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그래서 내 마음이 어떤데? (12)
“원한다면…… 넌 떠나지 않을 수 있어.”
그리고 기왕이면 내 곁에 남아주면 좋겠지만.
데메트리안은 그 말을 꿈에라도 내뱉을 수 없었다. 아직 아버지로부터 무엇도 확답받지 못했고, 무엇보다…… 그건 그녀의 마음에 달린 문제였으니까.
그의 말을 들은 클로에는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그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뭐라고?”
흠칫, 그녀가 제게로 다가섰다는 그 문자 그대로의 사실에 조금 가슴이 떨려오는 그 순간.
“정말, 색부터가 너무 아름답네요! 소공작님, 추천 감사드려요.”
어느새 지척에 다가온 멜라니가 와인 잔을 흔들며 걸어왔다. 아까 반쯤 남은 와인을 단숨에 들이킨 덕분인지, 조금 긴장을 덜어낸 듯 발랄한 목소리를 울리면서였다.
클로에에게 보였던 그 진지한 낯이 언제였냐는 양, 데메트리안은 형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멜라니에게 고개를 까닥여 보였다.
그의 얼굴에 썰물처럼 밀려왔다가 다시금 흘러나가는 그 잔잔한 감정의 변화를 눈에 담으며 클로에는 도로 한걸음 물러섰다.
‘혹시나 했는데…… 정말, 무슨 실마리를 찾은 거야……?’
* * *
“아니, 소문이 그렇게 났다고?”
“말도 마. 마차에서 내릴 때부터 거기 모든 눈동자가 여기 꽂혀서 쑥덕쑥덕……. 내가 멜라니랑 있는데도 한 열 명은 와서 왕자님을 눈짓하는 거야. 그런데 내가 어떻게 왕자님 마차를 타고 돌아오겠어?”
밤이 깊은 라크루아 궁정백저의 클로에의 방 안.
미라벨은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왜 알로제의 마차를 타고 돌아왔느냐 물었을 뿐인데, 상상도 못한 대답이 돌아오자 입을 떡 벌렸다.
“잘했네. 어이구, 그것들 그리 입 놀릴 때부터…….”
미라벨은 사용인들끼리 크레벨 소공작파와 스칸다르 왕자파로 나뉘어 갑론을박하던 것을 떠올리며 도리질 쳤다. 클로에의 시녀이자 호위 기사로서, 또 그 가신인 누아제트 남작의 딸로서, 고용주와 피고용인 그 중간 어드메 즈음인 그녀의 귀에는 사용인들의 잡담이 걸러지지 않고 들어왔으니까.
고용주의 연애사야 그네들의 즐거운 이야깃거리가 된다는 점에서 일종의 보너스와도 같으니 이해한다지만, 어느 정도라야지. 소문이 이렇게까지 날 정도면…….
“그것들?”
“아, 아냐.”
미라벨은 일단 또래 사용인 애들에게 한마디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그래서 결국, 그 신관님에 대해서는 알아낸 게 없는 거야?”
“응. 모르시는 낌새 같긴 했는데…….”
클로에가 말꼬리를 흐리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미라벨은 단박에 상황을 알아차렸다.
“그러니까, 디 경 말고 나를 데려갔어야지!”
“그러니까, 나도 후회했다고!”
까르륵, 미라벨이 웃었다. 그 소리를 들으며 뽀송뽀송한 실내용 원피스 차림의 클로에는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그 시야에 오늘도 어김없이 들어오는 천장화…….
거기에 유아의 모습으로 표현된 에르드의 여덟 사도들은 서로를 잡아당기거나, 제 이능을 작게 일으켜서 서로 괴롭히며 장난을 치고 있는 모습이었다.
클로에는 그간 제가 찾아봤던 여러 책에서 그들의 힘이 맞부딪히거나 뒤섞일 때 무언가가 되돌려진다고 묘사된 것을 떠올리며…… 뭔가, 그들의 농간에 휘둘리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클로에는 몸을 다시 일으켜 앉았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또 아닌 것 같아서 말야.”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면?”
미라벨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궁정백의 술장에서 몰래 가져온 아이스와인을 한 잔 따라 클로에에게 건네주었다.
몇 가지, 짐작이 가는 게 없지는 않았다. 미라벨이 생각하기에 그 왕자는 좀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고…….
“오늘 데미가 왔는데.”
아, 틀렸네.
지난번 마주쳤을 때 왕자님이 마중 나온다는 것을 면전에서 들었으니 조금 열이 올랐던 모양이구먼. 미라벨은 속으로 후후 웃으며 안주 삼아 가져온 체리를 입에 넣었다.
“지난번 아이펠의 장원에 갔을 때 말야. 사실…… 혹시 데미도 나 같은 경험을 한 건 아닌지 물어봤었어.”
그간 궁금했던 이야기를 드디어 들을 수 있는 건가. 미라벨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정말로?”
“네가 생각해도 걔가 이상하게 굴긴 했잖아. 내가 좀 달라진…… 때부터.”
“……맞네. 마침 딱 그렇네.”
미라벨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그 새벽같이 달려왔던 그날부터……. 그날 클로에가 시녀 어쩌고 하는 걸 듣고 잠꼬대인 줄 알았으니까.
그때부터 데미 공자는 착실히 달라졌고, 종내엔 제가 일종의 경고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러네. 듣고 보니 때가 딱 맞아떨어지네.”
미라벨은 오물오물, 체리의 씨를 입안에서 발라내며 그간의 일들을 돌이켰다.
분리 독립파의 아지트에서 클로에가 위험에 처했을 때, 황궁에서 클로에가 뷔욘과 함께 있는 것을 목격했을 때, 갑작스레 꽃을 한 무더기 안고서는 궁정백저로 찾아와 저녁 외출을 하자며 데리고 나갔을 때, 제가 클로에 대신 키슬라바산 에메랄드를 갖다주러 갔을 때 등등…….
다른 이들을 대하는 것에 비하면 클로에를 특별히 여기는 것이 빤히 보이는데 저 혼자 담백한 척하던 그 애송이가, 어느 순간부턴가 그 어떤 가장이란 않으려는 듯 굴기 시작했으니까.
‘나한테 보일 정도면, 직접 겪는 로이는 더 확실히 느꼈겠지.’
그렇다면……. 그에게는 그 미래가 불행해서 마음을 바꿔먹은 걸까? 같은 경험을 했다는 두 사람을 놓고 보자면, 그 태도가 서로 너무나도 달랐다.
클로에는 변함없는 미래를 더 잘 살기 위해 왕자와 친분을 쌓았지만, 데메트리안은 그런 건 별 신경도 안 쓰는 양 굴었으니까. 마치 내후년에도, 몇 년 뒤에도 클로에의 옆에 있고픈 사람처럼.
‘데미 공자가…… 저 하나 좋자고 그럴 리는 없는데.’
뭔가 실마리가 보일락 말락 하는 느낌에, 미라벨은 보채는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덧붙였다.
“그래서? 물어봤더니 뭐래?”
“자기는 말할 수 없다는 거야.”
“맞는지 틀린지?”
“아니, 그건 맞는데, 더 자세히는 말할 수 없대.”
“……허. 뭐야, 그럼? 지금까지 태도를 왜 바꿔먹었는지도?”
“그러게.”
클로에가 쓰게 웃었다. 아버지의 컬렉션에서 가져온 북부 지방의 아이스 와인은 꽤나 달았지만, 그게 너무 달아서일까, 혹은 제 입이 써서일까. 원했던 달콤함은 느낄 수 없었다.
“그런데, 너는 데미 공자에게 그걸 왜 물어봤어?”
“…….”
클로에는 바로 답하지 못했다. 그 단지 쓴지 알 수 없는 것을 한 모금 더 입에 머금을 뿐.
그런 그녀를 쳐다보던 미라벨은 눈동자를 슬쩍 굴리고는, 넌지시 덧붙였다.
“아무래도 데미 공자가…… 너를 더 잘 알지?”
대답 대신, 클로에의 시선이 미라벨에게로 따라붙었다. 미라벨은 부러 발랄한 목소리를 내며 어깨를 으쓱였다.
“뭐, 내가 보기엔 그래 보였다는 거야. 난 정말 그 레몬색 케이프 보고 기절하는 줄 알았다니까? 널 아는 사람이면 선택할 수 없는 디자인이었어.”
“아, 하하.”
그 능청이 진심일지, 클로에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떨어져 본 적 없는 미라벨의 진의를 파악하려는 양 그녀의 낯을 살피며, 어색한 웃음소리를 냈다.
맞아, 그랬어. 어렴풋이 중얼거리면서도…….
‘라비가 봐도 어색했구나, 그게.’
하하……. 한숨처럼 웃음소리를 덧붙이며, 클로에는 제 손에 든 와인 잔을 슬며시 만지작거렸다.
“그간 데미가 말하는 게 계속 이상했어. 뭔가……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사람처럼 굴었거든.”
미라벨은 말을 보태지 않고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그편으로 시선을 보내지 않아도 느껴지는 그 낌새에 클로에는 말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오늘 데미가 그러더라고. 원한다면 여기 남을 수 있다고.”
“어떻게?”
“거기까진 못 들었어.”
아이, 뭐야……. 미라벨은 클로에의 옆에 앉는가 싶더니, 그 옆으로 벌러덩 누웠다.
“그런데 네가 생각하기에, 너는 반드시 스칸다르에 갈 것 같다며.”
“응. 스칸다르랑 협상을 하게 되면……. 제국 연방에서 탈퇴할 나라에 미아를 내줄 리가 없잖아?”
그러니까 나밖에 없지. 클로에가 쓰게 웃었다.
“그러면, 그 협상을 안 하게 된다면…….”
“…….”
제 중얼거림에 대답이 없어, 미라벨은 고개를 돌려 클로에를 바라보았다. 제가 누워 있어서 앉아 있는 그녀의 어스름한 옆모습만 보였지만, 그 얼굴에 담긴 것은 분명 일종의 심란함이었다.
“그러니까, 데미 공자는…… 성배가 도난되는 걸 막으려는 거 아닐까?”
“……아르투젠에서는 범인을 찾았던 걸까?”
성배는 정말 감쪽같이 사라진 탓에, 내년의 대축일이 올 때까지 그게 없어졌으리라곤 그 누구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스칸다르에 굴러들어온 내역을 되짚어 보았지만, 그것은 결국 북부의 아무개 영주에게 토벌당해 멸망하고 만 화적떼에서 그치고 말았다.
“데미 공자는 범인이 누구인지 짐작하고 있는 것 아닐까?”
“어떻게?”
“그건 모르지만. 혹시 짐작 가는 바는 없는데 단순히 그 일만 막고 싶다면, 뭐, 상소를 올리든 대신전하고 거래를 해서든 경비를 강화하겠지. 요즘 데미 공자 하는 거 보면 그 정도는 하고도 남겠던데?”
미라벨이 너스레 떨듯 말하며 몸을 돌려, 클로에 쪽으로 엎드리며 양손으로 턱을 괴었다.
제가 기억하는 몇 달 전까지의 데미 공자라면 그런 과감한 짓은 안 할 거였으나, 뭐 그도 나름대로 달라진 것 아니겠는가. 그 조신한 클로에 라크루아가 슈바츠 거리를 야밤에 활보하는데, 데메트리안 크레벨이라고 해서 무슨 억지 권력 남용을 못할 것도 없지.
“그러지 않는 걸 보면…… 분명 짐작 가는 게 있을 거야. 사실 이상하잖아. 그 보물고 담당 신관님을 네가 스칸다르에서 봤다는 거.”
“……그게 사실 가장 찝찝하긴 했지.”
그렇기에, 제가 자꾸만 안톤미오노에 관해 뷔욘에게 묻고 싶어지는 것 아니었을까.
“사실 그간 데미에게서 계속 연락이 와서는, 말할 게 있다고도 했으니까 그 얘기려나.”
“그래서 네 마음은 어떤데?”
“나?”
“가고 싶어, 아니면 남고 싶어?”
“그거야……”
클로에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당연히 그때엔 가고 싶지 않았고, 지금도, 스칸다르에 가서 잘 지내기 위해 이런저런 일을 했지만…… 결국에는, 기왕이면…….
하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클로에는 저도 모르게, 제 입술만 지그시 깨물었다.
그런 클로에의 안색을 살피던 미라벨이 슬며시 덧붙였다.
“아니면…… 누가 더 좋아? 데미 공자? 왕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