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마지막 후회 (3)
농브르의 단주 대행인 듯한 그 왜소한 중년인의 뒷모습이 사라지자, 파이겐은 크게 한숨을 내쉬며 테이블 위에 엎어졌다.
‘어디서 농브르 이름을 주워듣고 오셔서는.’
뒷골목의 일들에 대해서 아실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나랏일을 책임지실 분은 뭐든 다 아신다는 거였나.
제가 농브르의 아무와도 연이 없다면 모르겠으나, 미라벨의 어머니가 단주인 곳이라면 사정이 달랐다. 파이겐은 제가 바보같이 굴어 제 이야기가 나쁘게 흘러들어가는 건 아닐지 다소간 걱정스런 마음이 들었다.
후우. 파이겐의 한숨이 깊어졌다.
‘그럼 슬슬 합류해 볼까.’
중년인이 이 거리를 빠져나갔을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난 뒤, 파이겐은 내내 만지작거리고 있던 오렌지주스를 대번에 들이켜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신매매단을 수사하는 김에 기사단을 이끌고 스칸다르산 여송연의 뒷조사를 시작한 데메트리안과 합류하기 위해서였다.
크레벨령에서 시작된 인신매매 사건 때문에 데메트리안이 궁 안팎에서 바빠진 것이 벌써 보름이 넘었다. 크레벨의 기사단이 수행하니 먼저 귀택해도 되었지만, 열몇 해를 함께한 사이에 선을 긋기가 마음처럼 쉽지 않은 것이었다.
파이겐은 계단을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어푸, 에이, 참.”
2층으로 내려서자마자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요즘 유행이라는 그 망할 여송연 때문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이렇게 손님이 많을 날이 아닌데, 탄신연에 참석하기 위해 올라왔던 이들이 다들 귀향하지 않아서인지 모든 좌석이 가득 차 있었다.
‘그쪽 수사가 어떻게 될지는 몰라도 싹 다 잡아들이면 좋겠구먼. 어딜 가건 연기투성이니 말야.’
평소 드나든 적도 없는 사교클럽과 슈바츠 거리의 환경미화를 생각하며 파이겐이 충혈된 눈으로 허공을 휘저을 때였다.
“크레벨이랑 캄포의 정혼 말야. 그때 봤지?”
갑작스레 귀에 달려드는 말소리가 있어 파이겐은 재빨리 그쪽을 바라보았다. 바 너머에 칸막이로 분리된 자리였다.
눈도 따가운 데다 연기가 자욱하여 그 말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판별할 수 없었다.
“응, 캄포 대공녀가 아주 맹랑하던데.”
“사람, 맹랑하다는 게 뭐야. 그래도 황녀나 마찬가진데.”
“나는 그 근처에 있었지 않은가? 딱 말이 그랬어. 연배 높은 이랑 춤추게 생겼다고. 말투가 아주 되바라졌다니까.”
“되바라졌다니, 표현도 참.”
“칭찬일세, 칭찬이야.”
그리 말한 신사들이 다시 연기를 뿜어, 안 그래도 흐릿했던 얼굴이 더욱 흐릿해졌다.
‘탄신연에 참석했던 귀족 나리들이신가 보군?’
슈바츠 거리의 중심가에 자리한 고텐베르크의 들꽃 클럽은 귀족들도 종종 찾는 곳이었다. 사교클럽의 분위기를 가식적이라 싫어하는 이들도 있었고, 슈바츠 거리에서 유흥을 마음 놓고 즐기기 위해서인 경우도 있었다.
파이겐은 제가 너무도 잘 아는 이름들이 오가는 것에 그 근처 벽으로 붙어섰다. 조금 전까지 이를 갈았던 여송연 연기가 이럴 땐 도움이 되었다.
“그 소년, 라크루아의 막내던가? 단단히 반했는지 얼굴이 새빨개졌던데.”
라크루아의 이름은 또 왜 나오지?
기사로 서임 받으면서 준남작의 작위를 받았으니 탄신연에 참석할 수 있었지만, 대연회장 바깥에서 시간을 때우며 크레벨들의 귀택을 기다린 파이겐이었다.
공자님의 정혼 상대인 캄포 대공녀가 나타나서 화제가 된 거야 들었는데,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정확히 모르고 있었던 차였다.
“대공녀 변덕에 놀아난 셈이지, 뭐. 그런대서 정혼이 깨지겠어? 그게 맹세로 된 일인데.”
“연배 높은 이랑 춤추게 생겨서 그랬다고? 늙탱이 싫다 이거잖어.”
신사들이 낄낄대기 시작했다. 여, 여덟 살쯤 차이나면 역시 좀 그런가. 파이겐은 대연회장 바깥에서 저와 시간을 보내 준 이를 떠올리며 민망한 마음이 들었다.
“크레벨 소공작이 스물셋, 뭐 그쯤이던가? 그 또래 여자애가 보기엔 늙수그레해 보일 수도 있지.”
“그래, 나이 먹고 보면 또 모르지만 말야. 그런데 왜, 크레벨 소공작은 단짝 있잖어.”
“결국 둘이 또 첫 춤을 췄지? 아무리 대공녀가 변덕을 부려도 그러면 안 되는 건데.”
“그거 지켜본 사람들 다 조마조마했을걸.”
“그 자리에 캄포 대공가도 와 있었는데……. 정혼을 깨려는 걸까?”
“에이, 설마. 그게 맹세로 된 건데…….”
신사들은 그리 말하며 다시 여송연 연기를 뿜고 잔에 담긴 저들의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제야 좀 눈치들을 채나?’
그런 생각과 함께, 파이겐은 괜한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공자님이 내어놓고 라크루아 아가씨를 좋아하는 티를 내기 시작이야 하셨지만, 귀족 사회에 이렇게 맹세에 대한 이야기가 유명한데.
‘잘되실 수 있으려나.’
물론, 맹세가 아니라도 제가 보기에 공자님께는 갈 길이 멀고도 험했지만 말이다.
* * *
대망의 바람의 날.
클로에 일행은 피크닉 거리를 챙겨 리비에라 강 건너편의 언덕으로 갔다. 해가 길어진 덕에 해가 오래도록 높이 떠 있어, 점심을 먹고 느즈막히 움직였음에도 피크닉을 즐기기엔 충분했다.
“같은 햇살이고 같은 공긴데, 궁 밖에서 쬐는 건 왜 이리 달까?”
머리칼을 보닛 속에 감춰 둔 메리앤은 라크루아의 주방에서 가져온 사과주를 마음껏 홀짝이며 다리를 동동거렸다.
저녁 시간이 되자 시내 유명 레스토랑인 ‘마레와 라쥐르’에 갔다. 데메트리안과의 추억 때문에 조금 꺼려진 것도 잠시, 황궁에서 늘 기교 부린 음식만 먹던 메리앤에게 식재료로 승부하는 제 외가의 식문화를 선보이고픈 마음이 이기고 만 것이었다.
연휴건 주말이건 늘 붐비는 곳이었지만 며칠 전에 예약해 둔 궁정백가의 손님들에게는 가장 보안이 좋은 자리가 주어졌다.
“맛있어? 괜찮아?”
“응! 언니가 라쥐르 다녀올 때마다 눈빛이 달라지던 이유가 다 있었구나?”
“공녀님 덕분에 저도 간만에 호식하네요.”
올리브오일에 자작하게 끓인 새우 구이도, 오징어 먹물 리소토도, 대구 스테이크도 모두 투박한 듯 풍미가 좋아 메리앤은 연신 기쁜 표정이었다. 미식을 즐기지 않는 미라벨도 색다른 곳에서 식사하니 기분이 좋았다.
후식으로 나온 레몬 셔벗까지 야무지게 해치웠을 때, 클로에는 조심스레 오늘의 계획을 입에 올렸다.
“오늘 갈 곳은 경매장이랑 물담배 바야. 리도테 때 동기들이 다니던 걸 생각하면 엄청 조심해야 할 것 같진 않지만, 미아 너는 사정이 다르니까 옷을 갈아입고 갈 거야.”
“그 상단 사무실에서 말이지?”
메리앤의 여상한 목소리에 클로에는 얼굴이 홧홧이 달아올랐다. 상단 사무실이라니, 거창하게도 참…….
그런 기색을 잽싸게 알아챈 미라벨이 대신 말을 받았다.
“맞아요. 거기서 논다고 올라가서, 몰래 빠져나가는 거죠.”
오늘도 호위 겸 감시를 위해 친위대의 기사 셋이 따라온 차였다.
“어떻게 몰래 빠져나가?”
“클로에의 그 아는 마법사가 와 주기로 했어요.”
“어머, 그럼 마법으로?”
“그럴 건가 봐요.”
미라벨도 신나기는 매한가지였다. 마법사는 이젠 좀 덜 신기했지만, 마법은 여전히 신기했으니까.
클로에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고티유 사교계에서 부채 흔드는 이치고 이동 마법을 겪어 본 이는 없을 거였다.
“진짜, 언니가 최고야!”
메리앤은 제 손을 맞잡으며 더없이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클로에 일행은 그 길로 라구가 기다리는 그 사무실로 향했다. 부티크가 모두 닫은 시간에 앙헬라타 대로 가장 으슥한 곳으로 향하자니 친위대 기사들이 조금 의아해하는 듯했지만, 그들이 행선지에 대해 왈가왈부할 입장은 못 됐다.
건물 앞에 도착해 마부에게 뒤편 공지에 마차를 대라 이르고서는, 클로에는 조심스럽게 친위대의 기사들에게 말했다.
“저, 크레벨 소공작과 만나기로 했어요. 다들 오랜만에 보는지라 조금 길어질 수도 있는데. 혹 근처에서 요기하시고 오셔도 좋고요.”
클로에가 그들에게 20실버짜리 은화를 한 닢씩 쥐여주며 작게 속삭였다. 그녀들이 마레와 라쥐르에서 식사하는 동안 다른 자리에서 요기했으니, 천천히 놀다 오라는 에두른 말이었다.
거기에 제국에서 가장 신뢰도 있는 한 청년의 이름을 곁들이는 것도 잊지 않았고.
‘혹시 나중에 뒷조사라도 하면, 여기가 데미 건물인 거 다 알 테니까.’
친위대의 세 기사는 음전하다 소문난 라크루아의 영애에게 아지트 같은 것도 있나 보다 하며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3층으로 올라가자 라구가 이미 도착해 있었다.
“오랜만이네, 경.”
“정말 오랜만에 뵈어요. 거의 한 달 만인 것 같은데. 그간 잘 지내셨죠?”
클로에는 씁쓸한 마음이 들어 그저 미소만 짓고 말았다.
아이펠의 장원에서 데메트리안에게 실망해 버린 이후로 이 근처로는 발도 안 들이고 있던 거였으니까.
라구로 말할 것 같으면, 크레벨에서 보낸 마차가 몇 주째 건물 뒤편에서 바람만 맞고 있는 걸 보고 대강의 상황을 눈치챈 차였다.
“미아, 이쪽이 그 마법사야. 라구 경이라고, 재작년에 마탑에서 정식 마법사로 서임 받았어.”
“잘 부탁하네. 내가 오늘 기대가 많아.”
메리앤은 맞은편에 앉은 라구에게 악수라도 청할 기세였다. 그 들뜬 낯을 숨기지 않은 것이, 황자궁에서 그녀가 표정 숨기는 걸 봐 온 시녀들이 본다면 서운해할 것이 빤했다.
“이쪽은 내 육촌일세. 라쥐르의 방계지.”
클로에는 고민 끝에 꾸며 둔 대로 메리앤을 소개했다. 라구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메리앤의 입지가 워낙에 특수했으니까.
“응, 맞네, 맞아. 고티유에도 처음인 촌뜨기니 잘 부탁하네.”
제 콘셉트가 썩 맘에 들어 버린 메리앤은 들뜬 낯으로 대꾸했다. 그것만으로도 라구는 그녀 역시 제가 주워들은 바가 있을 거물이라고 생각해 버리고 말았지만…….
“마탑이라면, 말레카에서 수학했다는 거지?”
“예에, 그렇죠.”
“말레카의 수도와 고티유는 좀 비슷한가?”
“기후나 번화한 정도를 말씀하시면 비슷하고, 사회상을 비슷하면 조금 다르죠. 거긴 부르주아 권력이 강하니까요.”
메리앤의 질문이 모호하여, 라구는 평소답지 않게 길게 주절대지 못했다. 메리앤은 그것만으로도 감격한 낌새였다.
“여기, 이게 부탁하신 마도구입니다. 환영 마법에서는 웬만한 기성 마법사 저리 가라 하는 친구가 만든 술식이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나무로 된 손거울이었다. 라구 말대로 거기 새겨진 마법식이 복잡해서인지 보통의 손거울보다 조금 컸다. 같은 숙소에서 지내는 동료가 짠 술식을 그대로 옮겨 만든 마도구라고 했다.
“이 손거울을 열어서 올려 두면, 반경 3에트 이내의 사람을 대상으로 타인의 주의를 분산시키는 마법이 작동된답니다. 그러니 변장을 하셔도 남들이 수상쩍은 줄 모르게 되는 거예요. 저희야 이미 서로 알고 있어서 효과가 느껴지지 않겠지만요.”
“마도구라니……. 제도 귀족들은 이런 마도구를 예사로 쓰는 건가?”
메리앤은 마치 로망스 속 등장인물이 된 것만 같아 기분이 좋아졌는지, 시골뜨기 흉내를 계속했다. 제 말투나 몸가짐에서 저도 모르는 새 기품이 넘쳐 흐르는 것도 모르고서.
그런 그녀를 못 말린다는 양 한번 쳐다본 클로에는 미라벨에게 눈짓했다.
미라벨은 클로에의 손가방에서 금화 주머니를 하나 꺼냈다. 한눈에 보기에도 무게가 상당했다.
늘 졸린 듯하던 라구의 눈이 번쩍 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