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마지막 후회 (1)
「아가씨께서 쓰신 것처럼 빛 가루를 드리우는 걸로 루비랑 에메랄드, 다이아몬드 주문이 들어왔고, 혹시 머리 색을 바꾸는 마법은 걸 수 없는지 물어본 분도 계셨어요. 말씀하신 대로 상등품 보석을 쓸 경우에는 보석 디자인을 선택할 수 없다고 안내했는데도, 젊은 영애님들 주문이 많아서인지 그래도 보석을 쓰겠다는 분들이 많았답니다.」
“앤지네에서 온 편지야?”
“응.”
“어떻대? 반응 좀 있대?”
“……주문이 꽤 많이 들어온 모양이야.”
클로에가 응접실에 앉아 앤지네에서 온 편지를 읽고 있을 때. 등 뒤에 답삭 매달려 온 미라벨이 클로에가 읽고 있던 편지를 넘겨받았다.
“헤에, 주일부터 전령이 다녀갔다고?”
편지를 읽어 내려가던 미라벨이 숨 들이쉬는 소리를 냈다.
“오늘도 벌써 열 명이 다녀가서, 주문이 열다섯 건……?”
“아무거나 좋으니까 만들어 둔 게 있으면 얼마가 됐든 먼저 팔라는 사람들도 많았대요.”
클로에의 맞은편에 앉은 라이언이 재빨리 덧붙였다.
라이언이 매주 클로에를 만나러 오는 빛의 날. 궁정백저에 오는 길에 앤지네에 들러 지난 이틀간 쏟아진 반응을 듣고 온 터였다.
“앤지 아줌마가 오늘 아침에 가게 문을 열었더니 문틈에 꽂혀 있던 편지들이 후두둑 떨어졌다는 거예요. 순서를 표시하려는지 겉봉에 다 시간을 적어 놨더래요.”
양복점을 물려받으려는 라이언으로서는 고티유에 새로운 유행이 태동하는 데 제가 일조했다는 자부심에 들뜬 모양이었다.
“선주문 들어온 것만 그 정도고, 내일부터는 방문 요청하신 댁에 가 보셔야 한다고, 낮에 상담하고 밤에 작업하느라 당분간 죽어나실 것 같다고들 하시던데요.”
상상 이상의 반응이었다.
라이언이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조잘대는 걸 들으며, 클로에는 조금 불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이렇게까지 유행을 바꿔도 되는 걸까……?’
루시엔의 부추김에 시험 삼아 해 본 일이었다. 제가 정말로 무슨 영향을 끼칠 수나 있는지 긴가민가한 마음이 있었지만…… 이렇게 되고 나니 그녀의 말이 참이었다.
미래를 알고 있으니 이런저런 일을 꾸몄는데, 이젠 미래를 알 수 없게 돼 버렸다.
클로에는 작은 불안과 고양감을 함께 느꼈다.
그래도, 한번 시작한 일은 책임지고 계속해야 하는 법.
“라비, 통신구 좀 갖다줘.”
어떤 거? 미라벨이 장난스런 표정을 지어 보이는 바람에 클로에는 미간을 찌푸리며 덧붙였다.
“밖에 있는 거 말야. 라구 경이랑 연락하는 거.”
미라벨이 까르륵 웃으며 응접실에서 나갔다.
“주인님께서 그날 완전히 주목받으셨다면서요? 무슨 상도 받으셨다고.”
“……별 소문이 다 났네.”
“손님들이 와서 아닌 척하면서 주인님 칭찬을 하도 했나 봐요. 자세히 말은 안 해도 부러워하는 티가 다 났대요. 정말 아름다우셨으니까…….”
그리 말하는 라이언은 여전히 꿈꾸는 눈빛이었다.
그의 찬사가 한편으로 저 스스로를 향해 있는 것이 빤했다. 제가 관여한 주인님의 차림이 황궁의 연회에서, 그것도 황제 폐하의 50세연에서 최고로 주목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라이언은 기절할 뻔했으니까.
클로에는 조금 몸을 배배 꼬고 싶은 마음이 되어, 재빨리 응접탁자에 올려 둔 나무 상자를 열었다. 지금까지 라구를 통해 정화한 보석들이 담겨 있었다.
“다이아몬드 하나, 루비 하나, 에메랄드 하나……. 또 있니?”
“없어요. 나머지는 다른 마법을 걸면 하는 것들이어서요. 아, 마법이 필요 없는 것으로는 에메랄드 두 개랑 라피스라줄리 하나, 자수정 세 개…….”
“주문 수량이랑 안 맞네?”
“개인적으로 소장하던 보석을 맡긴 손님도 있다셨어요.”
클로에와 라이언이 머리를 맞대고 나무 상자를 뒤적이고 있을 때였다.
“로이, 여기.”
금세 클로에의 방에 다녀온 미라벨이 라구와의 통신구가 담긴 상자를 내밀었다.
클로에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마도구를 작동시켰다.
“경, 오랜만이네. 지난번에 마법을 부여해 준 마도구 액세서리가 꽤나 호응이 좋았던 모양이야. 일전에 부여해 준 마법 말고도 다른 마법을 부여할 수 있는지 문의가 와서 말인데, 혹시 머리 색을 바꾸는 것도 가능한가?”
또각또각, 다시금 마도구를 작동해 메시지를 보내고서 클로에는 라이언과 다시 보석들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머리카락 색을 바꾸는 마법이 있으면 진짜 편하긴 할 텐데.”
“그러니까. 우리도 그…… 모자 없이도 다닐 수 있겠고.”
클로에는 이번에 루시엔에게서 빌려온 스체르바뇰식 드레스를 떠올리며 말했다. 라이언 앞이어서, 또 응접실 밖에서 누군가가 저들의 대화를 들을까 봐서 에둘러 말하는 거였다.
“장터 때 본 것 중에 손톱 색깔 바꾸는 거 있지 않았어?”
“그러게. 그치만 그렇게 편리한 걸 지금까지 써 봤단 소리 한번 없는 거 보면 머리카락은 좀 다른가 싶기도 하고.”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라구의 답신을 기다린 지 15분쯤 지났을까. 통신구가 빛을 내며 울렸다.
[오랜만이십니다, 영애님. 그간 잘 지내셨죠? 말씀 주신 것 말인데요. 인체에 영향을 끼치는 건 일종의 공격 마법이어서요. 음, 손톱처럼 움직이지 않고 생명 활동과 무관한 부위에 대한 건 가능한데…… 이론상으로는 눈동자 색도 가능하긴 하지만 위험이 커서 해 본 적은 없고요.]
안 된다는 결론으로 이어질 말을 언제나처럼, 마법에 일가견 없는 사람들에게 괴로우리만치 긴말로 이어가는 라구였다.
[환영 마법으로 인식을 흐트러뜨리는 게 그나마 비슷한데, 인상을 흐리게 해 주는 정도가 가장 최선이고요. 마력식도 복잡해서 보석에 달 소켓에 새기기에는 어려워요. 저는 환영 마법 전공이 아니고, 같이 사는 동료가 전공이라서 그녀가 만든 마도구가 있으니 궁금하시면……]
“안 된다는 소리겠지?”
30초가 이렇게 길었나. 클로에가 단정 짓는 말에 함께 듣고 있던 미라벨과 라이언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인상 흐리게 해 주는 마법을 어느 아가씨가 기대하겠는가.
“더 궁금하신 거 있으시면 제가 오늘 가서 여쭤볼게요.”
“그래. 아, 태양절 내내 집에 손님이 와 있어서, 그동안은 쉬어도 좋아.”
“네, 주인님. 라구 경께서 전하시는 말씀 있으시면 통신구로 전하라고 할게요.”
라이언이 여러모로 들뜬 낯을 숨기지 못한 채 클로에가 골라놓은 보석을 제 파우치에 쓸어 담았다.
* * *
이틀 뒤 물의 날, 태양절의 첫날.
왕실의 마차가 라크루아의 타운하우스에 다다른 것은 10시쯤의 일이었다. 한시라도 궁에 오래 머무르기 싫다고 시위하듯, 메리앤은 태양절 연휴 첫날이면 조찬을 해치우자마자 궁을 떠나는 것이었다.
“한 주간 잘 부탁드려요, 백작님, 부인. 아쉴도 잘 부탁해.”
아침 일찍 출근한 에티엔을 제외한 라크루아의 모두가 캔달우드 공녀의 방문을 반겼다.
제국에서 그리 몸값 높으시다는 신비주의 공녀님을 모시게 된 사용인들도 들뜬 모양새였다. 매해 오시는데도 말이다.
메리앤은 여느 때처럼 3층 제일 안쪽의 방을 배정받았다. 클로에의 방 바로 맞은편이었다. 가장 좋은 손님방이 2층에 있었지만, 클로에와 에티엔이 나눠 쓰는 3층에서 마음 편히 지내다 가시라는 배려였다.
“아, 그리웠어!”
1년에 한 번 오는 그 방에 들어선 메리앤은 마치 고향 집에 온 것처럼 침대에 몸을 던졌다.
라크루아의 하인들이 그녀의 짐을 방으로 옮겨 두는 동안 메리앤은 보닛도 벗지 않고서 침대 위를 뒹굴었다.
“공녀님 체통이 말이 아닌데?”
“나, 정말 태양절을 위해 한 해를 사는 것 같아…….”
메리앤의 너스레에 클로에가 피식 웃었다.
낮에는 라크루아의 신사들 아무도 즐기지 않아 1년에 한 번 쓰이는 당구대를 꺼내 놀았고, 늦은 오후에는 정원에서 티타임을 가졌다. 메리앤은 제 본분도 잊고 마음껏 손님처럼 굴 수 있는 라크루아에서의 체류를 진심으로 즐거워했다.
황자궁에서 무게 잡던 공녀님은 어디 갔는지, 메리앤은 티타임 내내 끊임없이 재잘거렸다.
“캄포 대공녀도 참 재밌는 사람이더라고요. 다음날 오찬 때 다들 보셨어야 했는데. 폐하께서 간밤 잘 잤냐고, 앞으로 자주 오라고 하시니까 침구 좋으면 뭐하냐고, 황후 폐하 시녀들 눈초리가 캐노피도 뚫을 기세라 체할 것 같다고 데뷔탕트 때나 뵙자고 하는 거 있죠?”
푸하하, 옆에서 듣던 미라벨이 목구멍을 보이며 깔깔 웃었다. 역시 루비 공녀님이셨다.
‘크레벨과의 혼약쯤 무시하고 써먹을 곳이 없을까 살핀 거겠지.’
메리앤의 천진한 조잘거림을 들으며, 궁정백부인은 크레벨 공작과 캄포 대공이 그 정혼을 맺던 30년쯤 전의 분위기를 떠올렸다.
제 죽은 여동생의 가여운 아기를 양녀도 아닌 후견인으로 들인 것부터가, 정략혼으로 정치하는 데 부창부수였던 것이다.
“언니가 그분이랑 친하게 되었다고 해서 놀랐어요.”
“그러게 말야. 나도 그날 놀랐지 뭐야.”
궁정백부인은 태연하게 거짓을 말했다.
“하하……. 그렇게 됐네요.”
“그분, 원래 그런 분이야?”
“으응, 좀 특이한 구석이 있기는 하지. 꽤 남달라.”
“고티유 안 오고 싶을 만하겠더라.”
“역시 그럴까?”
클로에에게는 너무 즐겁고 친숙한 고티유 사교계였지만, 저와 개인적으로 교류하는 아녀자들은 대부분 사교계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어머니부터가 그러했고 미라벨, 메리앤에 이어 이제는 루시엔까지.
‘캄포 대공녀는 뭐, 평범하게 활동했다면 사교계를 혼자 다 휘어잡았겠지만.’
출타했던 라크루아들이 모두 귀택한 만찬 시간에도 메리앤은 잔뜩 들떠 있었다. 그녀가 전하는 황실 만찬 자리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확실히 라크루아의 만찬실 공기가 퍽 화목한 거였다.
“아쉴, 상사병은 괜찮아?”
“뭐, 뭐라고요?”
“그때 그분과 춤추는 거 보니까 얼굴이 아주 홍당무던데.”
그리 말한 메리앤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아쉴은 다시금 홍당무가 되었다.
“안 그래도 아쉴이 갑자기 꼭 제국 아카데미를 가야 하냐고 묻지 뭐니?”
“어머어, 그렇죠. 대공가의 여식은 보통 리도테서 수학하니까요.”
“하지만 어쩌니, 캄포의 대공녀 정도면 못해도 3성급 관료는 돼야 남자로 볼 텐데.”
“그래, 아쉴. 네가 관료가 돼야 그나마 작위를 받을 수 있을 거야.”
“미안하다, 아쉴. 라크루아는 이 형이 물려받게 되어서.”
궁정백부인과 메리앤이 작정하고 아쉴을 놀리려 들자, 에티엔도 좋다고 거들었다. 그 상대가 루시엔이니 클로에는 난처한 미소만 지었고, 궁정백은 제 부인이 장난스레 굴 때면 늘 그렇듯 흐뭇하다는 표정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세 사람의 공세가 조금 길어졌다 싶었을 때쯤.
“그분은 데메트리안 경과 결혼하실 거잖아요!”
손에 쥐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으며 아쉴이 하소연하는 목소리를 내었다. 원망 섞인 그 목소리는 제 누이를 향해 있었다.
라크루아의 식탁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아는 바 있는 라크루아의 모자와, 아는 바는 없어도 짐작하는 바가 있는 궁정백은 깜짝 놀란 시선을 아쉴에게로 보냈다.
클로에는 괜히 죄인이 되어 고개만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