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밤이 짧아지는 나날들 (6)
너 알았어? 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미라벨이 클로에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슬며시 입꼬리만 들어 올린 양에서, 미라벨은 제 질문에 대한 답을 알았다.
신관들의 선두에서 루카가 느릿한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평소였으면 대신관이 있어야 할 자리에 신관도 아닌 평사제인 루카미오노가 자리한 것은 굉장한 파격이었다.
“발 닿은 대지의 은총을.”
“발 닿은 대지의 은총을.”
루카미오노가 합장하며 허리를 숙이자, 그 뒤의 신관들이 그를 따랐다. 그 면면을 보아하니 하나같이 대신전에서 요직을 맡고 있는 고위 신관들이었다.
보물고 담당인 안톤미오노 역시 루카의 바로 뒤에 자리해 있었다.
“지평선의 평균율을.”
“지평선의 평균율을.”
어느새 옥좌에서 내려와 단상 아래로 내려온 황제가 마주 합장하자, 연회장을 메운 하례객 모두가 그 인사말을 따라 읊었다.
“대신관께서 실족하셨다고요.”
“예. 제가 오늘 대신관을 대리하여 주신의 음성을 전하기 위해 온 사제 루카미오노입니다.”
대신관이 자리했어야 할 그 무리의 선두에 선 루카미오노를 본 순간부터 갸웃거리던 사람들은, 그의 입을 통해 저들의 추측이 못 박힌 순간부터 참지 못하고 웅성대기 시작했다.
“루카미오노가 고티유 대신전의 차기 대신관으로 점찍어져 있다더니.”
“아무리 그래도 평사제를 오늘 보내나?”
“그 신성력이 웬만한 대신관들 못지않다지 않아.”
그 말소리들이 들리지 않을 리 없는데도 루카는 눈을 살짝 내리뜬 채 일자로 입을 꼭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평소의 감색 사제복이 아니라 백색의 신관용 예복을 차려입은 루카는 정말 사도의 재림 같았다. 창백하리만치 하얀 피부에 목덜미를 덮으며 내려온 구불구불한 금발, 그윽한 암청색 눈동자 아래로 균형 있게 자리한 붉은 입술…….
그의 막돼먹은 본성을 알고 있는 클로에와 미라벨이 보기에도 오늘의 사제 루카미오노는 정말 고결하고 성스러워 보였다.
“하늘에서 햇볕과 비를 내리시고 땅에서 우리를 소생케 하시는 주신, 우리의 어머니 에르드시여. 당신의 영토를 보우하는 아르투젠의 마흔일곱 번째 주인에게 축복을 내리십사 간구하나이다.”
어느새 왕관을 벗은 황제가 루카의 앞에 무릎을 꿇자 루카미오노가 합장한 채 기도문을 읊기 시작했다. 바로 옆으로 안톤미오노가 은으로 만들어진 대접을 들고 서 있었다. 아마 그 일은 대신관이 축복을 내릴 때에도 그의 담당이리라.
그런 그가 단단히 굳혀 둔 표정은 그저 평온해 보이지만은 않았다.
“태초의 혼돈을 딛고 당신의 터전에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당신의 어린 새싹들을 돌보심에 올올이 다정한 손길을 내리시나니.”
루카미오노는 대접에 담긴 성수를 손에 묻혀, 황제의 이마와 정수리, 두 뺨에 찍어 발랐다.
“그 지도자인 에드워드 3세 형제가 탄생한 기념일을 맞아, 어머니시여, 축복을 내려 주소서.”
루카미오노의 주변으로 빛무리가 조금씩 생기더니, 그의 눈동자에 기묘한 이채가 떠올랐다. 멀리서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변화였지만 무언가가 달라졌음을 모두가 알았다.
“누나, 루카도 주신의 목소리를 받는 거야?”
“쉿.”
경건한 시간인 만큼 주의를 줬지만서도, 그때나 지금이나 클로에는 제 어린 동생을 위해 재빠르게 속삭였다.
“괜히 루카가 차기 대신관 감이라는 게 아니니까.”
신관급 이상의 신성력을 지닌 사제들 중에는 이따금 주신이 강림하여 그의 통로가 되는 이들이 있었다. 루카는 공식 석상이 아니라도 이따금 신의 목소리를 받는다며, 귀찮음에 진저리치곤 하는 것이었지만.
그 루카가 누구였냐는 양, 엄숙한 목소리로 기도문을 읊는 루카미오노의 목소리가 노래처럼 울릴 때였다.
“내 아들에게 올해의 축복을 전한다.”
그 목소리는 루카의 것 그대로였지만 어딘가 섬뜩한 구석이 있었다. 그걸 지켜보던 탄신연의 하례객들은 모두 숨소리조차 눌러 참았다.
“모든 것이 제 있을 곳을 찾으리라.”
루카미오노에게 깃들었던 빛무리가 황제에게로 옮아 가더니 그의 머리통에 스며들었다.
일순간 연회장 안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공식 석상에서 처음으로 주신의 목소리를 낸 루카미오노는 깊이 숨을 내뱉고는, 합장하며 깊이 허리를 숙였다.
“발 닿은 대지의 은총을.”
“지평선의 평균율을.”
뒤이어 일어난 황제가 깊이 허리를 숙이자, 연회장 안에서는 그 정적을 깨듯 신중한 박수 소리가 무겁게 울리기 시작했다.
그들을 따라 제 손바닥을 울리며, 클로에는 작은 충격에 젖어 있었다.
‘달라졌어.’
제가 기억하는 때와 오늘 이 자리 사이에는 저나 데메트리안의 옷차림이나 캄포 대공녀의 등장 같은 것들이 달라졌지만…… 그것은 어쩌면 저와 데메트리안이 달라졌기 때문에 일어난 변화일 거였다.
다른 모든 것은 기억대로 흘러갔다. 각 제후국 사절단이 바친 호화로운 진상품의 목록, 멜라니를 비롯한 제 지인들의 옷차림, 그리고 루카미오노의 등장 등등…….
주신의 메시지는 달라질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그건 클로에나 데메트리안의 행보와 전혀 무관한 것이었으니까.
‘정답은 머지않은 곳에 있다.’
그러나 주신은 다른 목소리를 내리시고야 말았다.
그러고 보면, 저의 이 기묘한 체험에 주신께서 휘말리실 리는 없으니 당연한 일인 듯도 했지만…….
막간의 휴식에 사람들이 부산스레 떠드는 와중에 홀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는, 다시금 저를 향한 시선을 느꼈다.
줄곧 그러했듯 집요하게 제 안색을 살피는 데메트리안의 푸른 눈동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들 사이에 겹겹이 자리한 사람들이 삼삼오오 웅성대고 있었지만, 게다가 거리가 멀어 그 어떤 말도 주고받지 못했지만…… 두 사람은 알 수 있었다.
달라진 주신의 메시지를, 서로가 인지했다는 것을.
“다음은 지난겨울 아흐너 숲의 마물을 토벌한 브루크너 기사단의 단장, 악시온 경입니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지고하신 폐하의 50세 탄신연을 감축드립니다.”
“그래, 악시온 경. 언제나 동부에서 고생이 많아.”
이어지는 포상 자리는 여느 때처럼 훈훈하게 이어졌다. 50세연이어서 그런지 포상의 정도가 거창한 것만이 다를 뿐이었다.
“경에게 금화 천 개와, 브루크너 기사단에 아흐너 숲 근방의 올란센 장원과 황제의 나팔을 세 개 하사하도록 하지.”
“성은에 감복하나이다.”
여느 때 같았으면 금화 또는 영지만 주고 말았을 것을, 두 가지 모두에 영주들에게 행사할 수 있는 특권까지 하사하는 것이었다.
“서대륙의 란국과 교류할 수 있는 초석을 다진 황금새치 상단의 단주 에우란타입니다.”
“덕분에 란국의 사절단이 짐의 탄신연에 와 주었구나. 네게 고대어로 어둠에서 모색하는 이라는 뜻의 성 알몬을 내리고 남작위를 하사한다.”
“지난해 동남부 지역의 전염병에 치료제를 발명한 리도테 학술원의 리온 경입니다.”
“덕분에 짐의 소중한 백성 수천의 목숨을 구했네. 경에게 아를라의 영지를 하사하고 백작위를 내리겠네.”
“올 초 보릿고개에 사재를 털어 제국 서부의 모든 고아원에 식량을 기부한 그레니다스 자작부인입니다.”
“부인의 선의 덕에 주신의 영토에 자라는 새싹들이 배를 곯지 않고 풍요를 맞았지. 부인에게 피레사의 훈장을 수여하네.”
굳이 공개적으로 치하하지 않았던 소소한 공적들까지 두둑이 포상하는 것이었다.
역시 50세연이라 그런지 통이 크시다며 모두들 와인 잔을 흔들고 박수갈채를 보냈다.
제 기억대로인 포상 행렬을, 클로에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와 달리 이런 자리에서 치하받기에 어울리는 공을 세운 프레더릭의 처우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거기서 내가 한 건 별거 없는데 말야. 별일 아니겠지…….’
아까 에티엔이 한 말도 자꾸만 떠올랐고 말이다.
“마지막으로, 이번 보릿고개 구휼 사업을 성공적으로 마친 프레더릭 1황자 전하와, 기지를 발휘하여 구휼 기금 유실 건을 해결한 데메트리안 경입니다.”
시종장이 마지막 포상자들의 이름을 읊었을 때, 클로에는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마지막이라니, 그러면 그렇지. 2황자 전하께서 장난기가 좀 있으시네.
개운한 마음이 된 클로에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옥좌 뒤편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프레더릭을 보았다.
구휼 사업이 실패했을 땐 당연히 프레더릭에게 아무 포상도 내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깜짝 책봉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눈에 띄게 상심한 얼굴이 된 그는 첫 춤의 의무만 간신히 지고는 일찍 자리를 뜨고 말았다.
프레더릭은 날래게 내려와 계단 아래로 내려왔다. 데메트리안 또한 성큼성큼 걸어 프레더릭의 곁에 섰다.
두 사람이 황제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을 때 프레더릭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분명한 기대감이었다.
그것이 그들을 둘러싼 좌중에도 느껴져서 연회장 내부는 다소간 들뜬 분위기가 되었다.
“나의 첫째가 지난겨울 내무부에 들어간바, 이번 구휼 사업을 마치느라 노고가 많았다. 주신께서 매해 풍요를 내리셔도 인간이 부족하니 이런 위기도 닥치는 것인데, 어쩌면 너의 슬기를 펼치라 이런 기회를 주신 것도 아니겠느냐.”
이제까지와 달리 황제의 찬사가 길었다. 어쩌면 제 아들이어서일 수도 있고, 그 공을 더 크게 치하하려는 것일 수도 있고, 어쩌면…….
프레더릭의 목울대가 크게 오르내렸다.
“나의 슬기로운 첫째에게 황가에 내려오는 가장 비옥한 토지 중 하나, 리델의 장원과 그 옆의 므네쥬령을 하사한다.”
“…….”
황제의 말이 끝나고도, 무언가 뒤따르는 말을 기다리는 듯 프레더릭은 곧바로 대꾸하지 않았다. 침묵이 길어지는 양에 그는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포상자 명단을 적은 칙서에서 눈을 뗀 황제는 제 아들의 대답을 보채듯 온화한 낯으로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그것이 끝인가……?
정말로?
사색이 된 프레더릭은 당황스런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황제 폐하의 성은에 감사하나이다.”
그가 꿇어앉은 뒤편의 온 귀족들이 제 나름으로 술렁이는 소리가 났다. 꾸우욱, 접어 세운 무릎에 올려 둔 주먹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이 정도로는 부족했던 것인가? 정말…… 정말 노력했는데.’
그는 기실 모자람이 없는 황자였다.
데메트리안같이 그를 개인적으로 아는 이들이 그의 성정에 다소간의 아쉬움을 느낄지언정, 공식적으로 비치는 모습만 놓고 보자면 그에게 결함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문자를 세 살 때 떼었다면 그 아우는 두 살 반 때, 그가 열두 살에 제국 검술을 마스터했다면 그 아우는 열 살 때, 그가 제왕학과 아카데미의 기초 학문들을 열네 살에 다 떼었다면 그 아우는 열세 살 때…… 모든 것에 있어서 조금씩 제 아우보다 늦되다는 것이 그의 평생의 열등감이었지만, 그게 황태자 책봉을 늦출 사유는 못 되었다.
아버지의 지위를 탐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황태자로서의 지위를 보전받고 싶은 것뿐인데…… 그게 그리도 어려울 일인가.
황망해진 그의 귓전에 칙서를 읊는 황제의 목소리가 웅웅대었다.
“원로원 의장의 보좌관으로서 내 첫째를 도와 구휼 사업을 성공시키는 데에 큰 공을 세웠다. 경에게는 내 앞으로 더 기대하는 바가 많다. 경에게 따로 맡긴 일들도 더 수고해 주길 바라는 바이네.”
데메트리안은 그것이 경시청과 함께 구휼 기금 절도범을 추적하는 일과 제도 뒷골목에서 일어나는 인신매매의 진상을 좇는 것에 대한 이야기임을 대번에 알아들었다.
결국 이리 되었는가.
데메트리안은 프레더릭의 낯을 곁눈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