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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했는데 첫사랑이 수상하다-111화 (111/189)

111화. 밤이 짧아지는 나날들 (3)

클로에의 차림새는 사람들의 이목을 완전히 잡아끌었다.

독특한 복색을 하고 온 타국의 사절들도 많았지만, 어쨌든 그녀는 아르투젠의 귀족인 클로에 라크루아 아니던가. 그것도 늘 유행에 적당히 따라가는 옷만 차려입던.

유행인 레이스 소매도 달지 않은 드레스에 치마는 크리놀린의 반도 부풀리지 않았고, 과감하리만치 커다란 헤드밴드에 달린 건 계절에 맞지 않게도 모피 같았다. 마법이라도 썼는지 사금을 섞은 듯 반짝이는 머리칼까지.

‘이런 시선을 피오나 앨포드 같은 사람들은 매일 받는다는 거지…….’

클로에는 자못 쑥스러운 마음을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발을 놀렸다.

“이야, 숨이 다 막히네. 네가 이런 시선을 즐기는 줄 몰랐다. 나는 무슨 죄니?”

“나도 기절할 것 같으니까 조용히 해.”

에티엔의 너스레에 클로에가 입술을 움직이지 않은 채 재빨리 속삭였다.

가족들에게 첫선을 보이러 응접실에 들어섰을 때도, 황궁에 도착해 마차에서 내릴 때도……, 그 모든 발걸음이 한없이 떨렸다. 장인들과 머리를 맞대고 상의할 때까지만 해도 즐거운 작당이었는데, 막상 선보이자니 마치 광대 옷을 입고 퍼레이드 선두에 선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전혀 새로운 모양새의 장신구와 그것이 돋보이도록 유행을 생각지 않고 지은 드레스를 본 사람들은, 부채로 와인 잔으로 입을 가리고 소곤소곤 떠들기 시작했다.

클로에는 괜스레 짓궂은 말들을 떠올리고 말았다. 저 우스꽝스런 복장은 뭐람? 저렇게 치마가 밋밋해서 어째? 머리엔 웬 괴상한 걸 얹었어?

사교계의 친절한 이들이 감히 라크루아에게 그런 소리를 할 리는 없는데도.

제게 들러붙는 수많은 시선에 애써 초연한 척하며, 클로에는 루시엔의 말을 떠올리려 애썼다.

“마침 잘됐네. 너 이따가 아아주 주목받을 텐데.”

“그게 무슨 소리야?”

“2황자 전하께서 기대해도 좋다시던데.”

“뭐?”

언뜻 떠오르는 대니얼과의 추억에, 클로에가 황급히 에티엔을 쳐다볼 때였다.

“클로에! 웬일이야, 요즘 볼 때마다 놀랄 일투성이야?”

“영애,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뵈어요, 막시무스 경.”

제 발랄한 이미지를 살린 듯 화사한 개나리색의 드레스를 차려입은 멜라니가 제 약혼자 막시무스의 팔짱을 끼고 그편으로 다가왔다.

에티엔의 모호한 말을 추궁할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인원수를 늘린 젊은이들은 순서 없이 인사말을 떠들었다.

“알로제 영애. 안녕하세요? 경은 어제도 봤고.”

“두 분,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소궁정백님. 오랜만이에요, 누아제트 영애.”

특유의 명랑한 어조로 클로에 일행에게 인사를 건넨 멜라니는 클로에 쪽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피오나 앨포드에게 도전이라도 하려고? 패션 배우느라 요즘 뜸했던 거야?”

“무슨 소리야, 너는. 나야 안드레아에서 지어 주는 대로 입는 거 알면서.”

“예뻐서 그래.”

멜라니가 부채로 입을 가리고 까르르 웃었다.

제 친구 클로에 라크루아는 리도테에 입학한 열다섯 때부터 봤지만 이미 어른스러웠고, 사교계의 어르신들이 좋아하리만치 퍽 음전했다. 고티유의 총괄인 궁정백의 여식이면서 거만하게 굴지도 않았고, 돈이나 권력을 갖고서 사람을 휘두르는 건 더더욱 못했다.

그런 그녀의 바른 면들이 저처럼 담이 작은 영애들에게 꽤나 안전한 호감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는데.

‘물론 크레벨 소공작하고 있을 땐 좀 어린애 같은 면도 보이더라만.’

그럴 때면, 저도 어릴 때부터 두 사람과 친했더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두 사람의 긴밀한 우정을 방해하겠다는 생각은 아니었고, 소꿉친구였던 막시무스가 있으니 부러울 것도 없지만 말이다.

“이 헤드밴드는 뭐야? 수입한 거야?”

“앤지네 거야.”

“앤지네라고? 앤지네에 이런 디자인이 있었나? 못 봤는데……. 이 모피 장식은 뭐고?”

“으응, 스칸다르산 담비래.”

“담비가? 은빛인데?”

만져 보라는 양 클로에가 고개를 살짝 숙여 주자, 멜라니가 잽싸게 손을 뻗었다. 애초부터 그러고 싶었던지 진즉에 한쪽 장갑을 벗은 채였다.

“우와, 정말 담비 털 같네.”

“같은 게 아니라 정말 담비 털이라니까.”

“그런데 어쩜 빛깔이 이래?”

“으응, 곰베르 산맥에 스칸다르 쪽 동물들은 다 털 빛깔이 이렇다나 봐. 어때, 여름인데도 안 더워 보이지?”

“클로에. 스칸다르 전문가 다 됐는데?”

멜라니가 생각 없이 대꾸한 말이었지만 괜히 찔리는 구석이 있었다. 짧게 고민한 클로에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있잖아, 그 스칸다르 왕자님하고.”

“응응, 너와 난 그 소문.”

멜라니의 말에, 두 영애의 담소를 곁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에티엔의 귀가 쫑긋했다.

제가 사교클럽에 갈 때마다 사람들이 쑥덕대면서 끼워 주지 않는 이야기가 있더라니, 이거였나.

에티엔의 의미심장한 기색은 눈치채지 못한 채 클로에는 신중히 말을 꾸며냈다. 몇 가지 구체적인 이야기는 뺀, 적당히 사실에 가까운 이야기였다.

“내가 앤지네서 이걸 보고서 다른 제품도 없냐니까, 스칸다르산 모피 구하기가 쉽지 않다는 거야. 그래서 왕자님께 대신 여쭤봤더니 스칸다르 행상이 이따금 고티유를 다녀간다고 소개해 주신 것뿐이야.”

“오호. 그래서 앤지네가 너한테만 이런 특별 제품을 준 거야?”

“라크루아 이름값이 이럴 때 도움이 되더라.”

클로에가 어깨를 한번 으쓱거렸다.

제가 하고 온 파격적인 장신구에 대해 궁금해하는 이들이 숨죽인 채 귀 기울이고 있는 것을 클로에는 놓치지 않았다.

그때, 제 편을 향해 웅성대던 사람들의 주의가 다른 쪽으로 쏠리는 분위기가 있었다. 연회장의 입구를 지키는 시종이 그 주인공들의 입장을 고하기도 전에, 활짝 열린 문으로 누가 들어올지 다 안 덕분이었다.

“크레벨 공작가 드십니다!”

“꺄아.”

멜라니가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그의 곁에 선 그녀의 연인 막시무스가 얄밉다는 듯 그녀의 낯을 흘기는 것이 보여, 클로에는 작게 웃었다.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들어오는 크레벨 공작 부부의 뒤편으로 그의 두 아들이 뒤따랐다.

그 광경에서 클로에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기실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포마드를 발라 이마를 드러내고 한쪽으로 넘긴 머리칼부터, 간만에 한껏 차려입은 예복까지.

보기 싫다고 얼마간 되뇌었어도 그렇게 자꾸만 시선이 가고 말아 클로에는 조금 슬픈 마음이 들었다.

그가 눈에 띄지 않는 때란 없었지만, 오늘은…….

“데미 공자님이 무슨 바람이 불었대.”

“본 중에 가장 열심히 꾸미신 것 같네요…….”

황실 연회에 참석한대도 남들이 평소 입는 연미복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것만 입고 다녀서, 맞추기야 새로 맞췄다는데 늘 비슷한 차림새로 다니던 그였다.

한데 같은 검정 일색이라도 공단 라펠에 은은한 수가 놓여 있다거나, 재킷 뒷자락이 최신 유행 양식으로 만들어져 있다거나…….

제가 지금까지 본 중에 가장 신경을 써서 꾸미고 온 그의 모습에, 클로에에게 떠오르는 어느 날의 추억이 있었다.

‘부인께서 공들여 예복 맞춰 주셨으면, 피부도 좀 가꾸고 머리도 멋있게 하고 말야, 응? 이런 연회에서는 네가 네 어머니의 액세서리란 말야.’

언제부터 제 말을 그리 잘 들었다고.

‘언제부터기는.’

그때부터인 거지……. 그 심란한 마음에, 그로부터 시선을 뗄 생각도 못하고 있을 때였다.

부모님을 따라 안쪽으로 걸어가며 무심한 듯 주변을 살피던 그의 눈동자가 그녀를 찾고 말았다.

그 순간, 심해처럼 가라앉아 있던 그 무덤덤한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다. 단단하게 굳어 있던 그 조각 같은 얼굴은 얼핏 부드러이 풀어졌고, 입매에는 은은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생 그래 왔던 것처럼.

그녀에게 잘못한 바가 있어 나름 자제했다지만, 반사적으로 낯이 바뀌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예상치 못한 그녀의 차림새에 놀란 듯 잠깐 멎었던 그 얼굴에는 이내 다시 더 깊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것을 바라보는 클로에는 잊었다 생각했던 먼 옛날의 감상에 빠져들었다.

그 어떤 이들 사이에 있건 똑같이 꾸며 두었던 얼굴이, 저와 눈이 마주친 순간 은은한 파장이 일듯 깨어지던 그 광경…….

제가 그에게 특별하다는 느낌, 이 모든 공간이 저들을 위해 갖춰졌다는 착각, 그리고 배꼽 간질간질한 그 감각은 사실…… 쉽게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이 함께한 거의 모든 시간이 그러했으니까.

“…….”

하지만, 클로에는 그 옛날처럼 마주 웃을 수가 없었다.

애초에 바란 것이 없었던 데메트리안은, 그녀의 시선을 얼마간 독점했다는 사실만으로 안도했다.

앞쪽을 바라보기 위해 시선을 거둔 그에게 일순 난처한 기색이 떠오른 듯했을 때, 살펴보니 그의 크라바트가……

‘연한 금빛에 진주 장식이면…….’

그걸 기억했던 걸까. 세상에 단 두 사람만 아는 오늘, 클로에가 입었던 드레스가 마침 어두운 금빛이었다. 거기에 맞췄던 장신구는 진주로 된 거였고.

‘그땐 그냥, 맨날 하는 것 중 하나인 군청색 크라밧이었는데.’

그러니까, 제가 언제부터 저에게 그리 맞춰 줬느냐는 것이다.

자꾸만 마음이 싱숭생숭해져, 클로에는 내내 에티엔의 팔꿈치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을 꾸욱 주었다.

“왜.”

에티엔이 제 쪽을 보지도 않은 채 건성으로 대꾸했다. 그새 단단히 한눈을 판 모양새였다.

거기서 짐작 가는 바가 있어, 클로에는 조금 샘이 났다.

“노엘 경, 악단 근처에 있더라. 샤르망 소백작이랑 인사 나누던데.”

“무, 무슨 소리야?”

“친해 보이던데.”

주변에 들리지 않게 재빨리 속살거리는 소리에, 에티엔의 얼굴이 당황으로 빨갛게 물들었다.

“멜라니, 우리 가 볼게? 이따 다시 보자.”

“응, 이따 막스랑도 한번 춤춰 줘.”

“내가 영광이지.”

멜라니 커플과 인사한 클로에는 돌아서서, 에티엔과 미라벨을 이끌고 부모님이 계신 쪽으로 이동했다. 얼핏 스쳐 지나가는 와중에도 사람들은 그녀의 옷차림에 시선을 던졌다.

‘사람들이 구경하는 만큼 앤지네가 성공한다고 생각하자.’

예견된 부담감에 어느 정도 적응돼 갈 때쯤.

사람들의 시선이 연회장의 입구 쪽으로 쏠리더니, 제가 입장했을 때처럼 곳곳에서 숨 들이켜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캄포 대공가 드십니다!”

“맙소사, 로이.”

“왜?”

놀랄 일이 뭐가 있어서, 클로에는 느긋한 목소리로 미라벨을 보았다.

“루비 공…… 아니, 캄포 대공녀야.”

“뭐라고?”

클로에도, 그 말을 들은 에티엔도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캄포 대공 부부의 뒤로, 황실 연회에 참석할 때면 으레 홀로 입장하던 대공자 올리비에가 자그마한 소녀 하나를 에스코트하고 있는 것이었다.

군청색의 단정한 앞머리 아래 총기 어린 까만 눈동자. 틀림없는 루시엔이었다.

황제의 유일한 여조카라는 수식어에 걸맞게도 은사로 놓은 자수와 갖은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드레스를 입고 나타난 그녀에게 모든 이들의 시선이 꽂혔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사교계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던 캄포 대공녀의 첫 등장.

수런거리던 말소리가 입구 쪽에서부터 연회장의 가장 구석진 부분으로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악단의 연주 소리만이 좌중에 흐르고 있을 때.

태연한 낯으로 제 부모님의 뒤를 따르던 루시엔의 시선이, 일순 클로에에게 와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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