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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했는데 첫사랑이 수상하다-118화 (118/189)

118화. 밤이 짧아지는 나날들 (10)

‘아르투젠에 남고 싶다면 남을 수 있어. 내가 그렇게 할게.’

빠른 박자의 춤곡이 흐르는 연회장 안.

클로에는 부모님이 지인들과 환담하는 무리를 가림막 삼아 벽에 기대선 채, 데메트리안의 말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네가 가고 싶다면…… 모든 걸 내버려 둘게. 네가 행복했다면 말야.’

그가 고해성사하듯 내뱉던 말소리와 그의 절박한 낯은, 머릿속에서 떠날 줄 몰랐다.

‘내가 스칸다르에 가지 않게 할 수 있지만, 스칸다르에서의 행복을 해칠 수 있으니 마음을 정할 때까지 그 방법은 말해 주지 않겠다고…….’

고민하는 시간 동안 행복하지 않을 거라면서. 그럴 거면 애초에 말을 꺼내지 말지 그랬나, 싶어지면서도…… 그것이 그의 최선이라는 게 느껴지고 말았다.

언제나 제게 완벽한 모습만 보여주던, 모자란 모습이란 그 누구에게도 단 한 번도 보인 적 없었을 그였다. 그런 모호한 말을 하기까지도 꽤 큰 용기가 필요했으리라.

그리 말하며 빛나던 그 푸른 눈동자에는, 평생 그가 가져 본 적 없었을 간절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런 눈빛을 요 얼마간 너무 많이 봤다는 생각이 들면…….

‘그때 대답을 피한 게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니까.’

그렇대서 잘했다는 건 아니었지만.

사교계의 시선이 쏟아지는 이 자리에서 바닥 꺼져라 한숨을 내쉴 수가 없어, 클로에는 애꿎은 와인만 자꾸 들이켰다.

‘모르긴 몰라도, 스칸다르의 누군가와 연관이 있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이 귀결되고 보면, 훗날 ‘손님’이라는 이름으로 셰비크의 궁정에 드나들 사제 안톤미오노에게로 생각이 흘렀다.

‘오늘 같은 날 루카가 나선 걸 보면 대신전 후계 구도가 명확해진 거니까…….’

마침 한 여성과 이야기 나누고 있는 루카가 시선에 걸렸다. 다른 신관들도 연회장 곳곳에서 귀족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지만, 그들과 루카의 담소는 조금 결이 달라 보였다.

‘그런 모습 보여 줬으면 하루쯤 고결하게 있어 주면 안 되나.’

굴러온 돌 루카의 개념 없는 행동에, 박혀 있던 돌들의 원성이 자자한 것은 당연한 일일 거였다. 그가 축복을 내릴 때 성수를 들어야만 했던 안톤미오노 역시 그러할 거고, 마침 그가 성배를 보관한 보물고 담당이라는 것은…….

‘아냐, 너무 넘겨짚지는 말자.’

미라벨과 이야기하는 것이 최선이었으나, 이런 자리를 답답해하는 그녀는 바람 쐬고 오겠다며 나가 버린 차였다. 뷔욘의 처신을 봐주겠다고 호언장담해 놓고서는…….

“저, 영애. 혹시 괜찮으시다면…….”

오늘 한 일곱 번째 듣는 말일까.

이렇게도 사람들이 클로에를 내버려 두지 않으니, 제가 곁에 있어 봤자 할 일이 없다는 거였다.

지난 시간과 다가올 시간 통틀어 제게 단 한 번도 춤을 청한 적 없는 신사였다. 클로에는 최대한 예의 바른 낯을 꾸며 답했다.

“정말 영광입니다만, 제가 오늘 자리에 신경을 많이 썼더니 머리가 조금 어지러워서요.”

“아, 그러시다면. 부디 얼른 회복하시기를.”

아르투젠에서도, 스칸다르에서도 사교계의 주목이란 남의 말이었던 그녀에게 자꾸만 춤을 청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클로에 양, 정말 오랜만에 보네요. 대축연 이후 처음이죠?”

“오랜만이에요, 돌로네즈 양.”

“깜짝 놀랐어요. 아까 그…… 포상도 받으시고.”

“아하하.”

“캄포 대공녀와도 친분이.”

“하하, 어쩌다 보니요.”

“간만에 봤더니 스타일이 많이 바뀌어서 놀랐어요. 특히……”

이렇듯, 그녀의 독특한 장신구에 관심을 가진 영애들이 안부를 가장해 말을 걸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렇죠? 앤지네에서 특별히 저를 위해 만들었다고 하는데, 요즘 유행 드레스에는 안 어울려서 어쩔 수가 없었어요.”

미라벨이 진저리치며 자리를 떠날 법도 했다. 클로에조차도 이제는 용건만 간단히 하면 좋겠다 싶어질 지경이었으니까.

‘존경해요, 앨포드 영애.’

클로에는 여덟 번의 춤곡이 지나는 동안 매번 다른 신사와 춤을 추고 있는 사교계의 여왕, 피오나 앨포드를 바라보며 한숨지었다. 그녀의 붉은 머리칼은 활력의 상징이었나.

‘차라리 춤만 내내 추라면 추겠어.’

사람들의 질문 세례에 시달리는 것은 꽤나 피곤한 일이었다. 물론 서로 몸놀림이 잘 맞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단 한 사람과 추는 게 아니라면 그것 역시 신경 쓰일 일이겠지만…….

“그렇다면 이 털은 모피를 염색한 건가요?”

“스칸다르산 담비 털이래요. 곰베르 산맥 북동부에서는 야생동물의 털 빛깔이 이리 다르다고.”

“어머, 스칸다르산 모피라고요? 역시…….”

그리 말하는 돌로네즈 양이 눈동자를 굴렸다. 클로에는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그편에 뷔욘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오늘 정말, 결백 증명하고 만다.’

이러한 사람들의 관심에 힘입어, 클로에는 한편으로 뷔욘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왕자님은 모르시는 눈치니까 내가 알아서 피해야지.’

제가 기억하는 한 그가 황실 연회에서 누군가와 춤을 춘 적도 없었고, 그게 저였던 적은 더더욱 없지만…… 같이 있는 모습을 보이기라도 한다면 또 시선이 여지없이 쏠려 버릴 게 뻔했다.

게다가 요즘 묘하게 적극적으로 굴던 그의 모습……. 그가 제 카나페를 입으로 받던 것이 떠올라, 클로에는 조금 아찔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좀 친했더라면 그렇게 구셨으려나…….’

‘네 마음이 정해지면.’

그에 대해 생각하자니, 득달같이 떠오르는 데메트리안의 말소리.

무언가 생각이 정리되기 전에는 뷔욘을 마주할 자신도 나지 않았으니, 제 노림수가 잘 통한 것이 여러모로 잘된 일이었다.

“앤지네가 스칸다르산 모피를 구하고 싶다기에 제가 왕자님을 통해 상단을 소개받으려 한 적이 있는 정도예요.”

“어머, 그러셨구나. 역시 라크루아는 수완이 좋으셔서.”

클로에는 돌로네즈 양이 적당히 체면 차린 인사를 하고 떠나간 그 길로 뷔욘 쪽을 곁눈질했다.

황실 연회에 참석하더라도 1부도 끝나기 전에 자리를 떠나곤 하던 그는 여유로운 얼굴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사절단의 인원들을 챙겨야 하니 연회장에 줄곧 머무르려는 듯했다.

스칸다르의 사절들, 그를 연모하는 영애들, 스칸다르 왕의 병세에 대해 한마디라도 주워듣길 원하는 호사가들.

여덟 번의 춤곡이 이어지는 동안 비슷한 자리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그를 보며, 클로에는 얼마간 동정의 마음까지 드는 것이었다.

‘그래, 왕자님도 바쁘신데. 문안조차 못 가는 아버지의 병세를 흥미 삼아 물어오는 걸 듣자면 기분도 나쁘실 테고…….’

정작 뷔욘의 낯은 온화하기 그지없었다. 황제에게 하례를 올린 직후의 그 날카로운 기색에 비하자면 말이었다.

‘늘 저렇게 웃는 낯으로 대하시려면 힘드실 텐데.’

그리 생각하며 손에 쥐고 있던 와인을 한 모금 삼켰을 때, 뷔욘의 눈동자가 그를 둘러싸고 선 이들의 정수리 능선을 가르고 이편을 향했다.

그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온화한 미소는 더욱 극적인 호선을 그리며 깊어졌다.

두 개의 춤곡이 더 흘렀을 때였다. 평소였으면 파우더룸에도 다녀오고 산책도 다녔겠지만, 사람들이 계속해서 말을 붙여 오니 기진맥진이었다. 평소 화법과 달리 알쏭달쏭한 말들로 답하자니 더더욱 그러했다.

‘라비는 언제 오는 거야? 산책이라도 나가고 싶은데.’

그런 클로에의 눈에, 마침 메리앤이 한 남성과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 황자들의 춤만 함께하고 도망쳐 버리곤 하던 메리앤은 그녀의 정략혼 후보들이 몰려든 오늘만큼은 자리를 지켜야 했던 모양이었다. 옥좌에 앉아 아르투젠 귀족들의 하례를 받는 황제가 이따금 메리앤 편을 살피고 있는 걸 보자니 말이다.

혹여 그녀에게 반한 것 같은 제후국 왕족이라도 보인다면 계산기를 두드리기 위해서.

“캔달우드 공녀랑 같이 있는 게, 알폰소지?”

마침 돌아와 있던 에티엔이 클로에에게 귀엣말했다. 메리앤과 춤추고 있는 남성의 차림새가 에티아식 예복인 것이었다.

그들의 사촌인 사막 국가 에티아의 왕세자, 알폰소. 클로에가 기억하는 그때도, 구릿빛 피부 위로 검은 머리를 짧게 깎은 그가 메리앤과 담소를 나누고 있는 걸 발견한 기억이었다.

“알폰소, 오랜만이야.”

라크루아의 오누이는 춤곡이 끝날 무렵 그들 쪽으로 다가갔다.

“에티엔, 클로에. 정말 오랜만이야. 이게 몇 년 만이지? 안 그래도 공녀 전하께서 네 이야기를 하시더군.”

“그러게, 그 사이 우리 모두 성년이 됐고.”

“어엿한 사막의 전사가 다 되신 것 같네요, 왕자님.”

라크루아 오누이의 너스레에 알폰소가 의례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렸을 때야 이따금 모두의 외가인 라쥐르 공작성에서 여름을 함께 보내곤 했던 것인데, 알폰소가 후계자 교육을 받기 시작하고 에티엔이 제국 아카데미에 들어가면서 자주 보지 못한 지 오래였다. 자연스레 어렸을 때처럼 살갑기가 어려워졌다.

“클로에, 너야말로 오늘 곳곳에서 화제던걸?”

“거짓말하지 마.”

“정말이야. 그렇지, 에티엔?”

“뭐…… 나는 뭐가 예쁜 건지 모르겠지만, 많이들 그렇다고들 하더라.”

제 오라비의 능청에 클로에가 집에서처럼 인상을 구기며 에티엔을 노려보았다.

“그거도 그거지만, 구휼 자금이 새어나가는 걸 수사하는 데 이바지했다고?”

“그 수사 담당이 나였는데, 나도 이번에 알았지 뭐야. 어쩐지…….”

“대단한 일이야. 사막의 전사에 비해도 손색없겠어.”

“나는 칼 쥔 적 없는걸.”

“칼을 쥐지 않아도 나라를 위해 애쓴 거면 다 같은 전사지.”

알폰소가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사막의 나라에 자부심이 큰 알폰소에게는 그것이 최고의 칭찬이었다. 물론 클로에가 살면서 한 번도 칼을 안 쥔 건 아니었지만.

“왕비 전하께서는 잘 계시지?”

“아마 그러실 거야. 여름 온다고 라쥐르로 피난 가셨거든. 아, 어마마마께서 이모님께 보내라고 하신 선물도 가져왔는데.”

“지금 가져왔으면 직접 드릴래? 더 좋아하실 거야.”

그리 말하며 클로에가 에티엔에게 눈짓하자, 미리 말을 맞춰 둔 것은 아니어도 에티엔은 그 의도를 알아차렸다.

“맞아. 안 그래도 오실 때부터 너 보실 생각에 궁금해하셨으니까. 지금 갈래?”

“아, 그럴까, 그럼?”

구릿빛 피부의 선 굵은 쾌남은 메리앤 쪽을 바라보고는, 큰 미련이 보이지 않는 얼굴로 허리를 숙여 보였다.

“그럼, 오늘 뵙게 되어서 반가웠습니다. 부디 다음 기회에.”

“예, 다음 기회에.”

두 청년이 떠나고 난 뒤, 메리앤은 지쳤다는 듯 슬그머니 등지고 있던 기둥에 등을 기대었다.

“아아, 진 빠져, 정말.”

역시 진 빠져서 그녀에게로 도피한 클로에는 공감 가득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근처를 살피니 호위인 척하면서 그녀를 감시하고 있는 예복 차림의 기사 몇이 눈에 들어왔다.

‘친위대 정복이네. 폐하께서 살피라 붙이신…….’

미성년인 그녀가 준황족만 아니었다면 부모님을 방패 삼고 아무와도 말 섞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클로에는 자그마한 연민을 담아 그녀의 팔을 쓸었다.

“다들 인사해 봤어? 누가 제일 낫디?”

“으응, 다 비슷비슷하지 뭐. 처음 봐서 뭘 알겠어.”

그리 말하는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어딘가에 생기가 돌았다. 그땐 눈치채지 못했지만, 이제는 그녀가 퍽 맘에 들어 버린 인물이 있기 때문임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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