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그래서 내 마음이 어떤데? (13)
“누가 더 좋아? 데미 공자? 왕자님?”
“……라비!”
클로에의 얼굴이 급격하게 달아올랐다. 전에 없이 새빨개진 얼굴에 신이 난 미라벨은 더욱 은근한 말소리로 덧붙였다.
“첫사랑인가, 어쨌든 같은 침대를 썼던……”
“침실 따로 썼거든!”
“아, 아파, 아파!”
당황한 클로에는 아무 말이나 내뱉으며, 손에 잡히는 대로 제 발베개를 집어다가 미라벨에게 휘둘렀다.
애초에 맞아 줄 생각이었던 미라벨은 피하지도 않고 계속 낄낄댈 뿐이었다.
“그만, 그만. 탄신연 때 내가 봐 줄게.”
“뭐를!”
“그, 왕자님 반응 같은 거. 너 아직도 헷갈리는 거잖아.”
“…….”
클로에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그게 단순히, 그가 저를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고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았지만.
“왕자님도 탄신연에 오시는 거지?”
“으응, 달라진 게 없다면 말야.”
뷔욘은 성인이 되고부터 대부분의 황실 행사마저 불참하거나 얼굴만 비추고 말았지만, 모든 제후국에서 사절이 참석하는 탄신연만큼은 꼬박꼬박 참석하곤 했으니까.
그리고 그것이 뷔욘 스칸다르가 고티유를 떠나기 전 마지막 공식 행사가 될 것이었다.
‘그날 뵙고, 귀국하시기 전에 폐하 알현하러 황궁 가셨을 때 마주치면 끝이네.’
그러면 2년 뒤 독립 협약서에 조인하러 올 때까지, 더 이상 그를 볼 일이 없는 것이었다.
그와 마주치려 노력하고, 그의 호감을 사려 노력하는 그런 순간들이 이제는 더 이상…….
그 마음이 조금 후련하다는 것에 이르러, 클로에는 다시금 당황하고 말았다.
그러게. 나는 누구를 좋아하는 걸까.
* * *
“부탁하신 옷들은 마차에 바로 실어 놓으라고 할게요.”
“고마워요, 루비.”
“별말씀을요. 저랑 다니신 게 재밌다고 생각하신 것 같아서 기쁜걸요. 친구분께도 즐거운 추억이 되면 좋겠어요.”
루시엔이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생긋 웃었다.
클로에도 마주 미소 지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제가 옷을 빌리면서까지 함께 슈바츠 거리에서의 일탈을 즐기고픈 친구가 누구인지, 그녀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미아가 태양절 연휴 때마다 우리 집에서 지내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니까…….’
리도테 시절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물담배 바에 가 보고 싶다는 생각에 자연스레 따라붙은 것은 늘상 황궁을 답답해하는 메리엔이었다. 마침 그녀가 조만간 궁정백저로 피신 나오는 때이기까지 했다.
모르긴 몰라도 메리앤이라면 기꺼이 따라나서리란 생각이 들었는데, 문제는 그녀의 분홍색 머리칼이 정말 그녀의 이름표 수준인 것이었다.
‘좀 특이한 정도인 내 머리 색도 숨기자고 틀어넣고 다녔으니까…….’
그래서 클로에는 루시엔으로부터 스체르바뇰의 복식을 빌리기로 했다. 귤색 머리칼이야, 분홍색 머리칼에 비하면 퍽 흔한 편이니까 메리엔에게 양보하자고 생각하면서.
「이번 주말은 탄신연이고, 다음 주부터 또 태양절 연휴가 시작되니 당분간 뵙기가 어렵겠죠? 숲의 날에 한번 저희집으로 찾아 주시겠어요?」
루시엔의 짤막한 초대에, 그녀와의 만남에서 이제는 나름의 재미를 찾게 된 클로에는 기꺼이 호이제르 거리의 저택을 찾은 것이었다.
‘그나저나 탄신연이 이틀 뒨데, 아직도 고티유에 있나?’
제국의 온 귀족들과 각 제후국의 사절들이 온갖 진상품을 갖고 몰려드는 탄신연. 하지만 올해의 탄신연에도 루시엔은 저 혼자 불참일 예정이었다. 황제의 유일한 여조카고, 황제의 쌍둥이 형의 여식임에도 그랬다.
그래서 클로에는 제가 메리앤이 놀러오기 전에 그녀와 만날 수 있음에 안도하면서도, 그녀가 왜 굳이 탄신연에 참석하지 않는지 궁금해지는 것이었다.
“루비 대공녀님은 탄신연 안 오세요? 폐하 탄신연이면 대공 전하 탄신연이기도 한데.”
그런 클로에의 궁금증은, 오늘도 미라벨이 대신 뱉어 주었다.
둘이 생일이 같기야 했으나, 황제의 탄신연에서 그 형의 생일을 기리는 건 아니었지만…….
“탄신연만 바람의 날에 치르는 거지, 진짜 생신은 내일이니까요. 마침 그래서 내일 아버지 계신 타운하우스에 가 봐야 해요.”
“그래도 대공녀가 참석하시면 대공께서도 기뻐하시지 않으시겠어요?”
그건 정말로 캄포 대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황실 행사를 지루해하는 미라벨이 동료를 하나라도 더 얻고자 하는 영업용 발언에 가까웠지만.
그만큼 그 말이 장난스러웠음에도, 루시엔은 선뜻 대꾸하지 않고 입술을 조금 샐쭉거렸다.
“……아버지께서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거랑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좀 다르더라고요.”
그 오밀조밀한 입술을 빼죽대는 것이 조금 소녀다운 구석이 있었으나, 또 한편으로 그 말소리는 심상찮게 울렸다. 그녀가 어떤 한마디도 허투루 내뱉는 법이 없음을, 짧으나마 그녀와 여러 번 교류하면서 알게 되었으니까.
클로에는 왠지 모르게 진지한 마음이 되어 손에 쥐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오리포네 출신의 하녀들이 꾸리는 티타임에는 오리포네산의 특상품 차가 손님들에게 대접되었다.
“루비는 그런 데 가서 아버지 면 세워 드리는 건 별로 중요하게 생각지 않나 봐요.”
“아버지 면은 아버지가 알아서 세우셔야죠.”
루시엔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 말이 논리적으로 틀린 점이 없어, 미라벨은 크흡, 입안으로 웃었다.
“대공님과 엄청 살뜰한 사이신 줄 알았어요. 상단도 차려 주시고…….”
“아버지께서 절 예뻐하시긴 하시죠. 아버지 나름의 방식으로요. 그렇다고 해서 내키지 않는 걸음을 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상단을 차려 주신 것은 아버지의 방식과 제 요구가 어쩌다 맞은 것뿐이고…….”
“그럼 루비는 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클로에는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물었다. 정말 궁금해서 물었다기보다, 그냥 그녀의 사고가 어찌 흘러가는지 궁금했을 뿐이었다.
루시엔은 애초부터 그 말을 꺼내고 싶었던 것처럼, 클로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일말의 긴장마저 서려 있었다. 클로에가 그간 판단한 그녀의 성정과는 퍽 어울리지 않게도.
“황위 계승권…… 같은 거요.”
“네에?”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클로에도 미라벨도 놀라고 말았다.
“황위 계승 서열 5위,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꼬리표잖아요.”
그거야…… 그랬다. 하지만 그녀는 황태자의 자리를 제 동생에게 양위하고 황위 계승권을 포기한 캄포 대공의 딸이었고, 황제 밑으로 적자가 셋이나 있는 상황에서 그건 정말 유명무실한 거였다.
“제 아버지는 그걸 별 쓸모 없다고 생각해 간단히 포기하셨고, 만나 보지조차 못한 자식들의 황위 계승권도 친우와의 소꿉장난 같은 맹세에 대가로 걸어 버리셨지만…… 저는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남겨 두는 이 황위 계승권이 너무 마음에 들거든요. 이것만 있으면 어딜 가서든 원하는 삶을 얻을 확률이 올라가니까요.”
그녀가 허황스런 것을 주워섬기듯 말했던 전 대륙의 유통망을 꽉 쥐는 상단을 만드는 데에도, 황위 계승권자라면 분명 조금이라도 더 수월한 구석이 있을 거였다.
그런 무거운 이야기를, 루시엔은 정말 제 아버지에 대해 투덜대듯 가벼운 말투로 쏟아내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클로에가 오래간 궁금해해 온 것에 대한 실마리까지 숨어 있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그녀의 얼굴을 살피니, 루시엔은 쐐기라도 박듯 단호하게 덧붙였다.
“그걸 잃기 싫어서…… 아버지의 맹세를 못 깰 정도로요.”
그녀가 언급하는 ‘아버지의 맹세’에서 떠올릴 수 있는 건 기실 한 가지밖에 없었다.
‘왜 나한테 이런 걸……?’
신전에서의 맹세는 주신 에르드와 당사자 간의 약속이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을 굳이 남들에게 알리지 않아도, 주신께서 대가를 받아들이셨다는 점에서 모두가 그 무거움을 알았다.
그리고 그 맹세에서 크레벨이 무엇을 걸었는지도…… 클로에는 알지 못했다.
그게 무엇이건 황위 계승권에 준하는 거라면, 그것은 분명 크레벨의 후계자로서 반드시 고수해야 할 가치일 거라 짐작될 뿐이었다. 그렇기에 그가 그간 정혼을 마치 성상처럼 모셔 왔을 거였고…….
‘그러고 보니 데미는…… 정혼을 깰 생각인가?’
그러면 그는 크레벨의 어떤 특권을 잃을 각오를 하면서까지 미래를 바꾸려 하는 것일까…….
클로에의 얼굴에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번졌다. 늘 예법을 따르며 표정을 잘 감추던 그녀치고는 드문 일이어서, 루시엔은 작은 만족감을 느꼈다.
‘역시, 말하길 잘했어.’
토템과 우주신에게 비는 것은 정말 만에 하나를 위한 일이었던 것이다.
‘떠본 것 같아 미안하지만……. 역시, 그분과 생각보다 깊은 관계인 건 맞는 모양이지.’
루시엔은 찻잔에 입을 묻어 제 미소를 숨겼다. 다 같이 해피 엔딩을 맞는 길이 있다면, 기왕이면 그편이 좋으니까.
“참, 일전에 중고 모피를 구하던 일은 잘되셨나요?”
그러고서, 루시엔은 태연하게 화제를 돌렸다.
애초에 제가 열변을 토한 것은 정말로 제 마음을 몰라주는 아버지에 대한 한탄 정도였다는 듯한 뉘앙스였다.
그녀에게 묻고 싶은, 그러나 물을 수 없는 것이 많았던 클로에는 그 갑작스런 전환이 달갑잖았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 전환된 주제가 안 그래도 제가 꺼내려던 것이었기에 마지못해 말을 받았다.
“그때 중고품 시장에서 루비가 알려준 곳들에서 잘 구했어요.”
“잘됐어요. 그건 재유통하기 힘드실 테고…….”
그리 말하는 루시엔의 눈이 가늘어졌다. 정말 못 속여, 그리 생각하며 클로에는 미라벨에게 눈짓했다.
미라벨은 제가 따로 들고 있던 작은 나무 상자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이게 뭐예요?”
“중고 모피를 갖고 만들어 본 견본품이에요.”
잠금쇠가 제 쪽으로 된 것을 본 루시엔이 손을 뻗어 상자를 열어 보았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성인의 검지 한 개 크기의 머리핀이었다. 핀대에 길게 은회색의 스칸다르산 모피가 붙고 옆에 한 줄로 새끼손톱만 한 루비가 여러 개 달려, 그 주변으로 앤지네의 정교한 금속 장식이 겹겹이 장식돼 있었다.
“이런 모피를 구하셨던 거군요?”
은회색이라니. 루시엔이 짐짓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 반응이 지금껏 제 동료들이나 앤지 부부가 보인 것과는 상당히 달랐다. 이런 종류의 모피에 대해 그녀가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으리라.
‘캄포랑 스칸다르가 가깝기도 하니까. 내가 이걸 구하고 다닌 걸 알아봤을 수도 있고.’
한들룽 지구에서 클로에가 몇 번 중고 의류점에 드나든 것만으로 그녀가 중고 모피를 찾는 걸 알아차린 루시엔이었으니까.
루시엔은 책갈피를 선물 받았을 때처럼 해사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 머리핀을 살펴보았다. 선물이란 말은 없었지만, 루비가 박혀 있다는 점에서 제게 선물하는 것임을 대번에 알아차린 것이었다.
“네. 우선 헤드밴드를 만들었어요. 유행이 될진 모르겠지만……. 이건 보답할 겸 견본품으로도 쓸 겸 만들어 본 거고요. 루비가 아이디어를 주지 않았으면, 이런 걸 만들 생각도 못했을 거여서요.”
앤지네에서 이 머리핀을 발주할 때만 해도, 클로에는 루시엔과 선뜻 친해질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로부터 슈바츠 거리의 경매장에 가자는 호의 넘치는 제안은 받았지만, 쉽사리 마음을 못 정하고 있었으니까.
물론 지금도…… 어디까지 친한지도 모르고, 그녀에게 무슨 의도가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지만.
하지만 적어도, 처음 선물을 줬을 때처럼 이걸 주고 털어 버리자는 마음은 아니었다.
그녀가 정말로 캄포의 맹세에 대해 어떤 의도를 갖고 노출했더래도, 그것이 그간의 호의를 무색케 할 일은 아님을 클로에도 잘 알았다.
오랜 기간은 아니었지만, 그동안 루시엔과 인간적으로 교류한 것은 분명 클로에의 어떤 부분에 큰 자극이 되었으니까.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관계에서 데메트리안을 지우자, 너무도 명확히 드러났다.
루시엔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머리핀에 달린 담비 털과 조잘조잘한 금속 장식을 손가락 끝으로 쓸더니, 이내 씨익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가 앰버…… 아니, 영애께 선물을 드릴게요.”
한쪽으로 삐뚜름히 올라간 그 입매는, 그녀에게 나름의 즐거운 속셈이 있음을 알려주었다.
“기대하셔도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