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밤이 짧아지는 나날들 (1)
“아니, 정말 놀랐네. 루시엔을 다 보고.”
“그러게. 허허, 녀석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탄신연이 코앞인데 제도에 아직 남아 있는지 모르겠어.”
“자네 딸인 것을? 뭐, 50세 생일은 특별하니 당일에 축하드리고 싶었던 게지.”
“그런 거려나. 그 성미가 나도 줄리아나도 닮은 곳이 없어서 영 알 수가 없어.”
캄포 대공이 예의 그 소탈한 웃음을 지으며 위스키 잔을 들이켰다.
황제의 탄신연을 하루 앞둔 6월의 마지막 주 철의 날, 에델타뉴 산자락에 위치한 캄포 대공저. 황제와 마찬가지로 50세 생일을 맞이한 캄포 대공의 생일 축하연이 열렸다.
제 쌍둥이 동생에게 황위를 잡음 없이 넘기기 위해 계승권마저 포기해 놓고도 뭘 그리 조심하는지, 50세 축하연조차 언제나처럼 만찬회로 소박하게 열고 말았다. 손님이라 봐야 그의 가장 가까운 벗인 크레벨 공작을 제외하면, 캄포 대공의 누이인 라쥐르 공작부인 부부와 탄신연의 사절로 당도한 오리포네의 왕족들 정도가 전부였다.
몇 해 전 치러진 마레 공작의 50세연이 그 영지에서 사냥대회를 겸해 일주일간 열린 것을 생각하면 정말 기이하리만치 수수했다.
멀리서 온 손님들이 먼저 떠난 늦은 밤, 캄포 대공의 서재.
크레벨 공작이 캄포 대공의 빈 잔에 위스키를 따라 주었다.
“사춘기, 뭐 그런 건가.”
“하긴, 올리비에는 참 속 안 썩이고 잘 컸어, 그렇지?”
“뭐, 제국 아카데미 다닌다고 떨어져 지낼 때 난봉을 부렸을지 내가 어찌 아나.”
캄포 대공이 짧게 다듬은 제 턱수염을 문지르며 넉살스레 말했다.
말은 그리해도 캄포 대공을 빼닮아 소탈하고 단정한 그 청년이, 그 대단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기숙사에 기거하면서 신분 고하를 아울러 인망을 쌓은 걸 두 어른이 잘 알았다.
“딸이어서인지, 막내여서인지, 아직 어려서인지, 그냥 그 애가 그래서인지 참.”
제 잔에 채워진 위스키를 반쯤 들이킨 캄포 대공은, 팔짱을 끼고서 소파에 깊이 기대어 앉았다. 제 서재의 한구석에 붙박인 그의 시선에는 그 딸아이가 사랑스러운 마음과 그 깜찍한 아이가 선사하는 난처함이 섞여 있었다.
“아직도 계승권 타령이야?”
“말도 마. 상단 놀음 좀 하다 말겠지 했더니, 연 매출이 웬만한 영지 하나는 맞먹어.”
푸념인 듯 자랑인 듯 읊조리며 캄포 대공이 쓰게 웃었다.
그 한탄 너머에 루시엔의 욕망을 잘 숨겨 두었지만……. 그럼에도 크레벨 공작은 그가 감춰 둔 말을 잘 알았다. 자식들 참, 부모 마음도 몰라주고.
“그걸 정리하자면 아깝긴 하겠군.”
“……아무래도 그렇지? 자네에게 면목이 없구먼. 자네야말로 두 아들 다 단정히 자랐는데 말야.”
“두 아들 다……라.”
크레벨 공작도 제 잔에 든 것을 들이켰다.
“차라리 그 나이 때 사춘기 오는 게 나을 수도 있어. 나이 먹고서 오면 답도 없을 수 있단 말이지.”
“자네 얘길 하는 건가?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부인과 싸우기라도 한 게야? 내일 빤히 오실 분이 편찮으시단 핑계로 안 오시고. 섭섭해.”
“거, 사람 참.”
크레벨 공작이 피식 웃으며 캄포 대공이 제 잔을 채우는 것을 쳐다보았다. 싸움 비스름한 것을 한 건 맞지만…….
제 큰아들이 생애 최초의 반항을 한 것이 벌써 한 달이 넘어, 아내가 샐쭉대는 양에 손조차 못 잡은 지도 벌써 그만큼이었다.
캄포 대공과는 늘 부부 동반으로 만났으니 오늘도 여느 때처럼 함께했어야 했지만, 크레벨 공작부인은 아침나절에 불참을 선언했다. 아들에게 힘을 실어 주기로 한 바에야 노선 확실히 하겠다는 거겠지.
그게, 그리 쉬운 일도 아닌데…….
크레벨 공작은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는 것만 같아, 캄포 대공이 채워 준 잔만 연거푸 들이켰다.
“얼마 전에 말일세.”
한참을 고민하던 크레벨 공작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데메트리안 그 녀석이 좀 이상한 말을 하지 뭔가.”
“이상한 말?”
“……후계자 자리를 루이폴트에게 넘겨도 감내하겠다나.”
제 뱃속을 까 보이는 것 같은 심정으로 말을 마치니, 캄포 대공은 허허 웃을 뿐이었다. 그 에두른 말 너머의 사연을 분명 알아차린 기색이었다.
“뭐, 정혼이야 크레벨의 것이지 데메트리안의 것은 아니니까.”
“…….”
캄포 대공이 능청스레 하는 말에, 그의 속셈이 빤히 보이는 것 같아 크레벨 공작은 제 40년 지기 친우의 낯을 흘겼다.
루이폴트가 퍽이나 가주 자리를 원하겠으며……. 무엇보다, 데메트리안이 후계자 자리를 고사할 만한 사유가 무엇인지 그가 모를 리 없으리라.
제 속이 읽힌 것을 짐작한 캄포 대공이 빙글빙글 웃었다.
‘이제 나도 저와 같은 고민 한다고 신난 게지.’
크레벨 공작은 그의 얼굴을 노려보며 위스키 잔에 입을 묻었다.
수십 년째, 그의 저 사람 좋은 미소에 휘말리는 느낌이었다.
태어나지도 않은 제 딸이 에드워드의 욕심에 휘말려 다른 나라에 시집가면 이혼당하고 말 거라며, 차라리 네가 거둬 달라던 젊은 날의 캄포 대공의 절박한 낯이 스쳐 지나갔다.
얼결에 그걸 받아줘 버린 저에게 말로만 고마워한 것을 누가 모를 줄 알고.
‘저 녀석이 버틴 걸 생각하면, 같이 파기하자고 신전에 가 줄 순 없는 노릇인데.’
그란펠트의 장원은 아깝지 않았으나, 양쪽의 합의하에 파기할 경우 각자가 맹세에 건 두 가지 중 무엇을 거둬 가실지는 주신의 변덕에 달린 것이었으니까.
심기가 불편한 티를 팍팍 내는 크레벨 공작의 얼굴을 보며 캄포 대공은 조금 유쾌한 얼굴이 되었다.
같은 일로 골머리를 썩이게 된 두 아버지는 적당한 말로 저들의 고민을 눙쳐 두기로 했다.
“녀석들, 참.”
“맘대로들 안 되지.”
* * *
제국력 913년, 6월의 셋째 주 바람의 날. 아르투젠 제국의 47대 황제 에드워드 3세의 50세 탄신연이 황궁에서 성대히 열릴 예정이었다.
황제에게 충성의 상징이 될 공물을 갖고 먼 걸음을 한 각 지방의 대귀족들도, 사교계 시즌을 제도 고티유에서 보내고 있던 귀족들도 모두 저녁에 있을 탄신연에 참석하기 위해 꼭두새벽부터 분주했다.
아마 제후국과 다른 대륙에서 올라와 별궁에 머무르는 중인 사절단도 그러하리라.
고티유의 시내와 귀족들의 타운하우스 밀집 지역의 경계에 자리한 라크루아 궁정백저도 예외는 아니었다.
“맙소사, 이 드레스에 저 애가 의견을 보탰다고요? 이 드레스 정말…….”
“도대체 실크가 몇 가지가 쓰인 거람?”
“총 세 가지요. 도비 실크를 기본으로 해서 오간자 실크를 장식으로 덧대고, 여기 치맛단에 포인트를 준 건 태피터 실크요.”
폼폼이 드레스를 손질하는 양을 지켜보던 라이언이 냉큼 답했다. 그가 넉살 좋게 말을 붙여 오는 것에 폼폼과 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그를 쳐다보았다.
가끔 아가씨 따라오던 키만 크고 어딘가 허술해 보이는 애에게 이런 말재간이 있을 줄이야?
라이언은 오늘 기분이 굉장히 좋았다. 그 안드레아의 디자이너에게 감히 보탠 아이디어로 완성된 드레스라니!
며칠 전 최종 가봉을 하러 가실 때엔 부모님 가게 일이 바빠 따라가지 못해 아쉬웠는데, 오늘은 마침 바람의 날이어서 그 드레스를 확인하러 올 수 있었던 거였다.
게다가 오는 길에 들러서 받아 온,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수정한 앤지네의 헤드밴드까지.
황궁에 제 주인님께서 입고 가실 오늘의 착장에 제가 공헌을 했다는 것이 너무나도 뿌듯했다.
아무리 그가 평민들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가게를 물려받을 예정이라도, 그래서 평생 이런 고급 실크는 만져 볼 일이 없을 거여도, 이 경험이 값지지 않을 리 없었다.
‘테오 아저씨네서 주인님의 안드레아 드레스를 알아본 건 진정 뷜의 축복이야!’
주말이면 친구들과 노느라 바쁜 라이언은 전혀 신실하지 못한 축에 속했지만, 이런 때면 꼭 제 수호 사도인 행운의 뷜을 찾게 되는 것이었다.
‘아, 마네킹에 입혀 놔도 정말 환상적이네……. 주인님께서 입으시면 더 아름답겠지.’
거울에 비친 그의 들뜬 기색에 속으로 웃으며, 화장대 앞에 앉아 있던 클로에가 입을 열었다.
“물건은 잘 받아 왔고?”
“네, 네네.”
라이언은 소중히 품고 있던 나무 상자를 슬쩍 내밀어 보였다.
“쥘, 오늘 머리 장식은 저기 있는 걸로 할 거야.”
“네, 아가씨.”
라이언은 눈치 좋게 화장대의 빈 곳에 그 나무 상자를 올려놓고 뚜껑을 열어 보였다.
“어머, 이거 저번에 선물 받으신 그 케이프랑.”
“응, 빛깔이 특이한 게 비슷하지? 이건 담비야.”
“우와……. 여름인데 이 장식을 하시게요?”
“그래도 색이 은빛이니 더워 보이진 않잖아?”
상자에서 헤드밴드 완성본을 꺼낸 쥘이 램프 빛에 이리저리 비추고 클로에의 머리 위에 대어 보더니, 납득했다는 양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앤지네 금속 장식이 대단하네요. 얘가 부피가 크니까, 지지 않게 컬을 굵게 말아야겠어요.”
“그래, 부탁해.”
쥘은 재빠른 손놀림으로 클로에의 치장을 시작했다. 귀족 영애의 파우더룸을 호기심으로 구경하던 라이언은, 어느새 화장대 앞으로 다가와 쥘의 능숙한 손놀림에 넋을 놓았다.
“폼폼, 저번에 선물받은 그 케이프, 얘한테 한번 보여줘.”
“네!”
폼폼은 신나서 겨울 옷장을 열었다.
그녀로 말할 것 같으면, 사용인들끼리 크레벨 소공작파와 스칸다르 왕자파로 나뉘어 격론을 벌일 때 모피 케이프의 값 추정치를 근거로 강경하게 스칸다르의 왕자를 지지했던 것이었다. 그러니 그 선물을 자랑하는 일이 몇 번을 거듭해도 짜릿할 수밖에.
“짜잔, 바로 이거야!”
마치 네 집엔 이거 없지, 하는 듯한 말투로 폼폼은 옷걸이에 걸린 채로 케이프를 들어 보였다.
“우와아. 레몬빛이 예쁘네요.”
“응. 어때, 가을에 좀 쓸 만할까?”
“가을에는 늘 따뜻한 계열의 색이 유행해서 안 어울릴 것 같은데……. 노란색이어도 채도도 높고 흰빛이 감돌아서요. 빨리 작업해서 여름용으로 귀걸이 같은 장신구에 쓰거나…… 아니면 가방이나 참 장식으로 써도 괜찮겠어요.”
“아니면 겨울을 노릴까?”
“모직 장갑 같은 데 써도 예쁘긴 하겠네요.”
하지만 대화를 듣자니 돌아가는 모양새가 이상했다. 그걸 느낀 건 그녀뿐만이 아니었는지, 클로에의 머리를 다듬던 쥘도 잠시 손을 멈추고 거울 너머로 눈을 맞추려 하고 있었다.
거봐, 내가 뭐랬어. 아니랬지? 아가씨 머리 색이랑 케이프 색이 어울리기나 하냐?
아냐, 그럴 리가 없어. 좀 더 들어 봐 봐.
거울을 통해 서로를 마주 본 두 소녀는 눈빛과 눈썹 각도를 이래저래 바꿔 가며 말싸움을 시작했다.
“어쨌든 저 정도면 양이 많으니까, 다양하게 써 볼 수 있을 거야.”
“겨울 코트에 싸개 단추나 소맷단에 달아서 포인트를 줘도 이쁠 것 같고요.”
“그래. 그럼 안드레아 같은 데 납품하는 단추 공방을 알아봐야겠네.”
“맡겨 주세요! 저, 안드레아의 마르디 선생님께서 언제든 놀러 오라고 하기도 하셨고요.”
아무래도 이야기가 묘하게 돌아갔다. 쥘은 거보라는 듯 코웃음을 치며 클로에의 머리칼에 다시 집중하기 시작했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폼폼이 조심스레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