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싹은 갈라진 틈에서 난다 (12)
스칸다르의 왕자는 사교계 활동을 할 때면 가면처럼 쓰곤 하는 그 미소를 입에 건 채로 클로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또는 그런 체하는 것인지 클로에는 이따금 고개를 갸웃거리나 어깨를 떨곤 했다.
그녀가, 제게 그렇게 웃어 보이던 때가 있었는데.
모든 걸 다 알고도 왕자와 저리 친하게 지내는 것을 보면, 어쩌면 제가 알던 것과 달리 그녀의 스칸다르 생활이…….
“뭐어, 그렇게 가까워 보이진 않는데요.”
데메트리안의 상념을 깨며, 파이겐은 괜히 하나 마나 한 소리를 해 보았다. 제 공자님의 숨소리만 듣고도, 그가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니까.
그가 무엇엔가 가슴 아파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정말 최근의 일이었지만…….
그때였다. 스칸다르의 왕자가 갑작스레 저들이 서 있는 쪽을 손짓하더니, 세 사람이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몰래 훔쳐본 거니 숨어야 하는 건가, 파이겐이 그런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데메트리안은 누군가 다른 사람의 손아귀에 심장이 움켜 쥐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내내 짓고 있던 미소의 잔상이 남아 있는 클로에의 얼굴…….
그리고 저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녀의 눈매며 입가가 조금씩 굳어지는 것이었다.
그것들을 붙들어 두고 싶다는 마음과 함께 치민 것은 분명, 다시 한번 그녀를 잃은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데미 공자님! 파이겐 경!”
그 속도 모르고 미라벨이 발랄하게 목소리를 울리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아니, 사실은 알아서 그런 거였지만…….
“어, 여어, 오랜만입니다, 아가씨들!”
파이겐도 덩달아 어색하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남들보다 한 뼘은 큰 그가 팔을 흔들자 그 누구라도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다. 평생을 남들보다 키 큰 아이로 자라 온 그는 그래서 튀는 행동을 한 적이 없었건만.
저보다 열 살은 어린 이들로 이뤄진 아카데미의 교정에서 창피함을 무릅쓰는 충성심을 공자님께서 아실까…….
미라벨을 따라 엉겁결에 하고 만 제 어색한 몸짓에 파이겐은 창피해 뒈져 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부르시는데, 가 보셔야지 않겠습니까?”
“…….”
마주치면 안 될 정도의 분위기는 아니니까 미라벨이 부르는 것 아닐까, 파이겐은 그렇게 쉽게 생각해 버리고는 제 공자님께 은근히 물었다.
데메트리안은, 클로에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저를 보고서 얼굴을 굳히고 말았던 그녀는 이미 고개를 돌려 분수대 쪽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더 이상 저 왕자를 보고 미소 짓지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그 얼굴이 저를 외면했다는 사실에 절망스러워지는 것이었다.
제가 그녀의 고민과 내뱉지 못하는 열망을 외면했던 그 모든 순간에 대해 단죄받는 것만 같았다.
늘어지는 공백에 미라벨과 파이겐의 팔짓도 느려지고, 생글생글 웃고 있던 미라벨의 얼굴에 조금 무서운 기운이 떠오르려고 할 무렵이었다.
파이겐은 큰마음 먹고 먼저 걸음을 내디뎠다. 젊은 애들로 가득한 공간에서 무슨 일 있었다고 광고할 것도 아니고…….
“아가씨, 그날 잘 들어가셨죠?”
“으응, 경.”
파이겐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서글서글하게 인사해 오는 양에, 클로에는 그의 얼굴 근처만 슬쩍 보고서 다시 고개를 돌렸다.
파이겐 쪽을 바라보면 그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데메트리안이 시야에 들어올 거였으니까.
“아가씨께서 웬일로 아카데미에까지 오셨습니까?”
“에티엔이 심부름을 시켜서 말야.”
결백한 저조차 보지 않을 정도이신가, 여전히 클로에가 제 근처도 바라보지 않자 파이겐이 미라벨의 낯을 스쳐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어느새, 데메트리안이 괴로운 발걸음으로 파이겐의 곁에 다가왔을 때였다. 뷔욘이 예의 그 미소를 그린 채로 클로에를 스쳐 지나가, 데메트리안에게 악수를 청했다.
“크레벨 소공작 아니십니까. 오랜만에 뵙는군요.”
기실 그는 늘 짓고 있는 그 가면 같은 표정을 지은 것뿐이건만…… 데메트리안은 거기에 어떤 비웃음이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저 스스로 느낀 열패감 때문임을 너무도 잘 알았다.
그의 손을 쳐내고픈 걸 그러지 못하고, 데메트리안은 마지못해 거친 손길로 그의 손을 맞잡았다. 이런 속마음을 갖는 것조차 너무 비참했다.
“그때 황자궁에서 뵙고 처음이죠.”
“그렇게 되네요.”
나긋나긋 웃고 있던 뷔욘의 눈동자에 무언가 다른 기색이 깃드는 것도 같았다. 다시금 그것이 왠지 승자의 것 같다는 착각마저 들 때에, 데메트리안은 그의 눈동자가 제 안색을 가늠하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때 갑작스레 끝나고 만 그들의 악수……. 그것이 데메트리안이 그의 손을 뿌리쳐서인지, 뷔욘이 그의 손을 밀쳐서인지, 그들도, 그들을 지켜보던 이들도 알 수 없었다.
‘저 애송이가 질투도 하네.’
‘공자님께서 질투하실 줄도 알고.’
미라벨과 파이겐은 비슷한 생각을 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나저나 원로원 일이 바쁘실 텐데 아카데미까지 무슨 일로.”
“학장님을 뵐 일이 있어서 말이죠.”
“아아……. 하긴, 크레벨이시니 학장님을 뵐 일도 있으시겠군요.”
“……그저 생도로서 서류를 내러 온 겁니다.”
데메트리안은 저도 모르게 말소리를 날카롭게 내고 말았다.
콜레스 자작이 원로원 귀족들 사이에 인망이 높긴 했지만, 황실 직속 교육기관인 아카데미의 학장으로서 중립을 지켜야 했으니 그를 두고 크레벨과 결부하는 것은 양쪽 모두에게 실례였다.
“아아, 그러시겠죠. 소공작께서 이미 수료하셔서 잊고 있었군요.”
그리 말하며 뷔욘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여 보였지만, 데메트리안은 그가 뭔가 비꼬듯 말한다고 생각했다.
그럴 사이가 아닌데도.
저야 그가 껄끄럽지만, 그가 저를 거북하게 여길 일이 뭐가 있겠는가.
‘이전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하긴, 그러고 보면 마주칠 일부터가 거의 없었나.’
순간적으로 옛날 생각에 빠진 데메트리안이 대꾸할 때를 놓쳤을 무렵, 뷔욘은 싱긋 웃으며 클로에 쪽을 향해 돌아섰다. 그러고서 여느 때처럼 클로에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그 시선은 데메트리안을 향해 있었다.
클로에는 오늘 제국 아카데미에서 오면서 절대 일어나지 않으리라 확신했던 상황에 처해 곤혹스럽기만 했다. 그 반가운 손길도, 줄곧 피하고만 싶었던 그의 괴로운 얼굴도, 모두…….
“저는 그럼 일행이 있어서. 친우분들께서는 이야기 나누시지요.”
“아, 저…….”
다정하게 제 교우관계를 챙겨 주시며 여느 때보다 더욱 고운 미소를 지어 보이셨지만, 클로에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요 얼마간 계속 그러했듯 손등에 키스하여 다음을 기약하고자 하는 것인데……. 이는 부군과 미래에도 제가 기억하는 대로 지낼 수 있음을 확인받는 일종의 의식과도 같은 일이었지만, 그걸 데메트리안의 앞에서, 그것도 저처럼 미래를 기억하는 그 앞에서는……
차마 그럴 수 없는 일이었다. 데메트리안이 얄미운 것과 별개로, 그러면 안 되는 일이었다.
클로에가 머뭇거리는 기색에, 허리를 살짝 숙여두었던 뷔욘은 클로에의 낯과 그 뒤편의 데메트리안의 어두운 안색을 한 번씩 살피며 작게 미소지었다. 한쪽 입꼬리가 더 올라간 그 미소는 어쨌든 아름답기야 했으나, 그가 평소 얼굴에 그려두던 것과는 얼마간 거리가 있었다.
“혹, 다음 주 윈제르 살롱에 갈 때에 제가 모시러 가도 괜찮을지요.”
“네?”
클로에는 예상치 못했던 제안에 깜짝 놀라 눈을 땡그랗게 떴다. 놀란 눈으로 바라본 그의 얼굴은 일견 간절히 바라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 걸린 미소는, 그녀가 거절하리란 경우란 아예 생각지 않는 듯 어떤 확신을 담고 있었다.
“윈제르 백작가엔 초행이기도 하고, 영애께서 그런 살롱에 자주 다니시기도 하시니 말이죠.”
퍽 살가운 그 제안이 반가운 한편으로, 클로에는 이 모든 것을 데메트리안이 듣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클로에는 마음속으로나마 눈을 질끈 감으며 대꾸했다.
“네에, 그러셔요. 그때 뵈어요.”
“그럼 살롱 시작 1시간쯤 전에 댁으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뷔욘은 더없이 영광이라는 듯, 해사하게 웃으며 고개를 모로 까닥여 보였다. 그 티없는 미소가 낯설어 클로에는 자그마한 혼란을 느꼈다.
“소공작께서도, 안녕히.”
뷔욘이 덧붙이듯 건네는 인사에, 데메트리안은 제가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도 모르는 채로 고개를 까닥였다.
뷔욘이 훌쩍 정문 쪽으로 떠나가자 네 사람 사이에는 썰렁한 바람이 불었다. 6월의 따사로운 햇살 아래인지라 그래 봤자 미풍이었지만…….
미라벨과 파이겐은 괜스레 서로에게 눈짓하며 그 어색함에 대한 괴로움을 공유했다.
데메트리안은, 이 자리까지 오는 내내 저를 괴롭혔던 이야기와 방금 전의 광경과 별개로, 제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들을 하기로 했다. 그녀에게 다가가서, 말을 거는 것.
“책 반납하러 왔구나.”
“…….”
큰마음을 먹고서 한 걸음 다가섰지만…… 그녀는 데메트리안의 얼굴 근처도 쳐다보지 않은 채, 작게 뒷걸음질 쳤다.
왕자를 대할 때에 얼굴에 걸려 있던 미소는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그 모든 것에서 비롯된 부정적인 감정을 애써 상기하지 않으려 애쓰며, 데메트리안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사람처럼 목소리를 내었다.
“같이 갈까?”
“…….”
“대신 반납해 줄까?”
그 말을 들은 미라벨이, 기다렸다는 양 제가 안고 있던 책들을 홀라당 파이겐에게로 넘겼다. 졸지에 웬 책 너댓 권을 들게 된 파이겐만 당황했다.
“그……”
뭐라도 울리려던 그의 목이 콱 막혔다.
미안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 미안한 것만으로는 제 마음을 다 표현할 수가 없는데…….
하지만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바뀌는 게 없고, 그렇다고 해서 지금 이 자리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걸 고백할 수는 없고…….
수많은 생각이 데메트리안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는 온갖 경우의 수를 떠올렸지만, 그중 그 무엇도 클로에의 마음을 달래줄 수 없을 듯했다.
저는 이미 한번 도망치고 만 자니까.
그래도, 이제라도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그는 저도 모르게 제 손을 말아쥐었다.
‘늦은 걸까.’
이처럼, 그 무엇이 무력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는데.
그들의 침묵이 길어질 무렵이었다.
“가자, 라비.”
“어? 어, 응, 그래. 경, 부탁해요?”
클로에가 두 주종의 근처를 보지도 않고 쌩 돌아서는 것에, 미라벨은 허둥지둥 그녀를 따라나섰다.
데메트리안은 그런 그녀를 망연히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제가 잡을 자격이 없다는 생각과, 그럼에도 저는 끝까지 다가가야 한다는 책임감, 그녀에게 어떻게든 닿고 싶은 열망, 또 한편으로 이토록 사람 많은 곳에서 함부로 다가가면 그녀가 더 싫어할 거라는 생각이 그를 괴롭혔다.
미라벨이 씌워 주는 양산의 그늘로 들어가는 클로에의 발걸음, 그 몸짓에 따라 살랑거리는 옷자락, 은은히 흔들리는 귤빛 머리칼 같은 것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보닛 사이로 어슷하게 나타난 그녀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그 어떤 때의 슬픔을 담아 제 쪽을 스치고 있었다. 조금 눈시울이 붉어진 듯도…….
“로이.”
그래, 모든 것을 다시는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되겠다고 느낀 그 순간, 데메트리안은 이미 크게 걸음을 내디뎌 그녀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지금은.”
클로에는 금세 몸을 옮겨 미라벨의 곁으로 숨었다.
“지금은 너랑 아무런 얘기도 하고 싶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