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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했는데 첫사랑이 수상하다-127화 (127/189)

127화. 마지막 후회 (5)

21시, 만찬을 즐기기엔 다소 늦었고 불야성의 클라이막스라기엔 퍽 이른 시간. 적당히 취한 사람들과 곧 취할 사람들이 이곳저곳으로 쏘다니는 슈바츠 거리는 한낮처럼 밝았다.

태양절을 보내고 여름휴가를 떠나려는 제도 귀족들과 아직 귀국 전인 사절단의 수행원들이 가지각색의 복식으로 거리를 꾸미고 있었다.

“이게 제도의 밤 풍경이구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가면 너머로 메리앤의 눈에 동경의 빛이 스치고 있음을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었다.

번잡한 밤의 거리에서, 남의 눈 신경 안 쓰고 돌아다니기란…… 어쩌면 그녀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도 있는 일이니까.

클로에의 마음에 공감일지 동정일지 모를 것이 떠오를 때쯤, 메리앤은 들뜬 목소리로 두 아가씨의 팔짱을 끼며 까르르 웃었다.

“자, 다음 길로 안내하게, 영애.”

“분부대로 합죠.”

클로에는 애써 웃었다.

클로에 일행은 일전에 눈여겨보았던 물담배 바로 향했다. ‘물담배 바’라고 남대륙 문자로 적혀 있는 곳이었다. 근처 에르베르의 친교 클럽에서는 오늘도 여송연 연기가 자욱했다.

“어서 오십쇼, 아가씨들! 스체르바뇰에서 오셨나?”

“응, 좋은 자리 부탁해.”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아저씨들과 친근한 미라벨이 대변인을 맡았다. 바지를 차려입은 미라벨은 국적 불명의 부유한 평민 왈가닥쯤으로 보였다.

슈바츠 거리에서 수십 년을 일한 주인장은 그녀들의 차림새를 훑고는, 대번에 안쪽 좋은 자리로 안내했다. 가면을 썼으니 평범한 인물은 아닐 것이고, 스체르바뇰 영애님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뒤따른 클로에 또한 평민들의 원피스를 입었대도 그 소재가 고급인 것이었다.

가게 안쪽에 설치된 평상 위의 자리였다. 남대륙 부족의 패치워크로 만들어진 좌식 소파 아래로는 입식 생활을 하는 아르투젠인들이 다리를 내릴 수 있게 탁자 아랫부분이 파여 있었다.

자리에 앉으니 가게의 전경이 얼추 눈에 다 들어왔다. 반대로 그녀들이 자리한 평상 앞에 인조 나무가 관목처럼 설치돼 있어, 밖에서는 그녀들을 보기 힘들 거였다.

“다른 나라에 온 것 같아.”

메리앤이 생경하다는 눈빛으로 가게를 둘러보았다. 한껏 어둑한 와중에 진동하는 연기가 램프 불빛에 녹아드는 풍경……. 이 가게의 독특한 분위기에 벌써 빠질 것 같았다.

“여기, 메뉴판이외다. 좋아하는 맛을 골라 주시면 그 향을 배합해서 드리지.”

남대륙 콘셉트를 잡아서인지 메뉴판에 적혀 있는 것은 대부분 남국의 과일들이었다.

망고? 용과? 패션프루트? 바나나?

남대륙의 과일을 맛본 적은 있어도 어떤 것에 호불호를 가질 정도는 아닌 게 문제였다. 서로의 눈치만 살피던 아가씨들은 주인장의 추천을 기다리기로 했다.

모를 땐 물어보는 게 답이라. 익숙한 척을 하려 해도 조금도 익숙한 게 없어 불가능했다.

혹여 조금 바가지를 쓴대도 오늘 나온 것만으로 즐거웠으니까.

“가장 잘나가는 배합으로 해 주게.”

“알겠습니다요. 저, 그냥 일반…… 물담배들로 하시는 거지?”

주인장이 조심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일반이 아니면 뭐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의 눈초리가 자못 의뭉스러운 것이 물어보면 안 될 것 같았다.

척하면 척, 20년 자매애였다. 미라벨은 클로에의 눈치를 보지 않고도 태연히 답했다.

“타국의 손님이 오신 거니까. 뭐든 다 기본으로 부탁해. 한 잔은 오렌지주스, 두 잔은 도수가 낮은 술로.”

“그러쇼.”

한눈에도 그녀들이 하룻밤 추억을 사러 온 것을 알아챈 주인장이 가격은 조금 있되 즐기기에 좋은 것들로만 상을 꾸려 주었다. 말린 과일과 치즈 조각 등 간단한 안줏거리에 에일 맥주, 와인에 탄산수를 섞은 와인 숄레가 서대륙 양식으로 자개 장식된 탁자에 올랐다.

“이 테이블도 그렇고, 커튼이랑 소파도 그렇고. 다 이국적이다.”

메리앤은 분위기에 취한 눈으로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드넓은 제국에서도 멀리 가 봐야 캔달우드령이었던 그녀였기에 제국적인 것이 뭔지도 잘 몰랐지만.

클로에 역시 물담배 바에 오는 건 처음이라 비슷한 심정이었다.

“자, 여기 있습니다요.”

뒤이어 주인장이 수연통水煙筒을 가져왔다. 아르투젠 사람들에게 익숙한 블랙커런트와 딸기 등의 과일 향에 이국의 과일 향을 섞었다고 했다.

수연통의 모양새를 본 클로에가 작게 놀랐다.

‘이건 분명 전하와 손님이 같이 계셨을 때…….’

불현듯 들러붙는 셰비크에서의 기억.

손님을 처음으로 마주쳤을 때, 연기로 뿌옇던 그 응접실에 바로 이런 것이 놓여 있었더랬다. 커다란 호리병에 기다란 파이프가 달린 것이 특이한 조형물이라 생각하고 말았던 것이었는데.

‘전하의 응접실에서도 물담배를 쓰셨던 건가?’

그러고 보면 추억 속 그 연기에 들큼한 향이 났던 것도 같고…….

“설명을 좀 해 드릴까?”

수연통을 어떻게 작동하는지, 물담배를 어떻게 피워야 하는지, 주의할 점은 무엇인지 등등. 주인장은 초심자인 일행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유들유들하게 설명해 주었다.

“아까 딸기랑…… 뭐랬지?”

“뭔지 몰라도 달달한 과일 향이야.”

수연통은 메리앤과 클로에의 차지였다. 건강 제일주의인 미라벨은 담배 비스름한 것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만 담배 한 번 태워 본 적 없는 그녀들에게 물담배가 어떤 느낌을 주기란 어려운 게 문제였다. 두 아가씨는 달콤한 향기를 연신 입에 머금었다 뱉었다 하는 사이 분위기에 취해 갔다.

한낮부터 익숙지도 않은 술을 홀짝홀짝 마신 메리앤은 정말로 취했고.

“내가 이런 걸 해 볼 줄 어떻게 알았겠어? 다 언니 덕이야, 고마워!”

메리앤은 제 옆에 앉은 클로에에게 팔짱을 끼며 기대 소리쳤다. 한껏 높아진 목소리에, 웃음기가 내내 떨어지지 않았다. 라구가 준 환영 마도구를 진즉에 꺼내 놓은 것이 다행이었다.

술도 술이지만, 제 본분을 잊어도 되는 바깥나들이 자체가 이미 그녀를 들뜨게 했으리라.

“너무 즐겁다. 밖에 이렇게 재밌는 게 많은 줄 처음 알았어. 리비에라강을 남쪽 언덕에서 바라본 것도 처음이었고, 슈바츠 거리도 처음, 경매장도 처음, 이런 술집도 처음!”

“응응, 나도 너랑 여기 와서 좋아.”

클로에가 미라벨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이 업소에서 알콜을 섞지 않고는 내는 일이 없을 게 빤한 오렌지주스를 홀짝이며, 미라벨은 두 아가씨를 흐뭇한 낯으로 바라보았다.

“하아, 다음에는 어느 나라에 가 볼 수 있을까.”

“어느 나라?”

“지금 아르투젠 여행 중이잖아.”

“아르투젠이면…….”

우리나라잖아. 클로에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녀는 늘 황실의 손님을 자처했으며, 애초에 정략혼의 장기말로 키워졌기에 아르투젠에 대한 소속감이 희박했던 것이었다. 늘 다른 나라 사람 될 거라고 말하며.

그러고 보면 제집도 아닌 황궁 밖에 나다니지 못하는 그녀에게 고티유가 전혀 다른 공간으로 느껴질 법도 했다.

그런 사정들이 떠올라, 그녀의 어깨를 어루만지는 클로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가 보고 싶은 나라 있어? 스체르바뇰은 어땠어?”

오늘 거기 옷 입은 김에 말야. 클로에는 제 속내를 대충 얼버무리며 물었다.

이리 바깥 행동을 오래 한 것이 처음이어서인지, 낮부터 계속 홀짝인 술 때문인지. 가면 너머 메리앤의 눈이 무겁게 끔벅이기 시작했다.

“거긴 춥지 않을까?”

“이번에 거기 왕세자 만나 봤을 거 아냐.”

클로에는 그녀가 에티아의 왕세자를 두고서 그 더운 기후를 언급한 것이 떠올라 작게 웃었다.

메리앤의 혼사와 관련해 있었던 일을 주워섬기던 데메트리안은, 어쨌든 스체르바뇰의 왕세자가 그래도 우직한 녀석이기는 하다고 말을 맺었다. 크레벨 공작부인이 스체르바뇰 왕의 누이이니, 사촌지간이어서 그리 친근히 말하는 것이었다.

‘멀리서 봐서 그런지, 북부 사람답게 키 엄청 컸던 것만 기억나지만.’

다른 왕족과 마찬가지로 메리앤과 통성명하고 춤을 한번 추고 임무를 완료했다는 듯 자리를 뜬 스체르바뇰의 왕세자.

메리앤은 그에 대한 기억이란 하나도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키가…… 제일 컸다? 눈동자 색이 크레벨 공작부인이랑 닮았더라.”

“그럼 그날 산책은 어땠어?”

기다렸다는 듯 은근한 목소리로 묻는 말에 메리앤이 허둥대었다.

“무, 뭐, 그냥 산책이었지. 내궁 후원 갔다가 뭐 그냥…….”

“그분이 마음에 들었어?”

클로에의 의뭉스런 말소리에 미라벨의 귀가 쫑긋했다. 마치 제가 클로에에게 하던 역할을 클로에가 메리앤에게 하는 것처럼 보인 것이었다.

메리앤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가면 아래 얼굴이 새빨개졌으리라.

“뭐어, 신사적이시고, 주제 파악 잘하시고, 나긋나긋하시고. 와중에 키도 크고 잘생겼고. 빠질 게 뭐가 있냐 싶더라.”

“헤에, 공녀님. 스체르바뇰 왕세자님께 반하셨나요?”

말소리를 듣던 미라벨이 장난스런 목소리를 냈다. 대강의 사정에 대해 클로에에게 들어 알고 있던 차였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허공에 한참 동안 시선을 고정하던 메리앤은, 이내 고개를 작게 털더니 제 앞의 잔에 입을 묻었다.

“다 무슨 소용이라고. 어차피 나야 흘레붙이는 대로 팔아 넘겨질 건데.”

“……뭐?”

클로에의 미간에 미세한 실금이 갔다. 그 과격한 언사를 정정할 마음조차 없는 듯 메리앤은 여상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지고하신 에드워드 3세께서 황제시지만 한편으로는 흘레꾼이시라. 마음대로 공작가들 교배하고 또 제후국이랑 교배하고. 우리가 종마랑 다를 게 뭐냐는 거지.”

그리 말하는 메리앤의 어조는 일견 가라앉아 있었다. 오늘 내내 들떠서 새된 목소리를 내던 것과는 판이했다.

아니, 그래서 냉소적이었을 거였다. 캔달우드의 공녀라면 평생 오늘을 다시 경험하지 못할 테니까.

“나한테 선택권이나 있겠어? 말레카는 후보에도 없는 걸 나도 알아.”

메리앤이 차갑게 중얼거렸다.

그 말이 한편으로는 남의 일 같지가 않아, 클로에는 씁쓸한 마음에 다시금 에일만 들이켰다.

* * *

슈바츠 거리 외곽에 자리한 회벽 건물. 오래된 다세대 주택들 사이에 욱여넣어진 듯한 그 건물은 십수 년 전 건물주가 급사한 이래로 상속받을 친족이 없어 방치되고 있는 곳이었다.

건물을 관리할 이는 없지만 세는 매달 행정청으로 납부하게 되었으니 세입자들이 건물을 비운 지도 오래. 이따금 유랑 상단이 제도에 들어올 때면 복비만 내고 한두 주 머무르다 가는 곳이었다.

말 많고 탈 많은 슈바츠 거리 근방에는 그런 건물이 한둘이 아니어서 특별할 것도 없었다.

그 건물에, 짐꾼을 모집한다는 벽보를 본 이들이 몰려들었다.

‘둘, 넷, 여섯, 여덟……. 서른은 되는 것 같네. 경쟁률이 얼마나 되려나.’

서른세 살의 릭도 거기에 끼어 있었다. 지난달 구휼 기금을 운반하는 상단에 짐꾼으로 따라왔다가 구휼 기금이 증발하는 바람에 상단과 함께 제도에 발이 묶이고 말았다.

고티유에는 그를 유혹할 거리가 너무 많았다. 도박장에 갔는데 초심자의 행운이었을까, 꽤나 크게 이득을 본 그는 거기서 멈추지 못했고, 경시청의 조사가 끝나 상단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는 쌈짓돈을 막 다 잃어버린 차였다.

거기서 끝났으면 좋았을 텐데 한번 돈맛을 본 그는 원금을 복구할 때까지 귀향하지 않으리라는 용단을 내렸다.

그게 벌써 한 달 전. 그는 대박은커녕 노숙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때 싸구려 증류주라도 마시기 위해 간 펍에서 이 모집 공고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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