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클로에의 선택, 그리고… (1)
수하들의 보고를 받아든 남작부인은 초조한 마음으로 궁정백저 안주인의 방을 찾았다.
똑똑, 똑, 똑똑. 손마디에 육중한 나무 문 울리는 소리가 둔탁했다.
얼마간 간격을 두고서, 남작부인은 지체 없이 문을 열어젖혔다. 급히 보고할 일이 있을 경우 허락받지 않고 드나들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일종의 비상 신호였다.
물론 그것이 지난 스무 해 동안 쓰이는 일은 없었지만.
“마님.”
“……으응.”
남작부인이 마정석 램프의 불을 켠 뒤, 트레이에 받쳐 온 찻잔을 협탁에 놓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편두통에 좋다며 마담 에투알이 선물한 약차였다.
갓 일어난 궁정백부인이 침대 헤드에 기대어 눈을 끔벅였다. 4시, 낮의 길이가 가장 길어지는 태양절임에도 먼동이 트려면 한참 남은 시간이었다.
어젯밤, 미라벨에게서 대신전에서 자고 가겠다는 연락이 와 상황을 알아보게 한 차였다.
그녀들이 지금껏 대신전에서 자고 온 적은 없었지만, 그녀들의 친우인 루카미오노가 대신전에 있으니 말이 안 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손님인 캔달우드의 공녀는 또 먼저 귀택한지라 아무래도 수상하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이 시간에 남작부인이 제 침소를 찾은 것은, 분명 제 딸에게 무슨 문제가 생겼다는 증명이렷다.
어스름한 램프 빛에 굴곡진 곳의 그림자가 더욱 짙어져, 궁정백부인의 얼굴에 불안을 새겼다.
“그래, 어떻게 된 일이던가?”
“……어제 슈바츠 거리 외곽에서 크레벨 기사단이 작전을 수행했다고 합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내용이 나오자 궁정백부인의 낯이 잠시 아연해졌다.
크레벨이 딸애와 아주 무관한 단어는 아니지만, 그 애는 어제 캔달우드의 공녀와 놀러 갔는데……?
“정확한 정황은 라비에게 물어봐야겠지만, 아가씨가 거기에…… 합류하셨다고 해요. 라비는 공녀님을 피신시키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었고요.”
“미라벨로서는 힘든 결정이었겠군.”
“…….”
남작부인이 송구스러운 듯이 제 손만 마주 매만졌다. 그 가라앉은 기색에서 불안이 엄습하여, 차를 한 모금 마시는 궁정백부인의 손길이 미세하게 떨렸다.
“크레벨 기사단은 크레벨 공자가 쫓던 인신매매단 아지트를 습격하러 간 거였다고 해요. 크레벨 공자와 함께 계속 계셨던 모양인데, 거기서…… 아가씨께서 다치셔서…….”
달각. 궁정백부인이 입을 묻었던 찻잔이 협탁 위 찻잔 받침에 놓이는 소리가 너른 방을 울렸다.
“신전 의원이 치료했고, 루카미오노가 신성력을 써서 아마 회복은 수월하겠지만……. 아직 깨어나시지는 않은 듯하더군요.”
궁정백부인이 크게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작게 떨렸다. 얇은 실내용 드레스 위로 그녀의 빗장뼈가 옴폭 패였다.
한 세대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루카미오노의 신성력은 그 양으로도 질로도 대단했다. 농브르가 입수해 둔 정보에 따르면, 그 어떤 사고를 당해도 루카미오노의 도움만 제때 받을 수 있다면 안전할 거였다.
그녀들의 딸들은 늘 제도 근방에서만 쏘다녔으니 다치는 일이 생긴대도 대신전이 가까워 안심이었던 것이었는데, 정말로 다쳤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심장 떨어질 일이었다.
안색이 새하얘진 궁정백부인이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모아 쥐었다.
“루카미오노가 나섰다면, 꽤…….”
“괜찮으실 거예요.”
남작부인이 제 주군의 무릎께에 손을 얹었으며 말했다. 그 말은, 일종의 기도였다.
“다만 이와 별개로, 라비 말고도 아가씨께 애들을 좀 붙여야 할 것 같아요.”
“……그래. 자세한 상황이 파악되는 대로 알려주게.”
“네.”
남작부인이 추가로 궁정백부인에게 보고를 올리는 일은 없었다.
4시 반, 궁정백부인의 침소를 나선 남작부인이 다시 제 수하들에게 지령을 내렸지만, 모든 것을 대신 고해 줄 당사자가 새벽같이 궁정백저를 방문했기 때문이었다.
지난밤 한숨도 자지 못한 데메트리안은 먼동이 터 올 때쯤 미라벨이 일어나기를 기다려 교대하고는, 이실직고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
그 밤을 어찌 보냈는지도 몰랐다. 그 수 시간 동안 데메트리안은 정말로…… 한동안 잊고 있었던 그 시절의 감각에 허우적댔다.
이따금 열에 달떠 찌푸릴 뿐, 그 눈동자 한 번 보여주지 않는 그녀의 창백한 낯만 바라볼 때면…… 그녀의 입가에 경직된 미소 이외의 어떤 움직임이 피어나길 바라던 셰비크의 알현실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는 절벽 끄트머리에 매달린 심정으로 클로에의 얼굴만 집요하게 들여다보았다. 거기서 잠시라도 눈을 뗀다면 모든 것들이 다 스러져 버릴 것 같아서.
먼동이 터 오도록 클로에의 눈꺼풀이 열리는 일은 없었다. 그녀의 입가에 간헐적으로 흐르는 신음은 그녀가 당장 눈을 뜨더라도 귀택할 정도는 못 될 것임을 짐작케 했다.
고심 끝에 데메트리안은 궁정백저로 향하는 것을 택했다. 한시라도 빨리 상황을 털어놓고, 용서를 구해야 했다.
그가 구할 용서는 많고도 또 많았지만…….
새벽의 안개와 먼 곳에서 터오는 희붐한 햇살이 반투명 장막을 드리운 듯한 고티유의 시내.
인적 드문 고티유 도로를 마차로 달리며, 데메트리안은 그녀를 단 한 번이라도 다시 보기 위해 새벽 별과 함께 입궁하고 귀택하던 그 시절을 떠올렸다.
루카가 괜찮을 거라 했다.
사라지고 만 그 시간에 데메트리안은 루카를 전적으로 의지하게 되었으니, 그가 그렇다면 그런 거였다.
그리고 그녀에게 어떤 불행도 닥치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었다. 그 확신이 어디에서 기인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데메트리안 왔니?”
“……이른 시간에 죄송합니다, 부인.”
라크루아의 응접실에 나타난 궁정백부인은 꽤나 말끔한 낯이었다. 출근 준비로 바쁜 궁정백 대신 그녀가 신새벽의 무례한 손님을 맞이하게 되었다.
갑작스런 손님을 맞은 것치고 완벽히 꾸민 그녀의 차림새를 보자니, 데메트리안은 제가 전하게 될 소식에 벌써부터 송구스러워졌다.
새벽에 남작부인으로부터 보고받은 궁정백부인이 다시 잠들지 못한 것을 그가 알 리가 없었으니까.
“그래. 네가 이런 무례를 간단히 저지를 아이는 아닌데……. 혹시 로이가 대신전에서 자고 오는 거랑 연관이 있을까?”
데메트리안이 깜짝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궁정백부인이 사교계의 에두른 화법을 즐겨 사용하는 이는 아니었지만, 이처럼 퍽 날카롭게 말하는 적은 없었는데…….
뭔가를 이미 알고 계시는 건가.
‘캔달우드 공녀를 먼저 보내 놓고 로이는 귀택하지 않았으니 이상하게 보였을 테지.’
데메트리안은 결례란 생각도 없이, 다시 고개를 떨군 채 무릎 위에 깍지 껴 둔 제 손만 쳐다보았다. 그의 초조한 낯에 대해 드는 복합적인 감정을 궁정백부인은 애써 다스렸다.
그래, 네가 송구해 해야지, 그리 괘씸해하는 마음이 모든 걸 압도했지만.
“어제 제 기사단이 수행한 작전에 로이가 휘말렸습니다.”
“작전?”
궁정백부인의 날카로운 눈빛에, 데메트리안은 작게 고민했다. 황명에 따른 수사에 관한 일인 만큼 쉬이 발설하면 안 되는 거였으니까.
하지만 그 원칙보다, 그에게는 이제 클로에와 그녀의 용태가 우선이었다.
이전 같았으면 대외비라며 침묵했을 것을, 데메트리안은 가뿐히 발설해 버렸다.
“황명으로 제도 인근 영지와 제도에서 성행한 인신매매단을 뒤쫓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환각제를 사용했는데, 로이가 어쩌다 보니 그 환각제가 유통되는 과정을 알게 된 모양입니다. 경시청에 제보하려고 쫓던 것이, 상황이 어그러지는 바람에…….”
데메트리안의 얼굴에는 명백한 고통이 흘렀다.
그런 그의 낯을 보는 것만으로도 궁정백부인은 제 원망이 조금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황명으로 수행 중이던 일에 휘말리게 해 제 딸을 위험에 빠뜨리고도, 그답잖게도 대외비 운운하며 고지식하게 굴지 않은 것은 마음에 들기까지 했다.
“저희가 작전을 오늘 벌이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크게 휘말리진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로이는.”
대강의 사정은 다 들은 셈이니, 궁정백부인은 가장 궁금한 내용을 물었다. 여기까지 기다린 것에도 꽤나 큰 인내가 필요했다.
“……좀 다쳤습니다.”
“…….”
“상황이 안 좋게 흘러가서…….”
꿀꺽, 데메트리안의 목울대가 크게 오르내렸다.
남작부인을 통해 적당히 보고받은 뒤였지만, 그 모든 걸 함께 겪고 지켜본 그의 입으로 듣는 건 훨씬 생생한 전언이었다.
“머리를…… 다쳤습니다. 신전에서 구빈원 의원에게 보였고, 처치가 끝나고서 루카미오노가 치유까지 걸었습니다. 다만 아직 의식을 못 찾아서…….”
데메트리안은 고통스러운 걸음을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듯 힘겹게 말을 이어 갔다. 궁정백부인은 거기에 아무런 말도 보태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보아 온 이여서 아들 같은 마음도 들었지만, 그의 잘못만이 아닌 걸 알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금이라도 그에게 여유를 베풀고 싶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데메트리안은 차라리 그녀의 침묵이 달가웠다. 묵묵히, 제 자백을 이어 가며, 음절과 음절 사이의 힘겨운 여백에서 스스로에 대한 책망이 피어났기에.
그것이 제가 응당 받아야 할 형벌의 반의반도 되지 않았던 것이다.
“어떻게든 먼저 보냈어야 했는데, 제가 로이를 지킬 수 있으리라 생각해 누아제트 영애를 먼저 보낸 게 정말 큰 패착입니다……. 결코 캔달우드의 공녀가 더 중하다 생각한 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제가 로이를 더 잘 지킬 수 있을 거라 자만했습니다.”
데메트리안은 혼란한 시선을 응접탁자 모서리 즈음에 붙박아 둔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런 그의 머리통을, 궁정백부인은 팔짱을 낀 채로 평가하듯 노려보았다.
간밤의 상황을 알려주는 듯, 땀이 났다가 마른 그 머리칼에 건물 회벽의 분진이 빼곡했다. 루카에게서 빌려 입은 셔츠만이 태연하게도 깔끔했다.
눈 밑이 거뭇하고 충혈된 것이, 클로에의 쾌차를 비는 자세만큼은 제대로인 모양이었다.
오래간 제게 붙박인 그 눈길을 뭐라 생각했는지, 데메트리안은 한참 동안 말을 꺼내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몇 년을 돌아 내뱉는 사죄였다.
***
다시 새벽.
데메트리안은 달빛 비치는 창에 팔짱을 낀 채 기대서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미라벨이 눈 좀 붙이라며 떠밀었지만, 누워 있자니 설은 잠의 틈으로 클로에의 코끝을 스치던 제 헛손질과 난간으로 떨어지던 클로에의 잔상이 자꾸만 반복되었던 것이었다.
창을 통해 새어들어 오는 어슴푸레한 빛과 몇십 시간째 제대로 잠을 청하지 못한 흐리멍덩한 의식 속에서, 그는 자꾸만 사라진 시간의 밤을 돌이키게 되었다.
잠에 들기 위해서,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서, 어영부영 시간을 흘려보내기 위해서 술로 얼버무렸던 그 어둑한 시간들. 그 기억의 조각들이 밀려왔다가 쓸려가고, 우후죽순으로 수면에 떠올랐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아침에는 자고 일어났더니 갑작스레 뒤바뀐 상황에 놀란 메리앤이 들이닥쳐 침대 머리맡에서 내내 훌쩍였다.
그 곁에 미라벨이 붙어 앉아 위로해 주는 걸 보고 서서, 데메트리안은 제가 잠깐이라도 편하게 있으면 클로에의 의식이 영영 돌아오지 못할 것처럼 굴었다.
라크루아들은 소문이 퍼질 빌미를 방지코자 아무도 신전에 방문하지 않았다. 모두가 가족과 보내는 태양절이었던 것이다.
한 해 중 가장 낮이 긴 날. 그 해가 어찌 떴다가 어찌 저물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날의 경이를 겪은 이후로 한동안 잊고 있었던 우울한 감정이 내내 그를 괴롭혔다.
끊임없이 자책하고, 스스로를 결함 있는 인간으로 단죄하고 몰아붙이며 후회하고 또 후회하던…….
데메트리안은 혼몽함 속에서 깨어날 때마다, 제가 감히 피로를 덜겠다고 꾸벅거렸음을 자책했다.
달빛 아래 눈을 부릅떴다가 다시금 수마에 굴복하길 몇 차례.
달빛이 거의 다 기울었을 때, 클로에가 눈을 떴다. 대신전에 오고서 꼬박 한나절이 지난 새벽녘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