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밤이 짧아지는 나날들 (9)
“답신?”
“뭐, 지금 생각해 보면 네가 그 생활이 행복해서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편지했었어?”
클로에가 미간을 찌푸리며 다급하게 묻는 양에, 데메트리안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그랬구나.
“그러겠다고 약속했었잖아.”
“…….”
클로에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그래. 그랬어.’
데메트리안은 빈말로라도 듣기 좋은 소리를 해 주는 부류의 인간이 아니었고, 대신 내뱉은 일을 저버리는 법은 없었다. 그런 그로부터 편지가 없었기에 배로 미웠고 그 이상으로 그리웠던 것인데.
그녀의 얼굴이 허물어지려는 것 같아 데메트리안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아무튼.”
사실, 그걸 말할 건 아니었는데. 행복했다면 계속 행복하길 바랐으니까.
제게 이기죽대는 스칸다르의 왕자에 대한 사적인 복수심이었을까. 제게 이런 옹졸한 마음도 있다는 것에 데메트리안은 조금 비참해졌다.
“그래서 나는 네가 스칸다르로 가지 않을 수 있게끔 하려고 했어.”
“어떻게?”
“그런데 너 또한 모든 걸 기억하는데도…… 스칸다르의 왕자와 살갑게 지내고, 또 이렇게 스칸다르의 것들을 활용해서 네 일을 꾸리는 걸 보니까, 내가 잘못 판단했겠다는 생각도 들었어.”
그러니까 어떻게. 재차 떠오르는 물음을 클로에는 입안에 삼켰다.
그가 조곤조곤 이어가는 말소리에는, 며칠 전 미라벨의 물음과 겹치는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너는 어떻게 하고 싶냐던.
“네가 아르투젠에 남고 싶다면 남을 수 있어. 내가 그렇게 할게. 실제로 그러려고 했으니까. 너도 모르는 사이에 말야.”
모든 걸 바로잡으려 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는 그런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 무엇이 바른 것인지는 그녀에게 달렸으니까.
클로에의 맨 어깨를 가리듯 대고 있던 손을, 그는 슬그머니 떼었다.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가 그녀의 어깨에 손자국이 남을세라.
대신 손을 꾹 말아쥐고서 그녀의 어깨에 가만히 올려 둘 뿐이었다.
거기에 보태고 싶은 말이 많았다. 하지만 그는 제 마음속에 부글대는 수많은 고백 중, 가장 보편적인 말만을 간신히 자아낼 수 있었다.
“……너한테는 늘 완벽한 사람이고 싶었으니까.”
그들이 고사리손을 마주 잡고 크레벨의 정원을 탐사하던 그 시절부터, 데메트리안은 늘 클로에에게 더 의젓하고 더 어른스럽고 더 똑똑하고 더 완벽한 인물이었으니까. 완벽한 저만이 그녀의 마음을 얻고 그녀에게 어울릴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너한테만은, 가장 형편없는 사람이지 않니.”
데메트리안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로부터 들을 수 있으리라 상상도 못했던 그 자신 없는 목소리에 클로에는 조금, 화가 날 것 같았다.
그의 팔에 올려 둔 손에, 저도 모르게 꾸욱 힘이 들어갔다.
그는 뒤따르는 생각을 굳이 내뱉지 않았다.
너를 떠나보내고, 아니 떠나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 순간부터 제가 어찌나 큰 후회를 했는지, 그녀가 떠난 시절이 제게 얼마나 지옥 같았는지…….
그래서 네가 내 그 끔찍한 패착을 알고 있으리란 것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까지.
몇 번을 해도 모자란 그 말을 데메트리안은 굳이 보태지 않았다. 제가 받고 싶은 것은 동정도 연민도 아니었으니까.
데메트리안은 그 시절에 저들이 마지막으로 만났던 원로원 응접실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며 빛나던 클로에의 눈동자.
그녀는 떠나고 싶지 않았고, 그가 그리해 주기를 바랐다. 그에게 그런 수완이 있으리라고 믿었으니까.
결국 모른 척하고 말았지만…… 그 순간을 데메트리안은 한순간도 잊은 적 없었다.
그러니까 이건, 그때의 답을 뒤늦게나마 주는 것이었다.
“원한다면 얘기해 줘. 그리되도록 할 테니까.”
그녀가 바라는 완벽한 데메트리안 크레벨이지 못한 저라도, 그것만은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네가 가고 싶다면…… 모든 걸 내버려 둘게. 네가 행복했다면 말야.”
데메트리안의 눈동자에 수많은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한편으로 낙담의 빛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간절한 바람이었다.
“그러니까 뭘 어떻게 하려던 건데.”
“네 마음이 정해지면.”
“너는 또……!”
“네가 가는 편을 선택한다면, 거기에 네 행복이 달렸다면 오히려 잘된 일이잖아. 나는 네가 고민할 일이라면 알게 하고 싶지 않아. 고민하는 시간 동안 너는 행복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러니까 그걸 네가 왜 판단해.
그 말이 목구멍에 치밀어 올랐지만, 클로에는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직감적으로, 더 이상 들으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본디 그는 기꺼이 그녀와 고민을 나누던 이였으니…… 그가 말하지 않음으로써, 클로에는 많은 것을 들어 버렸다.
* * *
탁탁탁…….
정원의 포석을 밟는 조급한 발소리가 밤에 잠긴 황궁의 후원을 울렸다. 황궁의 주인들이 모두 대연회장에 몰려가 있는 지금, 그곳을 제외한 모든 공간은 적막에 깊이 묻혀 있었다.
‘빌어먹을 춤의 의무 따위 때문에.’
밤하늘을 머금은 듯한 검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말레카의 왕녀 카타리나는 발을 재촉했다.
내궁 후원의, 황자궁으로부터도 황후궁으로부터도 적당히 떨어져 인적 드물고 어스름한 곳. 초여름의 햇살을 머금고 쑥쑥 자라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달빛이 은은하게 내리는 가제보가 나타났다.
그녀가 수년간 수백 번의 밀회를 가진 곳.
찾던 이의 인영에 카타리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인기척을 느꼈을 텐데도 그는 가제보의 난간에 한쪽 다리를 올리고 걸터앉은 채 하늘만 유심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프레디.”
가녀린 말소리가 울리자,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을 타고 파르란 달빛이 흘렀다.
프레더릭의 금안에 낙담의 빛이 가득 찬 것에, 카타리나는 목구멍이 막혀 오는 것 같았다.
그녀는 벗어서 들고 있던 제 구두를 가볍게 바닥에 내팽개치며 가제보로 들어섰다.
“여기 있어서 다행이야.”
“……그대를 기다리는 일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다고.”
그의 익숙한 앓는 소리에, 카타리나는 바닥에 나뒹구는 제 구두를 걷어차며 그가 걸터앉은 난간에 기댔다.
“또 미끄러지고 말았어.”
“…….”
“내가 벌써 스물여섯인데 말야.”
“프레디.”
“……그대가 여기에 온 지도 네 해가 다 되어 가는데.”
카타리나는 조금 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몸은 그녀를 향해 있었지만, 프레더릭은 차마 얼굴을 들지 못하고 손으로 제 얼굴만 쓸 뿐이었다.
“괜찮아. 모든 상황이 네게 흘러갈 수밖에 없게 돼 있어.”
어서 가자. 자리를 오래 비울수록 귀족들이 너에게 더 실망할 거야. 카타리나는 굳이 내뱉지 않는 그 말을 담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기실 프레더릭의 불운에 관해서는, 1황자파건 2황자파건 간에 인간적으로 안되었다는 것이 공통된 의견이었지만 말이다.
프레더릭은 한숨을 내쉬면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만이 이 의뭉스런 황궁에서 유일하게 저를 몇 번이고 일으켰다.
기다렸다는 듯 카타리나도 그의 앞에 섰다.
카타리나의 새하얀 얼굴은 달빛 아래에서 유독 아름다웠다. 어쩌면 그들이 마음껏 서로를 볼 수 있는 것이 햇볕 아래도 아닌, 마정석 불빛도 아닌 이 어스름한 달빛 아래뿐이어서이리라.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에 제 모습이 비치자, 프레더릭은 그녀를 위해 만들어 두었던 그 어느 말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미안하다든가, 조금 더 기다려 달라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이 아름답고, 강인하고, 가녀리고, 심지 굳고, 낭창하고, 이성적인 여인. 그녀의 앞에 선 자신은 얼마나 무능하고 약해 빠졌는지.
“……이렇게 미뤄지고, 미뤄지고, 미뤄진 끝에 결국 낙마하고 말게 되면.”
“그럴 린 없어, 프레디. 오히려 신중하게 널 지명하시려고 미루시는 거야.”
“이러다가 서른이 훌쩍 넘어 마차르토 왕실하고 혼약을 맺는 건 아니려나.”
“동대륙의 마차르토 왕국이라면 쿠데타로 왕실이……”
“그러니까!”
프레더릭의 거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는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울려 버려 스스로 놀라 있었다. 미안함으로 얼룩진 얼굴로 카타리나를 내려다봤지만, 정작 그녀는 아무런 동요도 없이 그를 지켜볼 뿐이었다.
그가 바라는 것은, 정말 단 하나뿐인데.
“나는 정말…….”
프레더릭은 어렵게 양손을 들어 카타리나의 앞섶을 쥐었다. 그 프릴 자락을 쥐어뜯을 듯 손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그가 그 손으로 멸하고 싶은 것은 기실 그들을 둘러싼 해묵은 약속이었다.
제 형의 양보로 황위에 오른 황제에게 말레카와의 혼약은 권세를 다지기 위한 초석과도 같았다. 장자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그의 정당성을 폄하하는 치들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말레카의 마탑에서 수십 년째 개발 중인 마도 공학 철도를 조금이라도 유리한 조건에 유치하고, 철도의 중심이 될 말레카와 끈끈한 유대를 형성하기 위함이었다.
철도가 놓여도 대륙의 패권은 여전히 아르투젠에 있음을 과시하기 위해.
말레카 왕의 첫째로 딸이 태어난 순간 그녀는 다음 대의 황후로 점지되었고, 황태자가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소년은 얼굴도 모르는 말레카의 왕녀를 어려서부터 그리워했다.
그러니 프레더릭이 어느 해의 탄신연에 방문한 카타리나와 마주쳤을 때 사랑에 빠지고 만 것은, 마치 해가 지면 밤이 오고 호수가 녹으면 봄이 오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리라.
황태자가 될 것이니 그녀를 사랑했지만, 이제는 그녀를 사랑하니 황태자가 되고 싶었다. 황제의 보위, 대륙의 패권, 그 수많은 것들은 그녀를 사랑하는 자리에 따라오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자리는 해가 갈수록 멀어져만 가는 것 같았다.
흐흐흑, 그녀의 가슴팍에 기댄 채 프레더릭은 떨리는 숨을 내뱉었다. 오랜 시간 참아온 울분이 그의 목구멍에서 울렁거렸다.
“난…… 난, 그대가 아니면…….”
격정과 미안함, 분노와 수치심 그 모든 감정으로 인해 덜덜 떨면서 그는 일그러진 눈가를 카타리나의 앞가슴에 묻었다. 제 두툼한 눈썹뼈가 그녀의 가는 쇄골에 아프게 닿을까 그마저도 마음껏 토해내지 못했다.
카타리나는 제 가슴께에 아무런 물기도 느끼지 못했지만, 제 작은 황자님이 울고 있는 것을 알았다.
토닥, 토닥. 그녀의 손이 느리게 그의 어깨를 쓸 무렵.
“……하겠어.”
“프레디.”
“뭐라도 하지 않으면……. 그러면 그대를 실망시키고 말 거니까.”
온갖 일그러진 감정을 삼키는 소리가 그의 목구멍에서 울렸다. 그러고 싶지는 않았는데. 정말, 절대로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카타리나는 천천히 반대편 손도 올려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한 덩이로 얼마간 멎어 있었다.
“……잘 생각했어.”
가제보 위로 두 개의 달이 떠 있었다. 한 달을 주기로 공전하는 제1의 달 에시스 옆으로, 14개월을 주기로 공전하는 제2의 달 뷜이 그믐을 향해 달려가는 중이었다.
“곧 겹그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