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마지막 후회 (17)
“그러니까, 나와 일부러…….”
“아직 늦지 않았잖아요? 저희는 약혼을 한 것도 아니고.”
상단 일을 놓지 않고, 사교계에서의 권력을 키우며, 유력자의 자제들과 보란 듯이 친분을 쌓던 그녀.
그것은 단순히 그가 싫어서가 아니라…….
그걸 알고 나니 드는 마음은, 온전한 패배감이었다. 같은 혼약을 짊어졌으나 그것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도 달랐으니까.
그는 이미 그녀처럼 능동적으로 무언가를 하지 못했던 과거를 괴로워하는 중이었고…….
“아, 경께는 늦었는지 모르겠지만요.”
루시엔이 그 속내를 짐작이라도 한 듯, 책상 한쪽 모퉁이에 쌓인 신문지 더미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해가 지지 않는 신문’, 제국 연방 바깥의 정세에 대해 다루는 주간지였다. 4년 전 스칸다르가 제국 연방에서 독립한 뒤부터 스칸다르의 소식 역시 이 주간지에 실리고 있었다.
제가 너무도 그리워하는 여인의 소식 한 자 얻을 수 있을까 매주 뒤적이는 것이었다.
***
봄이 빨리 찾아오는 크레벨의 온실에 프리지아가 피기 시작했다.
공작부인에게 온실을 구경하고 싶으니 초대해 달라는 클로에의 서신이 도착하곤 하던 그 계절이었다.
그 편지가 오지 않게 된, 벌써 두 번째 봄.
온실 너머로 그 노란 물결을 목격한 어느 주말, 데메트리안은 그 길로 여행을 떠났다. 대축일 주간 앞뒤로 일주일씩, 총 3주의 휴가를 내고서였다.
목적지는 스칸다르의 수도 셰비크.
정말 충동적인 여정이었다. 그의 호위 기사 파이겐은 황당한 마음으로 그의 옷차림을 용병처럼 꾸며 주면서도, 그가 오죽하면 이러겠느냐 싶어 동정심이 들었다.
늘 과묵하고 단정한 이여서 다른 사람들은 모를 거였지만, 제 눈에는 확연히도 말수를 잃고 초췌해진 그의 심사를 파이겐이 모를 리 없었다.
고티유 외성에서 포털을 타고 스칸다르의 포털이 있는 멜하운으로 이동해, 말을 하루 달려 셰비크에 도착했다.
이토록 가깝고, 또 이토록 손쉽게.
그렇게 그녀가 있는 도시에 다다랐다.
셰비크에 도착한 첫날, 데메트리안은 시내 중심지에 자리한 셰비크의 왕궁을 올려다보았다.
제도 고티유의 황궁보다얀 규모가 작았지만, 그 소담한 궁의 크기에도 장식이며 만듦새가 호화롭기 그지없었다.
이 궁 안에 그녀가 있겠지…….
모피로 된 두터운 장갑을 낀 손을 말아쥐며, 데메트리안은 가슴 한 켠이 졸아드는 것을 느꼈다.
우선 시내를 돌아다니며 2왕비에 대한 민심부터 살피기로 했다.
“그러게, 국혼 날 퍼레이드 때 보고 뵌 적이 없네. 정비가 아니셔서인지 독립기념일에도 얼굴 안 비치시고.”
“제국에서 오셔서 그런 거 아니겠어? 뭐, 폐하께서 왕후라도 맞으시면 어차피 뒷전 되실 텐데.”
그들이 머무르기로 한 여관 1층의 펍에서 사람들에게 물었을 때, 대부분 잘 모르겠다는 평이었다. 제국에서 왔다는 이유로 꽤나 이질적으로 여기는 듯도 했다.
“아, 맞아. 제국에서 공비로 오신 분이 계셨지.”
“뭐, 스칸다르는 제국에서 오신 분 눈에 안 찬다 이거 아니겠어?”
길에서 만난 상인들에게도 넌지시 물어보았지만 역시 클로에의 존재는 희미했다.
‘장래 희망? 나중에 어느 가문에 시집가든 허수아비 마님 안 되고 열심히 꾸리는 거. 사용인들한테도 가신들한테도 떳떳해야지. 그런 걸 장래 희망이라고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문득 열두 살 클로에가 조잘대던 말이 떠올라 가슴이 저몄다.
제국에서 온 비, 그것도 정실도 아닌 후비가 평민들에게까지 사랑받기란 어려울 수도 있지.
데메트리안은 애써 평가를 미루며, 사교클럽에 가 보기로 했다.
“제국에서 오신 분? 그, 뭐, 불쌍하신 분이지.”
“전하께 사랑받기야 하시는데, 어찌나 아끼시는지 꽁꽁 싸매고 안 보여 주셔.”
“어찌나 안 보여 주시는지, 계신지도 모를 정도야.”
으하하하, 스칸다르의 신사들이 발작적으로 웃었다.
제국에서 온 2왕비에 대해 묻는 2인조를 맞이해 의아했던 것도 잠시. 스칸다르보다 물가 높은 제국에서 왔다며 호방하게 술값을 내니, 기분 좋게 취한 그들은 손쉽게 원하는 정보를 떠벌여 주는 것이었다.
그들의 말을 듣는 데메트리안은 초조하게 입안의 살만 씹었다.
짐작 못한 건 아니었다. 그간 그는 스칸다르의 정세를 다양한 방법으로 청취해 왔고, 거기에 2왕비가 드러난 곳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니길 바랐는데.
차라리, 행복하기라도 하길 바랐는데.
데메트리안은 스칸다르의 신사들이 떨구는 작은 소식들 하나하나를 주워 담으며, 그것이 그래도 일종의 행복의 상을 이루기를 바랐다.
하지만 아무리 조각을 맞춰보아도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아, 그는 매일 밤 사교클럽에 가서 취미로 용병 일을 하는 여느 제국 귀족가의 골칫덩이 행세를 하며 돈을 물 쓰듯이 썼다.
그러나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그를 안심케 해 줄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저, 어찌하시렵니까? 슬슬 돌아가시겠습니까?”
셰비크에 오고서 열흘째, 파이겐이 조심스레 물었다. 사교클럽에 드나든 지 닷새가 넘었을 때였다.
파이겐은 스칸다르 귀족들이 떠드는 클로에의 처지에 대해 데메트리안이 대단히 실망한 것을 알아, 단둘이 있을 때면 말도 못 붙이고 있었다.
“……궁에 한번 들어가 봐야겠어.”
“아니, 이제 와서 사절이라고 하시려고요?”
파이겐이 황당하다는 듯한 목소리를 냈다.
아주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스칸다르에는 아직 아르투젠의 주재 대사가 없기에 아르투젠의 관료가 직접 스칸다르의 왕을 알현할 수야 있었다.
다만 그 외교적인 방문에 대해 미리 고지한 바가 없었고, 원로원의 관료래도 아직은 보좌관에 불과한 그가 스칸다르 왕을 만날 명분 또한 없었다.
혹시나 하여, 2왕비에게 알현 신청을 해 보았다.
“저희가 요 국경 너머 파타르그에서 왔는데 억울한 일이 있어서 말입죠. 2왕비 전하를 뵙고 이 억울한 일이라도 하소연하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2왕비 전하께서는 알현을 받지 않으시네. 외국인이라도 차별하지 않을 테니 치안대에 가 보면 어떻겠는가.”
파이겐이 나름대로 연기를 해 보였으나, 민원을 접수하는 관료의 칼 같은 제지를 넘어설 수는 없었다.
다음으로는 정보 길드를 찾았다. 공식 경로가 안 통하면 비공식적인 방법이라도 활용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스칸다르가 아르투젠보다 작고 폐쇄적이어서인지 정보 길드가 단 하나뿐이어서, 발품을 팔지 않아도 되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우리가 모시는 분께서 2왕비 전하의 아버지께 연을 좀 대고 싶어 하셔서 말이지. 셰비크에서만 알 수 있는 소식을 좀 구하고 싶은데.”
이번에도 파이겐이 30대의 관록으로 애써 연기를 해 보였다. 그의 어색한 연기가 제국인의 말씨로 오인된 덕에, 의심을 사지 않아 천만다행이었다.
파이겐과 그 뒤에 반보 물러나 있는 과묵한 검은 머리를 가느스름한 눈으로 살피던 길드 직원이 목소리를 한껏 낮췄다.
“저, 우리가 왕실 눈 밖에 나면 안 되는 처지여서 말이야. 왕실과 관련된 의뢰는 받기가 곤란해.”
길드 밖으로 나오자마자, 파이겐은 부러 침을 퉤퉤 뱉는 척을 해 보였다. 스칸다르에 체류하는 십여 일 동안 데메트리안이 얼마나 많은 실망을 거듭했는지 알아서였다.
“에이, 텄습니다요. 무슨 길드가 이래? 농브르 보고 배우라지.”
그러면서 슬며시 살핀 데메트리안의 안색에는, 일종의 오기가 서려 있었다.
‘요 몇 달간 생기 없어 보이시던 것보다얀 이편이 사람 같긴 하다마는…….’
데메트리안은 다시금 사교클럽에 가서 돈을 썼다. 제국 출신 2왕비의 근황을 직접 살피고자 하는 제국인이 돈을 한없이 쓴다는 소문에, 왕궁을 출입하는 상인 하나가 그들에게 접근했다.
“별궁까진 못 가. 내 호위인 척한다면 멀리서 볼 수는 있을 거요. 내가 알현할 때면 늘 비전하께서 배석하시거든.”
동대륙의 진귀품을 왕실에 납품하는 이라 했다. 데메트리안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상인에게도 금화를 아낌없이 베풀었다.
셰비크에 오고서 보름, 그의 1년치 봉록을 다 탕진했다.
셰비크 궁은 겉보다 내부가 더 화려했다. 데메트리안은 동대륙의 전사 차림으로 상인의 뒤를 따르며, 그 호화로움 덕에 클로에가 나름의 행복을 찾았기를 바랐다.
알현실의 화려함은 그중 최고였다. 대륙 북쪽의 겨울은 해가 짧고 낮에도 쨍하지 않았지만, 알현실 내부만큼은 제국의 여름처럼 밝았다.
바닥과 벽이 모두 고급 대리석으로 짜인 가운데, 기둥마다 마정석으로 밝힌 화려한 램프가 달려 있었다. 입구에서 옥좌까지 향하는 붉은 융단에는 금실로 자수가 놓여 있었고 옥좌 또한 진짜 금을 떼다 만든 듯 화려했다.
하지만 그 모든 휘황찬란한 것들에도 데메트리안의 눈에는…… 옥좌에서 반보 물러난 곳에 앉아 있는 그녀만이 보였다.
‘로이…….’
스칸다르의 전통 복식으로 차려입은 채, 다소곳하게 앉아 손을 모으고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는 클로에의 모습.
호위의 신분으로 알현실 문조차 넘어설 수 없어, 그는 열려 있는 문 바로 뒤에 서서 그편만 멀거니 바라보았다.
2년. 자그마치 2년 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클로에가 공작저에 드나들기 시작한 그 어린 시절부터 스무 해에 가까운 우정을 지키는 동안, 그들의 만남이 한 달조차 넘긴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그리도 가닿고 싶었고, 제 마음을 나누고 싶었고, 생각과, 목소리와, 손끝의 온기를 나누고 싶었던 이가…… 거기에 있었다.
상인이 동대륙의 상품들을 소개하는 동안 클로에의 입이 열리는 적은 극히 드물었다. 입꼬리로 아스라한 호선을 자아낸 채, 그녀는 이따금 제 부군이 무언가를 물을 때면 좋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기만 할 뿐이었다.
그걸 지켜보는 내내, 데메트리안은 그녀의 낯에 제가 기억하는 어떤 파문이 기적처럼 일기를 간절히 바랐다.
제 생각을 이야기하며 오르락내리락하던 눈썹, 상대의 짓궂은 말에 찡긋거리던 콧잔등, 말을 꺼낼 타이밍을 재기 위해 작게 벌어지던 입매 같은 것들…….
한 왕실의 비로서 그것이 예법에 어긋나는 일일 수야 있으나, 그녀의 손글씨 하나 받아 보지 못한 2년이었다. 저와 공유했던 그 시절이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확인을 받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뭐라고 말이라도 먼저 꺼낼라치면, 묘하게 싸늘해지는 알현실의 분위기…….
그녀 옆에 배석한 나이 지긋해 보이는 시녀도, 알현실을 책임지는 시종장도, 왕을 대할 때와 2왕비를 대할 때의 눈빛이 사뭇 달랐다.
‘누아제트 영애는 없나?’
스칸다르 왕의 퍽 귀애하는 듯한 눈빛을 받는 것 외에, 그 어느 스칸다르인의 호의적인 시선조차 못 받는 그녀의 모습이…… 속절없이 가슴 저몄다.
그것이 모종의 죄책감이었을까. 그렇다면 그에게 왜 죄책감이 피어오른 것일까.
옥좌 옆에서 가만히 미소만 짓고 있는 그녀를 안타까이 바라보며, 데메트리안은 그 감각에 대해 한참 동안 고민하였다.
도대체 왜, 이토록 심장이 죄어드는 걸까.
그리고 그 생각의 끝의 또 끄트머리에서, 그는 마침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떠나고부터 앓아 온 그의 마음이, 사실은 사랑이었다고.
그 사랑이 시작된 것이 너무도 오랜 일이어서 그것이 사랑인지도 몰랐다고.
그리고 그녀의 안된 처지도, 그것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제 상황도, 그 모든 것이 안일했던 제 탓이라고.
그걸 몰랐던, 그녀에게 솔직하지 못했던, 그녀의 절박한 눈빛을 모른 체했던, 그녀를 잡을 수 있다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그 모든 순간에 대한 후회에, 그는 입안의 살을 깨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어 더 비참했다.
깨달은 순간, 그는 거절한 이도 없이 실연당한 채였다.
***
그날 밤 데메트리안은 제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얼마나 오랜만이었을까. 이렇게 혼자 술잔을 기울이는 것은.
크레벨의 온실에 프리지아가 핀 그날 이후로, 그녀를 멀리서라도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들떴던 마음이 사라지고 나니…… 그 자리엔 후회와 슬픔과 자괴감만이 고여 있었다.
제가 느꼈던 마음이 사랑이었다.
깨닫고 나니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그녀를 잃고 만 뒤였다.
그리고 그녀는, 제가 알던 그녀로서는 행복하지 못해 보였다…….
데메트리안은 스칸다르산 독주만을 연거푸 들이켰다.
똑똑.
익명의 방문자가 찾아온 것은 데메트리안이 그 병을 반쯤 비웠을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