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클로에의 선택, 그리고… (5)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그리 말하고는 말없이 차만 마시는 루시엔의 모습에서, 클로에는 모든 답을 알 것 같았다.
‘아니, 정말로 나랑 데미랑 대놓고 엮으려는 거였어?’
그게 창피할 일인지, 불쾌할 일인지, 민망할 일인지 고민할 무렵.
“그분께서 오셨다고? 마, 만찬이라도 들고 가시려는 건가?”
흥분한 소년의 목소리가 소응접실 바깥 복도 저 너머에서 울려왔다.
루시엔의 눈썹이 난처한 듯 처지는 걸 보며, 클로에는 아쉴 첫사랑의 암울한 전망에 애도를 표했다.
***
“말도 안 됩니다!”
예법도 잊고, 황제의 집무실에 앉아 있던 데메트리안이 언성을 높였다. 그와 함께 황제의 부름을 받은 대니얼도 당황한 낯빛을 감춘 채 차만 홀짝일 뿐이었다.
“진정하게, 소공작.”
상석에 앉은 황제는 젊은 관료의 혈기가 곤란하다는 양 고개를 저었다.
제국 최고 권력자의 권유를 가장한 명령에도, 데메트리안은 무릎 위로 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대니얼은 그가 그토록 흥분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아마, 라크루아 영애가 위험했기 때문이겠지…….
“아직도 그들의 수중에 남은 제국민이 무려 마흔이 넘습니다. 그 기사의 얼굴만 확인하고 나면, 스칸다르 왕실도 정당한 요구였음을 인정할 것입니다. 모든 정황이 왕실저를 가리키고 있는데, 곧 귀국하니 내버려 두라니요?”
그는 분을 삭이지 못해, 불경하게도 황제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클로에가 다쳤던 그 순간과, 클로에가 잔뜩 심각한 얼굴로 그 기사의 정체를 알려주던 소응접실의 그 풍경이 데메트리안의 뇌리에 선연했다.
그곳에서 체포된 이들은 모두 분리 독립파였다. 그들이 피해자들을 유인하는 데 사용한 것은 스칸다르에서만 나는 약초를 담배와 배합한 거였다.
여기까지가 공식적으로 발표된 사실.
그리고 그들의 우두머리가 스칸다르의 왕자의 측근이다.
이 사실만 증명한다면, 지난 분리 독립파의 소행들을 재수사하는 것은 물론이요 왕자의 발도 묶을 수 있는 일이었다.
왕자의 비행을 확인하여 스칸다르가 독립 협상을 벌일 엄두도 못 내게 한다면, 그 역시 나쁘지 않은 귀결이리라.
마지막 보루가 있기야 했지만…….
‘당연히 윤허해 주실 줄 알았는데!’
데메트리안이 대니얼과 함께 득의양양하게 황제의 집무실에 들어선 것이 불과 30분도 채 안 된 일이었다.
뷔욘의 기사가 인신매매단의 우두머리라는 제보를 받았다며, 그와 결투한 파이겐이 확인할 수 있도록 치외법권인 왕실저의 수색 영장을 내 달라고 청한 참이었다.
‘지난 반년간 출입 기록을 다 살폈는데, 그때 마도구상으로 위장해 들어온 이들 말고는 스칸다르인이 더 이상 없었어. 스칸다르와 연결되는 포털을 사용한 이 또한 없고.’
한둘쯤 신분을 속이고 제도를 빠져나갔을 수야 있겠지만, 그럴 확률은 희박했다. 무엇보다 마법사가 납치한 이들을 데리고 갔기에, 오히려 발목을 잡을 거라는 라구의 해석도 있었다.
‘순간이동 마법을 걸 때는 시전 대상의 부피와 그 거리에 비례해서 마력이 소모돼요. 마력 자체가 많이 드는 건 아니지만 모든 입자를 같은 속도로 동일한 장소에 보내야 하니 집중력이 필요해서 체력도 문제죠. 보통의 마법사라면 그만한 부피를 최소 열몇 개는 보낸다 했을 때 1지구를 벗어나게 하기도 힘들 거예요. 며칠은 걸려야 제도를 빠져나갈걸요?’
그들이 빼돌린 사람 우리의 개수를 생각하면 하루 이틀 사이에 제도 밖으로 나가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새로운 아지트를 제도 내에서 찾지는 못했지만, 덕분에 그들이 아직 제도를 벗어나지 않았을 거란 가정을 할 수 있었다.
‘그 정도의 대용량 마법이 제도 내에서 시전된다면 분명 황실 마법사단에서 알아차렸을 겁니다. 그들이 재수 없기는 해도, 실력만은 인정해 줘야 하니까요.’
그래서 데메트리안은 황제의 나팔을 하나 더 써서 황실 마법사단에 당분간 고티유 내에 대량의 마력 반응이 발생하는지 감시해 달라고 요청한 차였다.
‘그 정도는 별도의 요청이 없어도 마법사단의 명예를 걸고 당연히 파악할 일이오.’
마법사단장은 지난번 구휼 기금 건 때문에 데메트리안을 꺼리는 기색이면서도, 그때 체면 상한 것을 만회해 보이겠다는지 꽤나 결의에 차서 받아들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제도 내에서 그 정도의 대규모 마력 반응이 보고된 일은 없었다. 그래서 수사단은 인신매매단이 아직 제도에 남아 있을 거라 확신했다.
스칸다르의 왕자를 심문한다면 어디가 그들의 아지트인지 알아내는 건 시간문제일 거였고. 다만…….
“그 애가 이미 귀국 일정까지 보고했다. 증거도 없이 단순히 심증만으로 왕실저의 인물을 수사하겠다고 하면,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이냐? 아무리 나라지만 물증이 필요한 법이니.”
꽤나 완고하게 구는 황제의 말에, 데메트리안은 어금니만 사리물었다.
하지만 그 제보의 출처에 관해서는, 데메트리안은 똑바로 말할 수 없었다.
‘그 출처가 로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야.’
라크루아의 영애가 뷔욘 스칸다르의 기사와 안면이 있다고 언급한다면 꽤나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불쾌하긴 해도…… 근래에 두 사람이 친밀하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으니까.
반대로, 파이겐이 그와 칼을 맞댄 이가 왕자의 호위랑 닮았다고 증언하는 것은 왕자 측에서 저를 음해하는 거라 반발할 가능성이 컸다.
‘왕자가 워낙에 두문불출해서 그 호위 얼굴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는 게 문제야. 그렇다고 로이 핑계를 댔다가는 온전히 회복하지도 못한 애를 오라 가라 하게 될 텐데. 혹시 스칸다르 왕자의 귀에 들어가면 로이가 더 곤란해질 테고…….’
그건 그것대로, 큰마음 먹고 제보해 준 그녀에게 짐이 되는 법. 물론 클로에가 온전히 회복한 지 꽤 되었고 그녀 나름대로의 각오도 있었지만, 죄책감은 종종 객관성을 잃게 하는 법이었다.
이럴 줄 알고 왕자는 성인이 되고서 사교계 활동을 안 했나, 일부러 그 호위를 늘 존재감 없게 만들고 다녔나.
그런 추측이 그의 안색을 붉으락푸르락하게 만들었다.
평소와 달리 차분히 굴지 못하는 그의 낯을 살피며, 대니얼은 차갑게 금안을 가라앉혔다.
‘아바마마께서는 스칸다르 부왕과 호형호제하시며 잘 지내는 척을 하시지만, 결국 그들을 도발하고 싶지 않으신 거지. 실은 그 왕자가 이런저런 일에 연루돼 있는 걸 이미 알고 계시는지도…….’
대니얼이 슬며시 눈동자를 굴려 황제를 쳐다보았다. 상석에 팔짱을 끼고서 앉아 있는 그의 부황은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을 완고하게 굳혀 두었을 뿐이었다.
“알겠습니다. 정공법으로, 납치된 이들을 찾는 게 우선이겠군요.”
“야, 아니, 전하……!”
“경에겐 황제의 나팔이 있지 않나. 경시청에 추가 지원을 요구하면 되는 일일세.”
“…….”
그러니까, 시간이 없다고……. 데메트리안은 억울한 낯으로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대니얼은 그런 그의 기색을 모른 체했다. 빤히 보이는 걸 모른 체하는 게 꽤나 마음이 미안한 일이기야 했지만…….
황제가 개인적인 지령을 성실히 수행하는 크레벨의 후계자를 꽤나 마음에 들어 했음이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무례가 얼버무려질 수 없었으리라.
***
「미아에게.
지난 연휴 때 정말 놀랐지? 네 걱정 덕에 씻은 듯이 나았어. 마지막 며칠을 너와 함께하지 못한 사죄의 마음으로, 이번 주 숲의 날에 너를 만나러 가도 괜찮을까?
너의 벗, 클로에 라크루아.」
클로에는 메리앤에게 방문하겠다는 편지를 보내 놓고도, 제가 잘하는 짓인지 알지 못해 심란했다.
루시엔으로부터 스칸다르의 왕이 와병 중이라는 확언을 들었을 때도, 메리앤을 만나기 위해 내일 입궁하겠다는 이야기를 어머니께 말씀드리는 그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왕자님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것이, 그래도 의미 있는 일일까……?’
시간을 거스르기 전의 913년 7월 둘째 주 숲의 날에는, 단순히 메리앤이 태양절 연휴 때 빌려주고 간 책을 돌려주기 위해 입궁했더랬다.
하지만 ‘이번’에는 메리앤이 바깥에서 놀 생각 만만이어서 갖고 나온 책이 없었으니, 전혀 다른 용건을 만든 것이었다.
메리앤을 만나러 가는 길, 내궁으로 향하는 중정에서 클로에는 마지막으로 뷔욘을 만나게 될 예정이었다.
마지막으로…….
몇 달 전이었다면 제가 기억하는 그때와 동일하게 행동하여 미래 부군의 마음을 사로잡겠답시고 기꺼이 출동했을 일이었다.
어차피 저는, 스칸다르에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간 새로이 접한 정보들을 통해 클로에에게는 새로운 고민이 쌓였다.
‘네 계획. 그걸 우선 알고 싶어.’
‘네가 그 시절을 어떻게 추억하는지, 그것만 알려줘. 기다리고 있을게.’
그가 지연한 대답은 결국 일종의 수락이었다.
데메트리안이 저를 잘못 봤을 리는 없었다. 그 영리한 이가, 평생을 가장 가까이 둔 저에 대해서 모르는 게 있을 리가.
행복했느냐고 묻는다면, 클로에는 대번에 이런 답을 떠올리게 되었다.
‘아르투젠을 떠나고 싶었던 적은 사실 단 한 번도 없었어…….’
처음 스무 살로 돌아오고서 대축연 주간을 지냈을 때, 클로에는 모든 것이 너무 좋았다.
미라벨과 속 이야기를 마음껏 떠들 수 있는 일상이, 나가고 싶은 때 외출할 수 있는 것이, 대축연에 갔더니 모두가 제게 살갑게 말 걸어 주는 고티유의 사교계가.
외로운 줄 몰랐지만 외로웠었고, 그렇게까지 그리운 줄 몰랐으나 속절없이 그리웠었다.
‘가고 싶어서 가려는 게 아니야. 갈 수밖에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한 거지…….’
기실 아르투젠의 고위 귀족가 영애들에게는 다른 삶을 상상할 기회란 전무했다.
‘집에 안 갈래! 데미랑 결혼해서 데미랑 더 놀래!’
‘클로에 미안, 어쩌니. 데메트리안은 캄포의 공녀님이랑 결혼해야 해.’
‘그, 그럼 저는요, 부인?’
‘우리 클로에는, 어느 나라 멋진 왕자님이나, 다른 가문의 멋진 영식과 결혼하지 않을까?’
그렇게 정해진 것이 스칸다르 왕실이었다. 오래간 기대해 온 대로 제 남은 일생을 그 일원으로 살아갈 곳이 생겼으니 그곳의 법도에 따랐다.
외로웠지만 외국인이니 어쩔 수 없었고, 곁에 다가오는 이 없었으나 정실 자리가 비었대도 후비란 신분이 응당 그러했다.
거기에 제 판단은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라크루아를 떼고 저만을 놓고 생각해 본다면…….
‘분명히 내가 스칸다르에 가지 않을 수 있는 미래라고 했지.’
하지만, 운명의 수레바퀴가 똑같이 흘러간다면 언젠가 클로에는 스칸다르에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아니면 정말로 그 정략혼에 쓰일 만한 이는 없어.’
그건 일종의 도피가 아닐까. 제가 행복해지지 못할 걸 알아 피하는 것이라 합리화해도, 저 대신 가게 될 아르투젠의 영애 누구나 일정량 불행해질 수밖에 없단 생각에 이르게 되면,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렇다면.
‘데미의 계획이, 반드시 성배랑 연관이 있는 거여야만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