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밤이 짧아지는 나날들 (12)
“안녕하세요, 전하. 이런 곳엔 어쩐 일로.”
“제 누님께서 부르셔서 나왔던 참입니다.”
그녀들이 중정을 세 바퀴쯤 도는 사이 그가 한 마법사의 모친과 추던 춤곡은 물론, 제 누이와의 용건도 다 끝난 모양이었다.
‘친누이를 굳이 밖에서?’
황실 사람이 되기 위해 왔으니 본국의 가족과 어울리는 모습을 굳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가.
‘스칸다르도 아니고…… 말레카는 개방적이라 들었는데.’
혼약으로 다른 나라에 넘어온 이의 사정에 감정 이입하며, 클로에는 안면을 튼 적 없는 그 남성과 시선을 주고받았다.
“미아.”
“아, 아! 미안해, 언니. 미안합니다, 전하.”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메리앤이 깜짝 놀라 허둥거렸다. 황실 바깥의 인물과 큰 교류도 없는 데다 연회에도 참석하지 않으니, 실전 예법에 눈치가 있기란 어려웠던 것이다.
“이쪽은 고티유의 총괄인 라크루아 궁정백의 영애. 이쪽은……”
“말레카의 왕세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클로에는 요한이 허리를 굽히는 것에 맞추어 예를 갖추어 인사해 보였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왕녀님과는 왜 밖에서…….”
“누님께 저는 아직 철부지 동생인가 봅니다. 뭘 해도 구박받다 보니, 저희 나라의 사절들 앞에서는 제 위신이 안 서는지라.”
아하하, 요한의 소탈한 말재주에 메리앤이 청아한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왕녀님께서는 그럼 연회장으로 돌아가셨고요?”
“그럼요. 1황자 전하께서도 돌아오셨고요.”
아차, 요한은 순간적으로 제가 말실수한 것을 깨달았지만, 말레카의 왕녀와 프레더릭이 개인적으로 관계가 있음을 상상조차 못하는 두 여인은 아무 눈치도 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뭐, 상관없나.
그는 부드러운 낯으로 두 여인을 향해 정중한 목소리를 냈다. 황제의 수족이 저리 두 눈 형형히 뜨고 있는데, 부질없는 일인 건 알지만. 그 저울질에 휘말려 들 수도 있겠지만…….
“혹, 황궁을 안내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밤의 황궁은 초면인지라, 색다른 정취가 있을 듯한데요.”
아, 그럼요, 거의 수락할 뻔했던 메리앤은 아차 싶었는지 클로에를 쳐다보았다. 말레카의 왕세자도 클로에를 슬며시 들여다보았다.
제게 선택권을 주려는 듯한 두 사람의 태도에, 잠시 고민하던 클로에는 눈치껏 행동해 주기로 했다.
‘그때도 이런 일이 있었던 거라면…….’
메리앤 혼자 애태우는 게 아니라 상대 또한 비슷한 마음이라는 생각에 이르니, 하루쯤 일탈이 뭐 문제랴 싶어지는 것이었다.
훗날 스체르바뇰의 왕세자와 결혼하여 정말로 사랑에 빠진대도 오늘 하루의 추억쯤 평생을 버티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 클로에는 어린 시절의 추억과 함께 부군이 찾으시지 않는 셰비크의 적막한 밤을 지새웠던 것을 떠올렸다.
“저는 찾아야 할 이가 있어서요.”
“앗, 그러면.”
“응, 라비 좀 찾고 들어갈게. 이따가 연회장에서 봐. 왕세자 전하, 잘 부탁드립니다.”
“당연한 것을요. 좋은 친우를 두셨습니다.”
오늘 제게 쏟아진 관심이 싹을 잘 틔운다면, 어떤 추억에 기대지 않아도 셰비크 생활이 나름 즐겁게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물론 스칸다르에 가는 것을 선택할 경우의 일이지만.
‘잘하는 일인지 모르겠네.’
메리앤과 요한을 단둘이 보낸 클로에는 중정을 통과하며 재차 드는 번민에 휩싸였다. 일종의 오지랖이었을까.
그때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 조금 미안해서……였다는 생각에 이르러 입안이 쌉싸래해졌다.
말레카의 왕세자가 꽤나 영리하다고들 했다. 그 나라의 기간산업인 마도 공학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면서. 그래서 말레카의 왕녀가 제 동생에게 왕세자 자리를 보장해 주기 위해 일찍 떠나왔다는 소문이 돌았을 때, 왕세자 본인이 영민하여 그럴 이유가 없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마도 공학에 통달했대서 사람 마음도 통달한 건 아니겠지만……. 제후국의 왕세자로서 제가 가진 입지 정도는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않을까.
클로에는 이미 저질러 버린 행동을 최대한 좋은 쪽으로 끼워 맞추며 외궁 입구로 향하는 길목에 접어들었다.
‘라비야 캄포 대공녀 가기 전에 인사한다 했으니까 알아서 올 테니, 일단 연회장으로 돌아가야겠다. 부모님 귀빈실서 내려오시면 같이 귀택해야지. 올 반응은 다 온 것 같고…….’
예전 같았으면 오늘도 아주 늦게까지 놀다가, 데메트리안의 마차를 타고서 집에 가는 거였는데. 5년의 세월을 거슬러야 하는 추억이지만 몸뚱이만 놓고 보면 몇 달 전의 일들일 터라 시간 감각이 기묘했다.
그리 오늘의 계획을 생각하며 외궁으로 들어서려 했을 때.
‘……오늘은 정말 피하려 했는데.’
그 문간에, 달빛을 받으며 기대어 선 이가 있었다. 얇은 비단에 자수를 놓은 로브 위로 그의 백금발을 흘러내려 둔 장신의 남자.
그를 마주한 클로에는 여름날의 알뫼 정원이 떠올라 아찔했다.
홀로 적적하여 정원을 한참 거닐고 나면, 어찌 안 것인지 제 부군이 꼭 저런 모습으로 정자에 기대어 서 있곤 했다. 북쪽의 온난한 여름 햇볕을 쬐며 고단함에 잠시 눈을 붙이고 있던 그가, 제 발걸음 소리에 백금색 속눈썹 빼곡히 박힌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리는 것이었는데.
그런 때면, 저를 마주하고는 깊이 웃어 보이시던 그의 미소.
그걸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젊은 부군께서 저를 오래간 은애해 왔고 또 아끼신다는 것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게 되는 것이었다.
클로에가 다가오는 것을 인지한 뷔욘의 눈매가 적당한 호선을 그렸다. 하지만 달빛 아래여서였을까. 미소 지은 그의 낯은 한편으로 한랭했다.
하례를 마치고 돌아서며 저를 본 그가 인상 찌푸렸던 것이 떠올라, 클로에는 추억에 기인한 두근거림도 잊고 작게 얼어붙고 말았다.
저는 그의 호감을 사는 데 성공한 걸까.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행동해 버린 덕분에 실패한 걸까. 아니면, 어쩌면…… 그는 말과 달리 이 시절의 제게 호감이 없었을까.
요 얼마간 그녀를 괴롭힌 의문이었다. 그가 가차 없이 찌푸린 미간을 보고서야, 제가 그것들을 고민해 왔음을 깨달았지만.
클로에는 그런 번민을 누른 채, 일단 생긋 웃으며 치맛자락을 잡아 인사했다. 요즘 그에게 하던 양보다는 조금 깍듯한 몸가짐이었다. 주변에 그들의 사이를 확대해석할 다른 인사들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였다.
“좋은 저녁입니다. 산책 나오셨어요?”
마정석 효과로 흩뿌려진 빛 가루와, 치맛단에 알알이 박힌 비즈가 달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났다.
그런 그녀의 머리에 올라붙어 있는 은회색 털뭉치. 그것마저 달빛을 받아 파르라니 빛나는 양에, 뷔욘은 제가 무엇을 이야기하려 그녀를 찾은 것인지 잊고 말았다.
무언가 따져 물으려고 했건만.
호감. 그래, 호감이라는 것을 배워 본 적은 없지만, 제가 살면서 느낀 감정 중 이것만큼 그 단어에 어울리는 것은 없으리라.
저 매사 당당하고 빛나는 여인에게서 어떤 반응을 이끌어 내고 싶은 이 비틀어진 마음에…….
뷔욘은 벽에 기대었던 몸을 일으키며 곱게 웃었다.
“오늘따라 더욱 아름다우십니다, 영애.”
“과찬이세요.”
클로에가 수줍게 웃었다.
실제로 수줍었다. 그가 제 야심작을 보고서 어떤 반응을 할지 조마조마했는데, 첫 반응이 좋은 건 아니었으니까.
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린 것처럼 뷔욘은 즉각 덧붙였다.
“저희 나라의 모피에 관심이 있으신 것이 궁정백부인이 아니라 영애의 이야기인 모양이었습니다.”
“어머니께서 즐기시는 것을 어깨너머로 보다 보니 그리되었어요.”
뷔욘은 대답 대신 더욱 깊은 미소를 지었다. 얼마 전, 궁정백저에 들러 클로에가 제 어머니와 따뜻한 눈길을 주고받던 것을 볼 때보다는 조금 더 온화한 눈빛이었다.
‘라비 얘는 봐준다고 해 놓고선 어디로 사라져서는.’
모든 판단은 제가 하는 거여야 했지만……. 클로에는 그의 기색을 살피는 한편, 그를 마주하는 제 마음이 단순한 설렘만은 아니라는 생각에 가닿았다.
“그리고 그 옆에는.”
“네, 마정석이에요. 대축일 주간 장터에서 마정석을 쓴 장신구를 파는 걸 보고 장인들이 영감을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그걸 판 상인이 사실은 분리 독립파의 수장이었고, 그녀를 체포하는 데에 제가 한몫하긴 했지만…… 그런 사정이야말로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클로에는 뫼니엘 상인을 알아봤다느니 하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제 변명 같은 핑계가 그의 마음에 거슬리지 않길 바라며.
그녀가 말하는 낯을 가만히 살피던 뷔욘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영애께서 저희 나라의 것을 이리 귀한 날에 선보여 주시니, 황송하기가 더할 나위 없습니다.”
“황송하시다뇨. 귀한 것은 누구에게나 통하는 것인지, 많은 영애들이 관심을 보였답니다.”
“많은…… 영애들요.”
뷔욘의 얼굴이 짐짓 굳었다.
“아무래도 신비로우니까요.”
“영애께서 아름다우셔서 그 덕을 본 모양입니다.”
“과찬이세요. 제가 덕을 보았죠.”
뷔욘은 다시금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신비……라. 제 평생을 이방인으로 만드는 그 단어가 그녀에게서 울릴 때 기분 나쁘지 않은 것도 신비였다.
이 지긋지긋한 시절도 이제는 곧 저물 테니…….
“덕분에 저희 나라의 그 신비가 아르투젠의 사교계에도 잠시나마 관심을 받았겠습니다.”
뷔욘이 제 신경을 거슬리게 만든 ‘신비’라는 단어에 묘한 강세를 두며 답했다.
잠시라니……. 클로에는 그의 오해를 정정해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관심이 발전하여 교역에 발판이 되기를 바라는바, 스칸다르 왕실의 수장이 될 그도 알아 두어야 하지 않을까.
제가 스칸다르에 가게 된다면, 제국 출신 비로서 그 사업에 힘을 보탤 수 있다면 즐거울 것이리라.
클로에는 부러 발랄하게 목소리를 냈다.
“제국에도 유행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제국’이라는 단어에 그가 어떤 기색을 보이는지 기억나, 급히 말을 덧붙였다.
“제국 사교계는 아무래도 취향이 협소한 경향이 있으니까요.”
뷔욘은 미소를 지은 채 클로에의 낯을 들여다볼 뿐이었다.
‘제국과 스칸다르는 이제 완전히 다른 나라지요.’
저도 모르게 제국 문화와 비교해서 이야기하자면 다정함이 가신 채 귓가에 내려앉던 말소리. 독립국 스칸다르의 왕은 그녀가 제국의 것에 빗대 스칸다르의 이야기를 하는 걸, 그래, 불쾌해하곤 했더랬다.
아직은 독립 전이니 괜찮지 않을까. 클로에는 뷔욘의 그린 듯한 미소 너머를 살피려 애쓰며 다음 말을 밀어붙였다.
“이 외에도 스칸다르만의 아름다운 문화들이 있을 테죠? 하나둘 알려지면 분명 다들 좋아할 거예요.”
“그렇습니까.”
뷔욘이 입꼬리를 빙긋이 들어 올렸다. 얼핏 봐서 그것은 미소였지만, 그의 눈매는 원래 둥글려 두었던 것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지금도 제국과 교류하는 것을 탐탁잖게 생각하시려나…….
두 사람이 한동안 말없이 서로의 눈빛만 살필 때였다.
뷔욘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이 해맑은 여인에게 따져 물을 수 없는 수만 가지 이야기를 묻어 둔 말이 흘러나왔다.
“공로를 세우신 것도 축하드립니다.”
“고, 공이라뇨. 별것 아니었어요.”
“폐하께서 탄신연에 특별히 치하하신 일인데요.”
“아까 포상 대잔치 여시는 것 보셨잖아요. 좋은 날이셔서, 허접스러운 일도 추켜세워 주신 거라 생각한답니다.”
“그래도, 웬만큼 결정적인 일이 아니었다면 그러지 않으셨을 텐데요.”
클로에가 재차 손사래 치는 양에, 뷔욘의 눈꼬리가 더욱 깊이 휘어질 무렵이었다.
“라크루아 영애는 그저 일상적인 얘기를 제게 꺼냈을 뿐입니다.”
뷔욘의 등 뒤에서 너무도 익숙한 말소리가 울렸다. 클로에는 무언가를 들킨 사람처럼 놀라, 외궁 안에서 성큼성큼 걸어 나오고 있는…… 데메트리안을 보았다.
일견 기품 있어 보이는 그 걸음걸이에는, 클로에의 눈에 분명 어떠한 격함이 깃들어 있었다.
“거기서 실마리를 얻은 건 저와 2황자 전하죠. 그녀는 거기에 아무런 의도도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