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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했는데 첫사랑이 수상하다-96화 (96/189)

96화. 그래서 내 마음은 어떤데? (1)

‘왜 거기서 그렇게 말했지.’

다그닥 다그닥, 말발굽 소리에 맞추어 차창 턱에 올려둔 팔에 괸 클로에의 머리통이 흔들렸다. 차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어른어른, 마차에 타자마자 보닛에서 해방된 그녀의 귤빛 머리칼 위로 빛과 그림자가 교차되었다.

‘지금은 너랑 아무런 얘기도 하고 싶지 않아.’

으으, 클로에는 제가 대꾸한 말을 떠올리며 도리질 치다가 고개를 그 팔에 묻었다. 그러고도 얼굴이 새빨개지는 느낌이었다.

‘완벽히 무시했어야 했는데! 아, 거기서 왜 나타나서는…….’

뭔가, 허무맹랑한 작당이 들킨 것만 같은 창피함이었다. 마치 어린 날에 그를 놀래기 위해 그의 공부방에 몰래 숨어들었다가 커튼 아래 신발 코가 나와서 들켰을 때 같은…….

아니, 그건 너무 소소한 일이었다. 제 생일 기념 정찬회에 그가 제 바로 옆자리에 앉도록 좌석을 배치해 두었더니 내가 네 애인도 아니고 거기를 왜, 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랑 좀 비슷할까.

그런 때면 데메트리안은, 저만 아는 그 이죽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건수 잡았다는 듯이 단단히 놀리곤 했었는데.

하지만 이제는 그가 제가 하는 무언가를 보고서 작정이라도 한 양 놀린다는 것이,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는 전처럼 은연중에 비치는 그녀의 소망을 모른 체하며 제 생각만을 관철하지도 않았으며…… 그러니까 ‘그날’부터.

그들의 관계는, 착실히 달라지고 있었다.

게다가 그가 목격한 클로에의 그 작당이란…….

‘상처받았을까.’

그 말을 떠올리자마자, 클로에는 지레 흠칫 놀랐다.

상처라니.

두 사람이 기억하는 미래에서 자연스레 저의 부군이 될 뷔욘에게 잘 보이려 노력하는 것이, 그에게 상처가 된다는 것은…….

‘데미가 나를 좋아한다.’

그 문장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클로에는 마음이 콱, 답답해져 오는 것 같았다.

데미는 다른 영애에겐 첫 춤을 신청하지 않아.

데미는 내가 여는 다과회를 뺀 그 어떤 다과회에도 참석하지 않아.

데미는 내가 아닌 다른 영애의 생일 연회에 참석하지 않아.

데미는 나만을 집까지 바래다줘.

데미는…….

그가 주어였던 수많은 명제에 덕지덕지 붙은 수식들을 걷어내고 나면, 그 너머에는 단 한 번도 의식적으로 생각하려 하지 않았던 그 문장만이 남는 것이었다.

‘그래서 뭐?’

그리고 그것을 느낀 것은 기실 오래된 일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스칸다르로 가기 전 마지막으로 만난 그날에, 그에게 무언가 바라는 듯 굴지 않았으리라.

‘어차피 성배가 도난당하고 나면 어쩔 수 없는 일인데.’

그렇게 단정 짓는 말을 떠올리자니 뭔가 상처받은 듯, 그럼에도 의연한 듯이 굴던 그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에 따라붙는, 그도 같은 경험을 했음을 확신했던 순간들…….

‘너는 정말 어리둥절하겠지만…… 조금만 시간을 줘. 모든 게 다 준비되면 내가 다 설명할게.’

‘오래 해야지. 너라면 그럴 수 있는걸.’

‘……지금은 말할 수 없어.’

그는 마치 저들에게 다른 미래가 있다는 양, 제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양 굴었다.

그게 말이나 되나……. 다른 선택지란 일말의 가능성조차 보이지 않았고, 그래서 2년 뒤의 미래가 정해져 있다고 생각했기에 이전 같으면 상상도 못했을 일들을 벌이고 있는 거였는데.

클로에의 머릿속에 이번의 스무 살에서 새로이 알게 된 사람들, 그러니까 라이언과 라구, 그리고 루시엔의 얼굴과…… 한들룽 지구의 풍경과 주일의 중고품 시장, 슈바츠 거리의 환락한 불빛 같은 것들이 떠올랐다.

그것은, 언젠가 셰비크의 적막한 궁중 생활로 돌아갈 저를 위한 잠시간의 일탈이었다.

하지만 데메트리안이 하던 말을 생각하면…….

‘혹시……. 무슨 실마리라도 찾은 걸까?’

그때쯤, 마차가 멈추려는지 마부가 말들을 어르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들어 올린 클로에의 눈앞에, 프란츠 광장에 세워진 승전기념탑의 첨단이 눈에 들어왔다. 그 너머로 보이는 필립 1세 대로…….

황궁 앞이었다.

“여긴 왜 왔어?”

“네가 아까 황궁 도서관 가 본다며.”

“내가?”

반사적으로 그리 대꾸하고는, 아까 저택을 나올 때에 마부에게 일러둔 말이 떠올랐다.

“아, 맞다. 그랬지.”

원래는 황궁의 도서관에 들러 에르드교의 비사와 연관된 다른 책들을 찾아보려던 거였는데, 데메트리안과 마주치고서 까맣게 잊고 만 것이었다.

흘끗 내다본 차창 밖에는 너무도 익숙한 황궁 앞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근위병이 지키고 있는 저 입구로 들어서면 황궁의 외궁이, 뒤이어 그 동편으로 원로원이 나타난다.

그 정경에는 제가 그를 찾으러 올 때마다, 아니, 그렇지 않더라도 어찌 안 것인지 만사 다 제쳐두고 나온 것이 선연히 보이는 얼굴로 나와 있던 그의 모습이 자연스레 따라붙는 것이었다.

‘어쩐 일로 거기 와 있었던 거람, 하필이면 그때.’

제가 부탁한 일을 처리하고 오려면 좀 늦겠지만, 그가 황궁으로 돌아올 것을 떠올리니 지금 여기서 내리면 안 될 것 같았다. 그와 마주치는 것은 당분간 사양이었으니까.

‘당분간이라니…….’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스스로에게 자괴감을 느끼며, 클로에는 미안한 낯으로 미라벨에게 말했다.

“아냐, 오늘은 그냥 귀택하자. 머리가 좀 아프네.”

“……그래, 뭐.”

미라벨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제 뒤편의 쪽창을 열어 마부에게 일렀다. 오늘 있었던 일이 좀 극적이긴 했지.

차창 밖의 풍경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황궁에서 멀리멀리 떠나, 시내와 타운하우스 밀집 지구의 경계에 자리한 라크루아 궁정백저로.

시내를 달리는 느슨한 속도에 맞추어, 페드로 거리의 건물들과 가로수들이 천천히 스쳐 지나갔다. 스무 해 넘게 살아온 내 고향, 내 도시, 내 추억이 담긴 거리들…….

‘근데…… 내가 데미랑 친한 걸 알고는 계셨구나.’

저와 데메트리안을 두고 ‘친우분들’이라고 언급하던 뷔욘의 말소리를 떠올리며, 클로에는 익숙한 감정을 느꼈다. 그가 제 외가가 라쥐르 공작가임을 언급하는 것을 들었을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부군께서는 내 친구란 미아뿐인 걸로 알고 계신 줄 알았는데.’

뷔욘이 예상외로 저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반가운지 아닌지, 클로에는 마음을 정할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스무 살로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계속 몰랐을 듯하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 * *

폭풍이 지나간 다음 날에도 오늘의 밭을 갈아야 한다……는 개뿔. 망할 철학자.

이름도 잊은 그 왕국 캄포 출신의 철학자를 영문도 없이 저주하며, 데메트리안은 사교클럽에서 가장 북적이는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제 동료인 퓌잘리 누스에게 빚을 진 지가 어언 두 달. 구휼 기금 문제 때문에 바빠서 생각보다 자주 오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나름 노력을 하여 6월의 둘째 주 철의 날인 오늘도 와서 앉아 있는 것이었다.

낮의 일을 생각하면 정말 루카 녀석이나 붙잡고 또 멋대로 취하고 싶었지만, 탄신연 직전이어서 다른 나라에서 온 이들도 많을 것이기에 새로운 얼굴들을 기대하며 온 차인데…….

‘정말, 인물 없다. 다들 머저리 같은 소리나 하고.’

물론 단순히 퓌잘리 누스의 맞선 상대 찾기만을 목적으로 온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데메트리안은 한숨을 삼키며 스체르바뇰산 위스키로 만든 하이볼을 입에 머금었다.

“그래서 말인데, 소공작.”

그때, 제게 걸어오는 말소리에 데메트리안은 고개를 들었다.

“소공작도 좀 아시는 바가 있습니까?”

“……뭐에 대해서 말씀이신지.”

낮에 마주쳤던 라이히 페데르의 목소리가 겹쳐지는 불안한 느낌.

“요즘 소문이 파다하지 않습니까. 그, 스칸다르의 왕자랑 라크루아 영애 말예요.”

용자의 말소리에 그 테이블의 남성들이 모두 그편을 바라보았다. 20대 미혼 남성 위주로 이루어진 그룹이어서인지, 다들 ‘연애사 가십’에 대한 흥미를 담아 눈을 빛냈다.

오늘 아카데미에 다녀오지 않았더라면 여기서 얼마나 바보 같은 표정을 지었으려나. 데메트리안은 속으로 자조하며 유리잔을 흔들었다.

‘진짜, 다들 머저리 같은 소리.’

제게 쏠린 시선을 살피며, 그는 한쪽 입꼬리를 간신히 들어 올려 웃어 보일 뿐이었다.

“글쎄요, 그건 그녀의 사생활이라.”

“아, 소공작조차 모르시면 이따 소궁정백께……”

“에이, 그런 걸 가문 사람에게 물어보면 어째? 퍽도 알려주겠습니다.”

“역시 그런가요? 저는 그래도 별 사이 아닐 것 같은데. 그 왕자가 지금껏 무슨 소문이나 뿌렸던가요.”

데메트리안은 그 ‘용자’에게 갑작스런 호감을 느꼈다. 그 남자, 갈색 머리칼을 포마드로 잘 빗어 넘긴 20대 후반의 로스첸트 자작은 사람 좋은 미소를 얼굴에 걸고서 다시 테이블의 신사들과 떠들기 시작했다.

‘미혼에 자작이고, 외모도 저 정도면 멀끔하니…… 하지만 허무맹랑한 가십이나 주워섬기는 건 좋지 않은데.’

데메트리안의 눈초리가 가늘어지며 로스첸트 자작을 뜯어보았다.

그가 사교클럽에 제 철칙에 벗어난 걸음을 하기 시작한 이래로 부쩍 친근하게 구는 로스첸트 자작은, 그 구레나룻이 턱까지 자란 것이 굉장히 마초적인 인상을 풍기는 인사였고…….

“혹시, 내기 어떻습니까? 저는 별 사이 아니다에 50실버.”

‘아, 사람이 타인에 대한 존중이 없고 경망스러운 구석이 있네.’

로스첸트 자작은 아주 가볍게, 이제껏 공석이던 퓌잘리 누스의 맞선 상대 후보 목록에서 제외되었다.

“50실버라니, 자신감이 없구먼. 나는 라크루아 영애가 스칸다르의 첫 외국인 비가 된다에 1골드 걸지.”

“고티유에 터를 잡고 사니, 그저 라크루아에 잘 보이려고 그런 것 아닐까요? 저도 아니다에 1골드.”

“잘 보이려면 기회는 이미 많았던 것을? 여기 와서 17년을 살았는데 이제 와서? 맞다에 50실버.”

“그러고 보니 마담 에투알의 살롱에 가서 그 왕자가 굳이 친근한 척을 했다는 이야기가 돌았죠. 저도 맞다에 1골드.”

“이게 사실이면 엄청난 특종인데? 두 사람 다 이성 관계가 표백 수준이었잖아. 난 맞다에 50실버. 더 재밌을 것 같아서.”

……지금껏 저와 클로에의 관계를 곡해하지 않아 준 건 참 고마웠지만, 어쩌면 단체로 눈치가 없는 것이 아닐까. 제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떠드는 걸 보면 말이었다.

제가 남들에게 보이는 상황에 한하여 클로에에게 단호하게 선을 그어대던 시절이 벌써 수년 전. 그걸 까맣게 잊어버린 데메트리안이, 고티유 사교계 지인들에 대해 사감을 실어 무차별한 평가를 내릴 때였다.

“스칸다르가 독립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힘들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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