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클로에의 선택, 그리고… (2)
클로에가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제 곁에 엎드려 있는 미라벨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위로 드리워진, 기울어진 달그림자.
그것을 따라 시선을 움직이니 창가에 기대어 있는 데메트리안의 모습이 보였다.
며칠간의 노곤함을 견딜 수 없었는지 그는 쓰러질 듯 기울어져 있었다.
씻기야 했지만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머리칼과 전투의 흔적만을 간신히 지운 얼굴, 신전의 것을 대충 빌려 입은 옷차림.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흐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그가 내내 그 모양으로 그곳에 있었을 거란 직감이 들었다.
「어제는 악몽을 꿔서 그랬어.」
클로에는 저도 모르게 몇 달 전 받았던 그의 글씨를 떠올렸다.
제가, 아니 저들이 이 시간으로 돌아오자마자 그가 그녀에게 서술했던 그의 감정.
그토록 감정을 드러낸 적 없던 이가.
악몽이라고 했다. 저와 같은 시간을 겪다 돌아온 그는 그 경험을 그리 말했다.
***
데메트리안이 그다음으로 궁정백저를 찾은 것은, 클로에가 깨어나고서 꼬박 일주일 뒤의 일이었다. 클로에가 깨어난 그날 곧바로 귀가했기에 일주일 만에 보는 것이었다.
라크루아의 손님인 캔달우드의 공녀가 매일같이 신전에 드나들 기세였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간 데메트리안은 경시청과 군부를 오가며 그날의 일에 대한 후속 수사를 진행했다. 이전에는 그들의 뒤꽁무니만 간신히 잡았다가 놓쳐 버리고 말았었는데, 이번에는 그들이 스칸다르인으로 이뤄진 범죄 단체라는 것과 그 수법까지는 알게 되어 꽤나 처리할 일이 많았다.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일주일간 클로에를 찾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클로에 라크루아. 호위를 따돌리고 스스로를 위험에 처하게 하다니, 주군으로서 실격이다. 네 행동거지의 무게를 충분히 인지할 때까지 외출 금지야.’
신전을 떠나는 날까지 루카미오노가 신성력을 쏟아부어 준 덕분에 상처가 무사히 아물었고 구빈원 의원의 걱정도 기우에 그치기야 했으나, 궁정백 부부가 저들의 딸에게 외출 금지령을 내린 것이었다.
공식적으로야 난생처음 있는 둘째의 일탈에 궁정백 부부는 그 정도로만 화내는 것을 택했다,
자연히 손님의 방문도 금지되었다. 최근 클로에를 찾던 인물이 라이언밖에 없는 걸 생각하면 이는 데메트리안을 겨냥한 처분이었다.
[공자님, 이제 로이 손님 맞아도 된대요.]
그날 오전, 클로에의 통신구로 미라벨이 대신 보낸 전언이었다.
데메트리안은 그길로 하던 일을 대강 정리하고, 곧바로 궁정백저로 마차를 달렸다.
언제 연락이 올지 몰라 마력 충전이 간당간당하던 통신구를 라구에게 보내고, 일전의 화원에 들러 또 한 번 꽃 무더기를 사 들고서였다.
시내에서 궁정백저까지는 마차로 30분도 안 걸리는 거리였지만, 그 시간 내내 데메트리안은 초조한 마음을 삼켰다.
‘왜 누아제트 영애가 통신을 보냈지? 별일 없는 거겠지? 완전히 나은 거겠지? 후유증이라도 있는 걸까?’
슈바츠 거리의 작전을 수행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제가 이런 마음으로 궁정백저에 향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이번 작전에 성공하고 나면, 성심성의껏 클로에에게 다가갈 요량이었다.
대축연 때 정혼에 관심 없는 티를 내던 캄포 대공녀의 행동이 용기를 주었고, 클로에에게 묘한 집착을 보이던 스칸다르의 왕자가 오기를 선사했다.
두 사람이 이제는 사라진 시간에 제게 어찌나 큰 고통을 줬는지 돌이켜 보면 퍽 고마운 일이었다.
특히, 벌써부터 혼약을 깨고 싶은 티를 선연히 드러내고 있는 캄포의 대공녀. 그럼에도 그녀에 대한 생리적인 거리낌이 사라지기란 힘든 일이었지만…….
덕분에 모든 일을 마치고서 지금과 다른 의미의 조마조마함을 안고 클로에를 만나러 가려고 했었다.
마차 안에 클로에가 좋아하는 여름 꽃을 싣고서, 그녀가 좋아하는 제도 서편의 달레냐 숲에 가 많고도 많은 용서를 구하고 싶었는데.
「어제는 악몽을 꿔서 그랬어.」
악몽. 그래, 그 시간을 악몽이라고 규정해 놓고.
다시 깨어났으니 다시는 후회하지 않겠다고 다짐해 놓고.
다시는 때를 놓치지 않겠다고, 그렇게 다짐해 놓고…… 또 어리석게 후회할 뻔했다.
다시는 놓치지 않는다.
데메트리안은 옆에 내려 둔 손에 힘을 꾸욱 쥐었다. 클로에에게 선물하기 위해 화원에서 사 온 해바라기 꽃다발을 쥐고 있는 손이었다.
오랜만에 방문한 라크루아의 소응접실이었다.
지난주 궁정백부인에게 고해성사하던 1층의 응접실이 아니어서, 데메트리안은 마음이 한결 편했다.
제가 이 응접실에 올 때면 늘 앉는 자리에 앉아 클로에를 기다렸다. 문에서 가까운 자리.
신전에서 봤던 모습과 달리 생생히 움직이는 모습을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하니 설레면서도, 그녀가 그 어떤 종류의 후유증에라도 시달리고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건 빼도 박도 못할 제 책임이었으니까…….
그런 초조한 마음을 잊기 위해, 데메트리안은 활짝 열어 둔 창문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키 높은 정원수에 바람이 스치는 초여름의 정경이었다.
올해로 돌아오고서 새벽같이 클로에를 찾아왔던 그날. 데메트리안은 그 창가에 서서 정원수의 가지 사이사이에 움트는 새싹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시선은 그쪽에 두었지만 기실 그는 전혀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겨우내 헐벗었던 나무에 그처럼 새싹이 올라오던 초봄, 충동적으로 셰비크로 떠났던 일. 그리고 거기서 맞닥뜨린 그녀의 인형 같은 미소…….
그렇다면, 정말로 시간을 거스른 거라면…… 제가 보길 바라마지 않던 그녀의 생생한 표정들을 볼 수 있는 것일까.
그리 생각하며 기다린 끝에 맞이했던 클로에의 얼굴이,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역시 혼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제 감격에 못 이겨 그것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던 거였지만.
소응접실 안을 둘러보니 또 다른 날의 정경도 자연스레 떠올랐다. 5년 전으로 돌아온 게 저 혼자만인 줄 알고서, 클로에와 오랜만에 독서회를 갖는 게 행복해 죽을 뻔했던 그 4월의 따스한 풍경.
그때 그녀는 얼마나 황당했을까.
‘앙헬라타에 대해서 똑같은 소릴 하니까 헷갈리고 말았잖아.’
데메트리안은 불안한 마음도 잊고 작게 웃었다. 역시 제 아가씨다웠다.
저도, 그녀의 오라비인 에티엔도 따르지 못하는 그 기억력이 제가 기억하는 것과 전혀 다른 그녀의 오늘을 만들었으리라.
‘이번에도 로이가 스칸다르의 여송연이나 물담배의 부작용이 무언지 말해 줘서, 꽤나 도움이 되었고 말야.’
그렇게도 그녀의 생활이, 그녀의 행동이 바뀌고 있었는데.
바뀐 고티유에서의 생활이 그녀의 마음에 썩 들기를 바라는 한편으로, 달라진 저 역시 그녀의 마음에 들기를…….
똑똑.
그때 집사가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며, 기다리던 이가 나타났다.
데메트리안은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뒤돌아보았다.
허둥지둥하는 그의 기색에, 클로에 뒤에 서 있던 집사는 적이 놀랐다. 아가씨의 외박에 크레벨 소공작의 지분이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었으니까.
라크루아의 사용인들에게는 마차 사고가 나는 바람에 근처의 대신전에서 머무르다 온 것으로 되어 있었다. 에르드의 사제들이 신성력으로 사람을 치유하는 것이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라, 사용인들은 클로에가 다쳐서 사제에게 치유받고 왔음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탁, 집사가 문을 닫는 소리를 뒤로 한 채 클로에가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데메트리안의 시선이 바쁘게 움직였다.
저를 간절한 낯으로 바라보는 그의 기색이 낯설면서도, 언젠가부터 그가 저를 그리 대할 것을 너무도 자연스레 알고 있었다. 클로에는 말없이 방을 빙 둘러, 데메트리안의 맞은편에 앉았다.
데메트리안은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한 채 그녀의 얼굴만 멀거니 바라보며 엉거주춤 앉았다.
라크루아의 하녀들이 티 트레이와 다구를 두고 빠져나갈 때까지, 두 사람 사이엔 침묵만 흘렀다.
‘왜 입을 안 열지……?’
그러는 사이 데메트리안은 혹여라도 그녀가 다친 곳이 잘못되어 실어증에 걸린 건 아닌지 전전긍긍하게 되었다. 그런 그의 기색이 못내 부담스러워, 클로에는 애꿎은 화병만 노려보았다.
거기에는 데메트리안이 클로에에게 선물하려고 가져온 해바라기 무더기의 일부가 장식돼 있었다.
클로에의 입술이 달싹였다.
“바쁠 텐데.”
그녀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데메트리안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클로에는 그것이 아쉴이 첫 옹알이를 했을 때 라크루아들의 얼굴 같다 생각하며 낯을 붉혔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어쩐 일이야? 물의 날도 아니고.”
“빨리 보고 싶어서.”
“…….”
정말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클로에는 제가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것이 느껴져, 괜히 찻주전자를 들어 각자의 잔에 차를 따랐다.
응급 처치가 탁월했고 신속히 의사의 시술도 받았던 덕에 신성력이 없었더라도 무리 없이 회복했을 거라고 했다. 더구나 루카로부터 그 양질의 신성력 세례를 잔뜩 받았으니 아물기도 진즉에 다 아문 차였다.
‘환각제 때문에 기절하신 게 맞기야 하겠지만, 그날 낮부터 야외에 계셨다지 않으셨나요? 뜨거운 볕 아래서 음주하셨다면 많이 드시지 않으셨어도 몸은 피곤했을 거예요.’
클로에는 라크루아의 주치의가 왕진 가방을 챙기며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녀는 환자의 증세가 귀족 영애님께 일어날 일치고는 퍽 험난한 일에 기인했다니 당황한 기색이었으나, 이내 사무적으로 진단을 내리고는 평범한 심신 안정 따위나 주문했을 뿐이었다.
“상처는 다 아물었지?”
“응, 그때 봤잖아.”
그의 성마른 질문에 클로에가 새초롬하게 답했다.
그리 말하는 그녀의 귀는 조금 빨개져 있었다. 열상을 꿰매기 위해 그쪽의 머리칼을 얼마간 잘라내야만 했던 것이다.
의원이 사려 깊게도 최대한 좁은 부위만 깎아 주었고, 다행히도 여름이어서 머리를 묶을 수 있었던 덕에 그편을 가릴 수 있었지만.
데메트리안은 양옆으로 땋아내려 목 뒤에서 하나로 묶은 클로에의 머리통을 걱정 가득한 낯으로 살폈다. 일견 아무런 이상이 없어 보이기야 했지만…….
“진짜 다 나았다니까? 부모님이 걱정이 크셔서 며칠 집에만 있으라고 하신 거야.”
“그래도…….”
“완전 멀쩡해. 자꾸 그렇게 굴면, 루카한테 네가 걔 실력 의심했다고 말할 거야?”
“루카를 믿는 거랑 널 걱정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야.”
그의 진중한 말소리에 클로에는 다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머리를 다쳐서 기억이 왜곡된 걸까? 스무 살로 돌아오고서 마주한 그가 꽤나 다정해진 것은 사실이었지만, 오늘은 그것이 다소 과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정말로, 작정하고 온 데메트리안은 클로에에게서 단 한 순간도 눈을 떼지 못했다. 클로에가 따라 준 차를 맛볼 생각도 없는 듯했다.
스물셋으로 돌아온 그날도 그러했으나, 또 한 번 클로에를 잃을 뻔한 그는 더 이상 어떤 여유를 부릴 수 없었다.
상황을 완벽하게 갖추는 동안 그녀가 제가 기억하는 그대로이리라는 여유는 이제 사치였다. 심지어 다치기까지 했었으니…….
그의 초조한 기색이 아무래도 적응되지 않아서, 클로에는 부러 퉁명스레 내뱉었다.
“또 실망이야, 데메트리안 크레벨. 내가 제대로 지키라고 했었잖아.”
“……미안해.”
데메트리안은 곧바로 사죄를 고했다. 누군가 저를 단죄하려 심장을 움켜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일부러 못되게 던진 말에, 밑도 끝도 없이 그의 표정이 침울해지니 클로에는 또 그것대로 마음이 아팠다.
‘내가 억지를 부렸던 일인데.’
상황이 여의치 못했으니 그렇지, 저도 제가 진즉에 몸을 뺐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데메트리안은 괜스레 저를 지키느라 위험 요소를 달고 임무를 수행한 셈이었다.
게다가 하루 내내 돌아다닌 것도 저, 내내 맥주며 와인을 홀짝인 것도 저, 건물로 돌입하자고 한 것도 저…….
그날의 일을 떠올리자니 저 자신도 못마땅하고, 제 앞에서 세상의 잘못은 다 짊어지고 있는 듯 구는 그의 표정도 못마땅했다.
클로에가 다시 화병만 쳐다보며, 그를 외면하고 있을 때였다.
무언가를 결심한 듯 데메트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 많지 않은 걸음으로 응접탁자를 돈 그는 이내 그녀의 옆에 섰다.
“……왜?”
의아한 듯, 클로에가 얼마간 데메트리안을 올려다보았다.
말없이, 얼마간 그녀의 낯만 바라보았을까.
그는 이내, 그 비좁은 곳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순식간에 시야가 낮아진 클로에는 어리둥절한 낯으로 그를 살폈다.
미세하게 일그러진 그의 낯에, 왠지 모르게 울음기가 배어 있는 것 같았다.
그 얼굴이 애처로워 보였을 즈음.
그가 한쪽 손을 내밀자, 클로에는 저도 모르게 제 손을 내주었다.
데메트리안은 한참 동안 제 손에 쥔 그녀의 손끝을 매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