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클로에의 선택, 그리고… (8)
“관료가 아닌데도 기사 작위를 받을 수 있어요?”
“뭐, 지금껏 관료 아닌 아녀자가 받은 일은 없었지만…… 이번에 그 무슨 부인이 훈장 받은 거 생각하면 무리도 아니지 않겠어?”
오호라, 미라벨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근거 있는 추측을 읊는 메리앤의 말소리에는 장난기가 배어 있었다. 제 희망을 거기 녹인 탓이었다.
“이야, 저번 금화는 나눌 동료라도 있었지, 이번에 훈장이라도 받으시면 오롯이 영애의 것 아니겠나? 그 훈장을 반으로 쪼갤 것도 아니고 말이야.”
“아냐, 내가 한 게 뭐 있다고…….”
“저번부터 그렇게 말하는데, 언니. 물론 데메트리안 경……의 입김이 들어갔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데…….”
그리 말하며 메리앤이 눈동자를 굴렸다.
생각에 빠진 클로에의 낯에 다행히도 별다른 기색이 떠오르지도 않았고, 미라벨이 의뭉스러운 눈빛을 보내오지도 않았다. 그녀들에겐 다소 익숙한 일이 되어 버린 것일까…….
클로에와 데메트리안이 묘한 관계로 평생을 지내 온 것을 메리앤도 잘 알았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데메트리안이 최근 들어 클로에의 편지를 대신 전해 오면서까지 잠시라도 더 보려는 사람처럼 구는 것 또한 눈치챈 차였다.
‘태양절에는 정말, 혼 빠진 사람 같았지…….’
클로에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서 대신전으로 달려갔을 때, 당시에는 한참 우느라 경황이 없어 몰랐지만 돌이켜 보면 데메트리안의 낯빛이 꽤나 절망적이었더랬다.
‘입도 한번 안 열고 눈빛이 죽어 있는 게, 세상 무너진 줄 알았어.’
사교계 활동을 하지 않는 메리앤은 그가 늘상 예의 바르게 꾸며 둔 얼굴로 만사에 초연하다는 평을 듣는 걸 알지 못했다. 그와 절친한 클로에나 대니얼과 함께 만나 온 만큼 그의 꾸밈없는 낯이 익숙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그토록 몰린 표정을 짓는 건, 단연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저도 미라벨도 친우의 상태가 위중함에 퍽 고통스러워했지만, 저들과 그는 사뭇 다른 관계 아니던가.
‘역시, 데메트리안 경은 언니를…….’
아냐, 그래도 아직은 정혼자가 있는데. 피차 사정 다 아는 처지에 모른 체해 줘야지.
메리앤은 재빨리 생각을 털어내며, 하려던 말을 곧장 이었다.
“아무튼, 지난번 일도 그렇고 이번도 그렇고, 말했지? 폐하께서 얼마나 까다로우신데. 없는 일 갖고 그러실 분이 아니란 거 알잖아. 지난번부터 왜 이렇게 소극적으로 생각해?”
“사실이 그렇잖아. 난 관료도 아니고, 그냥 어쩌다가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인데.”
“그 자리에 그냥 있다가 사경을 오갈 지경까지 돼?”
메리앤이 답답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메리앤 역시, 제가 클로에의 상황에 처하면 마찬가지로 소극적으로 굴 게 빤했기에 그건 스스로를 위로하는 말이기도 했다.
“관료가 아니면 공도 못 세워? 오히려 더 대단한 거 아냐? 관료들은 제 업무로 한 일이니까 보상 체계에 따라 인정받을 일인데, 언니는 개인적인 이해관계와 무관한데도 뛰어든 거잖아. 그런 걸 인정해 주지 않으면 뭘 인정해야 하는데?”
“그렇기야 하지만…….”
“우리가 관료가 되기 싫어서 안 된 것도 아니잖아.”
“…….”
클로에로서도 메리앤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저도 남의 일이었다면 아마 메리앤처럼 말했을 거였다.
다만 아르투젠 귀족 사회에서는 미혼의 귀족 영애가 황실로부터 공훈을 받는다는 게 어색한 일이었고, 한편으로는 그게 제 일이 되니 믿기지 않기까지 했다.
“우리가 배운 귀족 영애의 소양에 불의에 맞서 싸우거나 대의를 위해 몸 바치라는 게 없어서 문제인 거야. 배우지 않았지만, 중요한 건 알잖아? 그걸 언니가 해낸 거고.”
“……그렇지, 역시?”
“치하받아야 하는 일 맞아. 안 가르쳤는데도 알아서 사회에 공헌하는 걸 보면, 폐하께서도 귀족 영애들에게 종마로서의 삶 이외에 다른 가능성도 있다고 여기시지 않겠어?”
여느 때와 같은 메리앤의 황실 성토 한 마디에, 클로에의 마음이 속절없이 떨렸다.
어떤 전례가 되는 일이라.
그건 정말 오랜만에 겪는, 일종의 고양감이었다.
***
대니얼은 원로원의 응접실에서 데메트리안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돕겠다고 해 놓고 그러지 못한, 그날의 일에 대해 곱씹으면서.
‘네가 보관을 쓸 것도 아니면서 네 형을 흔들 일을 만들지 말거라.’
본인이 차남으로서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었을까, 그의 부황은 형제들을 경쟁 붙이는 데 꽤나 정성이었다. 그것이 노력하지 않아도 늘 그의 형보다 앞서는 그에게는 곤란한 일이었다.
‘황위에 뜻이 없다고 말씀드린 것이 벌써 수십 번인데, 형님의 책봉을 그저 미루기만 하시니…….’
그랬던 부황이, 스칸다르의 왕자를 건드리는 일을 두고서 프레더릭을 흔든다고 말했다.
뷔욘이 아르투젠에 오고서 첫 몇 년간은 제국 적응 기간이라며 별궁에서 손님으로 지냈더랬다.
그가 열 살에 왔을 때, 제 형님의 나이 아홉. 한쪽은 책봉되기 전이고 한쪽은 볼모 신분이었지만 어쨌든 양국의 후계자끼리여서, 그리고 한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터라 두 소년이 퍽 잘 지냈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형님과 잘 놀아 준 셈이지.’
놀아 주었다라……. 그들이 처음 만났던 시절의 여덟 살 대니얼은 그것을 알 수가 없었지만, 돌이켜 보면 그 열 살의 나이에 저보다 발육 늦은 아이들 상대로 비위 맞춰 주었음이다.
그게 그리도 자존심 상했을까. 제도에서 집단으로 범죄를 벌이는 이들의 뒷배가 되어 줄 정도로.
물론 일국의 왕자로 자라난 소년이 타국의 볼모로서 지내게 된 감각에 대해 제가 알 리는 영원히 없겠지만…….
‘그저 가게 두어라. 드디어 간다는데 잡고 싶지가 않구나.’
그리 말하던 부황에게선 다소간 지친 기색이 묻어났다. 데메트리안을 먼저 내보내고서 급격히 피로해졌던 그의 안색.
제도에 17년간 머무른 스칸다르의 볼모에 대해 그가 왈가왈부하는 일은 없었으니, 그것이 최초의 내색이었다.
‘원래 성년이 되면 돌아가는 것을 스물일곱이 되도록 못 돌아가고 있는 건데, 아바마마께서는 왜 그가 자의로 남은 것처럼 말씀하셨을까. 그가 남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대니얼은 퍼뜩 놀라고야 말았다.
지금으로부터 8년 전, 그가 성년이 되기 한 해 전에 제도에서 분리 독립파의 테러가 크게 벌어졌다. 스칸다르의 현 왕이 왕위에 오르고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분리 독립파와 선을 그으며 친제국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던 왕실에서는 거액의 보상금을 바치면서……
‘재발 방지 대책으로 제 볼모 기간을 연장하셔도, 달게 받겠습니다.’
그럼, 그때부터……?
때마침 응접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데메트리안이 들어왔다. 인사 대신, 대니얼의 입에서 나온 것은 그가 막 빠져 있던 생각의 결말부였다.
“너는…… 스칸다르의 왕자가 분리 독립파와 연관이 있을 거라고 확신하는 거야?”
문을 들어서자마자 들이닥친 말소리에, 데메트리안은 잠시간 그의 낯을 살폈다.
제게는 늘 느물대던 그의 낯이 전에 없이 진지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그것이 그의 휘하의 기사들이나 원로원의 어르신들에게 퍽 매력적으로 보는 황자의 위엄이라, 그에게 무언가 깊은 확신이 있음이 자명했다.
“어디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응.”
“그래, 그래서 네가 왕실저의 수색령을 그리 애타게 바란 거지.”
“대충 짐작한 거 아니었어?”
“나는 라크루아 영애를 믿는 너를 믿는 것뿐이야. 라크루아 영애를 믿는 게 아니라.”
내심으로는 뷔욘에 대한 일말의 적개심 때문에 그런 억측을 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고……. 거기까지는, 대니얼은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데메트리안이 최근 초조해하는 기색이긴 했지만, 그러고 보면 그는 꽤나 탁월하게 이번 사건에 관한 후속 수사를 진두지휘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숨겨둔 말이 무엇인지 눈치챈 양, 데메트리안은 다소간 기분이 상한 기색이었다. 클로에를 못 믿는다는 말도 기분이 썩 좋지 않았고.
그는 불퉁한 심사를 숨기지 않은 채 내뱉었다.
“그게 원래 용건은 아니지?”
“어어, 알레지오 후작가 말야.”
제 손에 들고 있던 서류 봉투를 흔들어 보인 대니얼은, 금세 다시금 생각에 빠졌다. 그의 한쪽 눈가가 일그러졌다.
“……그러고 보면 알레지오 후작가가 또 마정석 산업 때문에 스칸다르랑 연결이 되잖아. 설마 너, 그때부터 왕자를 의심했던 거야?”
“뭐어, 그런 셈이지.”
“이거…… 생각보다 일이 꽤 큰걸.”
대니얼이 골치 아프단 표정을 과장해서 지어 보이며, 그에게 그 서류 봉투를 건넸다.
일전에 데메트리안이 알레지오 상단에 대해 조사해 달라 부탁했던 것을, 인신매매단의 사건이 터지면서 그걸 먼저 처리하느라 이제야 전달하는 거였다.
“이 정도로 되겠어? 짐작했겠지만 별로 수확이랄 게 없어. 제도 출입 기록이야 정말 규칙적이기 그지없고, 수입 신고 내역도 아주 깔끔해.”
“깔끔하다고?”
“응, 기이할 정도로.”
“잘됐네. 기이할 정도로 깔끔하다면 분명 구린 구석이 있어서겠지.”
“너, 그럼 애초부터 이럴 작정으로…….”
대니얼의 얼굴이 아연해졌다. 그런 그의 낯을 보며, 데메트리안은 한쪽 입꼬리를 들어 웃어 보일 따름이었다.
‘단단히 작정했네.’
그의 벗은 늘상 성실한 인물이기야 했지만, 이처럼 의욕적으로 나서서 일을 벌이는 것은 처음 보는 듯도 했다. 일견 신나 보이리만치…….
대니얼의 낯에 수많은 생각이 스치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가, 데메트리안은 기꺼이 속내를 밝혔다.
“이번에 인신매매단이 납치한 이들을 빼돌리면서 마법사를 썼댔잖아? 알레지오 상단과 연관된 건물이나 거기서 새로이 구한 건물에 옮겨다 놓지 않았을까 싶어.”
“그런 거래에는 보통 목돈을 쓸 테니까…….”
“분명 깔끔하게 정리해 둔 그 금액이 쓰였겠지.”
그리 말하는 데메트리안의 눈이 굳게 빛났다. 그러니까 정확한 물증은 없지만 확신에 가까운 심증으로 그들을 드잡이할 거란 소리였다.
대니얼은 정말이지 생소한 그의 기색에 흥미로워해야 할지 당황스러워해야 할지 감을 못 잡을 지경이었다.
‘인신매매범을 잡긴 했지만 납치된 이들을 아직도 찾질 못해 민심이 흉흉해진 걸 생각하면, 황실로선 고마워해야 할 일이긴 한데.’
실제로 데메트리안이 아는 과거에선 그 흉수들조차 잡지 못해 황실의 지지율이 꽤나 떨어진 일이었다. 그것을 대니얼이 알지는 못했지만, 그럴 위험에 처했었음이 너무 명확했다. 때문에 클로에의 일에 대해서까지 포상을 해야 한다고 제 부황에게 간언한 차였다.
그런 데메트리안의 노력을 달갑게 여길 수밖에 없어, 그는 그저 제 걱정을 감춰 둔 능청스러운 말만 내뱉을 뿐이었다.
“이번 일이 잘 맞아떨어져서 그렇지, 무죄 추정의 법칙 어쩌려고 그래? 크레벨 영지민들 무서워서 살겠어? 후계자께서 공포정치할 포부가 만만이셔서.”
“추정이 아니야. 증거가 없다뿐 심증은 확실해.”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만 말이야. 그런데, 왕자는 곧 돌아가잖아?”
“납치된 이들이라도 구할 수 있다면 다행 아니겠어? 폐하께서 그대로 보내시기로 하신 바에야.”
“그렇긴 하지…….”
대니얼이 일견 수긍하는 기색이었다.
데메트리안은 지난번 함께 황제를 만났을 때보다 퍽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는 대니얼의 태도에, 그가 황제로부터 뷔욘의 일에 대해 뭔가 들은 바가 있음을 확신했다.
‘폐하께서 왕자를 수사하지 말라고 하신 게 이치에 안 닿는다 싶긴 했는데, 나름 생각이 있으셨던 모양이군.’
뭐, 그쪽 일이야 제가 알아서 하면 된다.
왕자에게서 알레지오 후작으로, 알레지오 후작에게서 말레카의 왕녀와 프레더릭으로 이어지는 또 다른 연결고리.
부황과 제 형을 사랑하는 대니얼에게는 절대 상의할 수 없는 내역이었다.
‘파이겐 경이 오늘 밤 농브르와 다시 만나기로 했지. 알레지오 후작의 영애와 왕자가…… 분명 무슨 관계가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