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마지막 후회 (19)
프레더릭은 무엄하다 여길 수 있었던 데메트리안의 도박에 대해 무어라 언급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인정한 셈이라, 데메트리안은 다시금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았던 과거의 저를 책망했다.
제국력 917년은 그렇게 정신없이 흘러갔다. 황태자가 된 프레더릭에게는 할 일이 수많았고, 한편으로 유능한 황태자로 각인되기 위해 더 많은 일을 떠안았다.
그것은 자연히 황태자의 보좌관이 된 데메트리안의 몫이 되었다.
여름에는 가뭄과 치수 문제에, 가을에는 지역별로 작황을 가늠하여 세율을 조절하는 일에, 겨울에는 몬스터를 퇴치하기 위한 기사단을 파견하고 피해 입은 지역을 구휼하는 사업에, 그리고 그에 뒤따르는 온갖 잡다하고 구차한 모든 일에…….
그는 잠도 줄여 가며 집착적으로 일했고, 제도 바깥의 공작저까지 왕복하는 시간도 아까워 황궁 근처에 작은 달방을 얻어 지내기에 이르렀다.
“진짜 올해 마가 꼈습니다. 스칸다르까지만 해도 그러려니 했는데, 저도 덩달아 이게 뭔가요?”
“좀 봐 줘, 경.”
파이겐이 부러 불퉁대는 소리를 낼 때에야 데메트리안은 간신히 미소 비슷한 걸 입에 걸었다.
자연스레 사교계에 두문불출하며 크레벨 소공작의 명성은 조금씩 스러져 갔고, 자애롭고도 유능한 황태자의 이름은 드높아졌다.
뭐, 그런 건 데메트리안에게 하등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자정이 넘어 퇴궁하고, 다음날 먼 현장 지원을 가야 해 서너 시간도 잠들기 힘든 날이면, 그는 저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웃음을 잃어버린 머나먼 북국의 여인을 생각했다.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달빛에 제 거친 손을 비추면, 마치 수년 전 어느 연회가 끝나고 그녀를 바래다줄 때 맞잡던 손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 손을 다시 잡을 수는 없겠지만…….
그리고 이듬해 3월, 한 해의 인사를 발표하는 황궁의 시무식 자리.
외무부에서 오래 일한 알첸토 백작을 주스칸다르 대사로 임명함과 더불어 그 개소식에 보낼 사절의 명단을 발표할 때, 데메트리안 크레벨의 이름이 불리는 일은 없었다.
“그, 미안해. 소공작을 스칸다르에 보낼 수는 없다고 공작이 폐하께 간언했다고……. 대신 자네, 재무부에 들어가는 게 꿈이었잖아.”
제 아들이 황태자의 개처럼 굴고 있는 것도 싫은데, 스칸다르에 가고자 함이 유일한 이유라니. 그것만은 용납할 수 없었던 크레벨 공작의 수완을 이길 수는 없었다.
데메트리안은 지난 10개월간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던 무언가가 끊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
고티유 사교계에는 해괴한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더 이상 선망받는 꽃미남은 못 돼도 유명인사 중 하나로는 남은 크레벨 소공작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가 알코올 중독이 되었다거나, 마약 중독이 되었다거나, 불면증 또는 우울증으로 약을 달고 산다거나…… 아무튼 그 단정하고 기품 있던 이의 행색이 이전 같지 않다는 이야기였다.
“확실히 핼쑥해지시고, 눈 밑이 퀭한 게 아무래도…….”
“제 하녀의 사촌의 옆집 아들이 황성 관료인데, 퇴궁도 않고 매일같이 술 마신단 이야기가 있어요.”
“사교클럽 단골이 됐다던데.”
그것은 대부분 일정 부분 사실에 근거한 이야기였다. 데메트리안은 공작저로 귀택하는 법이 드물었고, 일이 없는 시간을 버티지 못해 술로 지새는 밤이 많았으니까.
누군가를 바래다주기 위한 한편으로 스스로 흐트러지는 것이 싫어 굳이 술을 즐기지 않던 것을 생각하면, 그의 음주는 일종의 자해였다.
술에 취하면 어찌 잠들었는지 모르는 사이 잠들었고, 다음날 술이 깨지 않은 상태로 입궁하면 하루가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는 사이 일과를 마쳤다.
그럼에도 맡은 바는 기계적으로나마 제대로 해내니 나무라는 이는 없었지만.
퇴근 시간이 다가와 정신이 조금씩 맑아지면 그는 그것을 버틸 수 없어 곧바로 술을 찾았다.
“지금이라면 캄포가 정혼을 파기해도 주신께서 안쓰럽게 여기실 수 있겠네요.”
이따금 숙취에 괴로워하는 그를 마주칠 때면, 루시엔이 술 냄새를 못 참겠다는 듯 잔뜩 찌푸린 얼굴로 그리 빈정대는 것이었다.
데메트리안이 제 말을 귀담지 않는 걸 알면서도, 루시엔은 작은 성의를 한마디 보탰다.
“요즘 꼴을 보면 절박하실 일이었던 것 같은데. 왜 모르셨어요.”
……그러니까. 왜 몰랐던 걸까.
***
“그만 좀 와, 새끼야.”
말은 그리 해도, 루카는 오늘도 데메트리안이 구해 온 서대륙의 술병을 받아 들고서 꽤나 기꺼워했다.
쌀로 빚은 술을 증류했다는 서대륙의 화주에서는 과일 향이 나, 데메트리안은 속절없이 가향된 차를 좋아하던 제 마음속 정인을 떠올리고 말았다.
그걸 마음 놓고 털어놓을 수 있는 이여서, 데메트리안은 루카와의 술자리가 좋았다.
“이거, 로이가 좋아할 텐데. 독해서 싫어할지도 모르지만…….”
“에이, ××.”
술맛 떨어진다는 듯, 루카가 윗입술을 들어 올렸다.
벌써 몇 달째였다. 얼마간 저를 안 찾아서 대충 잘 사는가 보다 안심하고 있었는데, 스칸다르 사절단에 탈락한 이후로 신전의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다른 데서 삽질하느니, 제 눈앞에서 꼴값 떠는 게 차리라 낫겠다 싶기도 했다.
“왜, 기억하지? 너랑 로이랑 정원에 꽃 다 따다가 담금주 따라 하겠다고 물에 담가서 어머니께 된통 혼나고.”
“그래, 부인께서 그나마 클로에 봐서 참으시긴 하셨지.”
불콰히 취한 루카가 히죽대며 족히 스무 해는 전의 이야기들을 함께 되짚어 주었다.
“내가 얘기했었나. 너 성국 들어가고서 말야. 나 18살 됐을 때 로이가 백작님 컬렉션에서 술 몰래 갖다준 적 있었거든.”
“응, 얘기했어.”
“그게 우리 생년, 890년산 스위트 와인이었거든. 난 달아서 별로였는데, 로이가 뺏어 먹더니 마음에 들었나 봐.”
“××, 안 듣네…….”
“그래서 홀짝홀짝, 혼자서 한 잔을 다 마셨는데, 그 얼굴 새빨개져서 어눌하게 말하는 게 너무 귀여운 거야.”
그리 말하는 데메트리안의 눈빛이 정말 따스했다. 요즘의 그와 함께 일하는 재무부 관료들이 본다면 소스라치리라.
루카는 너는 떠들어라 하는 심정으로 수도원에서 진상한 포도주를 물 대신 들이켰다.
“그러고도 알코올 뒷맛이 어떻고, 포도 품종이 어떻고 하는데, 정말…… 그걸 남한테 보여 줄 수가 없었을 거야. 그래서 로이 데뷔탕트하고부터 매번 데려다줬겠지?”
“……1절만 하면 안 되는 거냐?”
“그 밤은 어두워도 같이 있던 마차 안은 정말 밝았는데.”
루카의 빈정대는 말을 한 귀로 흘리며, 데메트리안은 고개를 간신히 가누며 중얼거렸다.
“그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야아, 그거 상투적이고 참 같잖은 자기연민이네.”
루카가 듣기 싫다는 듯, 제 유리잔을 흔들며 비웃었다.
“너 새끼가 사랑을 아냐.”
“주신에 대한 사랑은 너보단 잘 압니다, 형제 새끼야.”
루카가 합장하며 하는 너스레에 데메트리안은 얼굴을 찡그렸다. 루카는 그가 울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때, 로이가 스칸다르에 가기 싫다고 할 때……. 어떻게든 방법을 생각해 봐야 했어.”
“그 소리 좀 작작.”
후후, 작게 웃은 데메트리안이 몸을 기울여 소파에 옹송그리며 누웠다. 실수로라도 응접탁자에 마구잡이로 놓인 빈 병들을 건드리지 않는 단정함이 있었다.
그때쯤, 루카의 눈이 묘하게 빛났다.
“그렇다면 시간이라도 돌려 보지 그래?”
“진짜 그러고 싶다…….”
“그래?”
되묻는 목소리가 선득하게 울렸다. 하지만 곧 잠들어 버린 데메트리안은 이를 분별할 수 없었다.
***
데메트리안이 눈을 떴을 때. 새벽의 어슴푸레한 달빛이 커튼 사이로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시야를 더듬어 주변을 살피자, 공작저의 제 방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언제 왔지?’
스칸다르 사절단에 탈락한 이후로 아버지 보기가 껄끄러워 주말이 아니면 잘 들어오지 않았는데.
하아, 데메트리안은 공작과 마주칠 생각에 한숨을 내쉬었다.
‘……어라?’
내쉬는 숨이, 너무나도 깔끔했다. 입도 텁텁하지 않았다.
어제 제 마지막 기억에 스친, 응접탁자에 두서없이 세워진 술병들을 생각하면 이럴 리가 없는데……. 그러고 보면 골을 울리는 숙취도 느껴지지 않았다.
‘뭐지?’
데메트리안은 튕기듯 일어나 앉았다.
검푸른 새벽빛이 내려앉은 제 익숙한 방.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아카데미에 들어갈 무렵 쑥쑥 자란 제 키에 맞추어 침대를 새로 맞춘 이후로 바꾼 것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단 하나만이 어색했다.
‘제복이 왜……?’
목깃이 올라온 검은색 자켓에, 금색 견장으로 최고 학년임을 나타내고 있는 아카데미의 제복. 아카데미를 졸업한 지가 벌써 5년인데, 저 제복이 왜 옷걸이에 걸려 있는가.
당황한 낯으로 그 제복을 한참 동안 쳐다보자니, 간밤의 파편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시간이라도 돌려 보지 그래?’
‘진짜 그러고 싶다…….’
루카의 목소리였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묘한 구석이 있었다. 어딘가 낮게 울렸던, 그래서 영혼 깊은 곳을 건드리는 것 같던 목소리.
언젠가 황제의 탄신연에서 주신의 목소리를 받을 때의 것과 비슷한 울림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내 아이를 위해 네게도 기회를 주겠다, 나의 아이야.’
툭 떠오른 한마디. 기억에 없는 말이지만, 데메트리안은 분명 그런 말을 들었다. 내 아이라니……?
한번 기억이 흘러들고 나니, 제가 분명 들었던 묘한 음성이 우후죽순으로 떠올랐다.
‘언제쯤이 좋을까?’
‘내 나름으로 보답할 것이다.’
와글와글한 기억의 편린들과 말의 조각들이 하나의 덩이를 이뤘을 때, 데메트리안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5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왔다는 것을.
쾅쾅쾅쾅.
“파이겐, 파이겐!”
“아, 무슨 일이십니까? 이 꼭두새벽에.”
데메트리안이 제 방 바로 옆에 자리한 파이겐의 방문을 얼마나 두드렸을까.
늘 규칙적으로 활동하시는 제 공자님이 찾는 소리에 깼더니 아직 해가 뜨기도 전이어서, 파이겐은 불충한 마음으로 비척비척 문을 열었다.
얼마나 급했는지 실크 잠옷 바지만 다리에 꿴 차림새를 보고 파이겐은 적잖이 놀랐다. 이런 흐트러진 모습을, 그를 처음 본 10여 년 전에도 본 적이 없었다.
“오늘 며칠이지? 아니, 지금 몇 년이지?”
“자다 깨서 무슨, 웬……”
“제발.”
데메트리안의 눈동자가 절박하게 빛났다.
잠기운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얼굴을 손으로 몇 번 문지른 파이겐은, 요상하다는 듯이 데메트리안을 흘겼다.
‘아니, 자다가 봉창을 뭐 이리 간절히 두드리셔?’
데메트리안의 낯에 진하게 묻어나는 다급함에, 파이겐은 저도 모르게 순순히 대답을 뱉어 주었다.
“제국력 913년……. 4월 첫째 주 숲의 날이죠.”
“913년? 그래서 지금 황태자는?”
“무슨 황태자요, 1황자님 스물여섯 되도록 책봉 못 받으셨는…… 어디 가세요?”
“아냐, 쉬어.”
“아니긴요, 그러고 어딜 가시려고요! 옷!”
그제야 한기가 느껴졌다.
파이겐의 답이 채 마치기도 전에 뒤돌아서 달려가던 데메트리안은, 방으로 들어가 밖에 나와 있던 제복을 순식간에 꿰어 입었다. 안 입은 지 5년이 다 돼 가는 옷이었지만 어제 입은 듯 익숙했다.
조금도 지체할 수 없었다. 지금이 5년 전이라면, 913년이 맞다면, 그렇다면……
“로이.”
그녀가, 지금 고티유에 있는 것이다.
이리도 오래 못 볼 줄 몰랐던, 못 봄이 그리도 사무칠 줄 몰랐던 제 유일한 사랑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