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클로에의 선택, 그리고… (7)
정말, 마지막이었다.
뷔욘 스칸다르는 일종의 희열과 학습된 모멸감을 은은한 미소 아래 욱여넣은 채 내궁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황제와의 마지막 대면이었다. 부왕이 위독하다는 소식이 날아든 이후로 손꼽으며 기다린 순간.
50세연임에도 호형호제하는 그 스칸다르의 왕이 참석하지 않아 고티유 사교계에 소문이 무섭도록 난 것이 얼마 전. 그리고 귀국을 결심하였다 황제에게 고한 것이 지난주의 일이었다.
‘그간 고생 많았고. 선정하는 왕이 되거라.’
덕담이랍시고 그리 말하던, 황제의 마지막 말.
위독한 부왕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떠나는 그에게 퍽 당연한 인사말이기야 했으나, 그에게는 그마저도 역겨웠다.
내 나라를 어찌 다스리고 어떤 왕이 되건…… 말이 좋아 제후국이지 속국 취급 아닌가.
하지만 그것도 이제, 다 끝이었다. 뷔욘의 느른한 미소의 끝에 만족감이 걸렸다.
‘17년을 꼬박 채우고 돌아가는군.’
셰비크의 왕궁에서 모두에게 예쁨 받는 왕자로 살던 시간보다, 고티유 사교계의 어릿광대로 살아간 세월이 한참 길었다.
성년 즈음하여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을 미루고 또 미룬 것은 스칸다르의 왕자이되 스칸다르인이지 못한 그의 마음 때문이었다.
‘이 아이가 미욱하여 제국의 법도를 몰라 벌어진 일이니 부디 용서하시길 바랍니다, 형님.’
그리고 제 밤을 몇 번이고 얼룩지게 하던 아주 어릴 적의 기억.
저를 그리도 귀애하던 부왕이 아르투젠에 온 첫날, 황실 인사들 앞에서 저를 치죄하고 낮잡았던 그 순간으로부터 뷔욘은 한순간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화, 황자 전하, 죄, 죄송합니다.’
‘제가 주제를 몰라 죄송했다 하여라.’
‘제가, 제가 주제를 몰라…….’
뷔욘은 짧게 코웃음 쳤다.
영문도 모르고 벌벌 떨며 난생처음 남 앞에 고개 숙이던 어린 뷔욘 스칸다르. 더 이상, 없는 일이다.
절대로 다시 오지 않을 고티유의 황궁. 멀리서 나쁜 소식이나 들려오길 바라게 될 고티유의 황궁.
남몰래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려 삿된 미소를 흘려 내며, 중정으로 나가는 계단에 걸음을 내디딜 때였다. 어두웠던 실내의 그림자가 거두어진 자리에 햇빛이 내려앉았을 때.
찔러 오는 햇살에 찌그러뜨린 눈에 들어온 것은, 저 멀리서 걸어오고 있는 라크루아 영애의 모습이었다.
‘그 소공작이 한 여성과 함께 행동했는데, 머리색으로 미루어 보아 높은 확률로…… 그 영애였습니다.’
제 뒤에 선 디에크가 복면을 코 위까지 끌어올리는 기척이 났다. 얼마 전 난 상처가 대충 아물긴 했으나 흉이 지려는지 벌겋게 자국이 남은 터였다.
다쳤다 했는데, 어느새 회복되셨군.
제가 무엇에 휘말렸던 것일지, 모험 놀이에 빠진 여인이 무엇을 알리오. 번번이 거슬리는 것도 참 공교롭지만, 어차피 그녀는…….
뷔욘은 반대쪽 입꼬리를 마저 끌어 올려 미소를 그린 채 그녀의 천진한 걸음걸이를 눈에 담았다.
그런 그의 눈매는 사뭇 일그러진 채였다.
“이런 날에 다 뵙는군요.”
클로에가 중정 한가운데의 조각상을 빙 둘러 내궁으로 향하는 길목에 들어섰을 때, 마치 그녀를 기다린 양 천천히 걷고 있던 뷔욘이 밝게 웃으며 알은체를 했다.
그런 그의 낯에 걸린 해사하고도 고운 미소.
클로에가 미래의 부군이 제게 보이던 더 다정한 미소를 몰랐다면 귀 끝이 붉어졌을 만한 그런 미소였다.
꽤나 달고, 예의 바르되 친근함을 내색하는 미소. 그가 연회에서 예의 차리는 미소보다는 조금 더 다정한 미소.
그래, 이렇게, 저를 얼마간 특별하게 여겨 주기야 하시지만…….
그 뒤에 치미는 복잡한 생각들은 일단 다 미뤄 두고서, 클로에는 반짝 웃었다.
“안녕하세요, 왕자님? 그간 잘 지내셨나요?”
“예, 오랜만에 뵙습니다. 탄신연 이후로 처음이지요.”
그리 말하며 뷔욘은 클로에의 눈빛을 살폈다.
클로에로 말할 것 같으면 혹시 실수로라도 디에크를 쳐다보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었다. 멀리서 그의 낯을 미리 살펴 둔 터라 흘끗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때 파이겐 경이 얼굴을 그었다고 했었는데…… 복면을 쓴 걸 보니 이번에도 그랬나 봐. 라비도 제대로 모른 척하고 있겠지?’
미라벨에게도, 디에크를 그날 건물에서 목격한 일에 대해 이야기해 둔 차였다. 이전부터 그의 무위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미라벨은 그가 단순한 호위가 아니라는 사실에 크게 놀라지 않는 눈치였더랬다.
지금껏 뷔욘을 마주한 중에 이토록 떨리는 순간이 없었다.
그에게 잘 보이고 싶어 마음 설렌 적이야 많았다. 하지만 제가 알고 있는 것들을 들킬까 봐서, 그를 어떤 식으로든 판단하려 해서, 그의 측근과 맞섰던 저만의 비밀 때문에 조마조마한 것은 정말이지 처음이었다.
클로에는 떨리는 입꼬리를 간신히 끌어 올리며 방긋 웃었다.
“예, 이런 시간에 어쩐 일이셔요? 폐하를 뵈러 오셨나요?”
“네에, 그것이……”
“참. 부왕께서 위독하시다고요.”
“역시 라크루아엔 고티유의 비밀이 없는 법이군요.”
난처한 듯 떨어지려던 뷔욘의 눈썹이 그린 듯이 평소의 모습을 되찾았다. 늘 다정하게, 저를 위해 주며 말을 걸던 부군의 모습.
하지만 무엇에 있어서건 제 속내를 보이는 법이 없으시던 그 모습…….
클로에는 지금에 와서야, 부군이 저를 어린애 어르듯 해 왔던 것임을 인정하게 되었다. 기실 그것을 의심하지 않은 적은 없었으나…… 그런다고 해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으니까.
그 씁쓸함에 손을 말아 쥐면서, 클로에는 오래간 마음속에 담아 온 문장을 떠올렸다.
뷔욘을 의심하기 시작한 이후로 정해 두었던, 그에게 보낼 마지막 인사말.
“그런 영애께서는…… 캔달우드의 공녀를 만나러 오셨겠군요.”
“어머, 그걸 어찌.”
“캔달우드의 공녀께서 유일하게 곁을 내준 사람이 라크루아의 따님인 게 얼마나 유명한 일입니까.”
“그게 유명씩이나 할 일인가요?”
“고티유 사교계에 가장 이름 높은 영애님의 명성에 보탬이 되는 수식 아닙니까.”
그리 말하는 뷔욘의 연갈색 눈동자가 따스하게 빛났다.
‘미아와 친한 것을, 이때도 실은 알고 계셨던 거고…….’
뷔욘이 저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번번이 놀라웠다.
‘그러면 일부러 아르투젠의 것들이나 그 시절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으셨던 걸까?’
그가 ‘제국식’이라는 표현에 다소 거리낌을 보였던 것을 생각하면…… 클로에의 낯빛이 흐려질 무렵이었다.
“참, 그래서 마지막 인사를 드리게 됐습니다.”
“마지막…… 인사요. 그렇다면.”
“예, 제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러 귀국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마지막 하례를 드리기 위해 온 참이고요.”
“어머, 설마요. 쾌차하실 거예요.”
쾌차하지 못할 걸 알고서 하는 클로에의 말을, 뷔욘은 그저 세상 물정 모르는 인사말로만 여겼다.
“볼모 생활이 부쩍 길어진 탓에 얼굴 못 보여드린 불효를 끼친 지가 벌써 몇 해인지 모르겠군요.”
“건강히 돌아가셔서 얼굴 보여 드리면, 씻은 듯이 나으실 거예요.”
“……그러면 좋겠습니다마는.”
뷔욘의 입꼬리가 여전히 미소를 지어 두었으면서도 가늘게 수축하였다.
“영애께서도, 부디 건강하시기를요. 고티유에 있는 동안 많은 편의를 보아주셔서 무척 감사하였습니다.”
그리 말하며, 뷔욘이 클로에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른 한 손은 등 뒤로 두르며 슬며시 상체를 숙이는 것이, 어쩌면 춤을 청하는 것과도 같은 모양새였다.
평소보다 어딘가 정중해 보이는 듯한 그의 몸짓 구석구석을 눈에 담으며 클로에는 조심스레 제 손을 그의 손 위에 올렸다.
하늘하늘한 레이스 장갑 끼인 그 가녀린 손끝을, 뷔욘은 얼마간 말없이 지켜보았다.
스칸다르에서는 쓰이지 않는 레이스로 된 장갑.
그 감촉을 새기려는 듯, 그의 엄지가 그녀의 조잘조잘한 손마디를 진득히 문질렀다.
“지난 연회 때도, 덕분에 좋은 추억을 만들었고요.”
“……천만에요.”
그 말소리가 다소간 음산하게 울린다 싶었을까. 그것이 이전의 마지막 만남 때 하지 않았던 이야기여서, 클로에는 대축연 때 제가 스칸다르의 것을 소개한 행위를 그가 얼마간 불쾌해하고 있음을 다시금 깨달았다.
“그럼 부디, 다음 기회가 있기를.”
다음 기회라.
그때 이 말을 듣는 저는 무슨 생각을 하였던가. 스칸다르의 국왕이 되기 위해 귀국하는, 볼모였던 왕자님께서 다음을 기약하시는 말에 대해…….
당시에는 소소한 의문이 들었던 말이었고, 그래서 클로에는 뷔욘이 저를 은애했다 했을 때 이 말소리를 떠올리며 그랬던 거구나, 수긍할 수 있었더랬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지금의 왕자님은, 딱히…….’
그에 대해 생각하는 대신, 클로에는 찬찬히 뷔욘의 낯을 살폈다.
내리쬐는 한낮의 햇볕만큼 빛나는 그의 백금발, 제 낯에서 무슨 기색을 읽으려는 듯 떨어지지 않는 눈동자. 여름이라 높게 묶은 탓에 초여름의 산들바람에 슬며시 휘날리는 그의 머리칼 같은 것들…….
그런 것을 하나하나 눈에 담으며, 클로에는 입안에 담아두었던 말을 뱉었다.
“네, 왕자님. 저어,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 자세로 고개를 들어 올린 뷔욘이, 얼마든지 이야기해 보라는 듯 퍽 넉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돌아가시는 길에…… 또 왕자님의 부왕 전하께 행운이 깃드시기를.”
클로에는 제 목소리의 떨림이, 무언가 어려운 위로를 전하는 이의 사려 깊은 공감으로 비치기를 바라며 말을 이었다.
“……세 성물을 인류에게 보내신 에르드 어머니의 관대하심에 기원해도 괜찮을까요?”
일순 깨어져 버린 뷔욘의 미소 안에서 클로에가 읽어 낸 것은 아주 작은 불씨였다.
제국과 연관된 것을 기피하는 이에게 제국의 근간이 되는 에르드의 축복을 바라자면 일종의 눈치 없는 선의로 읽힐 수야 있겠지만, 그러면서도 불쾌하게 여길 수야 있겠지만, 그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저건 분명, 비웃음.’
여전히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하였으나, 어딘가 차가운 기색이 있는 그의 입꼬리는 기묘하게 한쪽 끝이 올라가 있었다.
그와 3년간 부부로 지낸 클로에가 그것을 몰라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언니,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으, 응?”
“뭐야, 진짜 후유증 같은 거 있는 거…… 아니지?”
“아냐,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
클로에의 재빠른 말에 미라벨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암, 생각할 거리가 있지. 너무 많아서 문제지.
뷔욘과의 마지막 순간을 저도 모르게 계속 곱씹고 있으니, 머리가 잘못되어 소리를 듣지 못하는 건 아닌지 걱정을 산 모양이었다.
영 안심이 되지 않아서, 메리앤은 눈썹을 늘어뜨리며 제가 먹으려고 집었던 에클레어를 클로에에게로 내밀어 주었다. 에클레어는 단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메리앤이 유일하게 좋아하는 디저트였다.
클로에는 그녀의 귀여운 배려에 작게 웃으며 그것을 받아 한 입 베어 물었다.
“맞다, 언니. 내가 재밌는 얘기 들었는데.”
“재밌는 얘기?”
“응, 제리가 저번 주 황실 만찬 때 들었다면서 해 준 얘긴데 말야.”
주말마다 황실 일원들끼리 함께하는 만찬 자리는 황실의 문제에 대해 허심탄회한 이야기가 오가는 자리였다.
준황녀라 해도 양녀가 아닌 피후견인 신분인 메리앤은 그곳에 허락받지 못했지만, 그녀를 터울 많이 지는 형님들보다 가까이 여기는 3황자 제러미가 모든 걸 공유해 주었던 것이다.
“언니 다쳤던 그 일 말야, 대니얼 전하가 꼭 치하해야 한다고 간언에 간언을 거듭했나 봐.”
“……뭐어?”
“크레벨 소공작이 얼마 전에 폐하께 뭘 부탁했는데 그게 잘 안 된 모양이래. 그럴 거면 언니 공적이라도 치하해 줘야 한다고. 그래서 제리가 언니랑……”
데메트리안 경이랑 무슨 사이냐고 눈치 없게 물어보더라, 그런 말을 덧붙일 뻔한 메리앤은 입을 홉 다물었다. 다행히도 이미 깜짝 놀라 눈동자를 한껏 떨고 있던 클로에는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가 감춘 말이 무엇인지 알겠어서, 미라벨은 히죽 웃으며 메리앤에게 눈을 찡긋해 보였다. 지난번 시내 나들이 덕분에 한껏 친근해진 그녀들이었던 것이다.
“아, 아무튼. 그래서 폐하께서 생각해 보겠다고 하셨는데, 이러다가 언니 기사 작위라도 받는 거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