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밤이 짧아지는 나날들 (4)
클로에와 눈을 마주친 루시엔은 미미하게 입꼬리를 틀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와 오래 알고 지낸 이들만이 알 수 있는 미소였다.
‘영애께 선물을 드릴게요. 기대하셔도 좋아요.’
갑작스레 달려든 그날의 말소리. 클로에의 놀란 표정을 지켜본 루시엔이 고개를 살짝 까닥였다.
양옆으로 머리를 촘촘히 땋아 뒤에서 하나로 틀어넣은 그녀의 조숙한 머리 모양은, 클로에의 헤드밴드와 똑같은 털로 된 머리핀을 포인트로 하고 있었다.
“아니, 루시엔 아니야?”
연회장 안쪽의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은 크레벨 공작은, 갑작스레 흐르는 묘한 분위기를 따라 입구 쪽을 바라보고선 깜짝 놀랐다.
“대공녀 말예요?”
“으응, 안 그래도 어제 윌리엄 생일 축하연에 왔길래 보고 깜짝 놀랐던 참이오.”
크레벨 공작부인이 캄포 대공가와의 일이란 더 이상 모르쇠로 일관하겠다는 양 굴기에 이제야 털어놓는 이야기였다.
탄신연은 물론, 바로 그 전날에 열리는 제 아비의 생일 축하연에도 코빼기 한번 안 비치던 루시엔이었는데. 무슨 바람인지, 크레벨 공작은 의아한 낯으로 제 쪽으로 다가오는 캄포 대공을 바라보았다.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의 등장에 데메트리안도 굳고 말았다.
‘고티유에 올라온 적이 없었는데……?’
스물세 살의 데메트리안이 루시엔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것은 9년 전 캄포령에 놀러 갔을 때였다.
혼약이 제 의무인 것을 알고는 있었으나 여섯 살배기를 보고서 제 정혼자라고는 상상하기 곤란하여 말도 몇 마디 섞지 않았던 기억인데.
그런 그녀와는 앞으로 2년은 더 볼 일이 없을 예정이었다. 병약하다는 핑계로 캄포령에서만 머무는 그녀가 2년 뒤에야 제도 생활을 시작할 예정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정혼을 파기하기 위해 제가 동분서주하고 있는 현재를 생각하면, 앞으로도 볼 일은 없어야 했는데.
‘어쩐 일이지?’
누구도 눈치챌 수 없었지만, 당혹감에 젖은 그의 짙푸른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여어, 자네. 어제 잘 들어갔는가? 부인, 죄송합니다. 제가 어제 술을 좀 많이 먹였죠. 몸은 좀 괜찮으신지요?”
“호호, 대공님께서 이이랑 놀아 주신 덕에 집에서 푹 쉬었더니 가뿐하네요. 대공비 전하, 어제는 못 찾아뵈어서 죄송해요.”
“아니에요, 오늘 이렇게 또 뵌걸요. 손님이 많으면 아무래도 정신없죠. 다음에는 오붓하게 뵈어요.”
어떻게 봐도 어제 부부 동반으로 초대받은 자리에 남편 혼자 보낼 정도로 아팠던 사람으로는 안 보였지만. 적당히 오래 알고 지낸 두 부부는 서로 적당한 선을 지킬 줄 알았다. 남편들끼리야 막역할지언정.
“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나저나.”
크레벨 공작부인의 시선이 캄포 대공 부부의 뒤편을 향했다.
제게로 쏟아지는 좌중의 시선을 알면서도, 루시엔은 마치 이런 자리에 익숙한 사람처럼 의연한 태도로 제 오라비의 곁에 서 있었다.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공작부인. 그리고 공작 각하. 캄포의 루시엔입니다.”
흠잡을 데 없는 예법으로 깍듯하게 루시엔이 인사를 해 보였다. 그 고아한 몸놀림을 보는 그 누구도, 그녀가 한들룽 지구에서 여느 상단주의 종자 노릇을 한다고는 상상조차 못하리라.
“그래, 오랜만이구나. 어렸을 때 보고 처음이지?”
“네, 부인. 제가 그간 영지 밖으로 걸음 하지 못했는데, 이번에 폐하의 50세 탄신연이시니 부득불 부모님을 졸라 제도 나들이를 나왔답니다.”
그리 말하며 생긋 웃는 루시엔 또한, 병약과는 전혀 거리가 멀어 보였다.
크레벨 공작부인은 캄포 대공비를 닮아 자그마하고 인상에 고집스러운 구석이 있는 루시엔을 뜯어보았다.
아직 앳된 얼굴이지만, 황가와 오리포네 왕가의 핏줄을 이어받아 태생부터 고귀한 소녀. 왠지 스체르바뇰의 왕녀였던 제 어린 시절이 생각나, 크레벨 공작부인은 절로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고 해서 제 아들의 상대로 바라보는 건 절대 아니었지만.
‘바보 같은 남정네들, 나이 차가 다섯 살이 넘으면 파기하겠다는 조건이라도 달았어야지. 이 뽀송한 애는 또 무슨 죄가 있어서.’
그런 샐쭉한 마음을 눌러둔 채, 크레벨 공작부인은 화사하게 웃으며 제 아들들 쪽을 가리켰다.
“기억하니? 여기가 내 큰아들, 데메트리안. 그리고 이쪽이 둘째 루이폴트. 예전에 대공저에 다 같이 놀러 갔었는데.”
“……안녕하십니까.”
공작부인의 곁에 서 있던 데메트리안이, 간신히 예의를 차린 낯으로 그녀를 맞았다.
정혼자라느니 사위라느니, 웬일로 두 아버지가 그런 말을 안 해서 다행일까. 무례인 걸 알면서도 데메트리안은 저와 같은 천형을 짊어진 그녀를 살뜰히 대하기가 힘들었다.
제가 그때의 일로 시간을 거스른 것까지 치면 저보다 열몇 살은 어린 것이 빤히 보였고, 그녀는 또…….
그녀의 새까만 눈동자를 보는 순간, 그녀가 공작저에 머무르던 동안의 일들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죠.”
루이폴트가 곧바로 청순하게 웃으며 허리를 숙이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래, 차라리 루이하고는 사이가 편한 눈치였으니…….
“안녕하세요. 두 분 모두 오랜만에 뵈어요.”
루시엔은 나무랄 데 없는 몸가짐으로 두 공자에게 인사했다. 여전히 큰 공자는 제게 무관심해 보였고, 작은 공자는 상대적으로 친절히 굴었다.
‘양심은 있나 보지, 정말.’
루시엔은 속으로 비쭉 웃었다. 잘된 일이야. 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늘 긴장하는 기색인 클로에의 낯도 함께 떠올랐다.
“황실 연회가 처음이어서 긴장될 법도 한데.”
루시엔이 제 아들들과 오래 어울리게 할 생각이 없어, 크레벨 공작부인이 넌지시 말을 건넸다. 공자들 쪽으로 향했던 루시엔이 사뿐히 몸을 돌려 공작부인을 바라보았다.
“지고한 황실의 연회야 처음이지만, 종종 오리포네 왕실의 행사는 참석한걸요. 더 몸가짐에 유의하며 조용히 있다 가면 되지 싶어요.”
“하긴, 아직 데뷔탕트도 치르지 않았으니 함부로 말을 거는 신사들이 있을 리도 없고 말야.”
“네. 부모님 곁에 꼭 붙어 있어야죠.”
루시엔이 방긋 웃었다. 그리 말하는 저 스스로도 조금 가식적이라고 생각하면서.
데뷔탕트를 치르지 않은 어린 귀족들에게 성인인 가족을 통해야만 말을 걸 수 있는 아르투젠의 답답한 전통이 이런 때는 또 득이 되는 것이었다.
조용히 있다가, 보이려는 것만 다 보이고 떠나면 된다.
루시엔은 오늘의 제 계획, 어쩌면 클로에가 원하지 않을 수 있는 제 선물을 머릿속에서 곰곰이 따졌다.
“그런데, 머리 장식이 독특하구나.”
“감사합니다. 제 친우에게 선물 받은 거예요.”
“그렇구나. 친우.”
예상치 못한 자랑 어스름한 말에 크레벨 공작부인이 눈썹을 작게 들어 올렸다. 귀족들에게는 황제에게 하사받은 정도가 아니면 사치품의 내력이 화제가 되는 일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상대는 아직 데뷔탕트도 치르지 않은 어린 소녀. 조카딸 보는 마음으로 크레벨 공작부인은 상냥하게 답했다.
“수완 좋은 친우를 뒀네.”
“혹시 그, 친우가.”
그러는 양을 곁눈으로 살피던 데메트리안이 급하게 끼어들었다. 제 어머니의 말을 듣고서 보니, 그 머리핀에 꽤나 낯익은 구석이 있었던 것이었다.
제 아가씨의 귤빛 머리칼에 티아라처럼 둘러져 있던 바로 그 털 뭉치…….
루시엔은 빙긋이 웃어 보였다. 평상시의 그녀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 미소가 흥미로움을 담은 비릿한 미소임을 알아봤을 거였다.
아쉽게도 이 자리에는 그녀의 본모습을 아는 사람이 없어 그저 수줍은 미소 정도로 해석되고 말았지만.
하지만 그녀가 내뱉은 답은 수줍음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라크루아 궁정백 영애요. 이번에 제도에 와서 친해지게 되었답니다.”
“제국의 태양, 에드워드 3세 황제 폐하 드십니다!”
예정된 18시가 되었을 때, 북적이던 연회장에 시종이 고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악단의 행진곡에 맞춰 황실 소년 병사단의 단원들이 꽃가루를 뿌리며 에드워드 3세의 입장을 장식했다.
황제가 한가운데 융단 깔린 길을 따라 느릿하되 위풍당당한 걸음으로 입장하자, 미리 도착해 옥좌 뒤편에 자리해 있던 황후와 황자들이 일어났다. 시종 하나가 쟁반에 스파클링 와인 여러 잔을 담아와 옥좌 앞에 다다른 황제와 황실 일원에게 바쳤다.
황제가 입장하는 사이, 연회장을 가득 메운 귀족들에게도 와인이 한 잔씩 돌려진 터였다.
열 계단은 높은 곳에 자리한 옥좌 앞에 서서. 좌중을 내려다보며 황제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 짐의 50번째 생일을 축하하러 와 준 모두에게 이를 데 없이 고마운 마음을 전하는 바이네.”
그의 백성들은 와인 잔을 허공에 한 번 흔들어 보임으로써 대답을 대신했다. 축성을 받아 무지갯빛 기포가 바글대는 금빛 스파클링 와인이 허공에서 찰랑거렸다.
“고마운 날인 만큼, 오늘 특별한 일 가득히 만들면 좋겠네. 자, 주신의 축복을!”
“탄신을 경하드리옵나이다!”
황제의 건배사에 이어, 연회장을 가득 메운 수백의 인원들이 한소리로 축하 인사를 읊었다.
“특별한 일이라니, 아무래도.”
“역시, 그렇게 되고 마는 건가.”
황제가 착석하고 타국 사절단의 입장을 위해 시종들이 황제의 융단을 치우는 동안, 귀족들은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말소리를 내뱉기 시작했다.
“드디어 책봉을 하시려는 건가.”
“……원로들도 들은 바는 없는 것 같던데.”
“그러고 보니, 오늘 1황자 전하 얼굴이 더 좋아 보이시지 않아?”
“에이, 방금 그 말씀 들어서 그럴지도 몰라.”
“황자님들께는 귀띔해 주시지 않으셨나?”
황제가 무의미하게 읊었을 수 있는 ‘특별한 일’이라는 구절을 놓고, 연회장에 모여든 아르투젠의 귀족들은 황자들의 안색을 따지며 황태자 책봉 문제에 대해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아르투젠 황실의 문제라고 해 봐야 황태자가 정해지지 않은 것뿐이었으니 말이다.
황제의 오른편 조금 뒤쪽에 앉아 있는 프레더릭의 얼굴도 다소 상기된 눈치였다.
‘이번에는 벌써 책봉되시려나?’
클로에는 아무 일 없이 지나갔던 ‘원래’의 오늘을 떠올리며 그의 안색을 살폈다.
‘구휼 기금 문제가 잘 해결되긴 했으니까. 물론 범인을 잡고 사라진 금액을 찾아야만 진짜 해결이긴 하지만…….’
그걸 두고 공을 세웠다고 할 수 있을까.
황제가 마음만 먹는다면 그것은 언제든 공이 될 수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 황제가 인정하지 않으면 그 무엇도 공이 될 수 없었다.
제가 기억하는 미래에서 황제가 인정한 프레더릭의 공은 성배 환수 협상을 완료한 것밖에 없었는데……. 그러고 보니, 공이라 하면.
‘대니얼 전하가 도대체 나를 왜? 정말로?’
상상도 못한 탓에 잠시 잊었던 것을 캐물으려 에티엔을 찾았지만, 그는 경시청 관료들의 인사를 받느라 바쁜 모양새였다.
그때, 낯선 목소리가 울렸다.
“라크루아 영애, 오랜만이에요. 머리 장식이 이색적이네요.”
오호라. 첫 손님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