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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했는데 첫사랑이 수상하다-136화 (136/189)

136화. 마지막 후회 (14)

“그렇기는 합니다만, 루시엔 양이 크레벨에 머무르시는 것이 널리 알려져 있으니 아무래도…….”

“아, 제가 그날 선약이 있는지라. 거절의 말씀을 드리게 되어 죄송한 마음에 그리 여쭌 것뿐이에요.”

정혼자로서의 의무를 면피하고 싶다거나 뭐 그런 건 아니고요.

루시엔이 노래하듯이 그리 덧붙였다. 누가 봐도 그런 마음이 빤히 보이는 표정으로 생긋 웃으면서.

그 미소가 명백한 축객령이어서, 데메트리안은 그대로 응접실에서 빠져나왔다.

루시엔을 마주할 때마다 겪는 패배감의 근원은, 기본적으로 그가 그녀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

“소공작님. 와 주셔서 여, 영광이에요.”

“결혼 축하드립니다, 영애. 아니지, 이젠 랑엔펠트 부인이시군요.”

“감사합니다…….”

시월의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결혼식이 치러진 알로제 백작저의 정원.

신부의 얼굴에 장밋빛으로 물들인 화장 이상으로 짙은 홍조가 떠올랐음이 선연했다.

저를 볼 때면 늘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말을 더듬는 멜라니 알로제. 클로에의 리도테 시절 친우였다.

데메트리안과 함께 황실 소년 병사단 활동을 했던 랑엔펠트 백작 영식 막시무스와 소꿉친구여서, 그 시절에 그를 구경한답시고 놀러 왔다가 크레벨의 어린 후계자를 동경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같은 소꿉친구라도, 로이는 몇 번 보러 오지도 않았는데.’

그게 결혼으로 귀결된 그들의 우정과, 연락조차 닿지 않게 된 이 우정의 차이일까.

두 사람의 결혼식을 보는 내내, 데메트리안은 오히려 혼자 오게 된 것이 다행이다 싶었다. 클로에가 떠오르지 않는 구석이 없었던 것이다.

“와 줘서 고마워, 소공작.”

“당연한 것을. 축하해. 잘 살고.”

“그래. 이제 우리 392기 중에 소공작만 남았네. 왜 혼자야?”

“말마따나 미혼이잖아, 나는.”

“한 지붕 살면서 성년 미성년 따지자고 선 그으면 재미없어. 혼자 와서 칙칙하게 술이나 마시고. 멜라니가 결혼해서 아쉬워하는 사람 같잖아.”

신랑 막시무스가 느물대며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데메트리안은 제가 앉아 있던 테이블에 올라와 있는 위스키 잔을 흘기며 실소했다.

“막스, 소공작님께 무슨.”

옆에서 멜라니가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을 지으며 그의 팔을 흔들었다. 그녀는 두 사람의 사이에서 막시무스의 편을 드는 법이 없었다.

그 풍경이 떠오르게 하는 것이 또 있어, 데메트리안은 큰 의도를 담지 않은 양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지난 열몇 달 동안 묵혀 두고 또 묵혀 두었던 말을.

“오늘 같은 날 로이가 왔으면 좋았을 텐데요.”

“……몰라요, 이젠.”

멜라니의 입술이 토라진 듯 빼죽 튀어나왔다. 데메트리안의 앞에서라면 늘 수줍어하던 그녀치고 적극적인 내색이었다.

하하, 막시무스가 멋쩍게 웃으며 물었다.

“자네는 라크루아 영애, 음, 이젠 아니지. 아무튼. 연락이 돼?”

그 물음에 데메트리안은 심장이 작게 내려앉는 것 같았다. 충격이 여실한 그의 얼굴을 눈치채지 못한 채 막시무스는 말을 이었다.

“가자마자 멜라니가 몇 번 편지 보냈는데 답이 없어서 얼마나 울던지. 저번 달에도 결혼식 날짜 다가오니 싱숭생숭하다고 편지 보냈는데, 여태껏 또 답이 없다더군.”

“배신이야, 정말.”

“울면 안 돼. 못생겨져.”

멜라니의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리며 눈초리에 눈물방울이 맺히자, 막시무스가 재빨리 제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눈 밑을 콕콕 찍어 주었다.

지난 1년여 동안 무시당한 이력을 막시무스가 대신 읊어 주자 설움이 복받친 모양이었다.

“영애, 아니, 부인께서도 답을 못 받으셨던 건가요?”

“저도라면…… 아니, 소공작님도요?”

“그러게요…….”

이틀 뒤 빛의 날, 데메트리안은 입궁하자마자 황자궁으로 향했다.

평소 황자궁을 찾을 때면 대니얼에게 용건이 있었지만, 오늘의 목적지는 다른 곳이었다.

황자궁의 2층, 정원이 가장 아름답게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한 응접실. 갑작스레 데메트리안을 맞이하게 된 캔달우드의 공녀는 꽤나 놀란 눈치였다.

“스체르바뇰에 대해 뭐라도 알려주러 왔어? 나한테 말해 봐야 결정권 없는 거 알잖아.”

오랜만에 보는 메리앤은 꽤나 까칠해져 있었다. 미라벨과 마찬가지로 마치 클로에를 두고 경쟁하는 사이처럼 굴었기에 툭툭거리는 거야 예사였으나, 그 결이 확연히 달랐다.

“공녀의 혼처에 원로원이 뭐 얼마나 권한이 있다고.”

“원로원 의장 보좌관 나부랭이의 의견은 더더욱 안 중요하겠지. 혹시 트레야나 캔달우드에서 지랄하는 거 전하러 온 거면 그거 들을 생각도 없고.”

메리앤이 빈정거리는 낯을 조금도 숨기지 않은 채 말했다.

지난해 메리앤이 성년이 되고 또 마침 말레카와의 혼사가 완료되면서 황제의 저울질이 본격화된 차였다. 그 후보국인 스체르바뇰, 에티아, 그란디시 세 나라의 대사들이 계절마다 황궁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공녀의 일로 온 거 아냐.”

“그럼 뭔데? 간단하게 말해.”

왜 이렇게 날카로워? 그리 묻고 싶은 걸 참으며 데메트리안은 그녀의 낯을 살폈다.

그가 메리앤을 만날 때면 대부분 클로에와 함께였다. 그런 때면 늘 발랄히 굴던 그녀였는데, 그 안색이 냉소적인 성미도 못 가릴 만치 퍽 파리했다.

그는 속으로 그녀를 살며시 연민했다. 폐하께서 저울질을 좀 독하게 하고 있긴 하시지.

그 연민을, 메리앤 또한 제 얼굴을 보며 하고 있는 것도 모르고서 말이다.

“혹시 말야……. 로이랑 연락이 돼?”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로이랑 리도테 때 친했던 알로제 영애 알지? 지난 주말에 결혼해서 다녀왔는데 답신을 한 번도 못 받았다잖아.”

메리앤의 푸른 눈동자가 가느스름해졌다.

“그 자리에 있던 로이랑 좀 친했다 싶은 영애들 물어봤더니 아무도 답신을 받은 사람이 없대.”

“그래서?”

“이상하잖아.”

“경은?”

“나도 뭐……. 아무튼, 공녀는 연락이 돼?”

메리앤이 등받이에 몸을 깊이 기대며 팔짱을 꼈다. 고개를 모로 숙이며 올려다보는 그녀의 시선에는 미심쩍음이 들어 있었다.

데메트리안은 그녀의 시선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제가 얼마나 초조한 낯으로 그런 말들을 내뱉고 있는지 몰랐기 때문에…….

“경이 그걸 왜 걱정해? 언니가 누구하고 연락이 되건 말건.”

“그 애 성정에 일부러 연락을 끊었을 리도 없고. 영문도 모르고 아무하고도 연락이 안 되면 얼마나 슬프겠어? 나야 연락을 못 받아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고…….”

“왜 어쩔 수 없는데?”

“그야…….”

데메트리안은 더 이상 답을 맺어내지 못하고 입술 안쪽 살만 깨물었다.

클로에가 가고 싶지 않아했음을 잘 알았다. 그럼에도 그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당시의 그는 단순하게도, ‘로이가 갈 수밖에 없겠네’라고 납득하고 말았던 것이니까.

가지 않을 명분도 없었고, 가지 않게 할 수도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가지 못하게 할 방법이 있으리란 생각조차 못했다.

데메트리안이 가문 간의 혼약에 따라 캄포의 대공녀를 부인으로 맞아들이고, 그 전에 클로에가 크레벨이 아닌 다른 어딘가의 부인이 되는 것은…… 스무 해 넘도록 그들이 그려 온 미래였으니까.

그건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명제였다.

“……외간 남자랑 연락하는 걸 좋아하는 남편이 어딨어.”

데메트리안은 찻잔 테두리에 시선을 고정한 채 중얼거리듯이 답했다.

외간 남자.

스스로 거기에 제 위치를 정하고 나니, 지난 모든 세월을 겹겹으로 꽁꽁 싸매 두었던 자기기만의 포장지가 일거에 벗겨지고 말았다.

데미와 로이는 깊은 친구였다.

친구였고, 서로에게 단 하나뿐인 이성이었다.

두 사람 모두 우정의 껍데기를 걷어낼 생각조차 하지 않았지만.

‘……그러니까 말인데.’

그러니까 그것이, 자꾸만 제 마음을 헤집고 마는 그때의 눈빛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녀가 내비친 진심이었다.

그가 외면하고 말아 버린…….

메리앤은 그를 노려보던 시선을 거두어 창 너머의 정원을 바라보았다. 겨울을 맞을 준비 중인 황자궁 정원은 그 스산함마저 고즈넉했다.

메리앤은 보기 좋게 가지치기된 헐벗은 나목이 제 맞은편에 앉아 있는 신사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우아한 자세로 앉아 잘 다듬어진 표정과 칼 같은 예법으로 차를 마시고 있지만, 그 눈동자 너머에 공허가 비치는…….

제가 기억하던 것보다는 얼굴이 거칠해져 있었고, 잠을 잘 자지 못하는지 눈 밑도 우묵했다.

“고자 새끼.”

“……뭐?”

“몰라. 언니가 누구랑 연락을 하건 못하건, 스칸다르에만 가지 않았으면 되는 일이잖아.”

메리앤의 목소리에는 가시가 한가득이었다. 불쾌한 듯 미간에 금이 가 있어서, 데메트리안은 그녀가 울음을 참고 있다고 생각했다.

데메트리안은 제가 주말만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마치 지금처럼.

지난 한 주를 어떻게 마쳤는지 잘 생각나지 않았다. 벌써 3년도 넘게 맡고 있는 보좌관 일이었고, 3년도 넘게 합을 맞추는 동료도 있으니 아마…… 뭘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잘 마쳤을 거였다.

주말을 맞이하고서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몰랐지만. 그녀의 일에 대해 마음껏 생각하고 싶다는 것 말고는…….

퇴궁하여 크레벨의 마차에 올라, 데메트리안은 얼마간 말이 없었다.

“귀택하시는 거 맞죠? 왜 수련하기 싫은 어린애 같은 표정이십니까?”

그의 맞은편에 앉은 파이겐이 농지거리하듯 물어왔다.

흔들리는 차창 너머로 그 익숙한 귀택 길을 바라보는 데메트리안의 낯에 괴로움이 걸렸다. 이 풍경의 끝에 나오는 공작저, 그곳에는…….

흠. 데메트리안은 낮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사교클럽에라도 갈까.”

“어이구, 신사님들이 좋아하시겠네요. 마지막 주도 아닌데.”

“신사들…….”

그때까지 데메트리안의 음주는 그의 서재에만 국한된 이야기였는데, 이젠 공작저가 그에게 평온한 공간이 되지 못하는 게 문제였다. 그가 마음껏 생각하고 싶은 대상은 정해져 있는데.

하지만, 사교클럽이라고 해서…….

“조용한 데는 없을까?”

“슈바츠 거리의 비공인 사교클럽에 종종 가신다고들 합니다마는. 밖에서 한잔하시게요?”

“집에 가면 아무래도 번잡해서.”

그가 창밖 어딘가에 시선을 붙박아 둔 채 중얼거리듯 하는 대답이었지만, 파이겐은 그 ‘번잡’에 담긴 의미를 대번에 알아차렸다.

‘안 맞기가 그리 안 맞기도 어렵지.’

그는 작게 제 주인을 연민하고는 쪽창을 열어 마부에게 슈바츠 거리로 향하자고 전했다.

그날 이후로 데메트리안은 이삼일에 한 번씩 에르베르의 친교 클럽을 찾게 되었다. 파이겐이 근위대 종자 시절의 동료와 만날 때면 들르는 곳을 소개한 것이었다. 귀족 나리들 잘 안 다니더라면서 말이다. 그도 덩달아 친우들을 만날 수 있으니 좋은 일이었다.

친교 클럽의 종업원은 이제는 퍽 눈에 익은 신사께 안쪽의 소파 자리를 내주었다. 로브를 입고 후드를 푹 눌러 썼대도, 그의 걸음걸이며 잘 닦인 구두코 같은 데서 귀족임을 몰라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후우.”

데메트리안은 자리에 앉으며 나무로 된 가벽에 머리를 기댔다. 그 가벽이 앉아 있는 사람 머리통은 가릴 수 있을 정도로 높이 올라와 있어서, 다른 쪽에 앉은 이들과 시선을 마주칠 염려가 없었다.

데메트리안은 손가락으로 미간을 꾹꾹 누르며 침음했다.

‘로이와 연락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지, 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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