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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했는데 첫사랑이 수상하다-122화 (122/189)

122화. 밤이 짧아지는 나날들 (14)

데메트리안이 고개를 슬며시 모로 기울였다. 클로에는 그가 노골적으로 불쾌해하고 있음을 알았다.

‘왕자님을 경계하는 것을 알기야 했지만…… 조금 과한 거 아냐?’

한편으로 뷔욘의 어깨가 슬며시 올라가는 것이, 그 또한 심기가 불편한 것이 분명했다.

“그녀가 불편해하는 이야기를 계속하시기에 드리는 말입니다.”

데메트리안이 슬며시 걸음을 옮겨 두 사람의 옆에 와서 섰다. 졸지에 두 남자를 맞붙여 놓은 셈이 되어 클로에는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러고 보면 지난번에 제국 아카데미에서 뵈었을 때도…….’

데메트리안이 뷔욘을 적대하는 거야 제 쑥스럼만 제하고 보면 그럴 수 있는 거였지만, 뷔욘이 데메트리안을 대하는 것도……

‘매번 날카로우신데.’

뷔욘이 크레벨의 소공작에 대해 어찌 생각하는지, 클로에는 아는 바가 없었다. 제가 그와 사교계 대표 단짝인 것조차 모르시는 줄 알았으니까.

‘그러겠다고 약속했었잖아.’

그로부터 편지가 온 것을, 알고 계셨을까. 그의 편지가 스칸다르에 닿기는 했던 걸까.

“오해가 있으신 모양입니다. 영애께서 매번 보여 주시는 모습에 매번 경탄하게 되어 덧붙인 말인데.”

그리 말한 뷔욘은 눈초리를 곱게 접으며 클로에 쪽을 바라보았다. 그걸 본 아르투젠의 영애들이 셰비크의 구중궁궐 가장 은밀한 곳을 상상하게 만드는 미소였다.

“지난번 살롱에서 한 예술가를 구원하신 것도 그렇고, 제국의 위기에서도 한 줄기 빛이 되시니 말입니다.”

그리 말한 뷔욘은 성큼, 클로에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데메트리안조차 그녀와 춤을 출 때가 아니면 엄두 내지 않는 간격이었다.

폭 넓은 스칸다르식 로브를 꿴 그의 팔이 물 흐르듯 움직여, 제 드레스 자락을 말아쥐고 있는 클로에의 손에 닿았다. 매번 허락을 구하던 것과 사뭇 달랐다.

깜짝 놀란 클로에의 시선이 데메트리안의 낯을 스쳤다. 뷔욘의 금갈색 눈동자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이번에 영애께서 꾸리신 그 아름다운 것들이…… 한편으로 저희 나라의 부족한 산업 경제에 어떤 구원이 되지는 않을는지요.”

그는 그 손을 깊이 당겨 진녹색 실크로 된 장갑 위에 입을 묻었다. 그녀의 손등에 마디 두드러진 곳을 베어 물듯이.

그것이 평소보다 조금 길어졌을까.

“……덕담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농이 지나치신 건 아닌지.”

제 눈높이에서 이뤄지는 일을 외면하듯 시선을 돌리며 클로에가 재빨리 대꾸했다. 동시에 손을 작게 끌어 빼는 순간.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녀의 손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뷔욘의 손에 힘이 꾸욱 들어갔다. 그녀의 대꾸를 채근하듯 진득히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클로에는 더 이상 피할 수가 없었다.

제가 익숙히 보았던 그의 눈빛이었다.

그가 오래 품어 왔다는 연심을 고백했을 때, 또 그녀에게 무엇도 허투루 줄 수 없다며 가장 값비싼 것만 안기려 들었을 때, 또 여름휴가를 보낸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적적해하는 저를 그의 품에서 위로할 때.

그의 헤이즐넛 빛 눈동자가 램프 빛 어스름에 비쳐 금빛으로 빛날 때면, 클로에는 그것이 일종의 정염이라고 생각했던 것인데.

그것이, 여기서 어쩐 연유로.

클로에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제 생각에 빠져 그에게서 떨어지지 못했다.

“그쯤.”

하시죠. 데메트리안이 그 정적을 깨기 위해 목을 울릴 무렵.

“즐거운 밤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저는 먼저 들어가 보도록 하죠.”

속살거리듯 내뱉은 뷔욘이 빙긋 웃어 보이고는 입구 안쪽으로 몸을 돌렸다. 소공작에게 묵례하는 그 낯에 떠오른 미소에는 의뭉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데메트리안은 제가 어금니를 사리물고 있던 걸 한참 뒤에야 알았다. 그의 다부진 턱이 조금 아릿하다 느꼈을까. 그를 사로잡은 감정은 일종의 분노였다.

아차 싶어 고개를 돌리니 클로에가 걱정스러운 낯으로 저를 보고 있었다.

“……데미.”

후우. 그는 작게 숨을 뱉었다. 그런 부정적인 감정에 휩쓸릴 때가 아니니까…….

“잠시 걸을까?”

이리된 김에.

죄책감에 조심하던 것은 왕자의 뻔뻔함에 날아간 지 오래였다. 그는 저 자신이 모순적인 감정들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 것도 몰랐다.

클로에는 데메트리안이 내민 팔을 얼마간 바라보았다. 그와 이토록 자연스럽게 걸은 것이, 제가 그와의 독서회 날에 울며 도망친 이후로 처음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그녀의 장갑 낀 손이 조심스레 그의 팔을 걸어 잡았다.

데메트리안이 중정 쪽을 향해 걸음을 내디디려 할 때.

“……비스킷.”

“응?”

“데쎄르 비스킷 먹고 싶어.”

중정에서 말레카의 왕자와 함께 있을 메리앤과 마주치지 않으려는 배려였다.

원로원 관료들의 집무실이 있는 2층의 복도에는 램프 하나 켜지지 않아 창문으로 흘러드는 달빛만 어스름했다. 오늘 같은 날 잔업하는 관료가 있을 리 없을 테니까.

계단을 오르고 그 인적 드문 그 복도를 걷는 내내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복도 한중간에 중정 쪽을 향해 난 테라스를 지나칠 때였다.

“여기서 기다릴게.”

“같이 들어가지.”

그리 말하는 그의 눈빛에는 일종의 걱정이 깃들어 있었다. 계속 서 있고 춤추느라 발이 고단할 텐데.

클로에는 제가 쥐었던 그의 팔을 떠밀었다.

“다녀와.”

달빛이 내려앉은 테라스에서는 중정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었다. 아직 메리앤이 거기에 있을까. 클로에는 제가 잘 아는 몽실몽실한 분홍색 머리칼을 찾아보았지만 허사였다.

안 그래도 밤이면 어스름한 정원에, 연회 날이라고 더욱 불빛을 낮췄기 때문이었다.

그런 분위기가 두 남녀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알아 클로에는 조금 울적해졌다. 괜한 짓을 한 건 아닌지. 저 또한 거기서만큼은 데메트리안이 다가오는 걸 피할 수 없었는데 말이다.

난간 위로 팔을 올려 몸을 기댔을 때였다.

“혹시 춥……진 않지?”

“……뭐?”

일주일 뒤면 태양이 가장 높이 떠서 낮의 길이가 한 해 중 가장 길어지는 태양절. 서늘하대도 그게 춥다고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인데.

그의 어깨에는 응접실에서 가져온 얇은 숄이 걸쳐져 있었다. 한 손에는 비스킷 통이, 다른 손에는 한 쌍의 슬리퍼가 쥐인 채였다.

“이거라도 우선 신어.”

그가 집무실에서 신는 슬리퍼였다. 다리는 몰라도 발이라도 쉬었으면 싶어 무작정 들고 온 거였다.

‘언제부터 나를 그리 살뜰히 챙겼다고.’

이 역시, 그때부터였겠지.

클로에는 조금 뾰로통한 마음이 되었다가, 성의를 생각해 발을 옮겼다. 발을 조금도 조이지 않는 폭신한 바닥에 내려서자니 발이 시원했다.

그러고도 클로에는 중정만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찾아도 분홍색 머리칼이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밤의 황궁을 구경시켜 달라고 했으니 내궁 뒤편으로 넘어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남들에게 들키면 안 될 텐데. 폐하께야 알려지겠지만…….’

데메트리안은 그런 그녀를 한참 동안 곁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밤에 단둘이 있을 기회는 거의 없었다. 그가 그녀를 데려다주는 마차 안이 아니고서야. 연회장에서 단둘이 있을 수 없는 두 사람은, 첫 춤을 출 때만 어깨를 맞대고 마음껏 대화를 나누는 거였으니까.

데메트리안은 덩달아 난간에 몸을 기댔다. 두 사람의 팔꿈치가 서로의 온기가 느껴질 정도의 간격을 두고 나란히 자리했다.

“캔달우드 공녀는?”

“응?”

“아까 같이 나가는 거 봤는데. 돌아갔어?”

“아니, 그……”

클로에는 잠시 머뭇거렸다. 이건 메리앤의 사생활인데.

또 한편으로는 제 번민의 근거가 되는 미래를 그 또한 알고 있다는 사실이 유혹적이었다.

제 이야기라면 심사가 복잡했지만, 남의 이야기는 상의할 겸 나눠도 괜찮지 않을까. 제게 비겁히 군 것과 별개로 그에 대한 신뢰는 여전했던 것이다.

“……말레카의 왕세자랑 산책 중이야.”

“말레카?”

“나도 까먹고 있었어. 그러고 보니 미아가 말레카 이야기를 좀 하던 시절이 있더라고.”

데메트리안은 제가 기억하는 미래에서 황제가 캔달우드의 공녀의 혼처를 두고 여러 제후국을 저울질하던 것을 떠올렸다. 황태자가 된 프레더릭과 말레카의 왕녀가 혼인했으니 말레카는 당연히 후보에 없었다.

“돌아오고서 보니 몰랐던 것도 보이고…….”

“…….”

그건, 저들의 관계에 대해서도 통용되는 말이었다.

만나지 못하게 되고서야 그녀가 제게 필수 불가결한 존재임을 깨달은 그가 생각하기에는 더더욱 그러했다.

그게 저에 대한 원망의 말로 들려서였을까.

데메트리안은 자책의 마음을 담아, 제 품에 안고 온 틴케이스를 비틀어 열었다.

클로에가 올 때를 대비해 늘 채워 놓는 비스킷이었다. 최근에 그녀가 온 적은 없었지만, 혹시 몰라 저는 먹지도 않는 걸 매주 새것으로 채워 두었더랬다.

“스체르바뇰과는 협상이 어땠어?”

그 시절을 돌이키자면 제 멍청함이 떠올라 마음이 비참해지는 걸, 그녀는 알까.

“……매일이 난관이었지. 북해의 해적들을 소탕하라는 것이 골자였는데 스체르바뇰이 그들의 후예를 자처하니 어떻게 수락하겠어. 그것만은 힘들다, 그게 아니라면 내 딸과 같은 공녀를 그 험지에 보낼 수 없다, 뭐 그랬지.”

“딸과 같다고.”

클로에가 피식 웃었다. 그녀가 어떤 식으로든 웃었다는 것에 마음이 놓여, 데메트리안은 조심스럽게 비스킷 통에 담긴 것을 하나 꺼냈다. 하루 종일 누군가와 부딪은 장갑은 진즉에 벗어 둔 채였다.

그가 비스킷 포장지의 양 끝을 돌려 손쉽게 벗겨내는 것을, 클로에는 멀거니 바라보았다. 스스로 먹는 법이 없어 모르는 줄 알았는데.

데메트리안이 비스킷을 그녀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클로에의 손이 거기에 닿으려 할 때, 데메트리안의 손이 조금 물러났다.

실수일까? 클로에가 다시 손을 뻗자, 그는 팔을 움직여 또 피했다.

“줘.”

클로에의 손이 다시금 허공만 그었다.

“뭐야?”

“아.”

“뭐?”

“아.”

클로에는 조금 황당한 얼굴이 되었다.

답잖게 웬 장난질인가 싶어 고개를 쳐들었더니,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의 낯은…… 더없이 진지했다.

아, 그건가.

문득 스쳐 가는 윈제르 살롱에서의 당황했던 기억. 그리고 그곳에 있었을 그.

클로에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네가 이럴 자격이나 되냐는 괘씸한 마음이 들다가도, 그 자격을 그가 바라마지 않는 것을 알아 마음이 슬퍼지고 마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저는 자꾸만 그에게 약해지고 말아서…….

클로에는 수긍하듯 고개를 떨구어 그의 손에 들린 것을 물었다. 커피 향 너머로 풍미 깊은 버터의 향이 짭조름하게 났다.

그래, 서로의 마음을 알려 하지 않았던 때에도 저는 그에게 특별했다. 다시 올려다본 그의 눈빛이 감격한 듯 빛나고 있어 다시금 마음이 저몄다.

크레벨은 혼약에 무얼 걸었을까.

제가 가지 않는 편을 선택한다면 그는 그것을 포기해야 하는 걸까.

그새 비스킷 하나를 더 까고 있는 그의 낯에 흡족한 기색이 감돌았을 때, 클로에는 오늘 두 번째로 큰 결심을 하고서 말을 뱉었다. 그의 마음을 할퀼 마음이 없다는 데서 첫 번째와 달랐다.

“캄포 대공녀 말야.”

“……응.”

그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었다.

“친해졌어.”

“그래 보이더라.”

“재밌는 사람이던데.”

“……그래?”

데메트리안은 애써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럼에도 그의 얼굴에 흐르는 감정이 당혹 혹은 고통임이 분명했다.

클로에는 키득키득 웃고 싶은 것을 참으며 그가 또 장난질하기 전에 그의 손에 든 것을 빼앗았다.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있었던 것에 대한 대답을 들은 느낌이었다.

데미는 행복했었을까?

아니.

클로에는 대신 다른 질문을 떠올리기로 했다. 어쨌든 제게 선택권을 준 그의 성의에 보답하기 위해, 그에게 정말로 묻고 싶은 것과는 조금 다른 내용이었다.

“혹시……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

비스킷을 제 입 앞에 들어 올리고서, 클로에는 애써 태연한 목소리를 냈다. 깊은 의도가 있는 것처럼 들리지 않도록.

데메트리안은 그녀의 눈동자에 일말의 긴장이 깃든 것을 알았다. 달빛에 비친 그녀의 눈동자가 밤하늘을 머금은 듯 청록으로 빛났다.

그녀에게서 울리는 말 중 그에게 의미 없는 것이 있을까.

데메트리안은 비스킷을 들고 있는 그녀의 손에 제 손을 포갰다. 그녀가 손에 든 것을 떨어뜨리지 않도록 가볍게, 하지만 꾹 눌러 붙인 그 엄지로는 그녀의 손등을 느릿하게 문질렀다. 유영하듯이, 가느다란 손의 오돌토돌한 손마디를 덧그렸다.

스칸다르의 왕자가 입 맞췄던 부분이었다.

만족할 만큼 손짓하고서야, 데메트리안은 한 치의 꾸밈도 없는 답을 입에 올렸다.

“……아니.”

그건 정말로,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전조도, 조짐도 없는 일이었으니까.

‘내 아이를 위해 네게도 기회를 주겠다.’

다만, 의심이 가는 것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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