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밤이 짧아지는 나날들 (5)
황제가 입장하는 내내 근처에 서 있던 그란체 후작가의 둘째 딸이었다.
“고마워요, 그란체 영애. 앤지네에서 특별히 제작한 거랍니다.”
“앤지네에서요? 아티장 지구의?”
“제가 어려서부터 친하게 드나들어서 그런지, 저에게만 특별히 먼저 보여주는 야심작이라고 했어요.”
“어머. 그렇군요……. 그리고 머리카락에 반짝거리는 효과가 있는 건 혹시.”
“여기 있는 보석이 마정석이래요. 마정석을 액세서리로 쓰다니, 아이디어가 대단하죠?”
클로에는 제 헤드밴드에 대해서만 자세히 설명할 뿐 다른 모피가 더 있다느니, 이 색도 남은 게 있을 거라느니 하는 말을 보태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들이 원하는 것은 자기만의 무언가니까.
다만 제게 먼저 보여줬다고 언급함으로써 앤지네에 더 있을 무언가에 대한 상상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부디 효과가 있어야 할 텐데.’
그란체 영애가 제 친우들에게만 말해도 널리 퍼지겠지만, 정말 관심이 있다면 정보를 나누지 않을 게 뻔했다. 뭐, 오늘 안에 다섯 명만 제게 물어와도 성공은 성공이었다.
‘캄포 대공녀가 그걸 하고 올 줄은 몰랐는데.’
아니, 애초에 그녀가 올 줄도 몰랐지만.
아까 그녀가 크레벨들과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멀리서나마 지켜보며 느꼈던 묘한 감상이 다시 떠올랐다.
제가 요 얼마간 알아 온 루시엔 캄포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제국 연방에서 가장 고귀한 아가씨다운 몸가짐…….
이는 제가 오래간 상상해 왔던 캄포 대공녀의 모습 그 자체였다.
다른 한편으로, 루시엔이 지금껏 보여 준 모습과는 판이했다.
저와의 정혼을 깰 생각이 없어 보이는 데메트리안을 두고 고루하다 말하거나, 황위 계승권을 잃기 싫어서 정혼을 먼저 못 깬다는 식으로 말하던 루시엔 캄포.
선물을 준다더니, 여기에 온 것을 두고 말하는 건가, 아니면 머리핀을 하고 와 준 것일까.
그렇다면 그게 제게 어떻게 선물이 되는가.
‘……데미는 첫 춤을 대공녀랑 추게 되려나.’
원래는 늘 그랬듯 오늘도 클로에가 그의 첫 춤 상대가 되었었다. 이제는 그들 사이가 그때와 달라 여러 변수가 있었지만 높은 확률로 데메트리안은 꿋꿋이 춤을 청해 올 거였고, 클로에는…… 우선 그의 이야기를 들어 보기 위해 그걸 수락할 거였으니까.
그러나 캄포 대공녀가 있는 자리에서 제가 그와 첫 춤을 추는 것은 다소 곤란한 일이었다. 미성년인 캄포 대공녀가 첫 춤의 의무를 질 이유는 없었지만.
‘아니, 곤란하다기보다…….’
서글픈 일일까. 거기에 생각이 이르러, 클로에는 슬며시 크레벨들 쪽을 바라보았다.
언제부터였는지, 그녀가 내내 생각하던 이의 시선이 그녀에게 따라붙어 있었다.
제후국 사절단의 입장은 제국 연방에 복속된 순서대로 이루어졌다. 그란디시, 말레카, 오리포네, 스체르바뇰, 에티아와 키로스……. 맨 마지막은 늘 그랬듯 스칸다르의 몫이었다.
각 제후국에서 진상한 고대의 신비며 특산물이며 하는 것들이 옥좌 좌우로 쌓인 가운데, 제국에 볼모로 와 있는 스칸다르의 왕자가 제 나라의 복식을 차려입고서 사절단을 거느리고 입장했다.
연회장 곳곳에서 그를 연모하는 영애들의 탄식이 새어 나왔다. 평소 제국식 복식을 입고 다니는 그가, 탄신연 때면 늘 스칸다르 복식으로 나타나는 것이 그녀들에겐 일종의 깜짝 이벤트인 것이었다.
“제국의 마지막 가지, 스칸다르의 왕자 뷔욘 인사 올립니다.”
뷔욘이 허리를 숙이자, 늘 묶고 있던 것을 풀어 내린 머리카락이 금사처럼 사르르 그의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익숙한 광경을, 클로에는 묘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제 부왕께서 직접 오시지 못하심을 안타까워하시며, 대신 폐하의 탄신을 경하하라 긴히 명하셨습니다.”
그의 말에 수군대던 사람들의 말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그간 사교클럽을 중심으로 퍼지고 있던 스칸다르 왕의 와병설이 사실일 확률이 높아진 것이었다.
아무런 낌새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뷔욘의 연갈색 눈동자는 오롯이 황제를 향하고 있었다. 그 낯에는 그의 상징과도 같은 고운 미소란 흔적조차 없었다.
“그래.”
소란한 말소리를 눌러 내리듯, 황제가 낮고도 깊게 목소리를 울렸다. 좌중이 물 먹은 듯 조용해졌다.
“아우가 아프다고. 내 따로 전령을 받기도 했지. 얼른 쾌차하여야 네 시름도 덜 텐데 말이다.”
“황송합니다.”
다시금 고개를 꾸벅이는 뷔욘의 얼굴은 침통한 듯 굳어져 있었다.
이윽고 뷔욘이 짤막하게 손짓해 보이자, 사절단의 시종들이 선물 상자를 바리바리 그의 발치에 갖다 놓았다.
“지고하신 아르투젠 제국 연방의 으뜸, 존귀하신 황제 폐하의 탄신을 경하드립니다. 여기, 부왕께서 올해 저희 나라에서 생산된 것들 중 가장 귀한 것으로만 골라 보내오셨습니다.”
그 상자들은 외관상으로도 클로에가 모피 케이프를 선물 받을 때 쓰인 것보다 한층 화려했다.
사절단의 시종들이 뚜껑을 열어 보이자, 황제의 눈이 언뜻 커졌다. 안에 있는 것은 더욱 호화로운 모양이리라. 사절단의 뒷모습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귀족들은 황제의 반응으로 대강 짐작할 뿐이었다.
클로에는 훗날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사교계에서 떠돌았던, 값으로 대자면 무엇도 따르기 힘든 스칸다르의 진상품 목록을 떠올렸다.
금사로 수놓은 비단, 고산 지대의 영약, 검정색이나마 윤기가 특출난 밍크 모피.
사람의 머리통만 한 관상용 원석, 올해 채굴한 것 중 가장 큰 수호 사도의 상징석들, 최고의 장인이 세공한 독특한 모양의 다이아몬드, 황후에게 진상하는 핑크 다이아몬드 장신구 세트 등등…….
‘매해 보석을 저리도 많이 진상하는데, 스칸다르가 마정석 사업으로 유명한 게 여태껏 알려지지 않았던 것도 신기하지.’
제국 연방에서 가장 호화로운 도시인데도 스칸다르식으로 마정석을 활용한 장신구가 여태껏 소개된 적이 없으니 말이었다. 덕분에 제가 오늘 주목을 받고도 있지만…….
“그리고 이것은.”
사절단 중 고위 대신으로 보이는 사내가 직접 들고 온 상자를 뷔욘에게 건넸다. 뷔욘이 품에 한가득 들어오는 그 상자를 열어 보이자, 사절단을 맞이한 이래 황제의 눈이 가장 크게 뜨였다.
“폐하의 50세연을 특별히 기리고자 부왕께서 저희 나라의 으뜸가는 장인들을 모아 옥으로 만든 보관입니다. 수호 사도의 상징석이 아니기는 합니다만, 저희 나라에서는 옥이 장수와 번영의 상징이오니 부디 폐하의 보물고에 누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거기 박힌 보석은.”
“예, 폐하의 수호 사도의 상징석인 페리도트입니다.”
“호오, 귀한 것을. 스칸다르의 옥에 대해서는 내 아우에게 많이 들었지.”
후일 황제가 귀족들에게 자랑하며 사교계에 화제가 될 스칸다르의 옥관이었다. 품질 좋은 커다란 옥을 통째로 세공한 관으로, 그 중앙에는 아르투젠에서 노란빛을 띠는 것만이 유통되는 페리도트가 연두색으로 형형히 빛났다.
그걸 직접 볼 수는 없어도, 훤히 밝아진 황제의 낯에서 그것이 퍽 진귀한 것임을 모두가 알 수 있었다.
“분리 독립파가 여전히 말썽인데 50세연을 이리 열심히 챙긴 걸 보면…… 역시 왕실은 그들과 선을 긋는 거겠죠?”
옆에서 에티엔이 아버지, 궁정백에게 소곤대는 목소리가 났다. 클로에에게 들어 얼마 뒤의 일들을 대충 알고 있는 미라벨이 슬며시 클로에의 낯을 살폈다.
‘왕실이 독립을 요구하기야 했지만, 그건 제국에 무언가를 협상할 수 있게 되어서였으니까…….’
뭐, 계기가 없는 지금은 독립하고픈 열망이 있대도 납작 엎드려 있을 수 있지.
클로에는 그렇게 생각하며 뷔욘이 제 발치의 상자에 담긴 것을 하나하나 소개하는 걸 멍하니 보고 있었다.
모든 진상품이 황제의 옥좌 곁에 쌓인 뒤. 제 임무를 마친 뷔욘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마침 라크루아들이 자리해 있는 방향이었다.
고만고만한 제국식 야회복을 차려입은 귀족들 틈에, 잘못 보았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저건 설마.’
뷔욘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17년의 볼모 생활 덕에 부정적인 감정을 낯에 띄우지 않을 수 있는 법을 익혔건만, 순간적으로 그는 제 표정을 갈무리하지 못했다. 황제를 대할 때면 으레 그렇듯 목 끝까지 차오른 자괴감에 기분이 저조해졌기 때문이리라.
그 아래에 바로 이어지는 얼굴이, 제가 요 얼마간 마음에 담아 둔 인물임을 알았음에도.
클로에는 그가 이편으로 몸을 돌리는 것을 보며, 제 장신구에 대해 어찌 반응할지 조마조마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했을 때, 그 마음이 싸르르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그의 시선은 명백히 일종의 불쾌함을 담고 있었으니까.
‘언질이라도 드렸어야 했을까. 관심이 있다는 걸 티 냈으니 괜찮으려니 했던 건데…….’
호의적인 반응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불편해할 것은 상상하지 못했다.
그가 만인지상의 자리에 있던 셰비크의 궁정에서도, 그는 타인에게 분노할지언정 제 귀비에게는 불쾌함조차 드러낸 적 없었으니까.
‘로이의 차림새에, 뭔가 거슬리는 구석이 있나……?’
연회장의 반대편에서 데메트리안은 그 모든 것을 빠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스칸다르의 왕자는 더없이 깍듯한 자세로 하례를 올렸다. 분리 독립파가 여전히 골칫거리인 데다 다른 제후국들에 비해 제국과의 연결고리가 희박한 만큼, 비굴하리만치 과한 선물을 늘어놓으면서.
옥을 통째로 세공해 만든 왕관을 선물할 때에는 정말이지, 그것을 기억하고 있던 그마저도 깜빡 속을 정도였다. 스칸다르가 제국의 영원을 기원하며 제국 연방에 모쪼록 오래도록 속해 있기를 바란다고 말이다.
‘현 왕이야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재수 없으리만치 늘 빙글대던 그 낯짝은 어디 가고, 진중하게 황제를 대하는 그 몸가짐은 일견 공손해 보일 지경이었다. 백지수표나 다름없는 기회를 얻었을 때 곧바로 완전한 독립을 요구할 이라고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데메트리안은 그의 시선이 제가 짐작하는 대로 황제의 뒤편에 잠시 머무르는 것까지 확인했다.
‘정말 관계가 있는 건 맞는 것 같군.’
뷔욘의 눈인사를 받은 프레더릭은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스무 살에 성년이 되면서 받았어야 할 황태자 책봉이 미뤄진 것이 벌써 여섯 해. 황제가 훈장과 포상을 남발하는 탄신연이라면, 그것도 50세연이라면, 게다가 제가 무슨 성과를 거뒀으면…… 무언가를 기대할 수밖에 없는 게 인지상정이었으니까.
‘기왕이면 오늘 책봉되면 좋을 텐데.’
그와 고군분투한 지난 몇 달간을 돌이키며 데메트리안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가 목표한 일 중 하나가 자연스레 해결될 테니까.
그러는 사이, 탄신연 하례의 마지막 순서를 알리는 소리가 문 쪽에서 울렸다.
“고티유 대신전에서 주신의 사자가 당도하였습니다!”
에르드교에서 교황 다음가는 고티유 대신전 대신관의 입을 빌어 주신이 직접 축복을 내리는 자리였다.
대축일 예식만큼 제국에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주신의 이름으로 성립한 제국의 지도자가 여전히 주신의 지지를 받는다는 증명이었으니까.
그래서 성배가 없어진 뒤 대축일 예식은 엉망이 되어도, 탄신연 덕에 간신히 체면을 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 나름으로 파격적인 자리가 될 예정이었다.
에르드의 신관들을 위해 연회장의 입구가 열렸을 때, 클로에가 기억하는 그대로 곳곳에서 숨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맙소사. 루카 놈이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