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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했는데 첫사랑이 수상하다-137화 (137/189)

137화. 마지막 후회 (15)

멜라니의 도움을 받아 클로에의 리도테 친구들이나 다과회 고정 멤버들에게 연락해 보았더니, 스칸다르의 국혼 전후로 편지를 보내지 않은 이들이 없었다.

답신을 받은 이 또한 없었고.

제가 아는 클로에의 지인들 또한 비슷한 사정이었다. 루카 또한 결혼 축하 서신을 보냈지만 답을 받지 못했다고 했다.

‘캔달우드 공녀하곤 연락하는 눈치였지만…….’

몇 번 더 메리앤을 찾아갔지만, 그녀는 세모눈만 뜰 뿐 좀체 똑바로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것이 유일한 친구를 다시 보기 힘든 곳으로 떠나보낸 슬픔 때문인지, 모종의 이유로 그를 탓해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제 와서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인데?’

다만 확실한 것은, 그녀가 전해 듣는 스칸다르의 사정이 그리 좋지 않은 듯하다는 것이었다.

‘연락하는 이 하나 없다는 것부터가 좋은 건 아니니까…….’

제가 아는 클로에 라크루아는, 친우의 편지를 사뿐히 무시할 인물이 못 되었다.

말로는 사교계에 데뷔한 귀족 영애의 소양이어서라고 했지만, 그녀는 진심으로 다과회나 정찬회 등의 모임에 참석하는 것을 즐겼다.

그런 데서 있었던 이야기들을 즐거운 듯 조잘대던 그녀의 발랄한 낯이 눈앞에 가물대었다.

‘고티유에 아예 안 올 것도 아니고, 못 온대도 무례하게 굴 애도 아닌데. 오히려 편지를 기다리면 기다렸지.’

데메트리안은 제가 기억하는 클로에를, 제가 평생을 알아 온 그녀의 성정을 믿었다.

자기 하나한테만 답신하지 않는 거라면 제 잘못이겠지만, 이건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건데…….

빈속에 두 번째 잔을 비우며, 취기에 눈 밑이 달아오를 무렵이었다.

“그렇게 하는 걸로 알고 서류 꾸려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귓가를 파고드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가 너무도 잘 아는 목소리, 다만 이런 곳을 배경으로 들을 줄은 몰랐던 목소리였다.

‘설마.’

데메트리안은 머리통을 벽에 바싹 붙여 그 너머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또 다음 주 이 시간 여기서 뵙는 거지요?”

한 중년인의 목소리가 울렸다. 귀족 같진 않지만 말투가 퍽 고상한 것이 학식을 익힌 평민인 듯했다.

또 다음 주 이 시간이라……. 그러고 보면 그가 빛의 날부터 여기를 찾은 게 처음이긴 했다.

“네. 이렇게 밖에서 봬야 하니 저도 불편하지만, 이해해 주세요.”

“저희 거래가 하루 이틀도 아니고요. 대공저 수리는 언제 끝난다던가요?”

“조만간 끝나기야 할 것 같은데, 아버지께서도 내년부터는 영지에만 계실 거라고, 계속 거기 머무르라시네요.”

“어휴, 아가씨 올라오시고서 일 좀 편하게 하려나 했더니.”

역시 어느 정도 배운 듯한 평민의 목소리가 하나 더.

거기에 따라붙는 쿡쿡 웃는 웃음소리는 분명히 아는 사람의 것이었다.

“고매하신 공작가에 누가 될까 두려워 손님도 마음대로 못 부르고……. 제가 늘 죄송해요.”

빈정거리는 말투가 흡사 지문과도 같았다. 대공녀가 왜 여기에……? 얼굴에 스멀스멀 올라오던 술기운이 확 깨는 것 같았다.

“아이구, 저희 앞에서 그런 험한 소리 하지 마십쇼. 화 입기 싫습니다.”

“아가씨나 되시니 공작가를 그리 말씀하시지. 작년에 갑자기 정체 밝히셨을 때 한들룽 상인들 놀라 자빠졌던 거 생각하니 아직도 아찔합니다요.”

“화는 무슨 화인가요? 아저씨들이 제게 이리 공대하시는 게 저에겐 화지요.”

“저희가 어찌 감히 대공녀께.”

“이리 부담스러워하시면 거래 힘들어요.”

“아이고, 캄포 상단을 놓칠 순 없지만요.”

한들룽 상인……? 캄포……상단?

‘캄포에서 몇 년 전부터 운영하기 시작한 상단에 대공녀가 관여돼 있다고?’

게다가 작년이면 대공녀가 리도테에 들어가며 제도에 처음으로 올라온 해인데. 그전부터 제도를 드나든 거였나.

그때, 그편에서 사람들이 일어나는 소리가 났다. 데메트리안은 재빨리 후드를 깊게 눌러 쓰고서 벽에 몸을 붙였다. 그들의 시선에 걸리지 않기를 바라며.

자리에서 일어난 일행은 데메트리안이 앉은 쪽 테이블을 스쳐 지나갔다. 두 평민 사내의 뒤를 따르는 것은 분명 루시엔과 늘 붙어 다니는 그 덩치 큰 마부였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다른 사내들에 비해 명확히 자그마한 실루엣.

일순간 그녀가 발걸음을 멈추더니, 이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후드 너머로 그쪽을 살피던 데메트리안의 시선이 그녀의 새까만 눈동자와 마주치고 말았다.

그 눈동자에는 시선을 피하려는 기색조차 없었다. 얼마 후 한쪽 입꼬리를 슬며시 들어 올린 그녀는, 이내 사내들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데메트리안이 귀택한 것은 그로부터 두 시간쯤 뒤였다. 술이 확 깼지만, 자칫 그녀와 마주칠까 봐서 곧바로 자리를 뜨지 못했던 터였다.

잘못한 것이 있느냐면…… 그녀가 있는 공작저를 불편하게 여긴 마음밖에 없었지만서도.

그가 마차에서 내려섰을 때, 평소 같았으면 집사가 나와 있었을 그 현관에 루시엔이 있었다. 늦가을 쌀쌀한 밤공기에 대비해 숄을 걸친 것이 그를 기다린 모양새였다.

“오셨어요? 좋은 저녁이에요.”

“……네. 좋은 저녁입니다.”

맞았구나. 루시엔이 이 저택에 오고서 제게 먼저 말 붙이는 경우란 전무했으니 말이다.

“평민들 사이에 녹아드실 거라면 구두는 좀 신경 쓰셔야겠더군요.”

팔짱을 낀 그녀는 눈을 어슷하게 내리깔아, 그의 구두코를 눈짓하며 다짜고짜 말했다.

아, 어떻게 제가 있는 줄 알았나 했더니.

벽 쪽으로 몸을 파묻느라 테이블 바깥으로 내뻗은 다리가 실마리였던 모양이다. 크레벨 공작가의 구두를 대대로 맞춰 온 장인 특유의 비대칭적인 구두코 모양을 떠올리며 데메트리안은 실소를 머금었다.

실은 그 구두에 쓰인 가죽이 그 광택으로 보아 캄포산의 최고급 소가죽이 틀림없어서였던 거였지만.

루시엔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매주 빛의 날. 거기서 제 지인을 만나고, 앞으로도 그걸 바꿀 생각은 없어요. 크레벨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제가 포기한 게 너무 많아서.”

“그러니까 지금.”

“네. 그땐 일찍 귀택하시길 권고하는 거예요.”

데메트리안의 미간에 실금이 졌다. 그러니까, 밖에서 마주치지 않게 알아서 피하라는 거였다.

아니, 저는 미성년이 술집 드나드는 게 뭐 당당해서…….

“정 밖이 좋으시면 차라리 올란센 클럽을 추천해요. 여송연 대유행 때 부작용으로 주인이 죽는 바람에 귀족들 아무도 걸음 안 하는 곳이거든요.”

데메트리안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제 정혼녀의 낯만 쳐다보았다. 팔짱을 풀지 않은 채 저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검은 눈동자에 일렁이는 것은, 분명 일종의 적의였다.

“생각만큼 고지식한 분은 아닌 것 같아서 드리는 조언이랄까요. 그래도 제 평가 점수가 양수가 될 일은 없겠지만.”

내가 무슨, 제 평가를 바란다고. 데메트리안은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

***

“그래서, 사교클럽 대신 대신전에 오셨다? 미친 새끼네, 이거.”

“이게 네가 노래 부르던 스체르바뇰산 27년이 아닌가 보지?”

“형제님의 신실함이 주신께서 보시기에 평범함을 넘어선 듯하다는 의미였습니다.”

루카가 건들건들 합장하고 꾸벅이며 하는 말에, 데메트리안은 피식 웃으며 소파에 몸을 묻었다.

그래, 애초에 이랬어야 했다. 크레벨 공작가의 후원을 받았던 루카미오노와 회동을 한다면야 이 일탈도 적당한 이름표를 얻게 될 테니까.

그리고 그와는, 그녀를 함께 추억할 수도 있었고…….

루카는 데메트리안이 가져온 위스키 병에 황홀한 듯한 시선을 보내면서 뇌까렸다.

“그래서, 정혼녀께서 너한테 ×같이 군다 이거지?”

“너는, 말을 해도.”

“정혼이 아름답기가 쉽지가 않더라. 마나님들 뵈니까.”

너랑 만나는 부인들이 다, 그런 말을 꺼내려던 데메트리안은 입을 꾹 다물었다.

닭이 먼저고 달걀이 먼저고를 논하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제 결혼생활 또한 그녀들의 것처럼 퍽 고달파질 것이 눈에 선했기 때문이었다.

제가 이 혼약에 기대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마음이 맞는 여인과 함께 가문의 일들을 상의하며, 서로의 생각을 숨기지 않고, 모든 일을 함께하며…….

그 상상에 따라붙는 얼굴이 따로 있어서, 데메트리안은 루카가 따른 술잔을 급히 들이켰다.

“혼자 마시던 티 내지 말고, ××아.”

루카가 짐짓 인상을 구기며 그의 잔에 제 잔을 부딪쳤다.

잠들기 위해, 또 자꾸만 클로에의 생각이 드는 것이 곤란해 혼자 연거푸 마시던 것이 잘못된 버릇으로 들었다.

“저번에 연회 갔을 때 보니까 성깔 장난 아닐 것 같던데.”

“대공녀?”

“데뷔탕트도 하기 전인데 그렇게 주목받는 건 처음 봤어. 뭐, 피오나 앨포드도 결혼했으니 사교계의 꽃 자리가 비긴 했지. 크레벨의 권세가 사교계에까지 이르겠더라.”

그 말을 듣는 데메트리안은 다리를 멀리 꼬아 둔 채, 제 손에 든 위스키 잔을 흔들어 얼음 부딪는 소리를 냈다. 그 스스로도 정혼자에게 관심이 없는 게 선연했다.

쯧, 루카는 속으로 혀를 차며 슬며시 덧붙였다.

“예전의 클로에 같은 위치인데, 권력 쥐려는 게 보인달까.”

그 소리에 데메트리안의 낯이 그 짤막한 사이 굳어 버렸다. 슬며시 굴러 루카를 향한 그 눈동자가 그토록 빛난 건 정말 오랜만의 일이었다.

어휴, 이렇게 빤하게 굴 거면서. 루카는 속으로 실소하며 화제를 돌렸다.

“그, 알아보던 건 잘돼 가?”

“……그대로야. 아무도 연락이 안 됐대.”

“××, 그 스칸다르 왕자 새끼. ×같이 쪼개는 것부터 ×× 편집적으로 굴 것처럼 생기긴 했었어.”

루카로 말할 것 같으면 그 모든 것의 원흉으로 스칸다르의 왕을 지목하는 편이었다.

데메트리안은 거기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기왕이면 모든 것이 제 착각이어서, 실제로는 그녀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한구석에 진득한 것이었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응접실 문이 열렸다. 열 살쯤 되어 보이는 급사 소년이 쪼로로 들어왔다.

“저어, 사제님.”

“무슨 일이니?”

데메트리안은 제 비웃음을 숨기기 위해 위스키 잔에 입을 묻어야만 했다. 그가 인자한 척 사제님 말투로 말하는 건 몇 번을 봐도 우스웠다.

“아까 보물고 청소를 하다가 제 용돈 주머니를 떨어뜨린 것 같아서요. 거기에 예전 고아원 식구들 편지도 있는데…….”

“다른 데는 다 찾아봤고?”

“네에, 숙소에도 없고, 같이 청소한 애들도 다 못 봤대요.”

소년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고아원 출신이라니 루카가 약할 법도 했다.

“잠깐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렴.”

“네!”

소년은 밝은 낯이 되어서 곧바로 방을 빠져나갔다.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은 루카는 한숨을 푹 쉬며 일어나 겨울용 가운을 덧입으며 중얼거렸다.

“그 ×같은 새끼가 보물고 맡았다고 콧대만 높아서, ××.”

“사제 아니면 못 들어가서 그러는 거지?”

“대신관하고 담당자밖에 못 들어가지.”

“너는?”

루카가 피식 웃었다.

‘아, 역시 그런가.’

몇 년 전 탄신연 때 대신관 대신 주신의 목소리를 받은 데서도 알아봤지만, 대신관의 후계 가도를 걷고 있는 것이 확실한 모양이었다.

“근데 왜 너한테 와?”

“지금 담당하는 새끼가 완전 쓰레기거든. 전에 담당하던 놈은 재수 없긴 했어도 애들한테 ××은 안 떨었는데. 그 새끼처럼 안 뒈질라고 악을 쓰나.”

“죽어?”

“어어, 몇 년 전까지 보물고 담당하던 새끼. 신전에 헌금 털린 날 있지? 그날 뒈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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