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그래서 내 마음은 어떤데? (2)
데메트리안이 그 말소리가 울린 쪽을 쳐다보았다.
‘스칸다르의 독립이라니, 이런 말을 입에 올리는 자가 있나?’
스칸다르의 그 특수한 위치와 별개로, 제국 연방이 하나인 것은 아르투젠의 귀족이라면 절대 의심하면 안 되는 명제거늘.
“에이, 이 사람아. 독립이라니, 말이 돼?”
“뭐, 아주 말이 안 될 건 없는 것 같은데…….”
“차라리 독립시키는 게 낫지 않을까요? 경시청 관료들에게 들은 얘긴데, 사실 그 분리 독립파에서 이번 퍼레이드 때에 폭탄 테러를 일으키려고 했었다더라고요.”
비밀은 없구먼, 데메트리안이 싸늘하게 코웃음 쳤다. 그 소식통이 제대로 된 자였다면 제 앞에서 감히 그 얘기를 꺼내지는 못했을 텐데.
“저도 그걸 듣긴 했는데…… 결국 실패한 데다가 스칸다르 왕실에서도 그들하고 선을 긋는 걸 보면 슬슬 그만둘 때도 되지 않았을까요?”
“왕자가 이토록 고티유에 오래 머무르는 걸 보면 친제국 기조를 계속 유지할 것도 같고…….”
하기야, 분리 독립파가 아르투젠 귀족들의 심기를 거스른 세월이 유구했다.
데메트리안은 그들의 토론에 관심 없는 척하면서 하이볼의 마지막 모금을 들이켰다. 그는 그 주제인 스칸다르의 독립에 대해 일종의 대답을 갖고 있었지만, 그건 더 이상 없어야만 할 일이었다.
물론, 그녀가 그편을 선택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 무력한 느낌이 괴로워, 유리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차가운 유리잔에 맺혀 있던 물방울이 그의 손을 타고 뚝뚝,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지금은 너랑 아무런 얘기도 하고 싶지 않아.’
그렇다는 것은, 언젠가는 저를 돌아봐 줄 수 있다는 것일까…….
그 실낱같은 희망에 모든 것을 거는 심정이었다. 그 희망이란 것이 신기루만은 아니길 바라면서.
“한데 요즘 좀 이상한 소문이 돌더라고요. 스칸다르 왕이 위독하다는.”
“그러면 왕자가 태연히 연애질이나 할 때는 아닌데?”
“그러니까 둘이 아무 사이도 아닌 거죠!”
맞는 소리, 맞는 소리. 데메트리안은 남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지나가던 급사를 불러 늘 마시던 대로 위스키에 얼음 넣은 것을 주문했다.
“그러니까 스칸다르의 왕이 멀쩡한 것 아닐까?”
“알레지오…… 같은 데선 알고 있을 텐데.”
누군가가 나지막이 내뱉은 말에 사람들의 말소리가 잦아들었다.
‘그 알레지오가 아르투젠 밖, 아니 고티유만 벗어나도 저들보다 영향력이 크다는 걸 언제쯤 알까.’
스칸다르의 미래에 대해 조금 그럴싸한 말을 뱉는 자가 있으면 여전히 공석인 퓌잘리 누스의 맞선 상대 후보 목록에 올려주려 했건만.
고티유 사교계에서 활동하는 고고한 귀족들이셔서 내어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상단을 직접 경영하는 데다가 사교계 활동을 전혀 하지 않는 알레지오 후작을 다들 비천하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 분위기란 것이 떳떳지 못함을 잘 알았기에 선뜻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입을 열면 멍청한 소리일 텐데, 체면을 차리자면 그러면 안 되니까.
‘그러고 보면 말레카의 왕녀가 스칸다르까지 연결될 수도 있겠군.’
데메트리안은 일전에 황자궁에서 목격했던 알레지오의 영애를 떠올렸다. 그리고, 말레카의 왕녀는…….
‘이쪽으로도 한번 알아봐야겠어. 어쨌든 제국 연방 전역에서 꽤나 수완이 좋은 가문이니까.’
제가 굴리고 있는 공작가의 수사대를 거기에 가동할 수 있을까, 용처가 명확하지 않은 일인데 써도 될까, 아버지께 안 알려도 될까, 아니면 해결사 길드라도 알아봐야 하나…….
달각달각, 어느새 그의 손에 쥐인 얼음 든 위스키 잔이 흔들리며 규칙적인 소음을 냈다.
“에이, 텄네. 그럼 이 김에 이건 어떻소? 다음 주 탄신연에 황태자 책봉이 있을 거다, 아니다. 나는 1황자 전하께서 책봉되신다에 1골드.”
데메트리안의 고민이 깊어질 때쯤, 사내들의 내기 주제는 순식간에 또 다른 것으로 바뀌었다.
“아니, 말이라고요? 저는 아직 2황자 전하께 미련을 못 버렸습니다. 50실버요.”
“잡음이야 있었지만 구휼 기금도 적당히 돌아갔으니, 명분도 슬슬 서지 않겠나요? 저도 1황자 전하께 50실버 걸죠. 폐하께서도 그만 간 보시고, 후계 구도 안정시키실 때가 됐어요.”
“하하하, 적당히요?”
과장된 웃음소리를 내뱉은 한 백작가의 영식이 데메트리안을 쳐다보았다.
‘분명 구휼 기금 문제 때문이겠지…….’
데메트리안은 그가 2황자 대니얼의 강성 지지자 중 한 사람인 것을 떠올리며 의자 등받이에 느른히 기댔다.
“소공작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번 건은 소공작께서 다 해결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들었는데.”
역시나, 저를 걸고넘어지는 것이었다.
“뭐, 굳이 그렇게까지는…….”
“에이, 겸손도 하셔. 그래도 소공작께서는 2황자 전하랑 더 교분이 있으시잖습니까?”
제게 화살이 날아오는 양에, 데메트리안은 손에 쥐었던 위스키 잔을 조심스레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제가 아는 때엔 프레더릭이 끝내 황태자 책봉을 받았지만 이제는 모를 일이었고, 대니얼과 더 친한 건 맞았지만 그가 후계자가 되려면 또 얼마나 파란이 일어날지 또 모를 일이었다. 아니, 애초에 그가 황태자 자리를 원하지도 않거니와…….
그 모든 생각을 담아, 그의 한쪽 입꼬리가 조용히 올라가 의뭉스런 미소만 빚을 뿐이었다.
그가 입을 열지 않으려는 기색에, 신사들은 김샜다는 듯 고개를 털어 버리고는 자기들끼리 다시 내기를 시작했다.
‘프레더릭 전하가 힘내기는 하셔야겠네. 판돈은 대니얼 녀석이 두 배인 걸 보면.’
제가 하는 일이 제대로 이뤄진다면…… 그의 미래도 자못 달라질 거니까.
그 생각은 다시금, 클로에에게로 돌아갔다.
그녀가 이편을 선택할 가능성이 있을까.
제가 바꾸려는 미래에 분명 행복하지 않았다고 알고 있었는데, 오히려 스칸다르의 왕자와 살갑게 지내는 걸 보면 마음이 복잡해졌다.
‘내가 로이를 다 아는 건 아니래도…… 그래도 사람 못 만나고, 고티유 친구들하고 연락 못하고 사는 게 행복하진 않았을 텐데.’
그녀에 대한 작은 소식이라도 알기 위해 노력했던 그 어둑한 시절이 떠오르니 또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 같았다.
제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걸까……. 이런저런 미래의 일들을 헤집던 데메트리안은, 별안간 제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아, 사람들 참, 또 담배질이야.”
같은 테이블에 있던 목소리 큰 말소리에 갑작스레 드는 안도감…….
그래, 제가 그때에도 눈물지은 적은 없었는데.
데메트리안은 다른 이들이 노려보는 쪽을 따라 시선을 던졌다. 실내로 더 깊이 들어가면 방으로 된 단체석이 다섯 군데 있는데, 그쪽의 문이 하나 열리면서 매운 연기가 새어 나온 듯했다.
비흡연자들로 이뤄진 같은 테이블의 신사들 중에는 시위라도 하듯이 부러 격하게 기침을 하는 이도 있었다.
“원로원에서 사교클럽 내 흡연 금지 조례라도 발의하면 안 될까요, 소공작?”
“별소릴 다 하십니다.”
나이 좀 있는 한 후작가 영식의 투덜대는 소리에 데메트리안이 웃음을 흘렸다.
‘서대륙 여송연이 들어와서 유행하는 바람에, 1황자파와 2황자파로 싸우던 것이 이제는 흡연파, 비흡연파로 나뉘었다더니.’
제아무리 사교클럽이 원로원에서 운영하는 것이어도, 귀족들이 부와 특권을 만끽하고자 하는 일을 금할 수야 없는 법이었다.
“저거 즐기는 이들 중에는 분명 폼 재려고 태우는 이들도 있을 거요. 무슨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마도구라도 되는지 저거 태우고서 맨정신엔 못할 짓 하는 자들도 종종 있더군.”
“폼을 잡자고 저 독한 연기를 폐에 쑤셔 박는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담배보다 중독성도 더 강한 모양입디다. 그 유행이 어찌나 대단한지 이제는 서대륙산 말고도 다른 여송연도 들여온다지 뭡니까.”
“다른 여송연? 뭐, 남대륙이나 동대륙에서라도 온답니까?”
“예에. 스칸다르산도 종종 있다고 하고요.”
스칸다르산. 거기서 데메트리안은 떠오르는 바가 있어, 관심 없는 척 위스키 잔에 입을 묻으며 그들의 말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저희 단원 일부가 상단으로 가장하여 물자를 수송하는데, 이번에 그 품목이 영 미심쩍었습니다.’
얼마 전, 그는 오래간 기다리던 손님을 맞이했다.
분리 독립파를 체포했을 때 그들의 민감한 부분을 긁어서 뿌려놓았던 씨앗을 드디어 수확한 것이었다.
결국 저를 찾아온 분리 독립파의 수장이 수치와 고통이 섞인 낯으로 읊던 목록들.
‘어디에 진상하려는지 스칸다르산 모피를 굉장히 호화롭게 포장했다 했고, 무역을 할 것도 아닌데 다량의 찻잎이 그 저택으로 갔다고 했지. 그것들은 위장이고 여송연이 목적인 걸까.’
그게 제대로 된 경로를 통해 시장에서 유통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미심쩍은 부분이 있으니 그녀가 저를 찾아온 거겠지.
‘이제 와서 새로이 유통망을 뚫을 리도 없고 말야.’
다음 달이면 제가 기억하는 대로 스칸다르의 왕자는 이곳을 떠나게 되고, 또 제 짐작대로라면…… 그는 그리될 것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이게 또 어디로 이어질지 알 수 없지만……. 건수가 있으면 일단 다 잡고 봐야지.’
증거와 수단은 많을수록 좋은 법이었다.
물론 어느 편에서 살아갈지 정하는 것에는 그녀의 의견이 중요했지만…… 그래, 이것은 사적인 복수심이었다. 그녀가 스칸다르에서의 삶을 원한대도, 여송연 불법 유통 정도는 아무 영향도 못 끼치리라.
그는 낮에 제게 빈정대던 왕자의 허여멀건 낯짝을 떠올렸다.
“그, 스칸다르산 여송연이란 건 어떻게 구하는지들 아십니까?”
* * *
“루비는 5년 뒤에 어떻게 살고 있을 것 같아요?”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미라벨이 자리를 비웠을 때, 클로에는 재빨리 루시엔에게 지난 일주일간 연습해 온 질문을 던졌다.
그들이 자리한 곳은 다시금 슈바츠 거리 경매장의 한 박스석이었다.
지난번 경매장에 놀러 왔을 때 술에 취해서인지, 루시엔이 남대륙의 토템을 낙찰받은 것에 대한 대리 흥분감에 고취된 것인지, 클로에와 미라벨이 기꺼이 경매장에 한 번 더 같이 가겠다 한 덕분이었다.
“5년 뒤요?”
“네.”
클로에는 오늘도 예의 그 스체르바뇰식 옷을 입고 가면을 쓴 채로, 이번에는 마레령의 레드와인을 홀짝였다.
이곳이 귀족 전용은 아니어도 돈깨나 쓰는 이들의 취향에 맞춘 덕분인지, 까다로운 클로에의 입맛에도 그 와인의 바디감이며 복합적인 풍미가 꽤나 인상적이었다. 같은 마레령의 포도를 썼대도 황자궁에서 맛봤던 황실 양조장 와인보다야 조금 떨어졌지만.
“저번엔 내후년이더니, 이번엔 5년 뒤네요.”
루시엔의 입매가 은은한 호선을 그리며 그 고개가 살며시 모로 틀어졌다. 가면 너머의 까만 눈동자가 호기심을 담아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