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마지막 후회 (18)
곁방에서 자고 있는 파이겐을 깨울까 싶었으나, 이제는 제 몸 위험한 게 뭐 중요하냐 싶은 것이었다.
데메트리안은 간단한 손길로 문을 열었다.
달빛이 어스름하게 비치는 꼭대기 층의 복도에는 그가 잘 아는 얼굴이 있었다.
후드를 벗어 내리는 상대의 손길에 그의 백금색 금발이 달빛을 받아 부서져 내렸다.
“……왕자.”
“이제는 전하라고 칭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낮에 그가 상인의 도움으로 왕궁에서 보았던 그녀의 부군, 이제는 독립국이 된 스칸다르의 왕이었다.
데메트리안은 황망한 얼굴로 달빛에 허옇게 비치는 그의 낯을 바라보았다. 제 표정은 거울을 보지 않아도 패배자의 것일 게 분명했다.
“……어쩐 일로.”
“그건 제가 물어야 할 말인데요. 제국의 소공작께서 어찌하여 연방 바깥의 소국에 오셨는지.”
“제가 온 걸 어떻게…….”
“포털을 타고 오시면서 제게 보고가 안 들어올 거라고 생각하신 건 아니겠지요.”
“아.”
뷔욘이 빙긋 웃었다. 고티유의 사교계에서 그의 주가를 높이던, 그 가면 같은 미소였다.
얼얼한 표정만 짓는 데메트리안을 보며 뷔욘은 그 고운 미소 아래서 조소했다. 길드에 왕궁 잠입까지 의뢰하려 했다지. 그 길드가 누구 건지도 모르고.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혹시 내 귀비를 만나러 동대륙인 행세를 하면서까지 입궁했던 겁니까?”
“그걸 어떻게…….”
머리에도 입가에도 두건을 써서 저를 알아볼 구석이 없었을 텐데. 하지만 아닌 척 잡아떼기에는 그의 마음이 너무 물크러져 있었다.
“내 귀비는 이제 스칸다르인입니다. 이제는 제국과 무관하죠. 제국 땅을 밟을 일도 없을 겁니다. 혹여 그녀를 흔들려고 오신 거라면.”
“뭘 어쩌자는 건 아닙니다. 다만…….”
내가 당신의 비를 연모하여 한 번이라도 보고 싶은 마음에 그랬습니다. 그런 말을 내뱉을 수가 없는 것을 잘 알아, 데메트리안은 시선만 떨구었다.
막 깨달은 감정이었다. 그녀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끔, 정리하여 내뱉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상심 한가득인 낯이 그것대로 대답이었다. 뷔욘의 금갈색 눈동자에 옅은 불꽃이 일었다.
제국의 그 고매하신 소공작이었다. 제가 하릴없이 기생해야만 했던 사교계에서, 그 어떤 노력조차 하지 않아도 태생적으로 권력을 지닌 이였다.
그런 그가 고작 사랑 때문에. 그것도 제 여인이 된 이를 연모하여서 이렇게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
“참, 대단한 우정이십니다.”
뷔욘이 입매를 뒤틀며 웃었다. 그것은 사교계의 선의만 받으며 살아 온 데메트리안이 기억하는 왕자의 미소와 퍽 달랐다.
데메트리안은 거기서 어느 가을볕을 받으며 마차에서 내려섰던, 혹은 제 서재에서 데쎄르의 양철 케이스를 발견했던 루시엔의 얼굴을 겹쳐 보았다.
“귀국을 권고합니다. 말이 권고지, 이틀 뒤엔 추방령이 떨어질 겁니다.”
“…….”
제 체류의 동기조차 그 앞에선 불경한 것인지라, 데메트리안은 거기에 대꾸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편지도. 버리는 것도 고된 일이니 그만 보내시기를.”
***
휴가를 며칠 남겨 두고서 무력하게 귀국한 데메트리안은 제 서재에 틀어박혔다.
그는 잠을 자지 못했고, 그래서 혹은 그와 무관하게 술을 마셨고, 서재로 하인들이 나르는 식사는 별반 비워 내보내는 적이 없었다.
자연스럽게 그의 휴가는 일주일이 더 늘어났다.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났대서 그의 심경에 특기할 만한 변화가 일어나는 건 아니었지만.
장서를 보호하기 위해 걸어 둔 두툼한 커튼은, 그가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을 묵묵히 방조하고 있었다.
그 어리숭한 시공간 안에 클로에와 나눠 읽었던 책이, 그녀가 좋아했던 비스킷이, 그녀의 손글씨가 담긴 편지 같은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언젠가 클로에가 굳이 도전해 보겠다며 낑낑댔던 제국 아카데미의 정치학 교재. 금박으로 장식된 그 제목 자를 보며 데메트리안은 그보다 조금 더 노을빛을 띠던 그녀의 머리칼을 떠올렸다.
그 머리칼을 살랑이며, 제 나라를 위해 타국의 왕에게 혼약을 제안한 천 년 전의 위인을 옹호하던 그녀의 말소리를.
‘그럼 예견된 불행대로 굴러가게 두는 게 책임을 지는 거야?’
‘상황을 바꾸지 않으면 어떻게 그걸 막아?’
‘네가 말한 건 책임감을 핑계로 현실에 안주하는 비겁한 행위야.’
저와 격하게 다투었던 그녀의 말들이 오랜 시간을 돌아 그를 비난했다.
그런 감각이 수십 번, 수만 번 거듭되었을까.
매분 매초 무지하고 오만했던 저 스스로를, 데메트리안은 단 한 순간도 용서할 수 없었다.
눈을 감으면 마지막으로 만난 날 절박하게 빛나던 그녀의 눈동자가 그를 힐난했고, 설은 잠에라도 들면 셰비크의 알현실에서 보았던 그녀의 희미한 미소가 죄책감을 덧씌웠다.
숨을 쉬기가 힘들 정도로 마음이 미어질 때면, 그는 보내지 못할 편지를 몇 장이고 썼다.
그 수많은 연서를 썼다가 찢고, 썼다가 불태우고, 썼다가 구기고…… 그 모든 감정을 깎고 깎아 빚어낸 단 하나의 고백은……
‘미안해.’
너무 늦어서, 그리고 이렇게 뒤늦게 깨달아 버려서.
그래서 전할 수조차 없어서.
지난 2년간 그가 그녀에게 건네고 싶은 말은 수많았지만, 그 모든 단어의 끝에는 단 한 단어만이 남았다.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걸 전할 방법은…….
***
4주간의 휴가의 마지막 날, 데메트리안은 난생처음으로 고텐베르크의 들꽃 클럽에 들어섰다. 농브르와 접선하기 위해서였다.
대륙 최고의 정보 길드를 묻는 말에 파이겐이 아무 생각 없이 그들의 이름을 언급하는 바람에, 그 정체도 모르고서 진행된 일이었다.
“크레벨에서 이 농브르에 무슨 일을 의뢰하고 싶으실까.”
중절모를 눌러 쓰고 마스크를 낀 왜소한 중년인이 조금 특이하게 생긴 만년필을 까딱였다.
그 중년인, 누아제트 남작부인은 오랜만에 보는 데메트리안의 얼굴이 퍽 상한 것에 적잖이 놀라 있었다.
귀공자다운 차림새며 깔끔히 가르마 탄 머리칼, 말끔히 면도한 얼굴 등이 나무랄 데 없는 신사의 모습이기야 했지만…… 몇 년 전 클로에와 교류하던 그를 기억하는 남작부인에게는 그 변화가 확연했다.
그녀가 흘끗 쳐다본 그의 손에는 얼음이 곁들여진 위스키 잔이 쥐여 있었다. 그리고 종업원이 자주 다니지 않는 이곳의 특성상, 치워지지 않은 빈 잔이 두 개 더.
크레벨에서 의뢰가 들어왔다는 소식에 알아본 그의 근황이, 관료가 되고 처음으로 장기 휴가를 냈고 그 여정이 스칸다르였다는 것에 꽤나 놀란 터였다.
도대체 무슨 곡절일까.
남작부인은 머릿속의 몇 가지 가설과, 그가 내뱉을 정보들을 짜맞추기 위해 그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그대들이 제국 최고의 해결사라던데.”
“그렇게들 이야기하더군요.”
“혹시…… 지나간 일에 관해서도 알아볼 수 있나?”
“사람들이 그에 대해서 기억하고 있다면야. 정보를 나르는 건 사람들이니까요.”
데메트리안이 미심쩍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날것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에, 남작부인은 적이 놀랐다. 어려서부터 애늙은이 같은 구석이 있어 늘 차분하던 아이인데.
역시, 마음의 여유가 없어질 정도로…….
“그들이 일부러 거짓을 읊거나 잘못된 기억을 갖고 있다면?”
“정보원인 줄도 모르면서 정보원인 이들이 아주 많습니다. 저희야…… 많은 이들의 의견을 모아 가장 가능성 높은 가설을 제시하는 것뿐이고요.”
그 말에서 적당히 농브르의 시스템을 이해한 데메트리안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신전에 관한 것도?”
“원하신다면 성국의 일까지도.”
데메트리안은 사내가 내뱉은 말의 진위를 가늠하려는 듯, 얼마간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 밀빛 눈동자에서 무언가 읽을 수 있는 건 없었지만…… 그에겐 달리, 방도가 없었다.
이 자리에 오기 전에 이미 많은 것을 결심한 데메트리안은, 쥐고 있던 잔을 비우고는 속사포처럼 쏟아내었다.
“4년 전 겹그믐의 날 대신전에서 신관이 하나 죽었다. 여기에 그날 대신전에 체류 중이던 1황자가 연루돼 있는지, 그렇다면 그 증거가 있는지 알고 싶네.”
“1황자라 하면…….”
“황태자 전하지.”
남작부인은 스칸다르에 다녀온 그가, 캄포의 성배가 도난되었던 일을 뒤쫓고 있음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
내리쬐는 햇살에 열기가 조금씩 배기 시작하는 5월의 오후. 내궁에 자리한 황태자의 응접실에서는 신록이 우거진 중정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데메트리안은 그 아름다운 정경과는 퍽 이질적인 낯으로 프레더릭을 기다리고 있었다.
농브르의 연락책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것이 지난주의 일이었다.
‘겹그믐의 날이면 신전 경비대 대신 황실 기사단이 내부 경비를 서는데, 그날 병력 배치가 평소와는 달라 의아하게 여긴 이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스칸다르에서 귀국한 이후 열흘을 서재에 틀어박혀 있었던 그 어두운 4월.
데메트리안은 평생 몰랐던 제 마음과, 그걸 몰라서 비겁하게 굴고 말았던 과거의 선택들을 돌이키며 후회하고 또 후회한 끝에…… 어떻게 해서든 그녀를 한 번이라도 다시 보는 것을 소망하게 되었다.
큰 걸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제게 어떤 대책을 바라던 절박한 낯이 아니라, 인형처럼 입매를 멈춰 둔 얼굴이 아니라…… 제 말에 작게 웃고, 핀잔주듯 흘기고, 제가 얄밉게 굴 때면 노려보는, 그런 낯을 잠시라도 짓게 해 주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칸다르의 왕이 감히 피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야만 했다.
‘그토록 과거의 일인데도…… 정말 고맙네.’
‘가느다란 연을 놓지 않으면 되는 일이죠.’
그 가느다란 연을 잇고 또 이어, 데메트리안은 작은 요행을 바라고 있었다. 제국에서 가장 유능하다는 농브르에서도 물증은 잡지 못하여 일종의 도박이 될 터였지만.
“소공작! 그간 잘 지냈어? 무슨 일이야, 갑자기?”
프레더릭은 특유의 사람 좋은 미소를 건 채로 응접실에 나타났다.
재작년 황태자로 책봉받은 그가 내무부를 떠나면서 데메트리안과 마주하는 일도 줄어들었다. 크레벨의 후계자로서의 앞날보다 제 하루를 살아내기에 바빠진 데메트리안이 원로원 바깥의 일에 신경을 쓰지 못했던 탓이기도 했다.
황태자로서 입지를 다지는 중인 데다 황태자비와도 금슬이 좋아 몇 달 뒤면 황손을 생산한다는 그에게는 여유가 넘쳐 보였다.
이십여 년을 그리한 대로 공작가 후계자의 외관을 꾸며 두었으나, 그 속에는 분노와 초조함뿐인 데메트리안과는 퍽 대조적으로.
“내년에 스칸다르에 대사관이 완공되잖습니까.”
“그렇지. 혹시 대사 자리에 관심이 있는 건 아니지?”
“제가 감히 탐낼 자리가 아닌 건 알고 있습니다.”
“감히라니……. 크레벨의 소공작에게 못 갈 곳이 어디 있다고.”
데메트리안은 쓰게 웃었다. 그 못 갈 곳에 가고 싶어서 이러는 건데.
“대사관이 개소할 때 사절을 파견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절단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프레더릭은 적잖이 당황했다. 초지일관 데메트리안의 말에는 어떤 에두른 표현도, 예의 차리는 단어도 없었던 것이다.
한편으로 그의 말소리가 꽤나 절박하게 울렸다.
그제야 프레더릭의 눈에 데메트리안의 스산한 낯이 들어왔다.
“맨입으로 부탁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전하께서 올해 원하시는 바가 있다면 제가 다 이루겠습니다.”
꽤나 파격적인 제안이었지만, 프레더릭은 이를 덥석 기껍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유능하기로 소문난 크레벨의 후계자를 보좌관으로 부릴 수 있다니. 그 저의를 의심할 수밖에 없이 좋은 제안이었던 것이다.
데메트리안은 프레더릭의 기색을 살피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4년 전 겹그믐의 날에 있었던 일은, 더 이상 파고들지 않겠습니다.”
그 가느다란 연을 놓치지 않아…… 한순간이라도 그녀를 마주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