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그래서 내 마음은 어떤데? (9)
무명 천으로 덮인 제 그림 옆에 서 있는 제이크 콜린스의 기색이 이상했다.
그는 서 있다기보다 바닥에 꽂혀 있는 느낌으로 묘하게 몸을 못 가누고 있었는데, 그 얼굴과 입술이 한가지로 붉었다.
‘저저저저저는 제이크 콜린스입니다. 그, 캔달우드령 출신이고 고티유 예술학교에서 수학했습니다.’
처음 저와 함께 단상에 올랐을 때는 새하얬었는데, 그때 나갔던 핏기가 두 배로 돌아온 것인가 싶을 정도였다.
“저 선생, 괜찮은 거야?”
“긴장해서 술이라도 마셨나 보지.”
그렇게 대답하던 클로에는 아차, 제가 기억하는 그때를 떠올렸다.
그때도 제이크 콜린스는 미친 듯이 말을 더듬었고, 두 번째 단상에 올랐을 때는 어디서 그리 마신 건지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알코올 쇼크로 쓰러졌었지.’
건강상 문제가 될 일은 아니었다. 평소 술을 입에 대지 않던 그가 제 주량도 모르고서 급히 술을 마신 게 문제였던 것뿐이었다.
‘아까 인사 마치고서 낙담하는 거 보고 기억했어야 했는데.’
그가 설명을 얹는다고 해서 그림의 가치나 낙찰 금액이 올라가는 건 아니었지만, 클로에는 그의 결말을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모종의 책임감을 느꼈다.
“잠시만, 멜라니. 물이라도 갖다줘야겠어.”
“이야, 후견인 납셨어.”
멜라니가 장난스레 대꾸했다. 클로에는 그녀에게 윙크해 보이고는, 연회장 벽을 따라 음식이 차려진 쪽으로 갔다.
그전까지 시종들이 돌아다니면서 손님들에게 음료를 제공했지만, 곧 경매가 시작될 예정이어서 모든 음료가 한 테이블에 모여 있었다. 제이크 콜린스에게 도움이 될 레몬수 또한 손님들이 직접 음료를 따라 갈 수 있도록 유리병에 담겨 그쪽에 있었다.
경매를 관전하기 위해 몰려든 인파를 뚫고 그편에 다다른 클로에는, 손을 뻗다 말고 유리병 채로 가져갈지 한 잔으로 충분할지 잠시 고민했다.
그 멈칫하는 사이 유리병은 다른 사람이 먼저 차지했다.
‘그러면, 유리잔이 어디 있을까.’
그리 생각하며 고개를 돌리던 찰나.
방금 유리병을 잡은 손의 모양새가 문득, 마음에 걸렸다.
그것은…… 제가 오래간 몇 번을 잡았고, 오래간 제 앞에서 다양한 모양으로 움직였을 그 손이었다.
클로에는 저도 모르게, 제 짐작이 맞았을지 확인하고픈 충동에 그편을 돌아보았다. 그를 무시하기로 마음먹은 것이 무색하게도.
“저 선생에게 가져다주려던 거지?”
역시나. 데메트리안이 레몬수가 담긴 유리병을 슬쩍, 들어 보이고 있었다.
맞았네. 그의 짐작 또한 맞았고…….
‘그걸 어떻게 알았지?’
성인이 된 데메트리안이 윈제르의 살롱에 스스로 온 적은 전무했고, 때문에 제이크 콜린스를 보는 것도 처음일 텐데…….
‘이번 살롱에 진짜 대박 사건이 있었어. 소개된 사람이 화가였거든? 처음 볼 때부터 허옇게 질린 것이 엄청 심약한 양반 같았는데, 경매 때는 어디서 술을 잔뜩 먹고 와서는 알코올 쇼크로 기절해 버렸지 뭐야.’
아. 범인은 나였나.
클로에의 뇌리에 언젠가 제가 조잘대던 원로원 휴게실의 정경이 떠올랐다.
‘응, 어머니께 들었어.’
한참을 떠드는 걸 다 듣고는 그리 대꾸하는 것이 얄미워, 손에 집히는 것을 아무거나 그 낯짝에 던졌던 기억.
보지도 않고 탁, 잡아 버린 그것은 그가 저를 위해 떨어지지 않게 챙겨두던 데쎄르의 비스킷…….
‘……진짜.’
클로에는 조금 화가 날 것 같았다. 누구에게랄지 모를 것이었지만.
그 치미는 감정을 담아, 클로에는 그의 손에서 물병을 뺏을 요량으로 손을 휘둘렀다.
데메트리안은 작은 손짓으로 그것을 피했다.
“내가 들고 갈게. 무거워.”
“나도 들 수 있어.”
“알아.”
그리 말하며 데메트리안은, 고요히 클로에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녀의 입에서 어떤 특별한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듯이.
다만 그 눈빛에 요 얼마간 늘 비치던 갈급함이나 초조함 같은 것을 찾아볼 수 없어, 클로에는 순간적으로 저들 사이에 아무 일이 없었다고 착각할 뻔했다.
그 말소리가 조금 다정하게 들린 듯도 했다. 그는 빈말이라곤 모르는 인물이었으니까.
데메트리안의 손으로 클로에가 물을 챙겨 준 덕에, 제이크 콜린스는 적당한 주정뱅이 정도의 안색으로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있었다.
그것이 그를 발굴하는 데 일조한 크레벨과 라크루아의 책임감 있는 배려로 느껴져, 이를 지켜보던 귀족들 모두 그들의 선행을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평생을 친구 이상의 관계로 살아온 그들을 절대 의심하지 않는 그 눈치 없고 친절한 이들다운 해석이었다.
“자, 그럼 콜린스 선생의 신작을 함께 만나 보시죠!”
어느새 다른 손님들 사이로 섞여든 클로에는, 멜라니와 팔짱을 끼고서 앞쪽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그땐 저게 좀 파격적인 작품이었는데.’
클로에가 아는 미래에서 제이크 콜린스는 계절에 따라 색감이 달라지는 리비에라강의 물결을 담아낸 연작으로 유명해졌었다. 지금은 클로에가 크레벨 공작부인에게 선물한 것이 ‘정원에 비치는 햇살’인 바람에 무엇이 그의 대표작이 될지 모르지만.
‘정원에 비치는 햇살’ 연작이든 ‘리비에라의 수면’ 연작이든 빛의 세밀한 변모를 다룬 작업으로 유명해진 그는, 2년 뒤에는 실험적인 색감으로 화제가 될 예정이었다. 같은 색이라도 그 빛이 어디에 반사되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면서.
그래서 윈제르 백작부인의 살롱에서 그가 처음 소개할 작품은, 바닷가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살갗이 푸르뎅뎅하게 칠해진 작품이었다.
‘머리로는 이해해도 눈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겠지.’
거기에 대한 손님들의 반응은 경악 그 자체였다. 오히려 미술에 취향이 없어서일까, 클로에는 머리로 그의 실험적인 화풍을 이해할 수 있었지만.
보수적인 예술관을 가진 귀족 나리들께는 그의 파격이 선뜻 다가가기 어려웠던지, 그 그림은 윈제르 살롱 경매사상 역대 최저 금액에 낙찰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평론가들의 지지를 얻은 그가 클로에가 마지막으로 참석한 마담 에투알의 살롱에서도 소개되면서, 고티유 사교계의 미술 애호가들 사이에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그때보다 2년은 이르니까…… 화풍이 아직 그 정도로 과감하게 변하진 않았겠지?’
오늘 전시된 그림들을 보면 그의 색 선정도 아직 전통적인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듯하고 말이다.
그가 살롱에 빨리 데뷔하게 된 데에 책임감을 느껴서일까, 기왕이면 그때보다 더 큰 호응을 받아 더 높은 낙찰가에 그림을 팔 수 있기를 바라게 되는 것이었다.
“하나, 둘, 셋!”
윈제르의 하인 둘이 구호를 외치고서는 캔버스를 덮고 있던 무명천을 일시에 벗겨냈을 때였다.
그리고 거기에는…… 노란 하늘 아래 누런 잎사귀들을 배경으로 노란 얼굴을 한 여성이, 인물을 그렸다고는 믿어지지 않으리만치 대담하고 투박한 붓 터치로 그려져 있었다. 그 노란색들은 모두 나름으로 다른 색조를 띠고 있었다.
와중에 그 머리칼은 조금 주홍빛을 띠고 있기도…….
“어머, 인물화군요? 콜린스 선생, 소개 부탁드리오.”
윈제르 백작부인도 그림을 처음 보는 것인지, 토끼 눈을 뜨고서 제이크 콜린스에게 손짓했다.
그새 얼굴이 조금 더 제 색을 찾아간 제이크 콜린스는 매우 황송한 낯으로 앞으로 나섰다.
“네, 이 그림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제게 큰 은혜를 주신 라크루아 영애께 바치는 그림입니다.”
그림을 보고 있던 사람들의 입에서 한결같이 숨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어쩐지……. 그들의 과반수는 무례도 잊고 클로에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맙소사, 어쩐지 머리 색이.”
멜라니도 비슷한 소리를 내며 클로에의 안색을 살폈다.
“네가 저 그림을 사야 하는 걸까? 네 실물이 훨씬 예쁜데.”
기실 그것이 좌중의 모두가 걱정하는 바였다.
그러니까 그 그림은 일반적인 귀족들의 초상화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려져 있었고, 무엇보다 예쁘지 않았던 것이다.
와중에도 표현력이 어찌나 탁월한지, 그 거친 붓놀림에도 그녀의 똘망똘망한 에메랄드빛 눈동자와 오똑한 콧날, 고집 있는 턱선 같은 것이 제대로 표현되어 있었다. 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녀였다.
‘영애님께 제 그림으로나마 보답해 드리고 싶습니다.’
클로에는 어떻게든 사례하고자 하던 그의 마음 씀씀이가 떠올랐다.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이제는 어떤 상품 너머에 누군가의 손길이 있음을 알 정도는 되었으니까. 어쨌든 예술을 업으로 삼은 이가, 제 시간과 능력과 재료를 들여서 보이는 호의 아닌가.
그 잠깐 본 사이에 이 정도로 제 인상을 잡아낸 것은 신묘하기까지 했고.
한들룽 지구나 아티장 지구에서의 경험이 없었다면 그녀도 다른 이들처럼 경악했겠지만 말이다.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예술학교를 졸업하고서 무명 생활이 참으로 길었는데, 그동안 기나긴 동굴을 지나는 느낌이었죠. 모델 구할 돈도 없어서 늘 가족만 그리고, 그러다 보니 풍경화만 집요하게 파고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살롱에서 쌓은 명성이라면 기꺼이 무보수로 모델이 돼 줄 귀족들과의 연을 쌓을 수 있겠지만…… 이 그림을 본 이들은 아무도 그에게 초상화를 의뢰하지 않을 게 명백했다.
“그러다 보니 ‘정원에 비치는 햇살’ 연작도 그릴 수 있었지만요. 그러던 차에 이 기회를 주신 영애님이 제게 빛 같지 않겠습니까.”
캔버스에 그려진 이미지야 어쨌건, 제이크 콜린스의 사연은 마음을 움직이는 구석이 있었다. 이 그림에는 입찰하지 않겠지만 다른 그림을 꼭 맡겨야겠어, 그런 분위기로 손님들이 웅성대었다.
“제가 영애님을 우연히 보게 된 것은 대신전 성소 앞이었습니다. 그때가 오후였는데, 오후의 노란 햇살이 제게는 마치 성화에 등장하는 후광과 같아 보이더군요.”
술에 만취했다가 적당히 깨서인지, 살롱 시작 때와 달리 제이크 콜린스는 아주 달변이었다.
“마침 영애님께서 제게 빛과도 같으셨겠다, 오후의 햇살을 후광 삼아 그 빛에 녹아드는 느낌을 표현하고자 한 것입니다.”
제이크 콜린스가 양손을 맞잡으며 말하는 그 대목에서, 그림을 보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던 이의 7할은 그림에 대한 평가를 바꿔먹었다. 2할은 그래도 인물화는 실제보다 아름답게 그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었고, 나머지 1할은 뷔욘의 추종자들이었다.
어쨌든 그 감동적인 사연에 관한 사람들의 호의가 피부로 느껴질 정도여서 클로에는 몸을 배배 꼬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
“선생, 혹 다음 살롱에 가실 일이 있으시면 미리 약주를 조금 하시는 것도 나쁘지 않으시겠소?”
다들 감동받은 분위기에 더욱 기분이 좋아진 윈제르 백작부인이 제이크 콜린스에게 농지거리마저 했다.
“자, 그럼, 우리 라크루아 영애가.”
윈제르 백작부인이 클로에 쪽을 향해 눈을 찡긋해 보였다.
“모델이 된 이 감동적인 인물화. 늘 그랬듯 5골드부터 시작하려 합니다. 입찰하실 분들, 계신가요?”
5골드면 고티유에서 목 좋은 곳에 위치한 연립주택의 집 하나를 반년은 빌릴 수 있는 금액이었다. 오늘 제가 벌어들인 금액이 그 몇 배는 될 거면서, 제이크 콜린스는 새삼스레 놀라 숫제 딸꾹질까지 했다.
그러나 선뜻 나서는 이가 없어 얼마간 정적이 흐를 무렵이었다.
“10골드 입찰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