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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했는데 첫사랑이 수상하다-121화 (121/189)

121화. 밤이 짧아지는 나날들 (13)

클로에와 춤을 추고, 어머니와 춤을 추고, 여러 신사들의 환담을 다 받아 주고.

얼마간의 여유가 생기자 데메트리안은 황실 일원이 자리한 곳으로 향했다. 그의 용건은 옥좌 뒤편에 있었기에 측면의 계단을 따라 올랐다.

마침 그를 발견한 그의 목표, 2황자 대니얼은 작게 손짓해 인사하러 와 있던 제 휘하의 기사들을 물렸다. 소탈하되 위엄을 잊지 않은 그의 낯은 금세 천진하게 변했다.

“인상 풀어, 인상. 예쁘게 머리하고 왔는데 이마에 주름지잖아.”

“…….”

대니얼은 기분이 흡족해졌다. 늘 띄우고 있는 적당히 예의 바른 표정 아래 불쾌감이 선연한 것이었다. 제 친우를 대할 때면 꼭 좋아하는 애 괴롭히는 어린 소년의 심사가 되는 게, 별도리가 없었다.

제가 열 개쯤 되는 계단을 오르는 동안 웃음을 멈추지 못하는 대니얼을 노려보며 데메트리안은 주먹을 아드득 쥐었다.

“자자, 내려가서 한잔하세.”

대니얼은 친우의 등장이 오늘따라 더욱 반가웠다.

황제의 50세연인데도, 또 포상 명단의 최절정에 이름이 올랐는데도 1황자가 황태자 책봉을 받지 못해 뭇 귀족 사회의 시선이 그에게 쏠린 차였다. 분노하신 형님이 자리를 비우시는 바람에 애꿎게 시달리기까지 하던 터였다.

“미안, 미안. 네게 말해 둔다는 걸 깜빡했어.”

“거짓말하지 마.”

사석이었으면 이 자식 저 자식 하며 으르렁댔을 것인데 보는 눈이 많아 참았다. 분기등등한 그의 눈빛을 보며 대니얼은 조금 더 즐거워졌다.

당연히 일부러 말 안 했지. 깜찍한 녀석.

“갑자기 정해진 일이야. 너 요즘 성내에 수사한다고 자리에 잘 없었잖아.”

“……로이, 클로에한테는 말해 줬어야지.”

“소궁정백에게 말했으니 뭐 알아서 전할 줄 알았지. 라크루아 오누이가 좀 돈독해?”

대니얼이 태연한 낯짝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부황께서 깜짝 포상으로 그녀를 언급했을 때 화들짝 놀라는 걸 보니 에티엔이 제대로 전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게, 저부터가 깜짝 포상이라는 식으로 두루뭉술하게 말했으니까.

‘정식으로 알렸으면 어떻게든 고사했을 것 같아서 그랬는데……. 오늘 보면 시선 끄는 걸 싫어하는 타입도 아니었나?’

그들이 단상 아래 벽 쪽에 자리를 잡자, 시종들이 냉큼 와서 그들에게 와인 잔을 바쳤다.

“네 손으로 내가 포상을 하기야 했지만 그게 그 정도로 덮고 넘어갈 일은 아니잖아?”

데메트리안은 그가 언젠가 황실 양조장 와인을 강탈한 일을 언급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스칸다르의 왕자가 밀회의 성지에 있는 걸 보고서 조급해진 바람에, 라크루아의 담을 넘을 핑계가 필요했던 그날.

돌이키는 것만으로도 심장 간지러운 그날의 테라스로부터 너무도 많은 것이 달라졌다.

클로에가 저와 같은 경험을 했다는 사실을 알았고, 또 그녀를 실망케 해 버리고야 말았고, 용서만 바라며 매 순간 최선을 다해야만 하게 되었고…….

그 씁쓸한 마음을 담아 와인 잔에 든 것으로 입을 적셨을 때.

‘그러고 보니 왕자가 그곳에서 누군가와 접선했을 수도 있는 일이군.’

갑작스레 뇌리에 닿은 생각에, 데메트리안의 눈빛이 곁에 있는 사람도 잊은 채 가라앉았다.

‘그게 한들룽 지구에서 상단들 탐문하고 돌아오는 길이었으니, 구휼 기금 절도 사건에 마법사가 관여했다고 확정하기 전이었지.’

마법사가 관련되었다는 걸 떠올리다 보면 꼭 마법사 길드와 제휴하고 있는 알레지오의 후작가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알레지오 후작가는 필시 왕자와 연이 있을 테고.

‘분리 독립파에서 왕자의 개인적인 심부름을 한다는 걸 보면 그 일에도 왕자가 연관돼 있을 확률이 높은데. 이래저래 뒤가 구린 구석이 있으니.’

데메트리안은 보름쯤 전에 야밤을 틈타 공작저로 찾아왔던 분리 독립파의 수장, 이올린 한센이라는 그 중년 여성을 떠올렸다.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신뢰를 사기 위해 그날은 무엇도 캐묻지 않았더랬다.

생각에 빠진 그의 낯을, 대니얼은 미소하며 바라보았다.

‘용건이 있으시구먼.’

연회 자리에서라면 정치적인 밀담을 주고받더라도 친구 사이의 환담으로 가장할 수 있었으니까.

그가 뭔가를 위해 동분서주하는 걸 잘 알았다. 그 시작은 이제 숨기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그의 연심임이 자명했고.

원체도 열심히 일하던 이이긴 했으나 요 몇 달간은 과하다 싶을 정도였다. 갓 임관한 관료답지 않게.

그가 속으로는 꽉 채운 5년 경력의 관료임을 몰라, 대니얼은 제 친우이자 부황의 신하를 기특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혹시 알레지오 후작가에 대해 황실에서는 동향을 파악하고 있어?”

“알레지오? 갑자기 왜?”

“……인신매매 사건 말야.”

“아, 그래.”

그것이 비밀 지령이었어도 황자에게까지 비밀은 아닌지라 대니얼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경시청 수사관도 아닌 그에게 부황이 내린 임무를 군말 없이 수행하는 것 또한 대견한 것이었다.

“마법사가…… 거기에도 연관돼 있지 않을까 싶어.”

“또?”

단정했던 대니얼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구휼 기금 조달을 위해 황실 마법사단과 협의할 때 생긴 감정의 골이 온전히 가시지 않은 것이었다.

“인신매매단이 구인 벽보를 붙여 달라며 보석으로 셈을 치렀는데 그 현상을 보이는 게 있더라고.”

“이런.”

내내 능글대는 미소를 짓고 있던 대니얼의 얼굴이 덩달아 진중해졌다. 모두가 아는 2황자의 대외적인 얼굴이었다.

“그중에 사파이어가 있길래 전에 탐문했던 카틸라령 상단에 물었더니 사파이어가 몇 개 비기는 했다는 거야.”

“아니, 그걸 왜 그때는…….”

“긁어 부스럼이라고 생각해서 굳이 말 안 했겠지. 저들 혼자 손해 본 일이니까 이 문제와는 무관하다고도 생각했겠고.”

대니얼도 제 손에 쥔 잔을 입에 묻었다.

위정자의 적자가 보기에 요즘 제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꽤나 흉흉했다. 황실의 위신을 해칠 정도인지는 몰라도, 느낌이 안 좋았다.

황태자 책봉 문제 때문에 황실 내부도 어수선했고…….

“그 탈취범들이 인신매매 사건과도 연관돼 있다는 게 네 추측인 거지.”

“높은 확률로.”

“그렇다면…… 마법사 길드 쪽에?”

“알레지오 후작이 개인적으로 마법사들에게 일을 의뢰하기도 한다는 모양이야.”

“그래서 그 후작가가 의심스럽다는 거고.”

데메트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인신매매범 무리에 껴 있었다는 백발의 젊은 여성이 실마리일까 싶었으나, 라구가 알기로 마탑에 그런 외모의 마법사는 없다고 했다. 라구가 그 여성을 직접 본 게 아니니 확신하기엔 일렀지만.

‘마법으로 머리 색은 바꿀 수 없다고도 했고……. 우선 그 아지트를 덮쳐 봐야 할까.’

제가 파이겐과 급습했던 인신매매범의 아지트를 미리부터 주시하기 위해 근방의 상인들에게 뇌물을 먹여 놓은 터였다.

곰곰이 생각하는 기색이던 대니얼이 운을 떼었다.

“그 후작가와 상단의 제도 출입 내역 정도는 내 선에서 줄 수 있어. 그런데 마법사를 개인적으로 부린다면 굳이 외성 포털을 이용하지 않을 수도 있겠네.”

“마법사가 구휼 기금 탈취에 직접 움직였다면 더더욱.”

“또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그 상단의 수입 신고 내역 같은 거.”

“……아까 황제의 나팔 받았잖아?”

지방 영주에게나 공공기관에서 원하는 만큼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황제의 나팔을 열 개나 하사받은 데메트리안이었다. 대니얼도 그걸 들으며, 일종의 사무용품을 선물이랍시고 하사하는 재주가 제 부황께 있음에 속으로 혀를 내두른 차였다.

“황자님께서 비밀리에 봐주시는 게 낫지 않겠어?”

“……3교대 근무하는 불쌍한 영혼의 금쪽같은 휴무일을 친우를 위해 쓰겠구먼.”

“정말 네가 일개 기사라고 착각하는 건 아니지?”

대니얼의 미끈한 얼굴 아래 두툼한 입매가 비대칭적인 호선을 그렸다.

황위는 욕심내지 않아도 제국의 일에는 늘 진지한 그였다. 때문에 데메트리안은 황실의 그 누구보다 대니얼을 주군으로서 신뢰하기도 하는 거였고. 이상한 장난만 안 친다면 말이지…….

“그리고…… 혹시 스칸다르인이 출입한 내역도 알면 좋겠어.”

“갑자기 스칸다르는…… 아, 그렇게까지?”

대니얼의 미간이 다시 찌푸려졌다.

대륙 최대의 마정석 상단이 스칸다르와 연이 없을 리가 없었다. 스칸다르의 특산품이 특등급 보석인 만큼 선뜻 마정석과 연관 짓기가 어려웠지만.

“얼마 전에 스칸다르에서 행상이 들어왔어. 찻잎을 들여왔다고 신고했는데 그 이후로 스칸다르산 여송연이 유통되기 시작해서 말야. 마침 그때부터 여송연 부작용이 보고되기 시작했고.”

“그 행상이 밀반입한 건지 확인하겠다는 거지.”

데메트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미심쩍은 행상의 책임자가 스스로 제보한 내용이었지만…….

그들이 반입한 것이 사실은 스칸다르의 여송연이었고, 그것이 정말은 담배가 아니라 환각제의 일종이라면 스칸다르의 왕자를 뒤엎을 명분이 된다.

오늘 스칸다르의 왕이 위독하다는 소식이 암암리에 퍼지기 시작했으니, 얼마 안 있어 왕자는 17년 만에 귀환하리라. 그리고 다음 달에는…….

‘혹 대니얼이 말레카의 왕녀와 혼인하게 될 수도 있으니, 그녀와 관련된 건 길드에 맡기고…….’

시간이 없었다. 초조해진 데메트리안이 다음 주 내내 분주할 제 일정을 헤아렸다.

“그런데, 스칸다르인이 굳이 왜 환각제를 시중에 풀어?”

“그러게.”

데메트리안은 제 마음속의 정답을 비껴 두고서 대충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은 자연스레 스칸다르의 왕자 쪽을 향했다.

마침 그의 시선이 어딘가를 향했다. 따라가 보자니…… 그 끝에는 제가 익히 잘 아는 귤빛 머리칼이 있었다. 은은히 흐르는 마법 효과가 아니라도, 늘 그에게는 한눈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왕자에게 붙여 두었던 크레벨 기사단의 기사가 돌아온 것은 데메트리안이 열두 번째 춤곡에 맞추어 퓌잘리 누스와 춤을 추고서였다.

일종의 죄책감이었을까. 그녀는 늘 그렇듯 일 얘기나 하자고 그를 찾은 거였지만, 데메트리안은 그녀와 처음으로 춤도 추고 제가 자리 비운 사이 심심하지 말라고 제 아우를 소개해 주기까지 했다.

중정으로 넘어가는 입구에서 왕자와 클로에가 맞닥뜨렸다는 제보에, 데메트리안은 조도 낮은 외궁의 복도에서 걸음을 재촉했다.

그녀의 선택을 존중하겠다고 마음먹었대서, 그녀의 마음을 돌리려는 시도까지 안 할 건 아니었다.

‘아까 하례 마치고서 로이 얼굴을 보니 왕자가 예상외의 반응을 했던 듯한데.’

혹시 화를 입을지도 모르니까.

그리 합리화하면서 중정으로 향하는 외궁 후문에 다다랐을 때였다.

“공로를 세우신 것도 축하드립니다.”

왕자의 빈정대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세운 공이라 함은, 그가 그 배후일 확률이 높은 사건에 그녀가 의견을 보탠 일이었다.

클로에와 관계가 있다는 식으로 부풀려 소문을 낸 걸 보면, 해할 심산은 아닐 텐데.

데메트리안은 발걸음을 늦추고, 숨죽인 채 그편으로 다가갔다. 거리가 있어서인지 클로에의 답은 들리지 않았다.

“폐하께서 탄신연에 특별히 치하하신 일인데요.”

“그래도, 웬만큼 결정적인 일이 아니었다면 말입니다.”

데메트리안은 클로에가 겸손한 낯으로 제 공을 별것 아니라 칭하고 있음을 짐작했다. 그리고 왕자는 집요하게도 그녀를 띄우려 애썼다.

그 기저에 있는 감정이 절대 순수한 상찬만은 아님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데메트리안은 이미 그 출구로 나서고 있었다.

“라크루아 영애는 그저 일상적인 얘기를 제게 꺼냈을 뿐입니다.”

당하는 사람은 모르고 있을 왕자의 음습한 심문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

왕자의 의심이 계속된다면 그녀가 혹여라도 그편을 선택했을 때…… 그녀가 바라는 모양의 행복을 얻지 못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데메트리안은 활시위를 저에게 끌어오는 심정으로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거기서 실마리를 얻은 건 저와 2황자 전하죠. 그녀는 거기에 아무런 의도도 없었습니다.”

스칸다르의 왕자가 느릿하게 돌아섰다. 달빛을 등지고 안쪽을 향하는 그의 신형이 어둠에 잠겨 드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황갈색 눈동자가 어둑히 빛났다.

“그러셨습니까.”

“그녀가 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몸을 던진 거라면 폐하께서 기사 작위라도 주셨겠죠. 사용인으로 키울 애들을 고아원에서 사 온 그레니다스 자작부인도 보릿고개에 기부금을 쾌척한 의인으로 포장되는데요.”

데메트리안도 제가 수상해 보이리만치 급히 주절대고 있음을 알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클로에로 말할 것 같으면…… 평소 제가 한 일을 그리도 귀히 쳐 주던 그가 소 뒷걸음질에 쥐 잡았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으니 의아할 따름이었다.

뷔욘이 빙긋이 웃어 보였다. 그 입매가 다소 비대칭적으로 흘렀다.

“소공작께서는 영애를 참 열심히 변호하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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