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그래서 내 마음은 어떤데? (10)
클로에의 팔짱을 끼고 있던 멜라니가 손을 들어 그리 말하고는, 클로에를 향해 혀를 낼름 내밀어 보였다.
그녀는 여전히 제이크 콜린스의 그림이 클로에를 못나 보이게 그렸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을 클로에가 스스로 사느니 제가 선물하는 편이 훨씬 나을 거라고 판단한 것이었다.
‘그래, 나중에 연락이 끊긴대도…… 멜라니가 좋은 친구는 좋은 친구였지.’
멜라니의 생각이 빤히 보이는 듯해, 클로에는 벅찬 마음으로 제 팔에 매달린 그녀의 손을 쓰다듬었다.
“알로제에서 10골드 나왔습니다. 또 없으신가요?”
의외로 입찰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클로에가 기억하는 그때에는 참석자들이 모두 그 푸르뎅뎅한 소년들에 질색하면서도, 드문드문 조금씩 금액을 올리며 경매를 진행했었는데.
“이러다 진짜 내가 사는 거 아냐?”
“사려고 입찰한 거 아니었어?”
“으응, 내가 입찰받아서 너에게 팔려고 했지.”
“내가 원가를 아니까 이문 볼 생각은 하지 말고.”
멜라니와 장난스럽게 말을 주고받을 때였다.
사람들이 뭔가 제 쪽을 흘끔대는 것 같은 분위기……. 클로에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멜라니가 알겠다는 듯 재빠르게 속살거렸다.
“아무래도 저 모델이 너라서 선뜻 입찰하기 어려운가 봐.”
“아……. 정말 그렇겠네.”
하긴. 미혼 남성이 입찰한다면 괜한 오해를 살 것이 분명했고, 그렇지 않더라도 라크루아에게 새삼 아부하는 것으로 오해받을 수 있는 거였으니까.
제이크 콜린스는 이런 건 생각도 못하고, 그저 저 그리고 싶은 걸 그렸을 게 뻔했다. 파르스름한 바닷가 소년들을 그렸을 때처럼.
‘콜린스 선생이 조금 더 잇속에 밝았다면 좋았을 것을……. 정말 내가 사야 하나.’
기왕이면 제이크 콜린스에게 좋은 벌이를 주고 싶은 마음은 여전했으니까. 그는 제 은인을 그린 그림을 살롱에서 소개한 것만으로 이미 감격에 차 있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요 몇 달간 용돈은 모두 사업 예산에 넣었는데……. 가불하는 셈 치고 50골드 정도 쓸까? 아니면 투자한다 치고 사업 예산에서 쓰면…… 아냐, 되팔 것도 아닌데.’
클로에가 제이크 콜린스의 선의에 보답하기 위해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릴 때였다.
그녀에게 다가왔던 사람들의 시선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녀의 뒤편 어딘가로 향했다.
무심코 시선을 따라 그편을 바라보자니…… 거기에는, 제 추종자인 영애들을 양옆으로 거느린 뷔욘 스칸다르가 있었다.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의 시선은 그 그림에 붙박여 있었고, 꼭 다문 입술은 은은한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윈제르 살롱의 손님들은 모두 그의 입에서 어떤 금액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문이 사실이라면, 여기서 뭔가 반응을 할 텐데.’
‘입찰을 하려나, 말려나?’
‘뭐라도 반응이 있으면 재밌겠군.’
아무도 그런 소망을 입에 올리지 않았지만, 그러한 분위기는 피부로 느껴질 듯했다.
뷔욘은 제게로 쏠린 시선을 인지하지 못한 사람처럼, 그저 그림을 흥미로워하는 양 손으로 턱을 천천히 쓸 뿐이었다.
그의 곁에 둘러싸고 선 엘레니아 룩소르를 위시한 영애들이 다소 불안한 표정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경계했다.
‘왕자님 취향에는…… 이 그림들이란 하나도 아름답지 않을 텐데.’
그림이란 그저 보기에 아름다워야 하는 것 아니냐던 그의 직관적인 취향을 떠올리며, 클로에는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농담으로라도 아름답다고는 말할 수 없는 제이크 콜린스의 그림.
‘이 조각이 마음에 드십니까?’
‘어머, 안녕하세요, 왕자님.’
원래 오늘 열린 윈제르 살롱에서는, 당시 소개되었던 조각가 앨버트의 조각상을 앞에 두고서 첫인사를 나누었더랬다. 앨버트는 완벽한 인체 비율을 추구하던 인물상의 전통을 깬 작품으로 유명했고…….
‘미의 사도인 베람을 이렇게 통통하게 표현했다니, 참 기발하다 싶어서요.’
‘아무래도 미하고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군요.’
그는 전통적이고 정형화된 미의 기준을 벗어날 생각조차 못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저 그림에 관심을 가질 리가 없지. 그때의 추억을 생각하며 클로에가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을 때였다.
제 턱만 매만지던 뷔욘의 시선이, 천천히 클로에에게로 따라붙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얼마간 허공에서 맞붙었다.
그것을 빠짐없이 관찰하던 사람들 사이를 무음의 파동이 훑고 지나갔다.
‘에이, 설마…….’
그의 연갈색 눈동자가 무언가를 재는 듯하다고 생각했을 때, 클로에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뭐야, 뭐야? 아무 사이 아니라며.”
“아닌 거 맞아.”
“저 왕자님이 입찰하려는 것 같은데?”
“안 하실 거야.”
클로에는 재빠르게 속살거리는 멜라니의 말에, 무조건 고개를 가로젓고 보았다. 취향이 아니시니까…….
“더 입찰하실 분 안 계신가요?”
그리 말하는 윈제르 후작부인의 시선은, 손님들을 따라 뷔욘 쪽을 향해 있었다.
클로에가 멜라니에게로 시선을 돌린 이후에도 뷔욘의 시선은 오래간 그녀에게 붙박여 있었다.
‘그저 빛 같아서 노르스름하게 표현했다라.’
사람들이 보내는 시선의 의미를, 뷔욘 스칸다르는 너무나도 잘 알았다. 여기서 제가 부응하는 것이 맞다는 생각도 들었다.
언제나 제게 발랄하게 말을 걸어 주는 궁정백가의 영애.
그녀는 어쨌건 제게 얼마간의 호감을 보였고, 그것은 꽤나 즐거운 일이었다. 그녀 자체로도 매력적인 여인이었고, 그녀의 배경은 더더욱 그러했으니까.
이따금 당혹스러운 질문을 던지거나 예상치 못한 행동을 보일 때가 있었지만……. 그것이 그녀의 매력 아닐까.
사교계의 앵무새들처럼 제게 뭔가 잘 보이려는 듯한 눈빛을 보낼 때도 있었지만……. 그럴 리가 없지. 그녀처럼 아르투젠 귀족 사회의 가장 양지바른 곳에서 자라난 이가 저를 마음에 담을 리는 없을 거였다.
‘저 그림을 낙찰받아 선물하면, 호감의 표시가 될까?’
제가 가진 마음이 호감이라면, 그렇게 이름 붙일 수 있다면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언젠가를 위한 일종의 포석이 될 수도 있을 거였으니까.
‘30골드쯤이면 괜찮을까.’
과한 금액도 아니니 적당히 호의와 친의 그 사이의 어디쯤으로 가장할 수도 있을 것 같았고. 아마 ‘그’는 여기에 입찰할 정도의 위인은 못 될 테니, 제가 마지막 입찰자가 될 것이고…….
‘하지만 추하게 그려진 것을 선물하면 창피를 주는 건 아닐지.’
뷔욘이 그런 것들을 따지는 사이, 연회장 안에는 웅성대는 소리가 차츰 커지기 시작했다.
아닌가 봐. 그냥 아닌 척하는 것 아닐까? 그렇다기엔 같이 온 게 수상하지 않아? 그럼 비밀로 하는 건가. 역시 별 사이가 아닌가 봐…….
그림의 모델과 뷔욘의 관계에 대한 추측성 웅성거림이 제대로 된 말소리를 갖춰갈 때쯤이었다.
“110골드 입찰할게요.”
앞쪽에서 나온 말소리에, 모든 이들이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제 귀여운 입찰액에 100골드나 더해진 그 금액에 숨을 들이킨 멜라니와 그 이상으로 놀란 클로에 역시 마찬가지였다.
뷔욘 또한, 살짝 들까 싶었던 손을 말아쥐며 그 고운 미간을 살며시 찌푸렸다.
“네에, 크레벨에서 110골드 나왔네요! 혹시 더 있으실까요?”
금세 밝아진 목소리로 윈제르 백작부인이 좌중을 둘러보았다. 보통 경매가 70, 80골드 선에서 마무리되는 것을 생각하면 꽤나 체면 차릴 수 있는 금액인 것이었다.
이를 듣는 제이크 콜린스의 얼굴은 어느새 제 본연의 창백한 빛을 되찾았다.
“이 그림은 되도록이면 제가 낙찰받고 싶어서 말이죠.”
경매가 마감되지 않았는데도, 다른 사람들의 입찰을 저지하려는 듯이 그 110골드의 주인공이 앞으로 나왔다.
“오늘 클로에와 함께 재능 있는 화가를 소개한 추억을 오래간 간직하고 싶어서 말예요.”
크레벨 공작부인이 손에 쥔 부채로 반대편 손을 톡톡 치며 우아하게 웃었다.
크레벨 소공작과 라크루아 영애가 친오누이보다 더 막역한 사이라더니. 고티유 사교계의 다정한 인사들은 오늘도 눈치 없이 따스한 갈채를 보냈다.
저를 흘끔대는 시선에 뷔욘 역시 마지못한 손길로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역시 미담을 훈훈히 여기는 이의 것이었다. 그 마음은 사뭇 다를지언정.
“네, 콜린스 선생의 신작, 크레벨에 110골드에 낙찰되었습니다!”
와아, 박수갈채 소리를 들으며, 크레벨 공작부인은 클로에를 향해 눈을 찡긋해 보였다. 그에 화답하듯 고개를 까닥여 보이는, 클로에의 환한 낯.
그녀의 시선은 자연스레 조금 전까지 제 곁에 있던 큰아들에게로 향했다. 조금 뿌듯한 듯도, 설레는 듯도 한 그의 얼굴…….
‘아들내미를 늦되게 키워 놨으니, 어미로서 어쩔 수 없지.’
데메트리안은 제이크 콜린스가 그림에 대해 설명하기도 전에, 그것이 클로에를 그린 것임을 알아차린 눈치였다. 저를 에스코트하겠다고 내어 준 팔이 흠칫 떨린 것을 보면 말이었다.
‘저게…… 혹시 클로에를 그린 거겠니?’
‘그렇네요.’
혹시나 해서 슬며시 물었을 때, 확신에 차 대답하던 그 목소리.
제이크 콜린스가 정말로 클로에의 이름을 입에 올렸을 땐, 참 대단하다 싶기까지 한 것이었다.
‘좀…… 못생기게 그린 것 아닐까?’
‘거기에 담긴 마음이 더 중요한 것 아니겠어요? 무엇보다 로이에겐 기념적인 일이기도 하고요.’
제이크 콜린스가 그녀를 빛이라느니, 성화의 후광을 달았다느니 운운할 때에는 일견 감격한 표정까지 지었다. 그때 그의 표정은 이미 그 그림을 낙찰받은 사람이었지만…….
‘알로제에서 10골드 나왔습니다. 또 없으신가요?’
클로에의 친구인 멜라니가 바람잡이 격으로 입찰하자, 경매란 살면서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애가 승부욕에 달뜨는 것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스칸다르의 왕자에게서 무슨 반응이 나오기를 고대할 때에는…….
‘데미가 참 어려서부터 느긋하고 침착한 아이였는데.’
이 애가 저답잖게 구는 것도 다 보고, 클로에에게 고마운 일일까. 크레벨 공작부인은 부채를 펴 입을 가린 채 장난스런 미소를 지었다.
“데미.”
공작부인은 제 아들의 팔에 걸어 둔 손에 힘을 꾹 쥐었다. 그가 한 다섯 번쯤 그녀의 눈치를 봤을 때였다.
‘클로에랑 단단히 싸워서 제가 직접 나설 순 없나 보지.’
제 아들이 클로에를 위해 그 그림에 입찰한다고 해서 고티유 사교계에 뭔가 다른 소문이 퍼질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이유라면 기실 그것 하나였다.
‘잘 좀 하지, 녀석도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