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밤이 짧아지는 나날들 (7)
그 몸가짐은 평생을 황자로서 교육받은 이답게 나무랄 데 없었지만, 프레더릭의 얼굴은 창백해져 있었다.
‘기대가 크셨을 텐데.’
저만의 생각에 빠진 듯 초점 둔 곳 없는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데메트리안은 아까 그와 눈인사하던 스칸다르의 왕자를 떠올렸다.
“데메트리안 경에게 황제의 나팔 열 개와 황실의 보물, 데나르고의 반지를 하사하는 바이네.”
“폐하의 성은에 감사하옵나이다.”
황제의 나팔 써서 열심히 수사하라는 거네. 데메트리안은 한숨을 삼키며, 좌중의 박수갈채 소리에 맞춰 일어났다.
“자, 그럼 지루한 행사는 이것으로 마치도록 하지.”
박수갈채 소리가 더욱 높아졌다.
탄신연 본식 행사들은 보는 맛이 있기야 했지만, 다들 조금씩 배고파진 데다 내내 서 있으려니 좀이 쑤시기 시작한 차였다.
황제는 그들에게 손을 들어 인사해 보이며 제 황후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폐하, 더 하실 말씀 없으십니까?”
그때, 시종장이 황제에게 다급히 말을 걸었다. 그 말소리에 모두가 다시금 숨을 죽였다.
거의 돌아섰던 황제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너털웃음을 지으며 다시 전방을 향했다.
“아! 내가 잊었군.”
프레더릭의 금안이 실낱같은 희망으로 떨렸다. 그 낯에 띄워진 것은 일종의 혼란이기도 했다.
만면에 미소를 채운 황제는 좌중을 둘러보는 듯하더니, 라크루아들이 몰려 있는 쪽에 시선을 던졌다.
“구휼 기금의 탈취 건에 깜짝 조언을 해 준 이가 있다고, 내 둘째가 귀띔해 주더군.”
‘……!’
프레더릭의 기색만 살피던 클로에는 갑작스레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 들었다.
‘뭐, 뭐야……. 진짜였어?’
재빨리 에티엔을 바라보니, 거 뭐랬냐는 듯 얄미운 표정이었다.
황망한 마음에 다른 원망할 곳을 찾아 데메트리안을 쳐다보았지만, 그도 희게 질린 얼굴로 옥좌 뒤편의 대니얼만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수사에 결정적인 제보를 해 준 라크루아 궁정백 영애에게, 내 금화 500개를 하사하지.”
황제가 그녀 쪽으로 눈을 찡긋하며 손을 뻗어 보이자, 좌중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쏠렸다.
클로에는 졸도할 것만 같았다.
“그럼 모두들, 짐의 탄신일인 만큼 끝내주는 시간 보내게! 혹여 오늘 생기는 아이가 있다면 에드워드의 이름을 허락하겠네!”
스스로도 즐거운 농담을 했다는 양 껄껄 웃으며 황제가 돌아섰다.
터져 나오는 박수갈채 속에, 프레더릭의 얼굴만 뻘겋게 달아올랐다.
악단이 다시금 연주를 시작하고, 홀의 한가운데를 무도회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시종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프레더릭은 그 자리에 붙박인 채, 숨을 고르듯 어깨만 들썩일 뿐이었다.
클로에도, 데메트리안도, 그리고 몇 사람이 그런 그의 뒷모습을 주시하고 있었다.
황제가 황후의 손을 이끌어 연회장 한가운데로 나아갈 때.
프레더릭은 어느새 자리를 박차고 연회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첫 번째 춤곡에 맞춰 황제 부부가 춤추는 것을 보며, 황실 직계들 사이에는 묘한 기류가 흘렀다.
다음번 춤곡에 맞춰 황자들이 춤을 선보여야 하는데, 첫째가 자리를 비워 버렸기 때문이었다.
연회장을 가득 메운 인원들은 황제의 안색을 살폈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위화감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황후의 얼굴만 바라볼 뿐이었다.
“미아, 미안한데.”
“당연한 일을.”
늘 그렇듯 메리앤과 춤을 추기 위해 나란히 서 있던 대니얼은 상황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정리하기로 했다.
황자들의 의무에 동원되는 것이 고역이던 메리앤으로서는 그저 어깨만 으쓱일 뿐이었다. 이 김에 나도 쉬면 좋지 뭐.
대니얼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말레카의 왕녀, 카타리나에게 다가갔다.
“저, 왕녀님. 아무래도…….”
“예.”
공식 석상에서 늘 저를 에스코트하던 프레더릭이 없어 홀로 있던 카타리나가 처연한 낯으로 돌아보았다. 검은 비단결 아래 하얀 얼굴은, 붉게 칠한 입술 덕분인지 일견 창백해 보일 정도였다.
다음 대의 황후가 되기 위해 황궁에 미리 와 있는 그녀는 늘 1황자와 짝을 맞췄기에, 대니얼과는 여러모로 어색했다. 그건 대니얼이 귀족 사회의 아낌없는 지지에도 스스로 황위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가 조금이라도 욕심이 있었다면 그녀와의 관계를 무無로 만들지는 않았으리라.
상황을 지켜보던 제러미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미아, 혹시.”
“넌 율스 영애랑 춰. 짝 안 맞으면 한 명 쉬어야지.”
메리앤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제러미의 제안을 일축했다.
세 황자에게 짝을 맞추기 위해 황후가 친정인 캔달우드의 방계에서 공수해 온 아가씨를 벽의 꽃으로 둘 순 없는 법이었다. 제 먼 친척이기도 했고, 황실에 어떻게든 이용되는 캔달우드의 핏줄에 대한 동질감도 있었다.
‘뭐, 참석한 것으로 체면은 차렸으려나.’
제 호적상 아버지인 캔달우드 공작과 혈연상 아버지인 트레야 공작의 차남, 아드리아누 백작이 그녀 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지만, 그 묘하게 아련한 눈빛이 더욱 질색이었다.
‘이번 춤만 끝나고, 로이 언니한테 인사하고 빨리 돌아가야지.’
메리앤이 결의를 다지며 벽 쪽으로 물러설 때였다.
“안녕하십니까. 공녀 전하.”
뭐야, 이건 또? 갑자기 제게 말을 거는 남성의 목소리에, 메리앤은 우선 질색하고 보았다.
‘또 제게 반하게 만들어 주겠다는 각다귀 아냐? 두 번째 춤에 아무나 끼는 줄 아나.’
대륙 연방에서 캄포 대공녀만큼이나 고귀한 미혼의 여성으로 꼽히는 이가 바로, 황후의 조카이자 준황녀 대우를 받는 메리앤 캔달우드였으니까.
메리앤은 썩어들어가는 낯을 굳이 가리지 않은 채, 신발이 아프다는 핑계를 입에 물고서 고개를 들었다.
“파트너를 잃으신 모양인데, 괜찮으시다면 제게 파트너가 되는 영광을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가슴팍밖에 보이지 않아 조금 더 고개를 쳐들자, 거기에는 진회색의 머리칼의 남성이 예의 바른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것이 느끼함이나 허세와는 조금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의 가슴팍에 달린 휘장 중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제 누님께서 공녀의 파트너를 가로채신 듯하여, 그 결례를 제가 대신 사죄드리고자.”
“어, 어차피 두 번째 춤은…….”
“황제 폐하께서 윤허하신다면, 모쪼록 공녀께 제 누이의 빚을 대신 갚을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그의 건조한 말투와 달리, 말레카의 왕세자 요한의 보랏빛 눈동자는 따뜻하게 빛났다. 메리앤은 지금껏 춤 신청을 거절해 오던 모든 상투적인 어구들을 잊어버렸다.
‘마, 마도공학에 미쳐 있다더니. 제정신이 아닌가?’
도대체 어찌 된 일이냐고 묻는 부모님과 아쉴의 가벼운 타박을 적당히 흘려 넘기던 그때. 멀리서 메리앤의 상황을 살피던 클로에는 새까맣게 잊고 있던 일들이 떠올라 마음이 복잡해졌다.
오늘의 탄신연에는 각 제후국의 왕세자들이나 그에 준하는 왕자들이 사절단을 이끌고 참석해 있었다. 그녀의 사촌인 에티아의 왕세자, 알폰소처럼.
때문에 황제에게는 이 자리가 딸처럼 키웠다는 메리앤을 어느 제후국에 넘길지 한 번에 셈할 수 있는 기회였다.
‘맞아. 미아가…… 웬일로 꽤 오래 남아 있는다 싶더니, 말레카의 왕세자랑 즐겁게 보내다 돌아갔었지.’
메리앤은 절대 인정하지 않겠지만, 클로에가 멀리에서 보기에도 메리앤의 볼은 다소간 홍조를 띄우고 있었다.
‘이따금 말레카 이야기를 꺼냈던 것 같기도…….’
그땐 말레카가 그녀의 혼처 후보일 리가 없다고 생각해 주의 깊게 듣지 않았던 거였는데.
말레카의 왕세자는 스칸다르의 왕자만큼이나 메리앤의 혼처 후보에서 동떨어져 있었다.
스칸다르의 경우 골칫덩이에 그 왕실이 폐쇄적이라는 점에서, 나중에는 곧 제국 연방에서 독립할 소국이라는 점에서 메리앤을 내줄 수 없는 곳이었다.
말레카는 이미 그 왕녀가 다음 대의 황후가 되기 위해 와 있는 만큼, 굳이 메리앤이라는 패까지 쓰기엔 너무 과한 셈이라는 거였고.
그 계산이 치밀하리만치 음험했다.
‘그땐 프레더릭 전하가 춤은 추고 나가셔서 두 번째 춤에는 기회가 없었는데. 말레카의 왕세자가 꽤나 미아를 마음에 담아두었었나…….’
말레카의 왕세자는 깍듯하게 예를 갖춰 황제에게 무언가를 청하고 있었다. 일순 얼굴을 굳힌 황제는 재빨리 계산을 끝낸 것인지 다시금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클로에는 그것이 두 번째 춤에 메리앤과 함께해도 좋다는 윤허임을 알았다.
저보다 머리 하나는 큰 말레카의 왕세자를 올려다보는 메리앤의 낯에는, 클로에가 본 적 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미아가 저 왕세자에게 마음이 갔었어. 그치만…….’
클로에가 아는 5년 뒤에, 메리앤은 에티아와 스체르바뇰을 저울질하던 황제의 고민 끝에 스체르바뇰의 왕세자비가 되는 쪽으로 운명이 결정되고 있었다.
‘나도 나지만, 미아 신세도 애달프지.’
그리 생각하던 클로에는, 제가 제 예정된 미래를 애달프다 생각하는 것에 다소 놀랐다.
그 상념을 깨며, 제 팔뚝을 잡아채는 손길이 있었다. 미라벨이 속살거려 왔다.
“로이, 루비 공녀님이야.”
미라벨이 저들의 오른편을 턱짓했다.
“맙소사.”
어느새 인파를 헤치고, 루시엔이 바로 지척에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멀리서 봤을 때도 느꼈지만, 가까이서 보니 정말 루시엔은 클로에가 오래간 상상해 온 캄포 대공녀의 모습 그 자체였다.
옷차림도 대륙에서 가장 고귀한 미혼 여성답게 화려했지만, 무엇보다 클로에가 본 적 없는 그녀의 우아한 몸가짐이 그 고아함에 빛을 더했다.
“안녕하세요, 라크루아 영애. 좋은 저녁입니다.”
그녀들 앞에 다가선 루시엔은 양 치마를 살짝 들어 올리며 약식으로 인사를 해 보였다. 그것만으로도 그들을 둘러싼 이들은 두 여인이 구면임을 알았다.
“안녕하세요, 캄포 대공녀 전하.”
“반가워요, 대공녀님.”
“누아제트 영애도 여기서 보니 새롭네요.”
루시엔이 방긋 웃으며 청아하게 목소리를 울렸다. 마차 안에서 듣던 것보다 조금 높은 톤으로 꾸며진 목소리였다.
“대단한 공을 세우셨더군요.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과분한 포상을 받았죠.”
덕분에요, 라는 말을 클로에는 입으로 삼켰다. 요 능구렁이 같은 아가씨가 또 무슨 속셈이 있어서.
루시엔은 다시금 싱긋 웃으며 고개를 까닥해 보였다. 그런 양에, 그녀의 머리를 장식한 머리핀 끝자락에서 루비가 반짝거렸다.
그러고 보니 그 머리핀에 쓰인 털 뭉치가…… 오늘 연회에서 가장 주목받는 두 아가씨를 지켜보던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영애께서 선물해 주신 머리핀, 어떤가요. 잘 어울리나요?”
“……네, 정말 잘 어울리네요. 역시 제가 대공녀를 생각하며 주문 제작한 것인지라.”
그 의도가 무엇인지는 파악하지 못했지만, 클로에는 루시엔이 좋아할 법한 식으로 대꾸했다. 그것이 적중했는지 루시엔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영애께서 독려해 주신 덕분에 제가 처음으로 아르투젠의 행사에 참석할 수도 있었답니다.”
루시엔이 싱긋 웃으며 감사 인사하듯, 가슴에 손을 올리고 고개를 까닥여 보였다.
“오길 잘했네요. 영애께서 포상받으시는 영광된 순간에 함께할 수 있어서.”
“별말씀을요. 캄포의 대공녀께서 가지 못할 곳은 없지 않나요.”
“그래도 제가 원체 몸이 건강하지 못해 용기를 내기도 어려웠는데, 영애의 따뜻한 말이 용기가 되었으니까요.”
“제가 도움이 되었다면 정말 다행이에요.”
루시엔의 속셈 한가득인 말소리에 클로에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그녀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주변이 묘하게 고요해졌다. 황실 직계들이 추는 두 번째 춤에 시선은 붙박아 두어도 귀는 모두 이편을 향한 모양새였다.
“저어, 영애. 기왕에 한 가지 더 부탁드려도 괜찮을까요?”
“무슨.”
“혹 영애의 남동생분과 제가 첫 춤의 의무를 질 수 있을까요? 까딱하면 연배가 한참 높으신 분과 춤을 출 상황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