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마지막 후회 (16)
“여기, 부탁한 거.”
눈 덮인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황자궁. 지난달 대니얼이 대신전에서 겹그믐의 날을 지새운 이후로 데메트리안과 처음 만나는 오찬 자리였다.
전채를 낸 시종들이 자리를 비운 뒤 대니얼이 내민 것은 서류가 담긴 봉투였다.
“갑자기 3년 전 대신전 경비 업무일지는 왜?”
“어, 그때 신관 하나가 죽었다길래.”
“……그래, 그런 일이 있었지. 대신전은 불가침 구역이라 조사할 순 없었지만.”
데메트리안은 대꾸도 않은 채 곧바로 서류만 뒤적였다. 제 앞에 놓인 황자궁의 특급 요리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듯했다.
그러고 보면 요즘 식사를 거르는 때가 많아 원로원 하인들이 걱정한댔나.
‘부탁이 있는데. 이번 겹그믐의 날에도 네가 가지? 3년 전 겹그믐의 날 말야. 그달 경비 일지 좀 구해다 줄 수 있어?’
말로는 부탁이었지만, 그의 낯에는 그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어디 가서 허튼짓을 할 것만 같은 기색이 있었다.
얼마 전부터, 그를 볼 때면 어딘가 불안정해 보였다. 라크루아의 영애가 스칸다르로 떠나가게 된 이후로 조금씩 달라져 온 그였지만, 그것이 근 몇 달간엔 꽤나 급격했다.
물론 그것이 저처럼 가까운 이들이나 간신히 눈치챌 정도였지만.
그 사정에 대해 캐물을 수 없어, 대니얼은 그저 그의 오랜 동료인 퓌잘리 누스를 통해 그의 안부를 챙기는 수밖에 없었다.
“좀 먹으면서 해라.”
보다 못한 대니얼이 새우 하나를 그의 입에 밀어 넣으려 했지만, 데메트리안은 고개를 피하며 제 입에 든 말만 뱉을 뿐이었다.
“이거 읽어 봤어?”
“뭐, 대충.”
“어떻게 생각해?”
“……뭔가 묘하게 깔끔하긴 했지.”
대니얼의 답에 데메트리안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새우가 찍힌 포크를 넘겨받으면서도, 그의 시선은 서류에 박혀 있었다.
3년 전, 당시 1황자였던 프레더릭이 신전에서 밤을 새우며 기도했던 겹그믐의 날. 다른 날과 달리 그날의 신전 경비 배치에 대해서는 굉장히 두루뭉술하게 기록돼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날 살해됐다는 신관의 일에 관해서도 구체적인 언급이 없었다.
마치, 그날 바로 적지 못한 일지를 뒤늦게 채운 것처럼.
“하나만 솔직하게 답해 줄 수 있어?”
“너한테만큼 내가 투명하게 구는 사람도 없다.”
“그게 투명한 거면 경시청 심문실 유리창도 투명이다.”
데메트리안이 빈정대며 하는 말에 대니얼은 기꺼운 듯 소리 내어 웃었다. 이 녀석이 농담도 하고, 조금 마음이 편해졌나.
“그래서, 뭔데?”
“혹시 폐하께서…… 후계자로 너를 마음에 두셨었을까?”
대니얼의 낯이 대번에 굳었다. 질문의 의도가 무엇인지 간파하려는 듯, 그의 금안이 데메트리안의 낯을 한참 동안 살폈다.
프레더릭이 대신전에 머물렀던 날의 수상한 경비 일지를 들고서 묻는 의도란 단 한 가지밖에 없을 거였다.
“너, 혹시…….”
그의 시선을 마주한 데메트리안의 푸른 눈동자에 기묘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두 사람은 결국, 서로에게 아무런 답도 내주지 않았다.
그래서 클로에가…….
데메트리안은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
새해가 밝고 캄포 대공가 타운하우스의 수리가 완료되었지만, 루시엔 캄포가 크레벨 공작저를 떠나는 일은 없었다.
독립국 스칸다르가 세를 불리면서 그와 국경을 맞댄 캄포의 대공에게 할 일이 많아진 탓이었다. 대공 부부도 없는 타운하우스에 미성년의 딸 혼자 내버려 둘 수 없다는 구실이 붙었다.
‘대공녀는 이리될 줄 알고 있던 눈치였지만.’
에르베르의 친교 클럽에서 마주친 그날 이후로, 데메트리안은 루시엔과 잘 지내보려던 것도 온전히 포기한 상태였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정혼자와의 미래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부족했다. 많은 걸 놓쳐 버린 과거를 곱씹기에도 심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로이가 갈 수밖에 없겠네.’ 그렇게 간단히 생각하고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았던, 그때의 한심하고 바보 같은 데메트리안 크레벨…….
데메트리안은 아침에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제가 무언가를 잘못 판단했다는 사실에 대해 괴로워했다. 그가 무언가 잘못한 것은 어쩌면 그것이 최초였으니까.
그리고 그 괴로움에 익숙해질 때쯤, 왜 그것이 이토록 괴로운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비정상적인 야합의 결과로 클로에가 스칸다르에 가게 되어서, 그리고 그녀가 바랐을 행복을 누리지는 못하는 것 같아서.
그리고 그녀가 그리되지 않도록 제게 무언가를 바랐어서.
그리고, 또…….
그 문장 너머에 대해 데메트리안이 답을 얻게 된 것은, 그가 하루의 시작부터 끝까지 스스로를 결함 있는 인간으로 규정하며 몰아붙이기 시작하고 몇 달은 지난 뒤의 일이었다.
***
루시엔이 크레벨 공작저에 머무른 지 한 해가 다 되도록 두 사람이 가까워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크레벨 공작 부부에게 큰 걱정거리였다.
결국 크레벨 공작이 나섰다.
데메트리안이 집에도 늦게 들어오고, 밖에서도 끼니를 제대로 챙기지 않는다니 공작부인이 그를 원망하기 시작한 탓이었다.
루시엔이야 어려서, 데메트리안이야 제 의지가 아니어서 그럴 수 있었다. 그들의 불화에서 유일하게 잘못한 것은, 저들의 우정의 상징을 아이들에게 짐 지운 아비들뿐이었다.
“서대륙에서 좋은 차가 하나 들어왔구나. 데미, 네 서재에 갖다 두라 했으니 둘이 티타임 가질 때 한번 맛봐 보거라.”
둘의 티타임이라는 것이 지난 1년간 단 한 번도 없었던 걸 알면서 하는 말이었다.
데메트리안은 더 이상 루시엔과 잘 지낼 마음이 없었고 루시엔도 애초에 협조할 마음이 없었지만, 어른의 말이라면 듣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경의 서재에 오는 건 처음이네요.”
차를 한 모금 맛보고서야 루시엔이 내는 말소리에, 데메트리안은 속으로 허탈히 웃었다. 올 생각이나 했고?
그에 대해 곱씹는 대신, 새로운 차를 즐기는 것이 분명 즐거움이었던 때를 떠올리며 찻잔에 입을 묻었다. 서대륙의 유명한 녹차로 만든 시트러스 가향 차는 꽤나 풍미가 좋았다.
‘멜라니네 다과회에서 남대륙 차가 나왔는데, 오렌지로 가향한 게 부담스럽지 않고 괜찮더라. 네가 가향된 건 별로 안 좋아하지만, 그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차를 함께 익히며 서로의 취향을 알고, 다과회에 드나들기 시작하고서부터는 어떤 차를 마시건 서로를 떠올리게 되었던…… 그녀가 생각날 수밖에 없었다.
‘가향차 좋아하는 로이가 분명 좋아할 풍미네.’
몇 달 전 그녀의 생일 때 멋없는 편지나 보내고 말았으니, 새해 인사 겸 이 찻잎을 보내 줘 볼까.
그게 그녀의 손에 닿는다는 보장이, 이제는 없지만…….
제 앞에 앉은 이도 잊고서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그 표정이 꽤나 따스했다. 언젠가부터 혼 빠진 사람처럼 굴더니.
‘분명 저건 정인을 생각하는 표정인데.’
거기에 자동적으로 연상되는 이름자가 있었다.
작게 웃은 루시엔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서재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경께서 어렸을 때 리도테에서 청강하셨다고요.”
“네, 뭐…….”
“그럼 그 시절 교재 같은 것들도 있으시겠어요.”
웬일로 살가이 말을 붙이나. 데메트리안은 의아한 마음을 누른 채 찻잔을 내려놓고 그녀가 구경하는 편으로 따라갔다.
“작은 공자님께서는 책을 타인에게 빌려주지 않으신다셔서.”
“루이폴트에게서 책을 빌리려 하셨습니까?”
“그분과는 잘 지내도 아무런 영향이 없으니까요.”
데메트리안은 작게 미간을 찌푸렸다. 저와는 무슨 영향이 있어서 잘 지내지 않는 편을 택했나.
그때, 무언가를 발견한 루시엔이 재밌다는 표정을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어머. 비스킷도 즐기시고.”
책상에서 가장 가까운 책장에 데쎄르의 양철 케이스가 있었다. 한때 클로에와의 독서회에서 읽었던 책만 모아 놓은 칸이었다.
데메트리안의 얼굴이 기묘하게 얼어붙었다.
“아, 그건.”
“케이스가 예전 디자인이네요?”
“네, 좀 된 거라…….”
루시엔이 집어 들자니 안에서 사락, 종이 껍질 부딪는 소리가 났다. 루시엔이 뚜껑을 열려 할 때였다.
“상했을 겁니다.”
데메트리안의 손이 그 뚜껑에 내려앉았다. 열지 못하게끔 저지한 손길은 그대로 뺏듯이 그 양철 케이스를 넘겨받았다.
루시엔의 입꼬리가 비대칭적으로 올라갔다.
“……아하.”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기색도 모르고서, 데메트리안은 그 양철 케이스를 원래 있던 자리로 돌려놓았다. 따스한 색채의 일러스트가 그려진 것이 정면으로 보이도록 세심하게 조정하면서.
그 아래 칸에는 이 서재에 썩 어울리지 않게도 동화책이 몇 권 꽂혀 있었다. 어린 시절의 데미와 로이가 나눠 읽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주고받은 편지를 모아 놓은 보석함까지…….
누가 봐도 사연이 있는 구역이었다.
루시엔은 속으로 웃었다.
“클로에 라크루아……. 그런 이름이죠?”
뒤에서 울리는 루시엔의 목소리에 데메트리안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홱 고개를 돌려 보니, 루시엔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재작년 성배 송환 협상 때 스칸다르에 공비로 가신 궁정백의 따님요.”
“그건 왜…….”
“경께서 그분과 연락 닿는 사람이 있는지 알아보신다는 이야기가 고티유에 파다해, 아직 데뷔탕트도 못 치른 어린 저에 대한 동정 여론이 형성된 것. 알고 계셨나요?”
흑흑, 루시엔은 장난처럼 우는 소리를 덧붙였다.
“……그럴 의도는.”
“아니셨겠지만요.”
루시엔은 제 정혼자의 당혹스러운 낯을 쳐다보았다.
데메트리안 크레벨. 제가 고티유를 들락거리면서 그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을 때, 안 좋은 평가 한 번 들려오지 않던 공작가 후계자의 정석 같은 청년.
인간 대 인간으로 그를 만났더라면 좋은 관계를 맺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적당히 고지식한 한편으로, 저처럼 무엇이든 잘 해내는 이라면 말이 잘 통할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여덟 살은 어린 저를 기다리겠다는 건지, 반항했다는 소리 한번 들려오지 않는 정혼자는 아무래도 결함이 있어 보이는 것이었다.
‘같이 거부했으면 아버지들끼리 협상이라도 했을 텐데. 어린애 기다리는 이상 성욕자도 아니고.’
마치 제단처럼 정돈된 구역을 곁눈질하며, 루시엔은 데메트리안 쪽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그를 삐딱하게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냉소가 담겨 있었다.
“크레벨 경과 라크루아 영애의 뜻깊은 우정에 대해서는 제가 걸음마 떼기 전부터도 유명한 이야기던데.”
“…….”
비아냥대는 듯한 루시엔의 말에, 데메트리안은 미간을 좁힌 채 그녀를 내려다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의 낯에 미미하게나마 치부를 들킨 듯한 기색이 떠오르는 것이, 루시엔은 자못 흡족했다.
“해묵은 약속을 깨고 먼 나라로 떠나가지 못하게 발목 잡을 정돈 아니었나 봐요?”
데메트리안은 울컥하고 말았다. 제가 뭘 안다고…….
스스로도 괴로운 일을, 남이 그리 들쑤시니 너무도 억울했다. 게다가 그녀는 그냥 남도 아니니까…….
상처 입은 듯한 그의 낯을 바라보는 루시엔의 시선은 내내 이루 말할 수 없이 차가웠다.
“그 아버님들 약조가 번거로운 건 본인만일 줄 아셨나.”
그 짓씹듯 내뱉는 말이 곧, 지난 1년간 지속된 의문에 대한 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