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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했는데 첫사랑이 수상하다-129화 (129/189)

129화. 마지막 후회 (7)

쾅!

굉음이 한 번 더 울렸다. 바닥이 흔들리는 느낌에 검은 두건 중 하나가 재빨리 창가로 다가가 밖을 살폈다.

“밖에 침입자가 있습니다!”

우두머리는 그를 따라 창밖을 흘끗 살폈다. 한 소대 정도 돼 보이는 기사단…… 그리고 그 2인조. 쯧.

“한 명은 여기 남고.”

우두머리를 따라 검은 두건들이 계단참으로 빠져나갔다.

그 소란에도 우리에 갇힌 이들은 미동도 없었다.

* * *

메리앤은 결국 클로에의 무릎에 잠들고 말았다. 아직 22시, 오랜만의 밤마실이 아쉬운 두 아가씨는 실없는 소리를 떠들며 시간을 보냈다.

“다음에 루비 공녀님 만나면 덕분에 내가 너랑 마음 놓고 놀러 다닌다고 감사해 해야겠다. 탄신연 때 말했어야 했는데.”

“그러니까, 어딜 혼자 그렇게 쏘다닌 거야?”

“으응, 밖에 계속 있었다니까?”

“몇 시간 동안 혼자 바람 쐬는 것도 지겹지 않아?”

미라벨로 말할 것 같으면 탄신연 1부가 끝나고 캄포 대공가가 귀택할 때까지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은 것이었다.

“……뭐어, 달밤에 수련 좀 했달까.”

“드레스 입고서?”

“어허, 고수는 옷차림에 개의치 않는 법.”

미라벨이 짐짓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하하, 클로에가 꾸밈없는 목소리로 웃어 보였다.

그러니까, 이런 분위기가 좋았다. 아무리 미라벨과 단둘이라지만 밖에서 다닐 때면 아주 긴장을 놓을 순 없었는데. 가면 덕분인지 어두침침한 조명 덕분인지 술기운 때문인지 편하게 웃고 떠들 수 있었다.

어떤 비밀도 덮어 줄 것만 같은 분위기에 리도테의 영애들이 물담배 바를 찾는지도 모를 일.

“으으어……억!”

그때였다. 갑작스레 웬 사내 하나가 그녀들이 있는 평상에 고꾸라진 것은.

“뭐야?”

미라벨이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내가 쓰러지는 양에 평상 앞을 가리고 있던 인조 나무가 함께 꺾이며 쓰러졌다.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손님아……. 아가씨들, 죄송합니다요.”

잽싸게 주인장이 튀어왔다. 그는 이런 일이 익숙한지 놀라지도 않고, 쓰러진 남자를 일으키려 애쓸 뿐이었다.

평상 위에 무너진 채로 신음만 내던 남자는 주인장이 저를 일으키려 용쓰자 불분명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으으……. 조용히 좀……. 히힛, 히히힉.”

이어지는 기이한 웃음소리. 클로에와 미라벨은 에르베르의 친교 클럽에서 쫓겨나며 낄낄대던 사제 로브 입은 남자를 거기에 겹쳐보았다.

클로에와 미라벨은 슬그머니 눈빛을 교환했다.

잠시 후, 종업원이 와서 그 사내를 끌어내는 데 성공한 뒤.

“아이고, 아가씨들. 정말 죄송합니다요. 여기 와서, 저, 술을 저리들 마셔대서.”

주인장이 둘러대었으나, 사내의 행동이 알코올 때문은 아님을 두 아가씨가 알았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아이고, 저…… 물담배 다 태우셨으면 숯을 새 걸로 갈아 드릴깝쇼?”

미라벨이 클로에를 쳐다보았다. 클로에는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메리앤이 잠들기도 했거니와, 스스로도 별 재미를 느끼지 못한 것이었다.

“아직 좀 남아서 괜찮아.”

“그럼, 저, 드시던 것 한 잔씩 더 드리겠습니다. 아이고, 이거 죄송해서 어째.”

“괜찮은데.”

주인장은 잽싸게 클로에가 마시던 에일과 미라벨이 마시던 오렌지주스를 한 잔씩 더 대령했다.

주인장이 가자마자 미라벨이 소곤거렸다.

“여기서도 여송연을 태운 건가? 눈 안 매웠는데.”

미라벨은 요즘 슈바츠 거리에 올 때마다 눈이 매워서 고생이었다. 오늘도 오는 길에 한껏 손 부채질을 한 터였다.

하지만 여기 들어오고서는 괜찮았는데.

“그러게. 여기는 물담배만 취급하니까…….”

여기서 실내를 메운 뿌연 연기란 숯이 타며 나는 흐린 연기나 수증기가 다인데.

그리 생각하며 클로에가 고개를 갸웃할 때, 갑작스레 언젠가 들었던 말소리가 떠올랐다.

‘궁에 있는 것은 위험한 것이라 안 됩니다.’

‘갑자기 많이 흡입하면 쇼크가 오는지라.’

손님과 만나고 온 날이면 여지없이 담배 냄새가 나는 부군에게, 클로에는 언젠가 그의 취미를 알려달라고 청한 적이 있었다.

그때 뷔욘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눈썹을 슬며시 늘어뜨리며 거절의 말을 뱉었더랬다.

‘블라테르 약초에 섞어 물담배로 피우면 환각 증상까지 올 정도로 독한 것들입니다. 중독도 되고요. 부인께는 차마 권할 수 없습니다.’

아……. 스칸다르산 여송연이 들어왔다더니. 아까 주인장이 말한 ‘일반’이 그 얘기였나.

그러고 보면 저와 마주칠 때마다 적의 깃든 미소를 보이던 손님이, 이따금 그런…… 귀기 어린 웃음을 뱉었던 것 같기도.

우웅.

그때 클로에의 손지갑이 울렸다. 미라벨이 손지갑을 열어 통신구를 꺼냈다.

버튼을 눌렀더니 라구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쏟아져 나왔다.

[영애님, 말씀드리기 창피합니다만 제가 아무래도 환영 마법이 부족해서요. 기사들이 문을 두드리는데 일단 시끄러운 음악 소리로 때우긴 했지만, 불안하네요. 슬슬 오시는 게 어떨까요? 23시가 다 돼 가는데.]

아, 시간이 벌써.

그러고 보면 벌써 호위들을 따돌린 지가 세 시간이었다. 캔달우드 공녀님의 취침 시간이 22시인 것을 생각하면 친위대의 기사들이 의아하게 생각할 법도 했다.

클로에는 미라벨과 마주 보고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주인장을 불러 셈을 치른 아가씨들은 그길로 물담배 바를 나왔다. 깊이 잠든 메리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해, 미라벨이 업고 가기로 했다. 온종일 알차게도 돌아다니고 낮은 도수나마 술을 계속 홀짝인 것이 그녀의 인생에 처음이자 마지막 일탈일 거였다.

“조심해, 괜찮겠어?”

“그러믄요, 아가씨.”

축 늘어진 메리앤이 퍽 무거울 거였으나 평생 무예를 수련하여 근육이 옹골찬 무사의 몸에 그쯤은 거뜬했다.

스체르바뇰 여름 드레스의 치마폭이 넓은 것이 다행이었다. 치맛자락이 뒤를 잘 덮게끔 매만지며 클로에가 미라벨의 뒤를 가리듯 따라갈 때였다.

퍽. 골목 안쪽에서 남자 하나가 튀어나와 미라벨에게 부딪혀 왔다. 미라벨이 날카롭게 뱉으며 노려보았다.

“뭐야?”

“어이쿠. 죄송합니다.”

“조심해요.”

겸연쩍은 얼굴을 한 남자는 여송연에 취한 것도 고의로 아가씨들을 괴롭히려던 것도 아닌 눈치였다.

“먼저 좀 지나가겠습니다.”

고개를 꾸벅여 보인 남자가 읏샤, 기합 소리를 내며 들고 있던 것을 추슬러 올렸다. 그의 양팔에는 한쪽씩 수연통이 들려 있었다.

“빨리들 가자고.”

“예.”

그리고 그의 뒤로 똑같이 수연통을 양팔에 하나씩 낀 남자들 네 사람 더. 검은 두건을 쓴 남자들은 미라벨을 스쳐 슈바츠 거리의 중심부 쪽으로 나아갔다.

그들의 모습에 기시감이 들었을 무렵.

“라비.”

“응?”

“분리 독립파야.”

“뭐라고?”

일렬로 휘적휘적 걸어 골목 끝으로 잠겨 드는 검은 두건의 무리를 보며, 클로에가 미라벨의 옷깃을 꾹 쥐었다.

‘저희가 뭘 잘못했다고 이러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나리들.’

클로에가 스무 살로 돌아오고서 얼마 안 되었을 때, 분리 독립파의 아지트를 급습하여 맞닥뜨렸던 그 얼굴들이었다.

클로에는 홀린 듯이 검은 두건 무리의 뒤를 밟았다. 그들이 슈바츠 거리의 중심, 진짜 슈바츠 거리를 따라 움직인 덕에 미행이 쉬웠다. 혹시 몰라 라구의 마도구도 손가방 안에서 작동시켜 둔 채였다.

“그럼 그 이상한 사람들이 다 그 약초 섞은 여송연 때문에 그리됐단 거야?”

미라벨은 클로에가 그들을 따라가며 조금씩 풀어놓는 이야기에 연신 놀랐다.

“응, 그게 고산지대서만 나는 약초인데…… 스칸다르에는 담배가 귀해서 다른 약초나 이파리들하고 섞어 태우는 문화가 있대. 그러다가 환각 효과가 발견됐다나 봐.”

“어쩐지, 여송연 수입되는 곳이 다 남대륙이며 서대륙이며 따뜻한 곳들뿐인데, 스칸다르만 북쪽이다 했네.”

“담배 농가가 없는 건 아냐. 자급자족하기엔 양이 적어서 다른 약초랑 섞는 거지.”

클로에가 중얼거리며 부연했다.

“그럼 저들이 여기서 환각제를 불법 유통한 셈이 되는 거네?”

“응. 근데 더 문제는…… 그 약초랑 섞어서 물담배로 쓰면 중독 효과도 있다고 들었거든.”

‘들었다’라는 말이 미라벨의 귀에 인상적으로 울렸다. 그녀의 시선에 검은 두건들이 들고 가는 수연통이 닿았다.

“중독? 그래서 뭐에 쓰게?”

“모르지. 뭐가 됐든 떳떳하지 못한 일인 건 확실하잖아.”

미라벨은 고개를 주억이며 몇 걸음 앞서 나가는 검은 두건 무리를 쳐다보았다.

“그게 그렇게 쓰이는 걸 아는 건 너밖에 없지.”

“제국인 중에는 아마도.”

그걸 우리가 알아서 뭐하게, 라는 말은 더 이상 쓸모없었다. 5년을 거슬렀다는 그날 이후로 클로에는 꽤나 적극적으로 굴었고, 이는 대부분 유의미한 결과를 불러왔다.

‘로이에겐 경시청에 다니는 오빠도 있고, 로이를 짝사랑하는 원로원 보좌관도 있으니까.’

미라벨은 의욕이 가득 찬 얼굴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검은 두건 무리는 슈바츠 거리 남쪽의 주택가로 접어들었다. 경매장이 있는 중심부 기준으로 마차를 대어 놓은 곳과 대각선으로 정 반대편이었다.

마차를 대기 쉬웠던 슈바츠 거리 북쪽과 달리, 작은 건물들이 따닥따닥 붙어 있어서 마차는커녕 사람 셋도 다니기 힘들 정도로 길이 굉장히 좁았다.

‘평민들 사는 곳치고도 이렇게 복잡한 동네는 처음이네.’

클로에도 미라벨의 뒤에 붙어서 살금살금 걸음을 옮겼다. 몸을 숨길 곳도 없어, 검은 두건들이 길을 다 가서 모퉁이를 돈 뒤에야 그 모퉁이까지 따라붙기를 반복했다.

길이 구불구불하긴 해도 갈림길이 많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어딘지 확인하고 바로 귀택해서 에티엔에게 얘기해야지.’

남들은 태양절 연휴라고 휴가를 가네 유흥을 즐기네 하지만, 교대 근무의 숙명을 지닌 경시청 관료에게 연휴란 큰 의미가 없었다.

그렇게 다섯 개쯤의 모퉁이를 돌았을 때.

잡화점, 편의점, 수선소, 음식점 등 작은 상점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그 주택가의 작은 중심지가 나타났다. 검은 두건들은 그중 외장 색이 꽤 바랜 건물 하나로 들어갔다. 안에서 다른 검은 두건이 현관문을 열어 주는 것으로 보아 건물을 통째로 사용하는 듯했다.

“분리 독립파가 저렇게 돈이 많아?”

똑같은 의문을 가진 미라벨이 중얼거렸다.

“있어 봐.”

일단 주소 먼저 확인하고……. 클로에는 미라벨을 제치고 그 건물이 있는 골목으로 들어섰다. 소맷자락과 허벅지를 훑어, 제 호신용 단도들이 있을 곳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서였다.

평소에는 소맷자락 안에 한두 개만 넣어 다니던 것을, 슈바츠 거리에 메리앤을 데리고 간다 생각하니 긴장하여 최대한 많이 챙긴 것이었다.

그러니 평소보다 조금 무모할 수 있었다.

클로에는 마치 근처 거주자처럼, 느긋한 걸음으로 그 건물 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로이! 그냥 가자!”

미라벨이 목소리를 한껏 낮춘 채 외쳤다. 마음 같아서는 따라붙고 싶었지만, 제 등에 업힌 메리앤이 문제였다.

‘공녀님을 잠깐 내려 둘까.’

아무리 캔달우드의 공녀가 제국에 더 중요해도 저는 클로에의 호위였다. 다급해진 미라벨이 메리앤을 잠시 내려 둘 데를 찾아보고 있을 때였다.

척척척, 무장한 이들의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

클로에는 깜짝 놀라, 태연한 척 걷던 것도 잊고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건물의 반대쪽 모퉁이에서 그녀에게 너무도 익숙한 제복의 무리가 나타난 것이다.

지난번 슈바츠 거리에서 봤을 때와 달리 단단히 무장한 크레벨 공작가의 기사들이었다. 그 뒤에는 데메트리안과 파이겐이 함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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