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클로에의 선택, 그리고… (3)
“미안해 정말.”
“…….”
“네가 지키라고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데메트리안의 시선은 여전히 제가 만지작대고 있는 클로에의 손등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것처럼 느껴졌을까. 클로에는 제가 듣는 고해가 부당한 방향을 취하고 있다 생각했다. 불편한 마음에 얼굴이 다시금 달아올랐다.
“그동안 후회 많이 했어.”
그의 흐려진 낯을 보자면, 그가 말하는 ‘그동안’이 지난주 사고 때부터는 아닐 것이 자명했다.
아이펠의 장원에서 함께 승마한 그날부터도, 역시 아닐 거였다.
그것이 함의하는 세월이 어찌나 깊을지…… 클로에는 마른침을 삼켰다.
“셰비크에 갔었어.”
“뭐?”
놀란 클로에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데메트리안은 여전히 클로에의 손톱 끝과 제 엄지 밑의 보들보들한 살결만 살필 뿐이었다.
“917년 4월이었어. 알로제 영애도, 루카도…… 네 리도테 시절의 친구들이나 다과회 지인들도 너에게서 답을 받지 못했대서, 네게 무슨 일이 생긴 줄만 알았어. 그래서 네가 괜찮은지, 확인해 보고 싶었거든.”
아무 편지도 받지 못해 쓸쓸했던 그간의 뒷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듣자니 다시금 충격이었다. 탄신연 때 그가 지나가듯 건넨 말에서도 알았지만…….
제게 연락 한 번 없던 고티유 사교계의 인사들이 야속해 사교계 활동도 꺼리고 있던 참이 아니던가.
그럼에도 제게 늘 초대장을 보내 주는 부인들, 오랜만에 봐도 반가워해 주는 영애들, 자주 못 봐서 서운하다고 말해 주는 멜라니.
클로에 눈동자가 가물가물 어둡게 가라앉았다.
“왕궁에 동대륙 진귀품을 들인다는 상인을 알게 됐어. 그에게 부탁해서 그를 따라 왕궁에 들어가서…… 알현실에서 너를 봤어.”
클로에의 놀란 눈동자가 데메트리안을 향했다.
그 데메트리안 크레벨이, 살면서 아쉬운 소리 한번 해 본 적 없을 사람이 그 상인에게 무얼 부탁했다고……?
데메트리안이 입에 올린 것은 그가 겪은 일 중 극히 일부에 불과했지만, 클로에의 머릿속엔 그가 난생처음으로 행했을 수많은 그답잖은 일들이 스쳤다.
“내가 보기에…… 네가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았어. 난 네가 꿈꾸던 미래를 알고, 네가 행복할 때의 얼굴을 알잖아. 물론 내 판단이 잘못되었을 수 있단 걸, 이제는 알지만…….”
담담하게 말을 이어 가는 데메트리안의 푸른색 눈동자가, 그의 머리칼과 같이 짙은 속눈썹 사이에서 물 먹은 듯 빛났다.
그는 늘 저보다 의젓했기에 클로에는 그가 우는 것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것이 제가 처음으로 목격하는 그의 눈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때, 데미가 거기에.’
4월이면, 계절에 한 번씩 동대륙에 다녀온다는 그 상인이 왕궁에 오던 달이 맞았다. 애초에 그가 제게 거짓을 말할 리도 없겠지만…….
“그래서 후회했어. 네가 가고 싶지 않다고 했을 때, 딱히 의심할 생각조차 못한 채 너를 보내 버린 걸……. 그래서 네가 그때보다는 행복할 수 있도록, 적어도 스칸다르에는 가지 않을 수 있도록 하려고 했어. 네가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다는 걸 모르고서 행복만 누리면 좋을 것 같아서…….”
거기까지 말한 데메트리안은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때는, 그랬다. 제가 줄 수 있는 게 행복이라 생각했다.
그건 제가 클로에를 가장 잘 지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자만과도 동일했다. 결국 손끝에서 놓치고 말아 자괴감을 불러일으키고 만…….
입매에 어스름한 호선을 띄운 채, 다시금 그녀의 손마디를 엄지로 쓸고…… 조심스럽게, 정말로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마침내 그 손끝에 입을 묻은 그것은, 제 고해성사를 완성하는 마침표였다.
클로에의 손끝에서 피어난 그 감촉은 수줍음보다는 가슴을 저미는 슬픔이었다.
그것이 그가 이리도 용서를 구해야 할 일이었을까?
아이펠의 마장에서 제 질문에 대한 답을 피한 거야 잘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먼 옛날 저를 잡지 않은 것은, 그들의 세월에서 너무도 당연한 일 아니었나.
클로에는 그를 마지막으로 만난 이후로 꽤나 오래간 후회했었다.
제 충동적인 감상에 데메트리안에게 허튼 요구를 한 것 같아서. 쓸데없는 마음의 짐을 지운 것 같아서.
‘차라리 편지가 없어서 원망스러우면 원망스러웠지, 그건 정말 데미가 잘못한 게 없는 일인데.’
한편으로 그의 그 깊은 후회 너머에 자리한 감정이 무엇인지 알 것만 같았다.
그는 언젠가부터 저를…….
“너는 어떻게 생각해, 행복했어?”
그의 말소리가 손끝에서 울렸다. 애써 산뜻하게 꾸며낸 말투였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제 고해를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물기 없는 그의 눈에 자리한 것은 깊은 열망이었다.
“무엇도 넘겨짚지 않을게. 네가 행복했다고도, 행복하지 않았다고도.”
“나는……”
클로에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걸 올려다보는 데메트리안의 낯이 어딘가 애달파 보였다. 특정한 답을 바라는 마음이 진하게 깃들어 있는 걸 모른 체할 수 없었다.
그 답을 거의 목구멍까지 올렸다가, 클로에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나는 잘 모르겠어.”
그걸 말하는 순간 분명 모든 것을 돌이킬 수 없게 될 거였다.
그것이 제게 좋은 방향이고 아니고를 떠나, 클로에는 당장에 무언가를 선택한다는 것이 두려웠다.
그 선택은 데메트리안의 절박함에 휩쓸린 것일 테니까.
그에 속절없이 휩쓸려도 무방하겠으나, 저는 기실 그에게 평생을 휘둘린 차였다.
늘 제가 먼저 찾아갔고, 늘 제가 공작저에 놀러 갔고, 그의 편의와 관심사에 맞추고, 언제나 그를 생각했다. 붙잡아 달라 청한 것 또한 저 자신이었다.
게다가 그 선택을 위해서는, 뷔욘과의 일을 정리해야…….
그런 모든 혼란이 클로에의 낯에 선연히 드러나 있었다.
데메트리안은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다. 몇 번을 말해도 제가 느끼는 후회와 미안함을 이루 다 말할 수 없겠으나, 그 일부라도 사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라면 분명히 무슨 답을 들려줄 것이다.
제가 원하는 답이 아니어도 괜찮을 거였다. 그는 이미 그녀의 사랑을 받기를 단념했었으니까.
무슨 답이 되었든 그게, 그녀의 선택이기만 하다면야. 그리고 행복하기만 하다면야…….
‘로이가 답을 줄 때까지 후회 없도록 노력하면 되는 일이야.’
무언가를 바란 대로 쟁취하는 것은 그의 인생이었다. 그때 스칸다르의 사절에 선발되지 못한 것을 빼고는…….
그 끝에 두 번째 실패를 겪어 독신의 크레벨 공작이 된대도, 스칸다르의 대사는 못 돼도 스칸다르에 주기적으로 갈 수 있는 사절이 되면 그만이었다. 스칸다르를 오가는 상단을 꾸릴 수도 있었다. 오히려 원로원 의장직을 잇지 않아도 된다면 그게 나름대로 다행 아니겠는가.
그의 얼굴에 굉장히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거기에는 일종의 씁쓸함이 담겨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아주 실망한 기색도 아니었다.
클로에는 제가 답을 하지 못한 게 그를 실망시키지 않았음에 안심했다.
그리고 그녀는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답을 꺼냈다. 데메트리안을 만나기로 하고서부터, 아니, 제가 슈바츠 거리 외곽의 건물에서 정신을 잃기 전부터 입에 물고 있던 말이었다.
“……그분의 호위야.”
데메트리안의 눈동자가 이채를 띠었다. 누구, 그리 묻는 듯했다.
“파이겐 경이랑 싸우던 자 말야. 왕자님의 호위야.”
***
궁정백저에서 나온 데메트리안은 그대로 황궁으로 돌아갔다. 오늘 비번인 대니얼이 번외 업무를 보고 있는 황자궁의 집무실이 목적지였다.
“아직 출입국 내역 정리 다 안 됐는데, 무슨 일이야?”
대니얼의 집무실에 들어선 그대로, 데메트리안은 대답도 않고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그의 책상을 짚고 눈을 맞추는 그의 표정이 결연했다.
“왕자가 연루돼 있어.”
“왕자? ……뷔욘 왕자?”
미끈한 대니얼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얼마 전 인신매매단을 쫓던 데메트리안은 아끼던 황제의 나팔 한 개를 제3기사단에 썼다. 대니얼을 신뢰하는 한편으로, 인신매매단이 스칸다르인들로 구성돼 있으니 도망친 이들이 제도를 빠져나가는지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클로에를 치료하기 위해 떠난 뒤, 파이겐과 크레벨의 기사단이 현장을 정리하여 폭음을 듣고 달려온 경시청에게 생포한 이들을 넘겼다. 기사단의 발목을 잡으려 애썼던 그들은 모두 분리 독립파였다.
다만 그들이 전투를 벌이던 꼭대기 층에서는 아무도 생포하지 못했다. 벽이 무너지며 떨어진 클로에를 수습하는 틈을 타, 목숨만 간신히 붙어 있던 스칸다르의 기사들이 폭탄을 던지던 분리 독립파와 함께 도망친 것이었다.
‘영악한 놈들인 게, 도망치는 와중에도 그 폭탄에 맞은 기사의 검을 챙겨서 달아났습니다. 스칸다르산 검인 게 들통나면 불리해지는 걸 빤히 안 게죠.’
가장 큰 문제는…… 건물 층층마다 들어차 있던 우리의 절반 이상이 사라진 것이었다. 생포한 인원을 경시청으로 호송하는 사이, 해당 건물을 크레벨의 기사들이 지키고 있었는데도 일어난 일이었다. 마법사가 그들의 한패임이 확실하여 단단히 경계했지만, 워낙에 순식간이었다.
‘귀신을 본 줄 알았어요!’
‘백발이었지, 응? 아마 펍 주인들이 말하던 여자가 마법사가 맞았나 봐요.’
마력이 달렸는지 다 이동시키진 못했어도, 그 정도로도 이미 충분히 그 마력이 꽤나 강력했다. 데메트리안은 조만간 라구를 다시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 경시청은 그 우리들이 보관될 수 있을 만큼 큰 폐건물을 찾기 위해 바쁜 상태였다.
“증거는?”
“증거는…… 왕자를 만나면 알 수 있어.”
머릿속으로 무언가를 가늠하는 듯,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데메트리안이 말했다.
‘얼굴에 있던 흉이 사라져서 몰랐는데, 그때도 파이겐 경에게 당했던 모양이지? 분명 두건을 벗기면 머리칼이 연두색일 거야.’
원래도 파이겐에게 얼굴이 그였던 그는 또다시 얼굴에 상처를 입은 차였다. 그러니 클로에가 나서지 않아도, 검격을 주고받으며 한참 얼굴을 맞댄 파이겐이 충분히 알아볼 수 있을 거였다.
분리 독립파의 배후에 스칸다르의 왕자가 있는 것이야 알고 있었지만, 증거가 없어서 왕실저를 들쑤시지 못하던 차였으니 더없이 잘된 일이었다.
“왕실저는 치외법권이긴 하니까…….”
“폐하께서 내리시는 수색령으로는 수사할 수 있지.”
“아바마마께 아뢰 달라는 거지? 황제의 나팔이 황자에게는 안 통하지만, 특별히 사랑과 관심으로 수락해 드리지.”
데메트리안의 눈이 의욕에 차서 빛났다.
***
「앰버 귀하.
못 뵌 지 오래되어 연락드립니다. 빌려드린 것들을 받을 겸 뵙고 싶은데, 혹 초대받는 영광을 얻을 수 있을까요?
루비 드림.」
클로에가 루시엔의 서신을 받은 것은 그날 오후의 일이었다.
마치 제 외출 금지가 풀린 것을 알았다는 듯이 날아온 편지에 클로에는 실소를 머금었다.
‘대공녀라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도 남을 것 같단 말이지…….’
제 영민하고 의뭉스러운 지인의 수완을 떠올리며 클로에는 작게 어깨를 떨었다.
루시엔은 바로 이튿날 궁정백저에 방문했다. 이번 주 숲의 날을 제외한 아무 때라도 좋다고 쓴 답신에, 당장 내일 오겠다는 답이 돌아온 거였다.
궁정백저의 사용인들은 다시금 뒤집어졌다.
황제의 조카라는 캔달우드의 공녀님이 다녀간 게 고작 지난주였다. 1년에 한 번꼴로 오시는 분이심에도 신기하고 황송하였는데, 심지어 이번에는 캄포의 대공녀라신다.
마찬가지로 황제의 조카이기야 하셨지만 한편으로 크레벨 소공작의 정혼자이신 그분.
클로에의 짝을 두고 크레벨 소공작파와 스칸다르 왕자파로 나뉘어 싸우던 사용인들에게는 새로운 논쟁거리가 생겼다. 캄포의 대공녀가 패악을 부릴 것인지, 아닌지.
거기에는 이미 캄포의 대공녀가 제 정혼자의 소꿉친구를 경계한다는 것이 대전제로 깔려 있었다.
“일전에도 편지가 왔었잖아. 경고성 편지였던 거 아닐까?”
“그래도 우리 아가씨께서 연배가 더 많으실 텐데, 그리 무지막지하게 굴려고?”
“아가씨께도 드디어 적이 생기나…….”
그네들이 탄신연에서 있었던 일이나 아쉴의 상사병에 대해 알았더라면 그러지 않았을 테지만…….
“좋은 오후입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영애.”
그렇기에 루시엔이 호의 한가득인 미소를 얼굴에 띄운 채 현관에 들어섰을 때, 사용인들의 낯은 물음표로 가득 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