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클로에의 선택, 그리고… (4)
크레벨 소공작도 아니면서 커다란 꽃다발에, 오리포네산 고급 찻잎이며 건강에 좋다는 캄포산 벌꿀이며, 선물 공세가 평범 이상이었다.
아주 해맑으신데, 저거 진심이야?
선물하는 배포가 뭐 이리 커? 돈 많다고 유세 부리는 건가?
웃으면서 입에 칼 문 이들 많은 게 사교계라던데, 혹시 대공녀도 그 짝 아니야?
로망스로 사교계를 익힌 하녀들은 혼란에 빠진 채 소응접실로 티 트레이와 다구를 날랐다.
“어머, 저도 실키웨이 좋아하는데. 여기서 만나니 반갑네요.”
“어머니께서 드시던 거라 저도 자연히 좋아하게 되었어요.”
루시엔의 해사한 미소에 클로에는 절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너머에는 이 꿍꿍이 가득한 소녀가 도대체 무슨 의도로 제집에까지 찾아왔는지에 대한 의문을 숨겨 둔 채였다.
이는 일종의 호기심이었다. 클로에가 루시엔의 호의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녀와의 교류를 즐겁게 생각하는 한편으로,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에 최소한 두 개의 의도가 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누아제트 영애께서는.”
“아, 일이 있어서…… 오늘은 바깥에서 바쁘네요.”
그 바깥이란 연무장을 말하는 거였고, 바쁜 건 훈련으로 인한 거였다. 어쨌든 클로에를 위기에 처하게 했던 미라벨은 경호조의 선배들에게 왕창 혼났고, 한편으로 스스로도 자괴감에 빠진 것이었다.
‘라비는 내 명령을 따른 것뿐이야. 내가 다친 건 다 내가 자초한 일이고.’
정말 이것만큼은 미라벨에게 짐 지울 수 없어, 클로에가 강경하게 말해 보았지만 허사였다. 무엇보다 미라벨 본인이 의지가 만만이었다.
‘수련을 좀 더 열심히 했다면, 30분이 아니라 25분 만에 주파할 수 있지 않았을까? 우리 아가씨께서 앞으로도 더 쏘다니실 텐데, 내가 그에 맞춰야지.’
클로에는 제 실수로 인해 미라벨이 곤란해진 것에 대한 미안함 반, 무사로서의 미라벨이 뭔가 결의에 찬 것이 흐뭇한 마음 반으로 슬며시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리고 미라벨이 계속 무사로 지내기 위해서는…….
‘아냐, 그건 지금 생각하지 말자. 내가 스칸다르에 가더라도 라비를 안 데려가면 그만이고.’
클로에는 생각을 털어내기 위해 재빨리 다른 말을 덧붙였다. 티 트레이에 놓인 마카롱과 마들렌을 권하면서였다.
“탄신연 날 주신 선물, 정말 고마웠어요. 덕분에 제 동업자가 굉장히 바빠졌어요.”
“앤지네에서 색유리 세공품을 구하기 위해 수입상들을 종종 찾는다는 얘길 듣고서 짐작하고 있던 차랍니다.”
루시엔이 생긋 웃으며 답했다. 클로에는 역시 그녀에게 숨길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라비가 대공녀 덕분에 저랑 재밌는 데 많이 놀러 다니게 되었다고 꼭 감사 인사 올리고 싶다고 했었는데 말이에요. 제가 워낙에 바깥 외출을 잘 안 했어서요.”
“지난 태양절 연휴 때 나가셨댔죠?”
“예에, 그렇죠.”
나가셨던 그날이 데메트리안의 작전에 휘말려서 다치고 만 그날이었다.
어쨌건 제 부상이나 외출 금지령이 외부에 알려진 일이 아니어서, 클로에는 태연한 낯으로 찻잔에 입을 묻었다. 그걸 바라보는 루시엔의 눈동자가 기민하게 빛났다.
“그때 다치셨다고 들었는데.”
“하하.”
역시 알고 있었네. 어쩐지, 피 많이 흘린 산모들에게 좋다는 말린 해초가 선물로 들어왔다더라니.
클로에가 멋쩍게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자 루시엔이 후후 웃으며 말했다.
“정보 길드 같은 게 없어도 알 수 있는 일이에요. 한들룽 지구에서 거래하는 상인들 중에서는 슈바츠 거리에 사는 이들이 많아서요. 남쪽으로 더 내려가면 한들룽 지구잖아요.”
“거기서 다 소문이 났나 보죠?”
“아무도 뛰쳐나오지 않았대서 다들 몰랐던 건 아니니까요. 크레벨 기사단이 작전을 펼친 거야 다들 알고 있는 거고, 뭐, 아가씨 한 분이 마차에 실려 간 걸 본 이가 있더라고요.”
“그랬구나…….”
“또 태양절 당일에 캔달우드의 공녀님께서 대신전에 다녀가신 것도 일종의 실마리가 되었고요.”
클로에는 민망하게 웃었다. 루시엔의 꿍꿍이를 걱정할 게 아니라, 그녀 앞에서 비밀이 없는 걸 걱정해야 하는 거였다.
“그래서, 쾌차하신 거죠?”
루시엔의 눈동자에 이처럼 걱정의 빛이 떠오르기까지 하는데 말이다.
클로에는 루시엔이 제게 호의를 보이는 것에 날을 세울 이유가, 이제는 더 이상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신성력에 치유력이 있단 것, 혹시 아셨나요? 책에서나 읽던 일인데 제가 경험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루카미오노 님이 워낙에 뛰어난 신성력을 타고나셔서 다행이죠. 후유증은 없으신 거죠?”
“네, 단순한 열상이었는걸요…….”
그리 말하며 클로에는 루시엔의 낯을 살폈다. 혹시 블라테르 약초를 활용한 환각 효과에 관한 것도 그녀가 알고 있을까……?
하지만 루시엔의 낯에 더 특별한 기색이 비치지는 않았다. 한들룽 상인들이 환각제에 관해 상상도 못했던 터라 전한 말이 없어서, 루시엔 또한 그 정도만으로 안심했다.
“지난 탄신연 이후로 사교계에 재미있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 알고 계세요?”
그렇게 안심한 덕분에 루시엔은 마음 놓고 제 용건을 꺼냈다. 그녀가 클로에를 좋아하는 것과 별개로, 제 인생이 걸린 문제였으니까.
“재미있는…… 소문요?”
그 탄신연 이후로 보름이 지났지만, 그 반 이상을 기절해 있거나 외출 금지를 당해 집 안에만 있던 차였다. 클로에는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만 갸우뚱했다. 거기에 이어질 말은 짐작도 못한 채로.
“크레벨과 캄포의 두 혼약자가 쌍으로 예의가 없다는 소문이죠.”
“네?”
“제가 영애의 동생분의 마음을 갖고 논 한편으로, 뻔히 정혼자가 같은 홀 안에 있는데 눈치 없이 첫 춤을 단짝과 추는 걸 보니 크레벨 소공작도 사실은 라크루아 영애와 모종의 관계가 아니냐, 그런 소문요.”
루시엔이 냉소적으로 빈정대는 말에, 클로에는 진즉에 아문 제 뒤통수가 아려 오는 것만 같았다. 이제 와서, 그런 소문이 돈다고?
그리고, 그건 한편으로……
“뭐, 사실이지만요.”
루시엔이 그녀의 낯을 살피며 가만히 덧붙이는 말에, 클로에의 눈동자가 주체할 수 없이 흔들렸다.
‘지금 나랑 데미 관계 의심했다고 인정하는 거지?’
‘크레벨 소공작 일만 연관되면 속을 못 숨기신단 말이지.’
루시엔은 속으로 작게 웃으며 살며시 덧붙였다.
“아, 물론 제 편의 이야기 말이에요.”
아잇, 또. 클로에는 목이 타 찻물을 들이켰다. 루시엔이 아쉴의 마음을 갖고 논 게 맞다고 인정한 건 별일도 아니었던 것이다.
“죄송해요. 영애께 이상한 소문이 붙어서 제가 조금 조급했어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이어지는 루시엔의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갸웃하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이상한…… 소문이라뇨?”
“그, 스칸다르의 왕자와 개인적인 친분이 깊으시다는.”
“아아, 네……. 그게 사실이 아닌 것도 아시죠?”
클로에의 얼굴에 낭패가 스쳤다. 루시엔이 생긋 웃음으로써 클로에를 안심시켜 주었음에도.
멜라니의 말에 의하면 목격한 사람이 한둘이 아닌 양 고티유 사교계에 파다하게 돈 소문이라니, 아무리 교류하는 사람 없는 루시엔이어도 알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소문이 그렇게 난 거지? 우리 애들은 다 밖에다가 말 안 했다고 했는데.’
클로에가 뷔욘의 선물을 착용은커녕 보존조차 안 할 것이라는 이야기에, 스칸다르 왕자파의 수장을 자처하던 폼폼이 탄신연 다음날 납작 엎드려 하소연한 것이었다.
‘아가씨, 저희는 그런 줄도 모르고 감히 내기를 했지 뭐예요.’
‘내기만 했어?’
‘네?’
‘너희가 다른 댁 사용인들과 친하게 지내고 정보 주고받는 거야 당연한 일이지만, 거짓 정보를 밖에다가 흘리면 어떡하니.’
‘……밖에다가요? 저희 이 이야기, 다른 데 절대로 안 하기로 맹세했는데요?’
폼폼은 그길로 저와 내기한 사용인들 하나하나를 붙잡아 물어댔다. 결론은, 다른 댁 사용인과 그것을 공유한 이는 딱히 없음이었다.
아가씨가 두 남성의 구애를 받으심이 기껍기야 했으나, 염문이 함부로 돌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다들 잘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게 어디서 어떻게 소문이 돌았길래 대공녀 귀에까지 들어갈 정도로 파다해진 거지?’
루시엔이 상인들을 통해 흘러드는 사정에야 밝지만, 사교계의 이야기에는 다소 어두울 수밖에 없는데 말이다.
‘대공자에게서 들은 건가?’
클로에가 다시금 고개를 갸웃거릴 무렵이었다.
“영애께서 어떤 분을 마음에 담으시건 제게 왈가왈부할 권리가 없는 걸 알아요.”
왈가왈부하고 싶은 건 맞지만, 그 마음은 숨겨 둔 채 루시엔은 짐짓 호소하는 듯한 목소리를 냈다.
“탄신연 때 보셔서 짐작하시겠지만, 스칸다르의 현왕이 위독해요. 캄포가 스칸다르의 국경을 마주하고 있으니 소식이 빨리 들어와서, 저는 일찍이 알고 있었거든요. 이제는 아르투젠 사교계에도 암암리에 다 알려졌을 테고요.”
“아아, 역시. 괜히 그 왕이 탄신연에 불참한 게 아니군요?”
클로에는 뷔욘이 곧 귀국하고 뒤이어 스칸다르의 현왕이 붕어할…… 그 모든 앞일을 알고 있었지만, 그녀의 말에 순순히 동조해 주었다.
‘내가 이번 주 숲의 날에 메리앤을 만나러 가는 길에 황궁에서 뵈면, 그게 마지막으로 뵙는 걸 테니까…….’
그래서 원래대로 마주치려고 일정을 맞춰 놓기도 했는데, 그걸 정말로 실행할지는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한 차였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행복했어?’
행복하지 않았다면, 그의 호감을 사는 일을 당장에 그만두어야 하는 걸까. 행복했대도, 이미 퍽 가까워졌으니 만족해도 되지 않을까.
그녀의 심란한 표정을 어떻게 여겼는지 루시엔이 입꼬리를 들어 올려 방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스칸다르 왕자는 곧 귀국하게 될 건데, 그와 소문이 돌면 영애께 안 좋은 일이잖아요.”
“……별 사이가 아닌데 소문이 그리 나서 곤란하기야 했죠.”
“보통 소문은 남겨진 이만 괴로운 일이라더군요. 혹여 스칸다르의 왕자께서 첫 춤을 신청하시기라도 하면 곤란하시니까, 제가 피하실 수 있게 해 드리려고…….”
그리 말하는 루시엔의 눈동자가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클로에는 그녀의 속내가 당황스러운 것과 별개로 거기에 그녀의 진심이 별로 섞여 있지 않음을 직감했다.
“어린 저와 그 혼약을 지키시려면 3년은 더 기다리셔야 할 텐데, 그분도 참 고루하셔라. 안 그런가요?”
“그걸 잃기 싫어서…… 아버지의 맹세를 못 깰 정도로요.”
크레벨과의 정혼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듯한 뉘앙스를 줄곧 풍겨 온 루시엔. 그런 그녀를 보며, 그녀가 데메트리안과 불화하는 미래를 알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짐작했었지만…….
‘만일 그렇다면, 내가 스칸다르에 갈 수밖에 없는 걸 모를 리가 없으니까…… 정말로 대공녀는 미래의 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지.’
오래간 루시엔에 대해 갖고 있는 오해가 있었다. 그녀의 존재만으로.
그 덕에 그녀가 보이는 호의를 의심했고, 그 의심이 지금도 완벽히 해소된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확실한 것은, 루시엔이 미래의 무엇을 알아서 저를 이용하려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물론, 아주 이용하지 않으려는 건 아닌 듯하지만…….’
아, 혹시 그래서. 루시엔의의 까만 눈동자에 희미한 흥분이 깃든 것에, 클로에는 갑작스레 떠오르는 바가 있었다.
“혹시. 그것도 선물이었을까요?”
루시엔의 목표가 정혼에 대해 불만이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었다면.
줄곧 데메트리안과 제가 친한 것을 다 알고 있다는 양 말하던 그녀가, 일부러 저 자신을 휘말리게 한 거라면.
제 어린 지인은 한 가지 행동에 최소 두 가지의 의도를 깔아 두는 이였으니까.
“제가, 그러니까 마음 놓고 소공작이랑 춤출 수 있게…….”
루시엔의 입매가 비대칭적으로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