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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했는데 첫사랑이 수상하다-119화 (119/189)

119화. 밤이 짧아지는 나날들 (11)

그래서 황실의 요구에 부응하는 척, 괜스레 오래 남아 제후국의 왕자들과 춤을 췄으리라.

“알폰소는 어땠어?”

“으음, 부인께서 말씀하신 대로 속이 좁다는 건 잘 모르겠는데…… 에티아는 너무 덥지 않을까?”

그 마음에 든 인물이 고티유와 비슷한 기후의 말레카 출신임을 떠올리며 클로에는 쓰게 웃었다.

“이제 슬슬 들어가? 좀 더 있을 거야?”

“으응, 말레카의 왕녀님께서 자리를 비우셨으니까, 기다려 보지 뭐.”

“웬일로 기특한 생각을 다 했네.”

말은 그렇게 해도, 그녀가 이 자리에 더 남아 있고픈 이유가 따로 있는 게 분명해 클로에는 속으로 웃었다.

말레카의 왕세자는 나름 이 시간을 알차게 보내고 있었다. 타국의 왕녀나 마레 소공작부인같이 유력가의 젊은 부인들에게 춤을 청하면서.

“근데 언니, 아까 무슨 일이야? 수사에 무슨 제보를 했다는 거야? 아까 깜짝 놀랐네. 기사 작위라도 받는 줄 알고.”

기사 작위라. 클로에가 푸스스 웃었다. 황제에게 제 쓸모는 다른 데 있을 예정인데 말이다.

“별거 아니야. 저번에 너랑 테니스 친 날에 2황자 전하랑 식사했잖아. 그때 몇 마디 한 게 그렇게 부풀려졌나 봐.”

“에이, 폐하가 좀 깐깐하셔? 프레더릭 전하 책봉 안 하는 거 봐도 얼마나 까탈스러운데. 나한테도 말 안 해 줄 거야?”

메리앤이 눈을 초롱이며 하는 말에, 클로에는 주변을 슬쩍 훑고는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다음 주에 우리 집 오면 알려줄게.”

“오, 라크루아 영애. 이번에 나를 맞이함에 있어 기합이 단단히 들어가 있군그래. 내 기대하지.”

클로에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메리앤과 허물없이 대거리하자니 그간의 피로가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메리앤도 마찬가지인지, 황자궁 아무도 없는 응접실에서 티타임을 가질 때처럼 해맑은 얼굴이었다.

“그리고 이 옷차림도 말야. 언니가 이렇게 유행을 선도하는 데 관심 있는 사람이었어? 포상받을 줄 알고 특별히 차려입은 거야?”

“몰랐대도 그래. 유행이라니. 나야 그냥……”

“남들 안 하는 거 하면 그게 유행 선도하는 거지, 뭐.”

“그게 그렇게 되나?”

클로에가 유행시키고자 하는 것은 드레스가 아니라 제 장신구였지만.

태양절 연휴에 메리앤이 놀러 오면, 집에 있는 것들 구경하게 해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클로에가 미소 지을 때였다.

“공녀님, 연회도 좀 계셔 보시니 나름 재미있지 않으셔요?”

“……부인.”

메리앤의 시녀인 모햄 자작부인이었다. 메리앤은 벽에 기대었던 몸을 꼿꼿이 일으켜 세우며 낯을 싹 바꿨다.

“내 적성에 맞지 않는군.”

“자주 다니시면 익숙해지실 거예요. 나중에는 일국의 안주인으로서 또 이런 행사를 매번 꾸리셔야 하는걸요.”

“제국식 행사를 백번 겪어 봤자 그 나라와 양식이 다르면 쓸모없잖은가.”

메리앤이 부루퉁한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대꾸했다. 그녀의 기분을 북돋워 보려던 모햄 자작부인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들의 대화에서 클로에는 제가 겪었던, 또 제가 다시 겪게 될지 모를 셰비크 궁에서의 제 처지를 떠올렸다.

별궁의 주인이었지만 셰비크의 안주인은 아니었고, 왕실 연회에서는 저를 없는 사람 취급하며 정실 자리를 노려 부군에게 교태를 떨던 스칸다르의 여인들. 그런 밤이면 눈치 좋게도 부군에게 올라온 진상품이 모두 그녀의 침실로 몰려들곤 했는데.

……그 시절을 회상하자니 모햄 자작부인이 메리앤에게 살뜰한 것조차 조금 부러워지려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라크루아 영애.”

“네, 네?”

모햄 자작부인이 갑자기 말을 걸어오는 바람에 클로에는 화들짝 놀랐다. 그녀를 두고 생각에 빠져 있던 것이 들킨 것만 같았다.

“신기한 장신구를 하고 와서 놀랐어요. 딸아이가 어느 장인의 솜씨인지 궁금해하는데.”

“아, 하하.”

여기서도 끊이지 않는 관심……. 클로에는 제가 오늘 하루 종일 한 대답들을 떠올리며 접객 태세로 들어갔다.

“아, 안녕하세요, 영애. 모햄의 셀레나라 합니다.”

“데뷔탕트도 한참 남은 애가 벌써 이리 패션에 관심이 많답니다.”

“어, 어머니도 참.”

아쉴 또래의 어린 소녀였다.

그러고 보니 그들 주변에 사람들이 늘어나 있었다. 메리앤에게 눈도장 찍으려고 이편을 살피는 줄 알았는데, 그녀들의 말소리를 귀동냥하려는지 모두 귀를 쫑긋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게다가 모두가 아녀자들이었다. 메리앤에게 몰려드는 인사들은 대부분 그들 또래의 미혼 신사거나, 그 연배의 아들이나 조카가 있는 어느 가문의 가주들이었는데.

“드레스는 안드레아에서 맞추신 거예요? 올 시즌 안드레아 스타일과는 거리가 있는 것 같은데.”

“마정석이 보석으로 만드는 건 알았는데 이런 상등품 보석으로도 가능한 줄 몰랐어요. 마법사에게 따로 의뢰하신 거죠?”

“한눈에 봐도 품이 엄청 많이 들어갔는데, 앤지네가 영애를 각별히 생각하나 봐요.”

셀레나 모햄은 준비해 둔 듯한 말들을 우다다 쏟아내었다. 사교계에 데뷔하지 않은 어린 소녀의 풋풋한 화법이 차라리 반가웠다. 듣는 귀 없는 곳에서라면 구체적으로 답해 주었을 텐데…….

클로에는 이편을 주시하는 이들이 많은 것을 안타까워하며 지금까지 중에 가장 성심성의껏 답했다.

“감사해요, 영애. 나중에 제 데뷔탕트 기대해 주세요!”

“5년도 더 넘은 이야기를 이렇게 한답니다.”

그리 말하고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모햄 모녀의 뒷모습을 보며 클로에는 또 괜한 감상에 빠졌다.

‘아르투젠에 계속 머무를 수 있다면 말이지.’

여동생을 갖는 느낌에 대해 이따금 생각하곤 하던 클로에는 어린 영애와의 교류에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메리앤은 친우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러니까, 아쉬움……이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니, 이 오늘의 모든 일이 피로해지고 말았다.

전위적인 제 옷차림을 흘끔대는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금 달라붙었을까.

“미아, 잠깐 산책 안 할래?”

“산책?”

“라비가 바람 쐬러 나가서는 안 들어와서 말야.”

메리앤의 시선은 한 귀부인과 춤을 추고 있는 말레카의 왕세자에게 가닿아 있었다. 클로에가 알기로 그 부인의 딸이 마탑에서 수학 중이었다.

“곧 말레카의 왕녀님도 돌아올 테고.”

클로에는 메리앤의 소맷자락을 잡아끌었다.

‘도와줄 수는 없어도, 더 깊어지지 않는 정도는 해 줄 수 있으니까…….’

달빛이 내려앉은 황궁의 중정. 인공미가 돋보이는 어스름한 신록 너머로 연회장의 흥성거리는 불빛이 새어 나왔다.

오랜만에 거니는 밤의 정원에는 그간 몸집을 키운 나무들만큼 싱그러운 내음이 짙어져 있었다. 그러고 보면 메리앤과 황자궁 근방이 아닌 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처음이었다.

미라벨을 찾으러 나온 건 핑계였음을 숨길 생각도 없어, 클로에는 메리앤의 팔짱을 끼고서 정원만 거닐었다. 두 여인 모두 친우와 격의 없이 수다 떠는 시간이 절실했던 것이다.

“아까 캄포 대공녀, 맞지? 아쉴이랑 춤춘 거. 나 깜짝 놀랐잖아.”

“으응, 맞아.”

“그러고서 끝인 거야? 아쉴 완전 비 맞은 강아지 같던데. 어떡해, 상사병이라도 걸리는 거 아냐?”

클로에는 첫 춤을 추고서 가족들 편으로 돌아왔을 때, 발개진 얼굴로 눈동자의 초점이 풀려 있던 아쉴의 모습을 떠올렸다. 제게 춤을 청하라 명하신 어여쁜 또래의 대공녀 전하께 한눈에 반해 버린 모양이었다.

루시엔은 그걸로 제 할 일을 다 마쳤다는 듯 춤이 끝나자마자 대공 부부를 따라 귀빈실로 올라가 버렸다.

오늘 갑작스레 나타난 그녀가 한 것은…… 클로에와의 친분을 과시하고, 클로에의 선물을 한 번 더 주목받게 만든 것.

그리고 크레벨과의 정혼에 불만이 있다는 티를 풀풀 낸 것.

그것들이 그녀가 준다던 선물이었을까.

“……캄포 대공녀는 그냥 변덕 부렸던 것 같은데 말야.”

“흐응, 내가 생각해도 데메트리안 경이랑은 좀 안 어울리는 구석이 있지.”

클로에는 그녀가 훗날 제게 ‘고자로 뒈졌으면’이라는 저주를 덧붙이는 편지를 보내게 되는 걸 떠올렸다. 둘이 마주칠 때면 투덕대긴 해도 그렇게까지 사이가 안 좋은 건 아닌 듯한데.

“그런데 왜 하필 라크루아 중에 찾았대? 캄포 대공녀가 누구와 안면이 있었던 거야? 설마……”

“으응, 나. 어쩌다가 우연히 알게 됐어.”

“우연히?”

“어머니 심부름 나갔다가 길에서 마주쳤지 뭐야.”

메리앤이 오늘의 클로에에게 던지는 궁금증은 다양했지만, 루시엔에 관한 이야기가 개중 답하기에 가장 부담 없는 것이었다.

그마저도 온전히 사실대로는 털어놓을 수는 없었지만.

“처음에 딱 알아봤어? 난 오늘 보고도 긴가민가했는데.”

“당연히 아니지. 대공녀 호위 기사랑 라비가 신경전이 붙은 거야. 그래서 해명하다가 보니까…… 이거 비밀이야. 알지? 대공녀가 고티유를 자주 오간다는 게 아무래도.”

“응응, 당연히 알지. 나야 말할 곳이나 있나.”

그 말이 조금 안쓰럽게 울렸다. 내색하지는 못했지만.

클로에가 스칸다르로 가게 되면 매일같이 편지를 써야만 했을 정도로 외로운 그녀.

셰비크로 날아 온 편지의 양을 보면 그녀가 제게 어찌나 의지했던지 알 수 있어서, 스무 살로 돌아온 뒤 그녀에게 각별히 마음을 쓰게 되는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루시엔에게 드레스를 빌려 가면서까지 그녀와 밤마실을 나갈 생각을 한 건지도.

“다시 생각해도 신기하네. 바깥에선 그렇게 우연히 마주칠 수도 있구나.”

클로에의 이야기를 곱씹던 메리앤의 눈이 꿈꾸듯 반짝였다. 어려서 궁에 들어와 의무는 있되 권리는 없이 살아온 그녀는 예사로 사가에서의 삶을 동경하곤 했다.

대축일 주간에도, 태양절 때도, 수확제 때도, 메리앤은 늘 바깥 구경을 하고 싶어 했다. 다른 때는 지방에서 제도로 몰려들지만 여름휴가로 이어지는 태양절 연휴에는 그 반대여서, 메리앤은 태양절 때만 궁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그 여정은 보통 본가인 캔달우드령인 때보다 제도 내의 라크루아 타운하우스인 적이 더 많았다.

“그래서 말인데, 요번 태양절 때 말야.”

“응응.”

메리앤이 눈을 빛냈다.

“한번 밤에 나가 보면 어떨까 싶은데.”

“정말?”

메리앤의 물빛 눈동자가 끝도 없이 땡그래졌다. 잠시에 불과했지만.

“아, 하지만…….”

클로에는 그녀의 얼굴에 깃든 실망감의 정체를 확실히 알았다. 황제의 기획 상품과도 같은 그녀에게 얼마나 촘촘한 감시가 따를지, 안 봐도 빤했으니까.

지금도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친위대의 기사들이 따르고 있었고.

“제일 좋은 건 몰래 빠져나가는 건데, 다음으로 좋은 건 낮에 나갔다가 저녁 먹고 오겠다며 늦게 들어가는 거야.”

“정말?”

그래 줄 수 있어? 메리앤의 눈이 다시금 한껏 빛났다. 친위대의 기사들이 그 말소리까지는 알아차리지 못하리라.

궁의 밤이 주는 묵직한 분위기에, 이 어둠을 틈타 밀회하는 이들이 없는 것도 아니어서 내내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리던 참이었다.

클로에의 태양절 휴가 계획에 메리앤의 눈빛이 기대감으로 속절없이 떨릴 때였다.

“이런 곳에서 산보 중이셨군요.”

그녀들이 관목을 끼고 길을 꺾으려던 순간, 한 남성의 목소리가 담백하게 울렸다.

그의 정체를 확인한 클로에는 깜짝 놀랐다.

‘생각보다 꽤…… 적극적이었네?’

연회장의 하례객이 우연히 지나가던 길이라고 하기에는 어색한 그곳에, 말레카의 왕세자 요한이 홀로 걷고 있었던 것이었다.

클로에는 보지 않아도 메리앤의 얼굴이 빨개졌음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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