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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했는데 첫사랑이 수상하다-126화 (126/189)

126화. 마지막 후회 (4)

“지난번에 경이 크레벨 소공작에게 시연해 준 덕분에 내가 이번에 포상을 받았어. 경의 몫일세.”

그 금화 주머니가 제 앞에 다다르자, 라구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주머니를 슬쩍 열어 본 라구는…….

“그, 금화인데요? 이게 대체…….”

“포상금을 꽤 많이 받아서 말이지.”

“많기야 많겠지. 귀족 아녀자라면 응당 드레스나 장신구에 돈을 펑펑 써야 미덕이라고 착각하시는 분이니까 말야.”

메리앤은 제가 무슨 흉내를 내던 것도 잊고 빈정거렸다. 물가를 몰라 500골드가 실제로 얼마큼의 가치인지는 모르지만 황실을 비아냥댈 기회는 놓치지 않는 그녀였다.

클로에는 메리앤을 향해 웃어 보이고는 말을 이었다.

“우선 50골드만 가져왔네. 자네가 길드와의 서약 때문에 이것마저 반액을 납부해야 되면 다른 방법을 강구해 보려고 말야.”

“제게 선물로 주시는 것이니 이거야 수수료를 안 떼겠지만요. 우선이라 하시면……?”

“자네 몫으로 200골드를 생각했어.”

“이, 이, 이백…….”

라구를 알고 지낸 세 달간 그가 이처럼 무언가에 놀라는 건 처음 보았다.

미라벨과 메리앤도 덩달아 놀랐다. 아무리 동업자라지만 평민에게는 꽤나 과한 금액이었으니까.

‘거기서 내가 한 일은 2황자 전하 앞에서 말하고, 라구 경과 데미를 연결해 주고…… 중고품 장터에서 구한 에메랄드를 데미에게 갖다준 것뿐인걸.’

물론 그것만으로도 기여한 바가 크지만, 보석에 대한 감식안부터 보석이 마력에 오염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 중고품 장터의 어느 좌판에 키슬라바산 에메랄드가 나왔는지까지…… 무엇 하나 오롯이 스스로 해낸 건 아니라는 데 생각이 이른 것이었다.

“너, 너무 많습니다. 저야 지식을 전한 것뿐인걸요.”

“내가 받은 금액의 반절도 안 되네. 경 덕분에 내가 돈도 벌고 폐하께 포상도 받은 셈이지 않나. 나머지 돈은 차츰 보내도록 하겠네.”

“아이고, 이게 참…….”

클로에와의 일을 돈을 벌자고 시작한 건 맞았지만, 이렇게 큰돈을 예상한 건 아니었다. 이 금액이면 고향의 부모님 가게 건물을 살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러 라구는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오늘 경이 도와주는 것도 있지 않은가. 정 뭐하면 출장비 거기서 떼도록 하게.”

“그게 하면 얼마나 한다고요…….”

클로에의 단호한 기색에, 라구는 마지못해 금화 주머니를 품에 집어넣었다.

그제야 클로에는 조금 후련한 마음이 들었다. 나머지 300골드로는 오늘 경매장에서 루시엔과 어머니에게 줄 선물을 얻고, 제이크 콜린스에게 인물화가 아닌 다른 그림을 의뢰하고, 나머지는 사업 자금으로 융통할 계산이었다.

‘당분간 알차게 쓰고 다녀야지.’

2년 뒤에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미뤄두었던 고민이 스멀스멀 피어오를세라, 클로에는 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자, 그럼! 옷 먼저 갈아입자.”

건물 뒤편의 공터에 세 아가씨의 신형이 불현듯 나타났다. 대기 중이던 말들이 깜짝 놀라 투레질했다.

“느낌 진짜 신기해!”

“정말요!”

메리앤과 미라벨이 신나서 떠들었다. 클로에는 제 감상을 대신 떠들어 주는 그녀들을 흐뭇한 낯으로 바라보았다.

“혹시 장신구 같은 거 상했으면 나중에라도 나한테 말해?”

“내가 마법을 언제 겪어 보겠어? 기념으로 가질래. 상한 거 있으면 좋겠다.”

흥분한 메리앤의 말소리가 빨라졌다. 루시엔과 경매장에 갈 때마다 클로에가 입었던 스체르바뇰식 드레스를 입은 채였다. 그 모자에 틀어넣자니 그녀의 분홍색 머리칼이란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훗날 스체르바뇰에 가게 될 것을 생각하니, 그걸 보는 마음이 묘했다.

미라벨은 제가 늘 입는 바지를 갖춰 입었고, 클로에는 이따금 입던 평민들의 원피스에 수련화를 신었다. 메리앤의 시비인 척할 요량이었다.

“서두르자. 3시간 정도면 돌아온다고 해 뒀으니까.”

“맙소사, 발판 자동으로 나오는 거 봐!”

친위대 기사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데메트리안의 선물이 처음으로 쓰이게 되었다. 미리 귀띔을 들어 놓은 마부가, 그녀들이 라구를 만나는 사이 말들을 새 마차에 옮겨 놓았다.

어머니께 제 일들을 대강이나마 털어놓고 나자 더 이상 마부에게 행선지를 숨길 필요가 없어진 것이었다.

“와아, 가죽 냄새. 나 새 마차 처음 타 봐.”

새 마차가 아니어도 원체 마차 자체를 탈 일이 거의 없는 메리앤이 관성적으로 탄성을 내뱉었다.

미라벨로서도 그 만듦새가 고급스럽고 어디 하나 신경 쓰지 않은 곳이 없어 보여 감탄하려다가도, 이 마차가 그날의 것임을 알아 클로에의 낯만 살필 뿐이었다.

이곳저곳 버튼을 눌러 보며 신기해하던 메리앤은, 미라벨이 앉아 있는 마부석 쪽 의자 밑에 온장칸과 냉장칸이 있는 것을 알고서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니, 이것도 언니가 맞춘 거야? 발명가였어?”

거기에만큼은, 오늘도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 * *

데메트리안은 고텐베르크의 들꽃 클럽 3층에 혼자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간이 벽으로 방처럼 만들어 놓은 자리였다.

오늘이 바로 결행일이었다.

그저께 뇌물로 포섭해 놓은 상인 한 사람으로부터 연통이 왔다.

‘말씀하신 그 건물에 새로 세입자가 들어왔습니다. 언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인기척이 나서 알았습죠. 위층에는 덧문을 꼼꼼히 잠가서 안 보이는데 1층으로는 사람들이 드나드는 걸 봤습니다. 다들 검은 두건을 쓰고 있었어요.’

벽보를 붙여 달라고 부탁받았다던 슈바츠 거리 선술집 주인장들의 목격담과 일치했다.

‘원래 내가 그들을 습격한 것은 7월 첫째 주 불의 날. 사흘 뒤……. 그때가 그들이 움직이는 날이니까 오늘은 확실히 있겠지. 들어오는 걸 다들 몰랐다는 건 역시 마법이 쓰인 걸까.’

그가 그곳을 급습했을 때 일당들이 어찌 그리도 빨리 도망쳤나 했는데, 마법사가 개입했다면 말이 되었다.

‘검은 두건 중에 마법사가 있나? 마법으로 머리칼 색은 못 바꾼다고 했는데…….’

어느 날 라구에게 마법 자문 명목으로 출장비를 지급하고 물었던 일을 떠올리며 그들의 정체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나며 덧문이 열렸다. 파이겐이었다.

“잘 만났어?”

“예.”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쉬며 파이겐이 데메트리안의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두 번째 하는 일이었지만, 여전히 적응할 수 없었다.

농브르로부터 연락이 온 것이 바로 어제였다. 마침 오늘이 인신매매범의 아지트를 덮치기로 한 날이었기에, 겸사겸사 슈바츠 거리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었다. 크레벨령의 기사들은 지금으로부터 한 시간쯤 뒤에 그 건물 근처의 공터에서 만나기로 했다.

“쓸모 있는 정보가 좀 있었어?”

“……신기하데요. 미리 첩자를 심어 놓은 것도 아닐 텐데.”

“첩자는 안 심어 놓아도 작은 연들은 만들어 놓을 수 있는 거니까.”

그리 말하는 데메트리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가느다란 연을 만들고 놓지 않으면 되는 일이죠.’

지금은 사라진 그 시간에 그가 같은 의문을 가졌을 때, 농브르의 사내로부터 들은 말.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르는 파이겐은 그가 음지의 일들에 관해서도 아는 바가 있나 보다 싶어 고개만 주억이고 말았다.

“알레지오의 영애가 한 달에 한두 번씩 주기적으로 말레카의 왕녀를 만난다고 합니다.”

데메트리안은 제가 그녀를 목격한 일을 돌이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4년 전, 알레지오의 영애가 리도테를 졸업하자마자 말레카에서 상단 일을 도우며 지낸 적이 있는데 그때부터 알고 지냈다는군요.”

“꽤 오랜 연이네.”

“네. 그리고…… 알레지오 영애가 말레카의 왕녀를 만난 날이면 어김없이 스칸다르의 왕자를 만났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 높은 확률로.”

두 사람 사이에는 얼마간 말이 없었다.

파이겐은 제 자리에 놓인 유리잔을 잠깐 만지작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데메트리안이 그의 몫으로 미리 시켜 놓은 레몬수가 담겨 있었다.

“지난달에는 심지어 말레카의 왕녀가 궁 밖으로 외출하여 스칸다르의 왕자를 직접 만난 일이 있다는군요.”

“정말?”

데메트리안의 눈이 크게 뜨였다. 지금까지는 의심하고 있던 일을 확인받은 차원이었다면, 이는 정말로 짐작도 못한 이야기였던 것이었다.

‘하기야, 제국에 온 지가 벌써 4년이 다 되어 가는데 궁에만 있을 리는 없나.’

지난달 그녀가 외출했다는 소식을 듣자니, 데메트리안에게 떠오르는 광경이 있었다.

제가 에티엔과 함께 경시청의 마차를 타고 지나갈 때, 창밖에서 보았던 실크햇을 쓴 왕자의 모습.

“혹시, 만난 곳이 예가체프……?”

“어찌 아셨어요? 알아보자니 지난 1년간 계절마다 한 번꼴로 만난 모양이더군요. 그게 지금껏 귀족 사회에 알려지지 않은 게 신기하지 않습니까?”

“…….”

데메트리안은 재빨리 제가 겪은 미래를 떠올렸다.

성배 송환을 둘러싼 협상이 종료되고 얼마 뒤 프레더릭은 황태자로 책봉받았고, 책봉식 날에 프레더릭은 말레카의 왕녀와 혼인했다. 황태자 부부의 사이가 좋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이었고…….

‘서로 정혼할 사이로 알고 자랐는데 정분이 안 나는 것도 이상한가?’

왜 이 생각을 하지 못했지……? 그리 생각하자니, 한 지붕 아래 살았던 제 정혼자와의 추억이 달려드는 것이었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거지.’

데메트리안은 속으로 자조하고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농브르와 다시 접촉하기로 했나?”

“예. 스칸다르의 왕자와 알레지오의 영애의 관계에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기에 더 조사해 달라고 한 참입니다.”

“……그래.”

“더 물으실 일이 있으신 겁니까?”

“아마도.”

마지막, 마지막 연결고리가 남았다.

스칸다르의 왕자와 프레더릭이 결탁했으리라는 증거.

데메트리안은 지난 몇 년간 프레더릭이 황태자로 책봉받기 위해 스칸다르의 손을 잡았으리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추측에 대한 증거를 지금 이 시간에서 모으는 중이었다.

거의 다 왔다.

“그럼, 슬슬 나가 볼까요?”

“……그러지.”

오늘은, 우선 오늘의 일부터 처리해 나가면 될 것이었다.

* * *

“맡겨 두셨던 도검류입니다.”

“고마워.”

슈바츠 거리의 경매장. 밤이 짧아 경매장에 오래 머무를 수 없는 세 아가씨는, 21시가 조금 넘어 경매가 하이라이트를 향해 달려갈 때쯤 경매장에서 나왔다. 세 사람 모두 루시엔에게서 빌린 가면을 쓴 채였다.

미라벨이 벌써 세 번째 겪는 일이라고 익숙하게 맡겨 두었던 무기를 받아 왔다. 클로에의 것까지 다양한 길이의 단도가 열몇 개는 되어 경매장의 경호원들이 조금 의아해하는 눈치였다.

“나중에 대공녀 만나면 정말 고맙다고 해야겠어.”

“그분 데뷔탕트 치르려면 3년은 남았는데?”

“그 전에 팔려 가려나? 대공녀한테 고맙다고 말하려면 그때까진 버텨야겠다.”

흥분의 여진이 남은 메리앤은 신나서 평소보다 한 톤 높은 목소리로 재잘거렸다.

“그런데 대공녀가 이런 걸 좋아해? 대공녀 같은 사람도 빌 소원이 있나?”

오늘 클로에가 루시엔의 선물로 낙찰받은 것은 남대륙의 소수 부족이 안녕과 행운을 기리는 용으로 낀다는 팔찌였다. 가죽끈에 꿰인 다양한 빛깔의 원석에는 정교한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지도자 계층에서 쓰던 것이라는 모양이었다.

“누구든 간절한 것 하나쯤은 있지 않겠어?”

“……하긴, 우리도 나름 간절한 게 있으니까.”

흘리듯 대꾸하는 메리앤의 말소리에, 클로에는 복잡한 마음이 되었다.

그녀에게 간절한 게 무엇인지 짐작이 가는 한편으로, 무언가 간절한 것이 있는 이가 떠오르는 것이었다.

거기에 뒤따르는 그의 감청색 눈동자…….

클로에는 그 잔상을 떨치려는 듯 고개를 작게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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