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마지막 후회 (2)
“어, 어머.”
정적을 깨뜨린 것은 자세한 상황은 몰라도 두 사람의 기만적인 우정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손님이었다.
메리앤은 제 옆자리에 앉은 아쉴의 고슬고슬한 연갈색 머리칼을 흐트러뜨리며 말했다.
“우리 아쉴이 그런 생각을 했구나. 캄포와 크레벨의 정혼만 아니었으면 제게 기회가 있는 줄 착각하고 있구나.”
“……공녀님!”
기대한 대로 메리앤의 방문은 라크루아에 복작복작한 활기를 가져다주었다. 클로에 역시 피차 체면 차리지 않아도 되는 메리앤과의 시간이 마치 사촌을 만난 것처럼 좋았다.
만찬 시간이 끝나고, 클로에는 메리앤과 미라벨과 함께 제 방에서 파자마 파티를 벌였다. 캔달우드 공녀의 방문을 축하하며 궁정백이 내준 귀한 스위트와인도 함께였다.
메리앤은 황궁에서 탐낼 수 없는 와인을 맛볼 수 있어서 더욱 신났다. 법적으로는 음주 가능 연령이었지만, 캔달우드 공녀의 체면이 호기심보다 무거웠다.
“그래서, 바람의 날에 가는 거야?”
“응. 우선 피크닉을 가자.”
“아이펠 장원으로?”
“……아니, 새로 들은 데가 있어.”
클로에는 아이펠 장원과 관련된 추억이 자아내는 씁쓸함을 애써 누르며 말을 이었다.
“리비에라강 건너편에 고티유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이 있대. 평민들이 많이 간다더라.”
“우와아…….”
“그리고 시내에서 저녁을 먹는 거야. 그 후엔…… 슈바츠 거리로 가는 거지!”
“친위대 기사들을 잘 따돌려야 할 텐데.”
메리앤의 동향을 감시하는 한편으로 호위 본연의 임무도 수행할 친위대의 기사들은 1층의 손님방에서 머무르는 중이었다.
“걱정 마. 내가 사실 앙헬라 거리 뒤편에 집무실…… 비슷한 게 있거든. 거기서 따돌리면 어떨까 싶은데.”
“집무실? 언니 건물 샀어?”
“아아니, 내 건 아니고.”
데메트리안의 건물에 무상으로 공간을 얻은 셈이니 말하기가 껄끄러웠다. 클로에는 괜스레 목소리를 낮추었다.
“사실 내가 요즘 작게 하는 일이 있어.”
그 말을 듣는 메리앤의 눈이 땡그래졌다. 그때 해 줄 말이 있다더니, 이거구나.
“내가 너랑 3황자 전하께 선물해 준 책갈피 기억나지?”
메리앤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라벨이 눈치 좋게 클로에가 보석을 모아둔 나무 상자를 탁자 위에 올려 둔 참이었다.
클로에가 열쇠를 돌려 상자를 열어 보이자 안에 크고 작은 보석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우와아, 이거 뭐야. 언니 보석 밀매해?”
“세금 내고 있거든?”
비록 라이언의 명의를 빌렸지만 말이다.
메리앤의 눈이 휘둥그레져서 그 안을 살폈다. 황궁에서 부족한 것 없이 지내는 그녀라고 해도, 황실 직계도 아니면서 황실 예산을 마음대로 쓰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더구나 장신구에 세팅되지 않은 나석 상태의 보석을 볼 일도 없었고.
“내가 어쩌다가 보석이 마력에 오염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어. 여기, 이렇게 말야.”
클로에는 그 안에서 벨벳 주머니 하나를 꺼내, 오늘 라이언 편에 보내지 않은 보석 하나를 꺼내 보였다. 루카에게 부탁해야 할 정도로 오염이 심한 페리도트였다.
“이렇게 뿌연 게 보석이라고?”
“응, 여기 끄트머리 보면 원래 빛깔이 좀 보이거든.”
“아니, 이걸 어떻게 알아봐?”
“보석을 어엄청 많이 보면 그렇게 되더라.”
“라크루아들이 언제부터 보석을 그리 좋아했다고?”
궁정백가는 제도 행정을 총괄하는 만큼 대대로 사치를 좋아하는 척조차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 품위를 살릴 땐 살려야 하지만서도.
클로에는 제대로 답할 수 없어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내가 안목이 좀 뛰어난가 봐.”
그걸 잠자코 듣고 있던 미라벨이 입꼬리만 들어 올렸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책갈피 선물한 날 2황자 전하께 만찬 초대받았었잖아. 그날 전하랑 데미…… 데메트리안 경이랑 구휼 기금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는데, 마법사가 관여했는지 궁금해하고 있는 거야.”
“그래, 진짜 감쪽같이 도둑맞았다고들 했으니까.”
메리앤이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내가 보석만 있으면 마법이 쓰였는지 확인할 수 있다고 알려드렸더니, 정말로 구휼 기금을 도둑맞은 상단 중에 보석이 오염된 걸 본 곳이 있었던 거야.”
“아아, 그래서 마법사단장이 열 내면서 1황자 전하를 드잡이했구먼?”
“그랬어?”
“대놓고 그런 건 아니었지만. 마법사단장이 황자궁까지 올 일이 뭐가 있어.”
“아이고…….”
그게 자존심 싸움이라는 걸까.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미라벨이 작게 진저리쳤다.
그 고생을 하셨는데도 결국 황태자 자리에서 또 한 번 미끄러지고 마신 1황자 전하. 모두가 와인을 홀짝임으로써 그에 대한 애도를 표했다.
“그럼 이렇게 오염된 보석을 사서 원래대로 만들어 파는 게 언니가 하는 일이야? 저번에 선물해 준 책갈피에 달린 사파이어도 그렇게 생긴 거고?”
“응. 그래서 그…… 집무실이 앙헬라타 대로 근처에 있으니까, 거기에 들어간 척하면서 거기서 옷을 갈아입고……”
“캄포 대공녀도 그러다가 만난 거야?”
“응?”
“심부름 갔다가 만났다며. 근데 캄포 대공녀도 비범한 인물 같았단 말이지.”
그 말을 듣는 미라벨이 고개를 주억였다. 비범하긴 정말 비범하시지.
“그분이 고티유에 몰래 드나들 일이 뭐 있어? 황궁도 안 와, 사교계도 안 다녀. 그렇다고 유흥을 즐길 것도 아니고.”
“이야, 책벌레 추리력 어디 안 가네?”
클로에는 제대로 대답하지 않은 채 얼버무리며 안주로 주방에서 올려 준 무화과 조각을 그녀의 입에 넣어 주었다.
루시엔과 제가 어느 정도 비슷한 처지라고 생각해서였을까, 메리앤은 꼬치꼬치 캐묻는 대신 제 짐작으로 적당히 덮어 두는 편을 택했다.
“신기하다……. 바깥에선 진짜 많은 일이 있구나.”
메리앤이 늘 그렇듯 궁 밖에 대한 동경으로 눈을 반짝였다.
클로에는 정말은 루시엔은 괴짜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고, 저야 두 번째 삶이기에 그렇다고 말할 수가 없어 난처하게 웃고 말았다.
* * *
간만에 외부 의뢰가 있어, 누아제트 남작부인은 밤늦게 저택을 빠져나왔다. 두툼한 가죽 바지에 어깨를 덧댄 셔츠를 입으니 영락없이 왜소한 체형의 사내가 되었다. 거기에 음성 변조 마도구로 만든 마스크까지.
의뢰인을 만난 누아제트 남작부인은 작게 놀랐다. 그게 너무도 익숙한 거한이었던 것이다.
요즘 딸애의 호승심을 자극하여 수련에 진심으로 임하게 만들어 준 기특한 젊은이, 데메트리안의 호위기사 파이겐이었다.
‘크레벨에서 의뢰가 들어와 일단 받긴 했는데, 큰 공자의 일이었군?’
남작부인은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 애쓰며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슈바츠 거리의 중심부, 고텐베르크의 들꽃 클럽 3층의 으슥한 방 안이었다.
남작부인은 만년필 하나를 꺼냈다. 만년필의 기능도 있기야 했으나 그녀의 인상에 주목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미약한 환영 마법을 거는 마도구였다. 마탑에서도 다루는 이가 많지 않아 어렵게 제작한 거였다.
파이겐은 이런 자리가 처음인 것을 티 내지 않으려 애쓰며 어깨를 슬쩍 부풀렸다. 그런 그가 얼마간 제 아들 같은 마음이 들어 누아제트 남작부인은 속으로 웃었다.
“그래, 크레벨에서 무슨 일이 있어서 이 농브르를 다 찾았소?”
파이겐은 뒷목에 흐르는 식은땀을 들키지 않길 바라며 큼큼, 목을 가다듬어 위압적인 목소리를 냈다.
미라벨의 어머니가 농브르의 단주인 것을 알고야 있었지만, 제 앞의 사내가 그녀라고는 상상하지 못한 탓이었다.
“알아봐 줬으면 하는 일이 있소.”
“그런 분들만 농브르를 찾지.”
“……황궁 내부에 관한 일도 가능하시겠지?”
“원한다면 황후 폐하께서 포도를 드실 때 씨를 뱉으시는지, 함께 삼키시는지도 알 수 있지.”
“그것보다 더 사소한 일일 수 있는데.”
“황궁에 사소한 일이 어디 있소?”
끄응……. 어설프게 기선 제압을 하려던 파이겐은 마음이 불편해졌다.
햇볕 아래서 정도만 걷는 기사인 파이겐에게는 참 어려운 일이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늘 바른 일만 해 오신 공자님 덕에 밤의 일이란 남의 일이었건만.
거구의 젊은이가 쩔쩔매자, 남작부인은 놀리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걸 눌러 참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누구의 정보를 얻고 싶은 건진 모르겠지만 일단 맡겨만 주시게.”
“말레카의 왕녀.”
“말레카?”
“별궁에 손님으로 기거하는 말레카의 왕녀가 스칸다르의 왕자와 내통을 한 정황이 있는지 궁금하네. 알레지오 후작가의 영애가 그 연결고리인 모양인데.”
남작부인의 눈썹이 크게 들렸다. 제 주군인 궁정백부인의 지시에 따라 스칸다르 왕자의 주변을 살핀 덕에 그가 알레지오와 연이 있는 것까지는 파악해 놓은 터였다.
그런데, 말레카라니.
제가 파악하지 못했던 정황에 남작부인의 낯이 더없이 진지해졌다. 물론 마도구 덕분에 파이겐이 그 변화를 딱히 알 수는 없었지만.
“아아, 스칸다르…….”
길어지는 침묵을 메우려, 남작부인은 알 만하다는 듯한 투로 중얼거렸다.
스칸다르의 왕자를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에 반은 진심이었지만, 크레벨의 기사들이 왜 스칸다르를 의심하는지 알 수 없어 떠보는 것에 가까웠다.
“스칸다르에 대한 정보가 좀 있소?”
“왕자에 대한 개인적인 정보가 좀 있기야 하지.”
그게 무엇인지, 파이겐은 거의 물어볼 뻔했다. 요즘 들어 제 공자님께서 스칸다르의 왕자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것을 너무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는 더더욱 잘 알았고…….
다만 이 사내 너머에 누아제트 남작부인이 있는 걸 알아 따져 물을 수가 없었다.
‘아유, 공자님은 왜 이런 일을 맡겨서.’
파이겐은 마음속으로나마 제 붉은 머리카락을 거칠게 헤집었다.
말레카의 왕녀를 뒷조사하는 일은 크레벨의 기사들을 쓸 수 없다 판단한 데메트리안이 제 심복인 파이겐에게 그의 적성에 맞지 않은 일을 시킨 것이었다.
파이겐은 제가 생각해도 데메트리안이 이 일을 맡길 인물이 저뿐인 것이 빤해, 원망할 데도 없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파이겐의 머릿속에 스치는 생각이 대충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 있어서, 남작부인은 속으로 웃었다.
“의뢰인께서 생각하시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요. 우선은 알레지오와 스칸다르의 왕자가 꽤나 긴밀한 사이라는 것 정도……. 물론 세부적인 걸 들으시려면 좀 더 지불하셔야겠지만.”
파이겐은 다시금 머리가 지끈거렸다. 데메트리안이 만일의 경우에 쓰라고 금화를 두둑이 챙겨 주기야 했지만 제가 마음껏 써도 되는지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우선 말레카의 왕녀와 스칸다르의 왕자가 접촉하고 있는 게 사실인지부터 알아봐 주시면 좋겠소. 더 필요한 게 생기면 그때 정보를 사도 되겠지?”
“그때까지 팔리지 않는다면 말이지.”
남작부인이 어깨를 으쓱였다. 농브르에 정보를 사고팔겠다고 오는 고객들은 굉장히 한정적이었고, 그들 중 이 정보를 살 이들은 없었지만.
“그럼, 말미는 언제까지로 하면 되실까?”
이 자리에서 들은 질문 중에 가장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는 내용이 나와 파이겐은 조금 밝은 낯이 되었다.
“빠를수록 좋소. 긴급 수행비가 필요하다면 금액은 얼마가 들어도 좋고.”
데메트리안이 읊은 그대로였다.
“이번 주 안에 연락 드리도록 하지.”
“좋소.”
짧게 고개를 까닥여 보인 남작부인은 마치 실수로 들어왔던 사람처럼 날랜 동작으로 훌쩍 일어나 나갔다.
‘왕자가 알레지오 후작가와 연이 있는 걸 마님께는 굳이 보고드리지 않았는데. 크레벨에서 왕자를 주시하는 걸 보면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는 걸까…….’
남작부인은 제가 입수한 정보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고텐베르크의 들꽃 클럽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