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클로에의 선택, 그리고… (9)
헬레네 알레지오는 무척 기분이 좋았다. 저 재수 없는 신관의 낯짝을 보고도 하녀들에게 그를 잘 모시라 이를 수 있을 정도로.
“그래, 고위 신관이시니 마정석이나 뚝딱대는 알레지오가 뭐 그리 대단해 보이시겠니. 일 마치시는 거 보고 손님방으로 모셔. 수연통 미리 준비해 놓고.”
“네, 아가씨.”
흠흠, 흠흠흠, 하녀들이 그녀의 다홍빛 머리칼을 빗질하는 내내 헬레네의 입가에서는 콧노래가 그치지 않았다.
오늘은 즐거운 날, 제 정인이 간만에 찾아오시는 날이었다. 어제부로 드디어 그 볼모 놀이도 그만두시고 작지만 위대한 제 나라의 왕이 되기 위해 돌아가실 일만이 남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저는, 그 나라 최초로 색채 진한 머리칼을 지닌 왕후가 될 예정이었고.
‘체면에 목숨 걸어서 상업 천시하시는 그 고고하신 아르투젠 귀족들은, 이제 안녕이다 이거야.’
하녀들이 얼굴에 화장을 해 주는 내내 헬레네의 입꼬리는 올라가 내려오지 않았다. 아가씨가 간만에 기분이 좋으신 것을 알아, 하녀들은 덩달아 신이 나 아가씨를 꾸며 드렸다.
“아가씨, 오늘 간만에 이 에메랄드 목걸이 어떠세요? 아가씨 성년 때 왕자님께서 선물해 주셨다고 자주 하시더니, 요즘에는 통 안 하셔서 아까워서요.”
“에메랄드는 당분간 됐어. 재수 없는 일이 떠올라서 말이지.”
그녀의 성마른 말투에, 하녀는 재빨리 에메랄드 장신구가 담긴 보석함을 닫아 깊숙한 곳에 넣은 뒤 다른 장신구를 찾기 시작했다.
몇 달 전 정인의 저택에 방문한 손님, 연주황 머리칼에 초록색 눈동자를 보니 분명 궁정백가의 영애였다.
도대체 정인께서 제국의 귀족 계집 따위와 무슨 관계를 맺으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어떠한 계획에 이용당할 처지일 게 빤했다.
‘웬만큼 위세 높지 않고서야 달링이 말이나 섞었을 리도 없으니까. 제가 초대받은 게 뭐나 되는 일이라고, 나 보고서 당황하던 꼴이 아직도 우습네.’
당황한 듯하면서도 차분히 저를 훑던 그 영애의 눈초리가 떠올라 헬레네는 코끝에 더러운 게 들러붙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갓 진주 가루를 바른 콧잔등에 주름이 지자 하녀들이 괜스레 발을 동동거렸다.
“지난여름에 달링이 선물해 주신 로브 입고 싶어. 얼마 전에 마법사가 만들어 준 다이아몬드 목걸이 있지? 그거랑.”
“네, 아가씨.”
아버지와 정인 사이에 혼담이 오간 것이 벌써 8년이 된 일이었다. 사업적 관계로 시작된 사이이기는 했지만, 그녀는 나름대로 제 정인을 연모했다.
제 부유한 아버지가 정인의 과업을 돕고, 그 대가로 제가 정인의 옆자리에 당당히 서는 삶.
장사치라는 오명을 쓴 아버지 덕에 리도테 아카데미조차 외로이 다녔던 그녀가 20여 년을 버틴 끝에 쟁취하게 될 삶이란 그런 것이었다.
저를 투명인간 취급한 제국의 귀족 계집애들 따위는 상상도 못할, 그들이 그리 선망하는 왕자님의 곁을 바로 제가 독점하는 것.
그것이 머지않았다. 정인이 귀국하여 왕관을 쓰기만 하신다면.
관을 쓴 제 정인의 자태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헬레네는 자못 흡족해졌다. 거울에 비치는 신경질적으로 마른 여인의 입가에 뿌듯한 미소가 차올랐다.
이윽고 그녀의 마르고 긴 목에 하녀가 가져온 목걸이가 걸렸다. 아버지의 일을 돕는 마법사가 저를 더 고혹적으로 보이게 할 거라며 마법을 미약하게 걸어 준 다이아몬드 목걸이.
요즘 들어 어딘가 제가 지겨워진 듯 구시지만서도, 결국 정인은 제게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그의 과업을 이뤄 줄 것은 다름 아닌 제 아버지니까.
“오셨어요, 달링?”
“오랜만이야.”
뷔욘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그것만으로도 그가 무엇을 불쾌해하는지 알아, 헬레네는 재빨리 손을 휘저어 응접실 안의 하녀들을 모두 물렸다.
부끄럼쟁이 정인께서는 다른 사람 있는 곳을 참 꺼려도 하셨다. 산호색 입술연지가 발린 헬레네의 입술이 빙긋한 미소를 그렸다.
“신관은.”
“기사님들 치유 마치시고 쉬시는 중이에요.”
“혼자서?”
“어쩌면, 환상과?”
“……곱게 다루지.”
“뭐, 중독돼 주신 덕분에 회유하기 쉬웠잖아요?”
자못 굳어지는 그의 얼굴에 헬레네는 제 손끝을 갖다 대었다.
“달링이 늘 옳아요. 받을 줄 알았던 걸 뺏긴 이들이 무너지기 더 쉬운 법이죠. 신관도, 또 황자도.”
고티유의 멍청한 귀족 계집들은 정인의 고운 미소를 찬양한댔나. 헬레네는 누구나 볼 수 있는 그의 아름다운 미소보다, 저만이 볼 수 있는 이 싸늘하고 뒤틀린 얼굴을 좋아했다.
어느 편이건, 그는 아름다웠으니까.
올려 묶는 바람에 드러난 그의 관자놀이, 그 성정만큼 뾰족한 귓바퀴, 섬세한 턱선…… 헬레네의 손끝이 스치는 동안, 그의 얼굴이 미묘하게 더 굳어졌다.
그 광경의 구석에서 스칸다르의 전통 방식으로 염색된 제 소맷자락이 나풀대는 것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저택으로 오신 건 오랜만인데, 입 한 번 맞춰 주지 않으시려나요? 그간 심부름도 열심히 했는데.”
“응접실이잖아.”
“아이들은 다 물려 둔걸요.”
그리 말하며 헬레네는 한 걸음 내디뎌 그에게로 바싹 다가섰다. 스칸다르식 자수가 놓인 그녀의 양가죽 로퍼가 지분대듯 그의 발끝에 걸렸다.
헬레네가 뾰족한 턱을 쳐들자, 그녀의 입술이 그의 턱 끝 가까운 곳에 자리했다. 작게 숨을 내쉰 그녀의 정인은 별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려 촉, 짧게 입 맞추고는 고개를 들어 올릴 뿐이었다.
귀여우신 분. 그런다고 제게서 벗어나실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아버지와 그의 계약이 성사되고서 헬레네는 수년간 그의 곁에 서기를 고대해 왔다. 그 혼약이라는 것이 알레지오의 부녀와 그, 단 세 사람만의 것임에도 헬레네는 그 밀약의 무거움을 알았다.
그 어떤 공언보다 더 의미 있는 금액이 오갔으니까.
그러고서 재작년 그녀가 성년이 되던 해 즈음해서는 둘 사이에 애욕 비슷한 무언가가 불타기도 했던 것인데, 최근 들어서는 그것이 퍽 사그라든 차였다.
뭐, 군불도 불이지.
돌아갈 날이 가까워 와서든, 과업을 이룰 때가 닥쳐 예민해져서든, 다른 누군가가 마음에 들어와서든…… 그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저는 스칸다르의 왕후가 되어 오래오래 그의 곁을 지킬 몸이니까.
헬레나가 반짝 까치발을 쳐들어 그의 턱께에 쪽, 입을 맞췄다. 그의 하얀 낯에 그녀의 산호빛 입술연지가 묻어났다.
그 모든 순간에, 뷔욘은 어제 중정에서 마주쳤던 클로에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돌아가시는 길에, 또 왕자님의 부왕 전하께 행운이 깃드시기를…… 세 성물을 인류에게 보내 주신 에르드 어머니의 관대하심에 기원해도 괜찮을까요?’
제가 뭘 하려는 줄도 모르고 에르드에게 행운을 빌어 주신다니. 역시나, 순진하신 아가씨 아니던가. 그 고마움과 귀여움이 눈물겨울 정도로.
모험 놀이를 하심에 있어 이래저래 제 심기를 거스르셨지만, 제국 사교계의 그 앵무새들보다 진취적인 여인이니 그 정도는 감내할 만한 매력이었다.
이 고매하신 사교계의 권력자이시되, 제게 퍽 살갑게 굴어 주시는 천진한 여인.
헬레네의 다홍빛 머리칼이 창 너머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볕에 녹아들자, 연한 빛으로 빛났다. 그 빛의 장난에, 뷔욘은 자꾸만 머릿속에 밀려드는 클로에의 잔상을 지워낼 수 없었다.
알레지오의 딸이 제게 남겼을 표식을 손등으로 스치듯 지워내며, 뷔욘은 그녀의 손을 다정스레 잡았다.
“그래서, 신관님 뵈러 가 볼까?”
그런 그의 얼굴에는 특유의 고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조금 전, 헬레네가 누구에게나 보인다고 한 그 가면 같은 미소였다.
***
“그래서 농브르에서는 왕자와 알레지오 영애가 연인 사이……라고 판단했다고 합니다. 사용인들 앞에서야 아닌 척 군다지만요.”
귀택하는 마차에서 파이겐의 보고를 받는 데메트리안의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아니, 어차피 제국 출신 비를 들일 거라면 그 연인이나 데려갈 것이지, 왜 애먼 로이를…….’
데메트리안은 제가 기억하는 그 시절에 알레지오 후작가가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 떠올리려 애썼다.
‘사업도 함께하고 그 외동딸이 왕자와 연인 관계에 있기까지…… 그렇게 깊이 얽혀 있으면 아마 망명도 준비했을 텐데.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걸 보면 결국 불발된 모양이고.’
알레지오 후작가가 그 미래에 망명이라도 했다면 굉장한 화젯거리였을 거였다. 장사치라 매도하면서도 그들의 재력과 수완마저 무시할 순 없었으니까.
원로원의 입장에서도 어쨌든 세금만은 착실히 내는 후작가의 부가 국외로 유출된다면 고심해야만 했을 일이니, 관련된 기억이 없다는 건 곧 망명 불발의 증명이었다.
‘모종의 사건으로 틀어져서, 제국 출신의 비를 구할 때 로이가 가게 된 건가……? 아니, 어쨌든 지금은 아직 연인 사이라면서 왜 로이에게 그렇게 친밀하게 군 거야?’
차창에 걸쳐 둔 팔로 제 거칠한 턱을 쓸며 고민하는 데메트리안을 보며, 파이겐은 라크루아 궁정백가 역시 유사한 충격을 받으리라 짐작했다.
‘저희도 꽤나 놀랐습니다. 그 왕자가 사실 궁정백가의 영애와 소문이 나 있어서 그에 대해서도 조사하던 차였거든요. 그런데 그 진원지가 왕실저의 사용인들이었지 뭡니까.’
농브르의 사내는 줄곧 라크루아와 무관한 척을 했다. 미라벨을 통해 제가 농브르의 단주가 미라벨의 어머니임을 알고 있음이 흘러 들어갔을 텐데도 말이다.
‘어쨌든 농브르에서 따로 알아봤던 걸 보면 라크루아에서도 왕자와의 소문 때문에 곤란했던 모양이니, 왕자에게 연인이 따로 있던 걸 알면 아주 뒤집어지겠지.’
그 말을 해 주면 제 공자님께서 퍽 좋아하실 텐데.
파이겐은 데메트리안의 얼굴에서 고뇌의 기색이 지워지기만을 기다렸지만, 그의 미간은 펴질 줄을 몰랐다.
‘그 정도로 깊게 결탁해 있다면, 인신매매 건도 그렇고 앞으로 벌일 일도 그렇고…… 알레지오에서 여러모로 투자를 했겠어. 마법사는 정말로 후작이 주선한 거겠고, 어쩌면 구휼 기금 세탁까지……. 후작가를 당분간 감시해야겠군.’
프레더릭과 뷔욘의 연결고리가 되는 알레지오가 어떠한 역할을 할 줄이야 알았으나, 그 정도로 깊이 연관되어 있음은 짐작하지 못한 차였다.
‘두 사람이 개인적으로 교류하기 시작한 게 분리 독립파에서 고티유에 처음으로 테러를 일으킨 때랑 맞아떨어지기도 하고.’
알레지오 후작가가 분리 독립파의 활동에까지 연관돼 있음이 드러난다면, 재산과 영지 몰수로 끝나지는 않겠군…… 이라는 생각에 이르러, 데메트리안은 문득 차창 밖의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구휼 기금 증발 사건에서 인신매매 사건에 이르기까지, 스물셋으로 돌아오고서 거의 매일 밤하늘의 달들을 보면서 귀택하곤 했다.
제 골머리를 썩였던 동시에 혼약을 당당하게 깰 공적이 되어 줄 그 일련의 사건들이 모두 하나로 이어지는 요즈음.
밤하늘에는 거의 다 차오른 달 하나와 그믐을 향해 치닫는 달 하나가 있었다. 다시 기울어 갈 날만이 남은 제1의 달 에시스와, 14개월의 여정 끝에 그믐으로 치닫는 중인 제2의 달 뷜이었다.
십여 일 뒤, 마지막 주 물의 날. 두 달이 모두 그믐으로 접어드는 겹그믐의 날이었다.
다른 모든 것이 불확실한 와중에, 그날 무슨 일이 생기는지만은 확실히 알았다.
왕자에 관한 것, 알레지오에 관한 것, 인신매매단에게 납치된 사람들이 구금돼 있을 장소나 구휼 기금이 세탁된 방향 같은 것 등등…… 아직은 모두 불확실했지만.
그날만 지나면, 모든 것이 명확해질 거였다. 아주 만일의 경우 클로에가 스칸다르에서 행복했다고 주장하지 않는 이상.
혹여 그리된다면 저는 클로에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천치인 셈이니 그녀를 잃는대도 할 말 없을 거였다.
그날 밤, 클로에에게서 연락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