의 시선은 제게 붙박여 있던 모양이었다.
줄곧 그래왔듯이.
클로에는 슬며시 입술을 깨물었다.
“왜 안 물어봐?”
“네가 말하고 싶을 때까지 기다리는 거야.”
“내가 계속 말 안 하면 어떡하려고.”
“더 오래 같이 있을 수 있으니 좋고.”
클로에가 뜨악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낯을 노려보았다. 그것이 얼마간, 그녀가 저를 예전처럼 대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어 데메트리안은 기분이 좋아졌다.
그것이 또 음습하다고 생각하며 그는 여상한 말투로 덧붙였다.
“그걸 핑계로 다음에 또 보면 되니까.”
“급한 일 아냐?”
“급한 일…… 뭐, 그렇게까지는.”
그리 말한 데메트리안은 스칸다르 왕실저의 수색 영장을 내주지 않는 황제 앞에서 불경하게 굴었던 것이 떠올라 작게 웃었다.
앞으로 열흘.
하지만 그 모든 건 이 앞의 아가씨를 위해서였으니까.
그녀가 원하지 않는다면 성배가 사라지건 말건, 그래서 제국에 혼란이 오건 말건 다 알 바 아닌 일이었다.
클로에는 잔을 비스름하게 기울여 한참 동안 흔들어 보았다. 찰랑이는 연녹색 금빛 물결 위로 두 개의 달이 어스름하게 비쳤다.
갓 보름이 된 달과, 그믐을 향해 치닫는 두 번째 달.
“성배를 지켜서 스칸다르와의 정략혼을 아예 없는 일로 만들려는 거지?”
그 한마디에 그들을 둘러싼 공기가 급격히 바뀌었다.
“너는 왕자님이 거기에 끼어 있다고 생각하는 거고.”
“그건……”
“나를 잡을 기회를 줄게.”
데메트리안의 얼굴에 반색이 돈 순간, 클로에는 재빨리 덧붙였다.
“그렇다고 해서 네 곁에 남겠다는 뜻은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