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클로에의 선택, 그리고… (6)
그게 아니라면, 그의 계획이 무엇이 되었든 제 고배를 남에게 돌리는 것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데메트리안이 그런 걸 허투루 할 리가 없었다.
클로에가 단순히 자기의 행복과 불행만을 근거로 어떤 선택을 하지 않으리란 걸, 그가 모를 리가 없었으니까. 책임감을 숭상하는 저와 더불어 자라난 그녀 또한, 귀족으로서 책임감을 의무로 이해하고 있음을 그가 잘 알 거였다.
‘그게 어떻게 도난되었는지 그때까지 밝혀진 게 하나도 없었어서 실감은 안 나지만, 데미는 뭔가 알고 있는 거겠지.’
무언가, 저를 설득할 확실한 근거가 있어서…….
그리고, 그녀가 스칸다르에서 행복을 찾았다면 굳이 말하지 않겠다는 것은, 성배 협상에 스칸다르의 무언가가 얽혀 있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디에크 경이 인신매매단의 일에 얽혀 있었던 것처럼.’
그가 단독으로 벌인 일일 수도 있겠으나, 뷔욘 또한 그 배후에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면 성배 절도에도 역시……
‘왕자님이 얽혀 있다고 생각해야 하려나.’
클로에의 생각은 자연스레 뷔욘에게로 옮아갔다.
마주치면 웃어 주시는 왕자님, 저와 가까워지기 위해서인지 살롱에 다니기 시작한 왕자님, 언젠가부터 손등에 입맞춤으로써 다음을 기약하시는 왕자님, 과한 것을 선물하고 남들 앞에서 과감히도 행동하시는 왕자님…….
제가 친밀하게 군 덕에 그때보다얀 가까워졌다.
그러나 클로에는 그 모든 행동에서 훗날 뷔욘이 주장할 연심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는 제게 퍽 친근하게 굴었고, 그때보다 더 적극적으로 굴었지만……
그 누구에 비하면, 저를 그리 절박하게 여기는 낌새란 없었으니까.
그런 때면 클로에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물음표가 차오르는 것이었다.
그의 호감을 산 걸까?
그가 이 시절부터 저를 연모한 게 맞을까?
그때보다 더 친근해졌다면, 그것이 미래의 셰비크 생활에 도움이 될까?
‘그때의 나는, 행복했을까……? 부군의 총애를 받기야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당장에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아니, 클로에는 기실 얼마간의 답을 어렴풋이 쥐고 있었지만…… 그것을 확정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일단은, 일단은……, 마지막으로 한번 만나 봐야겠어. 정말 후회 없이 결정할 수 있도록.’
혹여 스칸다르의 생활을 거부하고 싶어서 데메트리안의 계획을 따르게 된대도, 그를 만나보는 것쯤은 큰 문제도 되지 않으리라.
대차게 실망이라도 하게 된다면, 수년간 제 운명이라 생각해 온 것을 저버리는 데 큰 도움이 될 거였고.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라면, 하고 후회하는 편이 더 나음을 느끼고 있는 두 번째 스무 살이었던 것이다.
***
황궁 서편에 자리한 경시청. 그곳을 제 일터처럼 드나드는 크레벨 소공작의 존재가 경시청 관료들에게 퍽 익숙해진 지도 오래였다.
경시청 관료도 아닌 이가 수사에 큰 권한을 행사하니 불만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가 황명에 따라 수사 중인 데다 황제의 나팔까지 있어 어쩔 수 없었다.
오늘도 크레벨의 마차가 도착했단 소리에 에티엔이 재빨리 로비로 나왔다.
비슷한 연차의 관료들 중 그에게 처지지 않는 지위라는 이유만으로 그가 크레벨 소공작의 전담이 된 차였다.
“좋은 오후예요. 오늘은 또 어쩐 일이세요?”
“어, 좋은 오후야.”
데메트리안은 고개를 까딱여 그의 인사를 받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근 열흘 새 매일같이 드나들어서인지 경시청 구조가 퍽 익숙했으나, 평소와 사뭇 다른 곳이 오늘의 목적지였던 탓이었다.
“작전실로 안 가시고요?”
“응, 생포한 분리 독립파를 좀 만나 보고 싶은데.”
“……심문하시려고요?”
에티엔의 미간이 좁아졌다. 제 누이보다 조금 더 금발에 가까운 머리칼과 조금 더 푸른 눈동자를 갖고 그런 날카로운 표정을 지을 때면…… 데메트리안은 왠지 모르게 그에게 약해지고 마는 것이었다.
‘지난번 테러 미수 때 대신 심문하겠다고 노엘 경에게 막무가내 부린 걸 갖고 저러는 거겠지…….’
저처럼 5년 뒤에도 약혼자 없을 그가 이번에야 다시 보니 제 선배를 연모하고 있음이 선연했던 것이었다. 이따금 밖에서 마주칠 때면 늘 그녀와 함께 임무 수행 중이었는데, 저를 수행한답시고 그걸 못하니 꽁한 모양이었다.
‘이렇게 빤하게 굴면서 스물여섯 되도록 약혼 소식 하나 없었던 사연은 잘 모르겠지만…….’
데메트리안은 심기 불편함을 숨기지 않는 그의 낯을 얼마간 들여다보다가 목소리를 낮췄다. 저들 가까이에는 파이겐밖에 없었지만, 혹시 모르니까.
“이번 일에 스칸다르 왕자의 호위가 얽혀 있다고 로이가 말해 줬는데, 달리 왕실저를 끌어들일 방법이 없어서 말야. 혹시 아는 바가 없는지 물어보려고. 로이가 그, 왕자랑 조금 교류하고 지냈으니 로이가 알아봤다면 꽤나 신빙성이 있잖아?”
그 말을 하며 데메트리안은 제 생살을 찌르는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그 교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에티엔의 낯이 대번에 심각해졌다. 공식적으로는 이 사건에 클로에의 존재가 없지만, 제 누이가 인신매매범 체포 작전에 연루되었던 것을 아는 탓이었다.
사람들 얼굴을 잘 기억하는 클로에가, 요 얼마간 서로 왕래했다던 스칸다르 왕자의 호위 얼굴을 기억하는 것은 이치에 닿는 일이었다.
“응접실에서 기다리시면 심문실 준비해 두겠습니다.”
진지해진 낯으로 에티엔이 하는 말에 데메트리안은 고마움을 담아 고개를 까딱였다.
일전에 이올린 한센을 마주했던 심문실에는 30대 후반 정도 되어 보이는 한 남성이 의자 뒤로 팔이 결박된 채 앉아 있었다. 체포돼 온 이들 중에 전투에서 어딘가를 다친 이들이 많아, 상태가 멀쩡한 자들 중에 그나마 연식이 많은 자를 골라 놓은 거랬다.
‘20대 정도의 젊은이들이 꽤나 많더라고요. 묵비권 행사하는 척하지만 실제론 아는 게 없어서 말 못하는 게 빤한 게, 분리 독립파에 합류한 지 얼마 안 된 모양이었어요.’
데메트리안을 심문실로 안내하며 에티엔이 덧붙인 말이었다.
상태가 멀쩡했대도 열흘 전의 전투에서 아주 무탈할 수는 없었던지, 남자의 얼굴이며 팔뚝, 다리 등이 붕대로 처치돼 있었다.
끼익, 맞은편의 나무 의자를 끌어 빼는 소리가 나자 사내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거래를 제안하겠다.”
다짜고짜 내뱉은 말소리. 사내의 흐릿한 눈동자에 물음표가 담겼다.
“이올린 한센.”
“……!”
그의 입에서 예기치 못한 이름이 흘러나오자 그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꽤나 은은한 반응이었지만 데메트리안에게는 그 정도도 충분했다.
“그녀도 이번 작전에 찬성했나?”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5월에 스칸다르에서 행상 하나가 그대들의 왕자가 주문한 개인적인 물품과 함께 찻잎을 들여왔지.”
사내가 뭐라 반론하건 데메트리안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갔다.
“그 안에 분명 블라테르 약초가 있었을 터.”
사내의 눈자위에 핏발이 섰다. 스칸다르 고산지대에서만 나는 그 잎은 타국에 수출된 적이 없어 제국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었다.
“스칸다르산 여송연을 몰래 들여와 그걸 섞었든, 시중에 유통되는 여송연을 사서 재조립했든. 아마 이올린 한센이 미온적으로 구니 다른 이들이 왕자의 밀명을 받았겠지. 그게 어쩌면, 자네인지도.”
“……억측입니다요.”
데메트리안의 평이한 말투와 달리 급격히 격양된 사내가 몸을 꿈틀거렸다. 의자 뒤로 손이 묶여 그것은 무위에 그치고 말았지만.
“그게 누구였는지 알고 싶은 건 아니다. 다만 너희들의 리더가 반대한 그 일로 인해 작전에 참여한 이들의 반수가 목숨을 잃었지. 그중에 주동자가 있을지도…….”
말꼬리를 늘이며 데메트리안은 그들 사이의 탁자에 상체를 기댔다. 그는 꼭대기 층에서 마지막까지 마정석 폭탄을 던지며 응전하던 그 사내가 주동자라고 판단하는 편이었지만.
깍지 낀 손 너머로 사내를 바라보는 데메트리안의 눈동자가 날카로이 빛났다.
“너희들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사내의 눈빛이 더욱 흉흉해졌다. 어쩌면 절박함과 절망감이 뒤섞인 듯도 했다.
그 앞에서 데메트리안의 말투는 퍽 태연하게 울렸다.
“그렇게 줄어든 인원으로 겹그믐의 날 지령을 수행하다가 진압되어 앵프리종에서 종신형을 사느냐. 아니면 너희를 진압할 나와 말을 맞춰서 노력하였으나 안타깝게도 실패하고 목숨만은 보전받아 귀국하느냐.”
“…….”
“아, 왕자에겐 안타깝게도 말이지.”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건지 잘, 그런 말이 더 이상 무용함을 사내는 알았다. 마른침을 삼키는 목구멍이 턱턱 막혀 왔다.
그걸 말하는 데메트리안 역시, 초연한 낯빛을 해 보였지만 속으로는 꽤나 긴장해 있었다.
모든 정황이 제 가설을 뒷받침하기야 했지만 아직 결정적인 증거는 못 구한 탓이었다.
하나 그런 때면 클로에의 울먹이는 눈동자가 떠올라 저를 채찍질하는 것이었다.
‘모든 경우의 수를 다 혼자 생각해 놓고, 안전하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에야 움직이는 거.’
그래, 언제까지 그 백 퍼센트짜리 확신을 기다릴 수만은 없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고, 또, 더 이상 머뭇대지 않기로 정했으니까.
하지 않았음을 후회하는 일은 지난 시간에 실컷 해 보았다.
깍지 껴 둔 손에 힘을 꾸욱 주며, 데메트리안은 다음 말을 뱉었다.
“스칸다르는 독립할 수 없다. 겹그믐의 날 작전은 어떻게든 실패할 테니까.”
“…….”
“그렇다면 분리 독립파는 멸절하겠지.”
사내의 속절없이 흔들리는 눈동자에서, 데메트리안은 제 소소한 도박이 성공했음을 확신했다.
***
라크루아의 작은 마차가 낮 시간에 황궁으로 향한 건 퍽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간 데메트리안과의 어색함 때문에 발길을 끊었던 탓이었다.
점심시간을 막 지난 시간의 외궁 앞에는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네들에게 고티유 행정을 총괄하는 라크루아의 마차가 전혀 어색한 것이 아니어서, 거기서 나타난 라크루아 영애를 본 이들은 그러려니 고개를 주억이며 지나갈 뿐이었다.
얼마 전 일어난 대형 사건에 제가 휘말렸지만 아는 이 하나 없음이 확실했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클로에에게 미라벨이 장난스레 말을 붙였다.
“이야, 제도민들 아무도 우리 로이가 몸 바쳐서 큰 사건 해결한 건 모르나 보네? 열심히 기른 머리까지 바쳤는데.”
“라비!”
클로에가 작게 외치자 미라벨이 쿡쿡 웃었다. 그렇게 농담처럼 말해도, 그 일에 대해 뼈저리게 아파한 미라벨이었다.
“괜스레 오랜만에 오는 것 같다. 하긴, 탄신연이 벌써 3주 전이라서 그런가?”
미라벨의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주억이며 외궁의 전경을 둘러보았다.
‘낮에 온 건 아카데미 갔던 날이 마지막이었지. 데미랑 또 마주칠까 봐 도서관 다음에 들르기로 한 게 벌써 한 달 전인 셈이네…….’
제게 이런 특별한 경험이 일어난 것이 어찌 된 영문인지 알고자 책을 탐독하던 시절도, 왠지 모르게 아득했다.
그 신비를 데메트리안도 함께 체험하였고, 그에게 어떤 결의랄 것이 있는 것을 보며 꽤나 안심이 되었다……라고 생각하며 클로에는 조금 아연해졌다.
그래, 어떻게 믿지 않을 수 있겠어.
제가 메리앤을 만나러 온 것을 어떻게 알고 마차 앞을 기웃대던 그가 생각나, 클로에는 원로원이 자리한 외궁의 동편을 바라보았다.
제 제보가 실마리가 되었다면, 꽤나 바쁠 거였다. 그러지 않더라도 분주할 때였고.
‘나는 나대로, 오늘 마무리 지어 보는 거야.’
결연한 발걸음으로 외궁을 통과하여 당도한 중정.
아니나 다를까, 저 멀리 보이는 내궁의 현관 앞 계단을 타고 제가 기대한 인물이 내려오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클로에가 얼마 전 인신매매단 사건의 핵심 인물로 지목한 뷔욘의 호위도 함께였다.
‘에티엔이 별말 없더라니, 별 도움이 안 된 모양이구나.’
그 실망감에 아쉬워하느라, 클로에는 멀리서 저를 알아본 뷔욘의 표정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