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그래서 내 마음은 어떤데? (11)
‘잘 좀 하지, 녀석도 참.’
크레벨 공작부인은 청명한 가을 하늘 같은 눈빛으로 따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거기에는 이 어미만 믿으라는 장난기 어린 포부가 배어 있었다.
그리고 멜라니가 입찰한 것에 100골드를 붙여 평상시의 낙찰가를 웃도는 금액을 쾌척함으로써, 그녀는 제 큰아들의 난생처음 보는 표정을 볼 수 있었다.
‘이런 게 아들 키우는 재미일까.’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태양절이 다가오는 참이라, 살롱은 조금 더 오래 이어졌다. 평소 살롱이 마치는 17시가 다 되어도 해가 기울 기미를 보이지 않는 덕분이었다.
콜드디시로 채워졌던 부페 요리들은 어느새 핑거푸드나마 잘 익힌 요리들로 갈음되었다. 손님들이 여기서 간단히 허기를 달래고, 귀택하여 늦은 만찬을 즐길 수 있도록.
언젠가 이 살롱에서 소개됐던 예술학교 출신 콰르텟의 연주가 흐르는 정원에서, 살롱의 참석자들은 삼삼오오 무리 지어 담소를 나누었다.
클로에는 멜라니와 함께 그들이 이 정원에 올 때면 늘 찾는 나무 아래 자리를 잡았다. 아무래도 화제는 최근 만나지 못했던 동안의 이야기였다. 그간의 근황 중 후작가 영애인 멜라니에게 내어놓고 말할 만한 것이 별로 없긴 했지만…….
“라크루아 영애, 오랜만에 만나요.”
“네, 샹트레 영애. 잘 지내셨죠?”
“그럼요. 그간 모임들에 격조하시길래…… 혹시나 했는데.”
그러다 보면 꼭 사람들이 이렇게 안부를 묻는 척하며 무언가를 떠보러 오는 것이었다. 클로에보다 리도테를 한 해 먼저 졸업한, 그러니까 적당히 데면데면한 사이의 샹트레 백작 영애는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뷔욘이 있는 쪽을 눈짓했다.
아, 이번에도 또.
“지난번 마담 에투알의 살롱에 초대해 주신 데 대한 보답을 받은 것뿐, 생각하시는 그런 사이 아니에요.”
“어머, 그걸 여쭈려던 게 아니라.”
몇 번째 읊는지 모를 똑같은 답을 내뱉으면, 다들 그런 의미는 아니었지만 알려줘서 고맙다는 뉘앙스의 인사말로 자리를 떠나는 것이었다.
클로에는 한숨을 쉬며 뷔욘이 있는 쪽을 흘겼다.
‘왕자님은 태연하신데 왜 나한테만 이 난리람.’
뷔욘은 이따금 오며 가며 인사해 오는 신사들과 담소를 나누기는 했지만, 대체로 저를 추종하는 영애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 신사들의 경우에도 그와 친교를 맺는 것이 목적이라기보다 그 영애들 중 누군가에게 관심이 있어서인 듯했다.
‘그러고 보면 사교계에서 가까운 이가 없긴 없으시구나. 아무리 사교계 활동을 안 하신대도 고티유서 지내신 게 몇 년인데.’
그 딸과도 알고 지내는 알레지오 후작과 차라리 친근하신 듯도 하고.
그에게 특별한 관계를 바라듯 흠뻑 빠진 눈빛을 보내고 있는 영애들이 듣자면 자존심 상할 평가였지만.
‘안톤미오노 신관과도…… 모르는 사이이신 것 같았는데.’
제가 안톤미오노의 이름을 입에 올렸을 때 그가 지은 미소는, 그가 대답을 회피할 때 짓던 표정이기는 했다. 하나 그것은 그가 그전부터 그려 넣고 있던 것일 뿐, 그 낯에 딱히 이렇다 할 변화가 떠오른 것은 아니었다,
모르는 사이여서나, 아니면 아시더라도…… 떳떳해서겠지. 아니, 아셨다면 아신다고 말씀하셨으려나.
‘가만. 떳떳지 않으실 건 또 뭐야.’
저도 모르게 든 생각에 클로에는 깜짝 놀랐다. 제후국의 왕자가 제국 연방에서 믿는 유일신의 신관과 안면이 있는 게 별일이라고.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그래. 제가 스무 살로 돌아와 새로이 알게 되는 모든 것들이 너무 혼란스러워서일 거였다.
‘우선 그 신관이 손님인 게 너무 충격이었으니까. 알레지오 후작가와 그리 연이 깊으신데 내가 몰랐던 것도 그렇고…….’
그렇다면 그 신관은 뷔욘과 친분도 없으면서, 두어 해 뒤에 갑작스레 파계한 뒤 스칸다르로 넘어와 몸을 의탁하게 되는 것일까?
‘오늘 라비랑 왔으면 같이 고민할 수 있었을 텐데.’
그 애는 이따금 다른 사람들의 표정을 기가 막히게 알아채는 재주가 있었으니까.
괜히 원래와 똑같이 굴겠다고 우겼나. 이미 많은 게 달라졌는데…….
착잡한 마음에 손에 쥐고 있던 와인 잔을 톡톡 치며 멜라니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어머, 소, 소공작님.”
“안녕하세요, 알로제 영애.”
“안녕하세요…….”
단둘이 있을 땐 한껏 말괄량이처럼 굴다가도, 이상하게 데메트리안만 보면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수줍어하는 멜라니였다. 그가 황실 소년 병사단 시절에 팬이었다나, 뭐라나.
그때마다 클로에는 그녀의 연인인 막시무스를 거론하며 놀리곤 했더랬다.
‘약았네, 데메트리안 크레벨.’
여태껏 제 신경을 건드리지 않아 내심 고맙기까지 할 지경이었는데.
다른 사람 앞에서 제가 야멸차게 굴지 못할 것도 계산하고, 특히 멜라니가 저에게 약한 것까지 계산한 것이었다.
클로에는 절로 뾰족해지는 마음을 애써 감추지 않았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다른 쪽을 두리번대는 것을 못 본 체하며, 데메트리안은 멜라니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아까 로이의 그림에 입찰하시는 걸 보니, 역시 영애께서 로이의 가장 가까운 지인이시다 싶더군요.”
“그, 그래 봐야 누아제트 영애에 비할 반가요…….”
칭찬이 아닌 말을 데메트리안은 칭찬처럼 했고, 칭찬이 아닌데도 멜라니는 겸손하게 굴며 목을 움츠렸다.
데메트리안이 이처럼 멜라니에게 친절하게 말 걸어 준 적이 있던가. 과거에도, 사라진 미래에도 없는 일이었다.
“누아제트 영애야 로이의 자매나 마찬가지니까요.”
거기에 덧붙는 부드러운 미소……. 슬쩍 쳐다본 멜라니의 얼굴이 자못 발그레해지는 것에, 클로에는 배신감마저 느꼈다. 멜라니가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에도.
그나저나 아까부터 로이, 로이, 로이. 지금껏 수백, 수천 번을 그의 입에서 울린 그 말이 오늘따라 거슬렸다. 제가 뭐라고 자꾸만, 우리 엄마가 부르는 애칭을 왜?
“저녁이 돼서인지 로제 스파클링 와인이 새로 나왔던데, 아직들이신가 보죠?”
데메트리안은 꾸준하게도 멜라니에게만 말을 걸었다. 제게 말을 건다면 마음껏 어색하게 굴어 줄 셈이었는데. 클로에는 삐딱한 마음이 더 커졌다.
“어머, 버, 벌써 다음 와인이 나왔군요?”
“두 분이 괜찮으시면 제가 다음 잔을 가져와도.”
“아, 아뇨! 제가!”
얼굴이 빨개진 멜라니가 제 잔에 남았던 것을 단숨에 들이키고는 다급히 외쳤다. 황송하지만, 너무 황송해!
“제가 다녀올게요. 저, 클로에랑 말씀 나누시고 계세요. 소공작님은 필요 없으시죠?”
데메트리안이 가득 찬 제 잔을 슬쩍 들어 보이며, 고개를 까닥여 자리를 떠나는 멜라니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결국 이렇게 되는가…….
클로에는 반쯤 빈 제 와인 잔에 입을 묻으며, 부러 몸을 그의 반대쪽으로 틀었다.
제게 무슨 짧은 말이라도 걸면 야멸차게 굴 결심을 한 채로.
“…….”
“…….”
그런데, 도대체 무슨 심산인지 데메트리안은 제가 들고 온 와인 잔을 흔들다가, 한 모금 맛보기도 하다가…… 그저 혼자 있는 사람처럼 굴 뿐, 클로에에게 뭔가 말을 걸려는 낌새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무슨 심산이지?’
말을 걸지 않으니 편하기야…… 할 리가 없었다. 클로에는 부러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눈인사를 하며 어색하지 않은 척해 보였지만, 마음은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데메트리안으로 말할 것 같으면, 나름대로 그 순간을 알차게 보내고 있었다. 그가 이 자리에 도착하고서 클로에의 머리통 너머로 그 왕자와 세 번은 눈이 마주쳤으니까.
‘……도대체 무슨 심산일까.’
기실 그것이 그의 목표 중 하나였던 것이다.
클로에에게만 어색한 시간이 흐르고 저 멀리, 멜라니가 하인들로부터 새로운 와인 잔을 받는 것이 보일 때쯤.
백기를 든 클로에는 그의 얼굴 근처도 보지 않고서 퉁명스레 말을 뱉었다.
“왜 말이 없어?”
“나랑 아무 얘기도 하고 싶지 않다길래.”
“장난해?”
놀리는 것도 아니고. 그가 짓고 있을 비아냥과 장난기 섞인 미소가 눈에 선연해, 클로에는 울컥하는 마음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런데 줄곧 등지고 있던 그의 얼굴에는…… 미소 그 비슷한 무엇도 걸려 있지 않았다.
그는 그저 고요히, 또 진중한 눈길로 저를 쏘아보는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장난할 리가 없잖아.”
“그렇다고…….”
정말 말도 걸지 말란 건 아닌 거 알잖아, 그런 말이 튀어나올 뻔한 것을 누르며 클로에는 스스로에게 당황했다.
그리 실망해 놓고도, 상처받아 놓고도 그에게 여전히 마음 약하게 굴고 있다는 게.
……그래, 생각해 보면 애초부터 제가 데메트리안에게 뭔가 단호하게 군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클로에는 그에게 오랜 시간 동안 번번이 실망해 왔다.
리도테의 졸업 연회에 파트너가 되어 달라는 식의 요청들을 어떻게든 거절할 때부터, 제 처음이자 마지막의 어떠한 갈구를 그가 외면한 때, 그리고 스칸다르로 가고도 3년 동안 아무런 연락이 없었던 그 모든 순간에.
그리고 제게 끝내 솔직하지 못했던 아이펠 정원에서까지…….
클로에는 그에게 실망하고, 실망하고, 상처받고, 또 상처받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완전히 외면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그러려는 마음이 없는 건지도…….
[나는 뭔가를 꼭 바꾸고 싶어.]
[네 결정이 무엇이든 조금만 기다려 줄 수 있을까……?]
그가 그런 절박한 목소리를 내는 건 반칙이었다. 매일같이 통신구를 울려대던 그 말소리들을 돌이키면, 그에게 끝내 매정하게 굴 수 없게 되는 것이었으니까.
마지막 기회는 줘야 하지 않을까. 그 마지막 기회를 배신하더라도, 마지막의 마지막 기회를 또 한 번…… 다시 한번, 마지막으로 또 한 번 주게 되겠지만.
‘저런 인간이 도대체 뭐가 좋다고.’
그에 대한 원망에 자신에 대한 일종의 자기연민까지 더해, 데메트리안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처연하게 빛났다.
데메트리안은 그 눈빛을 놓치지 않았다. 제가 제대로 해석한 것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저 멀리서 멜라니가 걸어오는 것이 눈에 들어오자, 데메트리안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혹시, 선물을 받았지.”
그건 질문이 아니었다.
그가 그리도 단호히 말하는 것에 클로에는 작은 호기심이 동했다.
‘어떻게 알았지?’
그가 제게 멋대로 말을 걸었다는 불쾌감은 그에 이길 수 없었다.
데메트리안은 어떤 확답을 바라는 갈급한 심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제가 내뱉은 말을 확신하고 있었음에도.
분리 독립파의 수장으로부터 화려하게 포장된 모피에 대해 들을 때까지만 해도 어디로 연결될지 알 수 없었던 것이, 클로에가 스칸다르 왕실저에 다녀갔다는 말을 들은 순간 접점이 생겼으니까.
클로에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음으로써 데메트리안의 확신에 근거를 더해주었다.
그는 멜라니가 도착하기 전에 말을 마치기 위해, 재빠르게 속삭였다.
“로이. 행복했다면 어쩔 수 없어. 하지만 원한다면…… 넌 떠나지 않을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