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밤이 짧아지는 나날들 (8)
루시엔의 말에 그녀들을 둘러싼 이들의 수군거림이 뚝 멈췄다.
루시엔의 요청은 예법상 조금도 문제없는 것이었다. 첫 춤의 의무는 데뷔탕트를 마친 모든 귀족에게 주어지는 것이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춤을 추는 것은 자유였다. 3황자 제러미부터가 아직 미성년이니까.
미성년의 귀족에게 성년인 가족을 통하여 말을 거는 것이 예법에 맞으니 클로에에게 요청하는 것 또한 옳은 일이었다.
다만 캄포와 크레벨의 정혼은 아르투젠 귀족 사회의 기본 상식이었고, 루시엔의 정혼자는 지금 이 공간에 있었다.
그러니 그녀가 첫 춤의 의무를 진다면 당연히 그와 함께이리라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클로에가 걱정한 대로.
그런데 그녀가 ‘연배가 한참 높으신 분’을 언급했을 때, 모든 이들은 두 가문의 혼약이 다소간 미묘한 상황에 처해 있음을 인지했다.
“안 될까요?”
그 모든 혼란을 담아내고 있는 클로에의 낯에, 루시엔은 다시금 생긋 웃어 보였다.
“아쉴 말씀이세요?”
미라벨이 대신 말을 받았다. 루시엔이 도대체 무슨 심산인지는 그녀라고 알 수는 없었지만.
궁정백부인 옆에 붙어 있던 아쉴이 깜짝 놀라 이편을 바라보았다. 황제의 입장에 황실 소년 병사단의 일원으로서 꽃가루를 뿌리고 온 그는 늠름한 와인빛의 제복 차림이었다.
“성함은 이제 알았지만요.”
루시엔이 사르르 눈을 접어 웃으며 아쉴을 바라보았다.
클로에와 미라벨로서는 완전히 처음 보는 그 화사한 미소에 아쉴은 면역력이 전혀 없었다. 열두 살 소년에게는 황실 소년 병사단 친구들과 뒤엉켜 노는 것이 가장 즐거웠으니까. 여자인 친구라 하더라도 소년 병사단에 몇 있는 영애가 다였고…….
그런데 대공녀께서는 너무…… 예쁘셨다.
열두 살, 곧 열세 살이 되는 아쉴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루시엔은 그런 반응은 모른 체하며, 클로에와 미라벨에게 시선을 다시 던졌다.
“그분보다야 영애의 동생분께서 저와 키도 잘 맞을 것 같고요. 제가 이런 자리가 처음이라 실수할까 두렵답니다.”
평균보다 작은 체구의 루시엔보다 아쉴이 조금 더 컸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좀체 의도를 알 수가 없어, 클로에는 그녀와 제 남동생만 번갈아 쳐다볼 뿐이었다.
루시엔은 아예 저돌적으로 굴었다.
“안녕하세요, 부인. 안녕하세요, 백작님. 캄포 대공의 여식, 루시엔 캄포라 합니다.”
“캄포의 대공녀를 이렇게 처음 뵙는구먼. 반갑소.”
“반가워요. 윌리엄에게서 어쩜 이리 어여쁜 아가씨가 나왔을까.”
“아버지께서 부인 말씀을 종종 하셨어요. 대공저에 열대륙의 예술품이 몇 가지 있답니다.”
루시엔이 붙임성 좋게 제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며, 클로에는 제가 아는 가장 독특한 두 여인이 만났다고 생각했다.
루시엔과 클로에의 관계에 대해 보고받은 바가 있던 궁정백부인은 이 흥미로운 상황에 망설임 없이 투신했다.
“자, 아쉴. 대공녀께서 아까 말씀하신 바를 들었지?”
“아, 저, 여, 아니 대, 대공녀 전하. 괘, 괜찮으시다면 제게 첫 춤의 영광을…….”
잔뜩 긴장한 아쉴은 새빨개진 얼굴로, 예법 교사에게 배우고 연회에 따라다니며 눈으로 익힌 것을 생애 최초로 시연했다.
루시엔이 제 첫 춤을 아쉴에게 내어주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그편을 바라보던 이들은 모두 한껏 도드라진 광대로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머릿속으로는 크레벨과 캄포의 혼약에 대해 다양한 추측을 지어내면서.
다음 춤곡을 기다리며 무도회장의 가장자리로 자리를 옮긴 소년소녀 한 쌍은 좌중의 주목을 받았다. 그 주인공이 오늘 처음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낸 캄포 대공녀였고, 상대가 그녀의 정혼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더더욱 시선을 끌었다. 체구로 봐도 나이로 봐도 훨씬 보기 좋았고.
그들을 곁눈으로 살피며 데메트리안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도대체 영문을 모를 일이었다.
캄포 대공녀와의 추억이라고 해 봐야…… 기억하려 시도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불편해질 따름인데, 그런 그녀가 너무나 간단히도 제 고민을 덜어 주다니.
그녀는 제게 고민을 주는 존재였지, 해소해 준 적은 없었는데 말이다.
‘로이랑 친분이 생겨서인가? 하지만 이건 날 돕는 건데.’
그녀들이 언제부터 서로 알게 된 건지도 모르고 말이다.
크레벨과 캄포의 정혼이 아르투젠 귀족 사회의 상식인 것은 나름 편리한 일이었다. 덕분에 크레벨 소공작을 선망하는 이가 그리 많아도 번거롭게 한 영애 하나 없었으며, 또 덕분에 그가 클로에와 친밀하게 지내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건 맹세로 된 거였으니까.
하지만 그 맹세의 상대방이 이 자리에 왔을 때 데메트리안은 심각한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모두가 제가 그녀와 첫 춤을 출 걸로 기대하는 건 아닌지.
그는 늘 그랬듯 클로에에게 첫 춤을 신청할 요량이었다. 그녀가 받아주건, 그러지 않건…….
실제로 얼마 전에는 거절도 당했고, 오늘은 다시금 거절당할 각오도 하고 있었다.
다만 그것이 저와 정혼으로 얽힌 이가 와 있는 자리에서도 그래도 되는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제 마음을 바꿔 먹을 건 아니었지만.
‘나이 때문인지 참 작게 느껴졌는데, 지금은 더 작네…….’
여덟 살이나 차이 나는 이였다. 그녀의 오라비가 제 또래인 덕에 세대 차이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에게는 자꾸만 비교하게 되는 다른 여인이 있었으니까.
아무것도 알 리가 없는 그녀의 얼굴을 뜯어보니, 순진무구한 그 입매가 저를 비웃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를 볼 때면 늘상 지었던 그 삐딱한 미소…….
마음속에 앙금처럼 고여 있던, 그 시절의 음습하고 비참하고 괴로운 심정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황자들이 춤을 추는 곳을 빙 둘러 반대편으로 넘어가는 데메트리안의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졌다.
두엇씩 짝지어 있는 인파를 헤치고, 헤치고, 또 헤쳤을 때. 오늘따라 남다르게 꾸며 입은 제 아가씨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가 그 무슨 옷을 입어도, 존재 자체로 그에게는 특별했겠지만.
몇 걸음을 남겨두고서 그는 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얼마간 그녀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클로에는 제가 알기로 별 친분이 없는 한 영애와 예의 차린 낯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잘 꾸며 둔 표정이었지만 요즘 들어 그녀가 제게 보여준 것보다는 생생했다.
호선을 그린 눈매,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 입꼬리, 호의를 담아 까닥이는 고개 같은 것들…….
제가 그 안온한 평화를 깨뜨려도 될까, 못난 생각이 들 무렵.
“어머.”
“아이쿠.”
그와 그녀 사이에 자리했던 이들이 그를 알아보고는, 마치 저들이 길을 막았다는 양 비켜 주었다.
데메트리안은 마른침을 삼키고 성큼, 한 걸음을 내뻗었다.
‘더는 피하지 않아.’
저를 확인하자마자 그녀의 얼굴이 굳어버렸지만, 두려움을 애써 삼켰다. 이제는 더 실망시킬 것도 없을 테니…….
“로이.”
왼손을 등 뒤에 놓으며 그는 사뿐히 허리를 숙였다. 장갑 속에 숨겨 둔 제 손바닥에 잔 습기가 배는 게 느껴졌다.
“좋은 저녁이야.”
클로에는 자못 긴장하여, 제 앞에 놓인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탄신연을 떠올릴 때마다 머릿속에서 수십, 수백 번은 상상한 장면이었다.
올려다본 데메트리안의 눈동자 역시 긴장감에 물들어 있었다.
“……응, 좋은 저녁.”
그녀의 진녹색 실크 장갑을 낀 손이 그의 손에 포개졌다.
연회장의 가운데에 마련된 공간 적당한 공간에 멈춰선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데메트리안은 제 모든 번뇌를 미뤄두고서 일단 빙긋 웃었다. 기뻤으니까. 클로에가 그 눈동자를 기민하게 빛내며 저를 살피고 있었다.
늘 그랬듯 서로의 어깨에, 또 허리에 손을 얹은 순간.
현악주자들의 큰 활질과 함께 세 번째 춤곡, 귀족들을 위한 첫 춤이 시작되었다.
그녀 쪽으로 몇 걸음, 제 쪽으로 몇 걸음. 먼저 말을 꺼낸 건 데메트리안이었다.
“대니얼 녀석이 그런 일을 꾸밀 줄 나도 몰랐어. 미안해.”
“네가 안 엮인 건 나도 알겠어.”
클로에는 아까 희게 질렸던 그의 얼굴을 떠올리며 한숨처럼 말을 받았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한편으론 고맙단 생각도 들더라. 네게 돌아가야 할 몫이 맞았잖아.”
“내가 뭘 한 게 있다고.”
“아주 중요한 일을 했지. 사실 나도…… 너만 괜찮다면 네 공을 치하받도록 알리고 싶었는걸.”
그간 물어볼 기회가 없었지만 말야.
실실 쪼개던 대니얼의 능글맞은 낯짝이 약 올랐지만, 한편으로 고마운 일이기야 했다.
“……물어봤으면 그러지 말라고 했을 거야.”
그건 사실 반쯤은 거짓말이었다. 프레더릭을 살피느라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한 제 마음에는, 주목받은 것이 창피했을 뿐 나름 가슴 벅찬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솔직한 속내를…… 그에게 드러내기 싫어, 클로에는 얼굴만 굳힌 채 입을 다물었다.
샐쭉거리듯 도톰하게 튀어나온 그녀의 앙증맞은 입술을 바라보며 데메트리안은 끈기 있게 말을 이었다.
“오늘 모두 네 이야기뿐이더라.”
“…….”
“마정석 효과인 거지? 라구 경이 네게 좋은 인연인 모양이네.”
“뭐어, 그렇지.”
변죽만 울려대는 그의 말소리에 클로에는 다시금 마음이 뾰족해졌다.
그가 제 차림새에 관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낯선 일은 아니었다.
다만 너무 파인 것 아니냐느니, 레이스가 공작새 같다느니, 뒤로 묶은 리본이 허리를 옥죄는 것 같다느니…… 무신경한 남자애들 특유의 말장난을 꼭 한 번씩 던지며, 그녀가 흘기는 것을 보고 천진한 낯을 띄우곤 하는 거였으니까.
하지만 그가 이런 눈빛을 보인 적은 없었다.
이 연회장 안에서 그녀가 가장 눈부시게 빛난다는 듯한, 경애로 가득 찬 눈빛…….
무언가를 사죄하고 또 해명하고 싶어 하는 그 절박한 죄책감으로도 가리지 못한 열망이었다.
“그 소년이 또 한몫했다는 것도 들었어. 너도 알다시피 우리 어머니께서도 안드레아에 다니시니까.”
그걸 들었음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제가 기억하는 클로에의 드레스에 어울리는 크라바트를 맞춰 왔다는 거였다. 구체적으로 어떤 드레스를 주문했는지는 의상실의 극비니까.
그 금빛 감도는 베이지색의 천 조각이 제 눈높이에 있었다. 클로에는 자백하듯 말을 뱉었다. 반쯤은 충동적으로.
“이건 스칸다르산 모피야.”
저들의 상처를 어설프게 덮어 놓았던 얄팍한 평온을 할퀴어 뜯는 말이었다.
다분한 행복을 묻어 두었던 데메트리안의 낯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그리고 그런 반응조차 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잘 알아, 이내 애써 태연한 척하며 따뜻한 눈빛을 냈다.
상처 주려고 일부러 그런 말을 던졌으면서 정말로 그가 상처받은 표정을 보이니…… 클로에는 되레 제 마음이 아팠다.
‘난 정말, 왜 이러지.’
데메트리안은 숨죽여 숨을 고르고는, 오래간 품어 온 말을 입에 올렸다.
주변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게끔, 고개를 살짝 그녀 쪽으로 기울이고 목소리를 낮춰서.
정수리 가까운 곳에서 울리는 나직한 목소리는 그의 이야기가 특별치 않은 것처럼 느껴지게 했다.
“그날…….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던 걸 내가 얼마나 후회했는지 몰라.”
“…….”
“너를 보낸 건 내 평생의 가장 큰 후회였는데 말야.”
처음으로 듣는 말……. 하지만 클로에는 아무것도 대꾸하지 않았다. 그녀의 내리깐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아, 그것만으로도 데메트리안은 마음이 아팠다.
“그건 내 인생의 가장 큰 실수였고, 내 가장 큰 결함이었어. 그걸 네가 알고 있다는 게…… 너무나도 창피했어.”
그리 말하는 데메트리안의 목소리는 마치 울먹이는 듯했다. 그가 그럴 리가 없는데도.
문득 올려다보니 그의 낯에는 은은한 고통이 흐르고 있었다. 클로에는 그가 그런 표정을 지을 줄도 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아이펠의 장원에서도 제 뒤에 남겨진 그는 저런 표정을 지었을까.
“나는 네가 불행하다고 생각했어. 네게로부터 답신을 받은 이가 아무도 없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