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싹은 갈라진 틈에서 난다 (11)
“이런 서류는 사람을 시켜도 되는 것을.”
“아닙니다, 학장님께서 편의를 봐주신 일인걸요.”
“허허, 소공작께서 이런 학자 나부랭이도 살피시고, 원로원의 미래가 밝구만.”
원로원의 미래……라. 캄포와의 정혼을 깰 것이니 다음 대의 원로원 의장은 크레벨이 아닌 다른 가문에서 선출될 예정이어서 당치 않은 찬사였다.
저만 아는 그 계획을 속으로 삼키며 데메트리안은 제국 아카데미의 학장, 콜레스 자작에게 고개를 까닥여 보였다.
“하필이면 보좌관 일을 시작하자마자 이리 바빠져서 어쩌나?”
“바쁠 때에 더 많이 배운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건 맞는 말이긴 하지만. 이번 구휼 기금 문제에 소공작이 활약한 일로 동문회에서 칭찬이 자자해.”
“아직 범인도 못 잡은걸요.”
“그건 또 다른 문제고. 예산에 그리도 큰 구멍이 났는데도 어쨌든 모든 영지가 다 무사히 살림을 하게 되었으니까. 로티엘 교수가 긴급 예산 편성 모범 사례로 수업에 써야겠다고 찬탄을 하더군.”
행정학 담당 교수의 호들갑을 전하며 콜레스 자작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데메트리안은 엄밀히 말해 5년제 제국 아카데미의 5학년에 재학 중이었지만, 지난 4년간 수료 학점을 다 채웠기에 교양 과목 하나만 등록한 채로 원로원에서 일하고 있었다.
학점을 다 수료했다지만 재학생의 신분으로 임관한 것은 일종의 특혜였고, 거기에는 원로원 의장 가문의 후계자에 대한 학장의 배려가 있었던 것이다.
‘원래’의 데메트리안은, 그의 배려를 원로원의 원활한 운영을 위한 당연한 절차로 여겨 형식적인 감사의 인사만 올리고 말았더랬다. 하지만 이제는 출석 대체용 서류를 굳이 직접 내러 와서는 학장에게 안부를 묻고 갈 정도의 성의를 보일 줄 알게 된 것이었다.
마침 제가 재임하는 동안 입학하여 학생회장을 지낸 크레벨의 후계자를 보며 늘상 흐뭇해하던 콜레스 자작도, 이렇게 제게 인사치레를 꼬박꼬박해 주니 그에 대한 호감이 하늘 높은 줄을 모르고 치솟았다.
“아무리 바쁘다지만, 졸업식에 생도 대표는 해 주는 거지?”
“제게도 영광된 일인걸요. 오히려 마지막 학년도에 아카데미 생활을 돌보지 못하고 있는데도 학장님께서 선뜻 제안해 주시니 제가 더 감사합니다.”
“허허허, 군이 그래 말해 주니 내가 더 고맙네. 아, 이젠 경인가?”
“아직 생도잖습니까.”
바깥에서는 소공작이나, 임관한 졸업생 취급을 받아 경 등으로 불리면서도 그리 말해 주는 것에 콜레스 자작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깊어졌다.
“저를 시키시든 전령을 보내시든 하시죠. 바쁘신데 이게 뭔가요?”
학장실에서 나와 복도를 걸으며, 학장실에서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파이겐이 투덜대듯 말했다. 그건 소공작의 귀한 발걸음을 아까워해서가 아니라, 이곳에 다녀간 만큼 귀택이 늦어질 거라는 현실적인 계산에 따른 것이었다.
해결되지 않은 구휼 기금 문제에, 크레벨령 인신매매 사건까지 겹치면서 칼 같은 정시 퇴근은 지난날의 추억이 되어 버렸으니까.
“콜레스 자작은 원로원 귀족들 사이에서도 인망이 높으니까. 어쨌든 편의를 봐준 거잖나.”
“참된 후계자다우시군요? 공작님께서 좋아하시겠습니다, 그래.”
“…….”
사정 뻔히 알면서 툴툴대는 파이겐의 말에 데메트리안은 다시금 괴로운 마음이 들었다.
데메트리안이 크레벨 공작에게 캄포와의 정혼을 파기하고프다 선언한 것이 벌써 한 달.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해도, 적어도 그 바르고 참하게 자라 온 소공작께서 뭔가 공작님의 심기를 거스른 것만은 모두가 알았다.
이제는 두 부자가 따로 입궁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보일 지경이었으니까.
‘공작님 속 썩일 작정했으면 잘 좀 하지, 뭘 또 잘못했기에 그날…….’
그리고 파이겐은 데메트리안이 공작의 심기를 거스를 유일한 일이 무엇인지 아는 몇 안 되는 이 중 하나였다.
아이펠의 장원에 갔던 그날, 몇 번 검을 주고받으며 이제는 퍽 친근해진 미라벨과 한 일곱 번쯤의 대련을 펼쳤을 때였다. 처음에는 5판 4선승제니 전승제니 하면서 서로 얄밉게 굴던 것이 조금 진지해져서는, 서로의 무예를 살펴 주며 나름의 훈련을 하고 있을 때였다.
‘……로이가 왜 혼자 오죠?’
파이겐이 차고 다니는 한손검과 양손검을 하나씩 휘둘러 보며 한 뼘은 큰 그의 키와 굵직한 팔뚝 같은 걸 경외의 눈빛으로 바라보던 미라벨이, 갑자기 먼 쪽을 바라보더니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의아하기는 파이겐도 마찬가지였다. 아가씨의 종자들과 작당을 하여 만들어 낸 마차를 선물해 주는 날이니, 그 마차가 마장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말이다.
파이겐이 보기에도 뭔가 심상찮아 보였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미라벨은 이미 파이겐의 검이며 팔뚝을 내팽개쳐 두고 클로에에게로 쏠랑 따라붙었다.
허허, 그 황망한 마음이 무엇인지 고민할 새도 없이 뒤따라가 보았더니, 라크루아의 아가씨가 미라벨의 품에 안겨 있는 게 아닌가. 그것만으로도 파이겐은 제 공자님이 일을 그르쳤음을 대번에 알았다.
‘저, 먼저 가 볼게요.’
‘그래요, 가 보쇼.’
마부에게 마차를 호숫가에 갖다 놓고 말은 거둬 가라고 말하는 것을 옆에서 들은 참이었다. 마차가 쌍두마차였으니 그걸 회수하기 위해서는 말 한 마리가 더 필요할 터.
파이겐은 데메트리안이 타고 간 말과 비슷한 크기의 말을 잡아타고서 곧바로 호숫가로 달렸다.
그리고, 거기에 남아 있는 것은 망연자실한 채 마부석에 앉아 있는 제 공자님뿐…….
마차 모는 기술만 익혔더라면 고삐를 제가 쥐는 게 나았을 정도로, 공작저까지 돌아가는 내내 데메트리안은 어딘가 혼이 빠진 사람 같았다.
‘루카 녀석하고는 무슨 병 나길 바라는 사람처럼 술을 마시지를 않나. 인신매매범 수사에는 또 눈이 뒤집힌 사람처럼 달려들고.’
그 이후로 마치 장래희망이 과로사인 것처럼 굴고 있는 그의 일과를 돌이키며 파이겐이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을 때였다.
“그 소문이 진짜려나?”
“나이 차가 좀 나지 않나?”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그래도 왕잔데. 궁정백이면 가문도…….”
“야.”
그날의 일들에 대해 생각하는 사이 어느새 건물 밖으로 나온 모양이었다. 교수회관과 연결돼 있는 학생회관을 지나 오솔길을 걷고 있는데, 저들끼리 쑥덕이던 생도들이 데메트리안을 보자마자 눈치를 보며 말을 아끼는 것이었다.
“그, 라크…… 흠흠.”
“그으, 그 댁 영애가 저번에 왕실저에 초대받았다잖아.”
“나도 들었어. 내 하인이 그 댁 사용인들에게 들었다고.”
허어, 이건 또 무슨 새로운 국면인가. 다들 말을 아끼기야 했다지만 데메트리안을 보고 어느 영애의 이야기를 하다 만다는 점에서 그 대상이 라크루아의 아가씨인 것이 너무도 명백했다.
파이겐은 눈동자를 굴려 바로 옆에서 걷고 있는 데메트리안의 안색을 살폈다. 그러고 보면…… 아이펠의 장원에서 돌아온 이후로 그의 안색이 좋았던 적은 없는 것 같긴 했지만.
다만, 들리는 것은 들은 모양인지 그의 미간이 얼핏 흉흉해질 무렵이었다.
“진짠가 봐. 이렇게 대낮에 아카데미에까지 찾아오는 걸 보면. 어어, 소공작!”
데메트리안이 제국 아카데미의 학생회장을 맡았던 지난해, 같이 학생회 활동을 하며 유독 친한 척을 하던 동학년의 페데르 후작 영식 라이히가 아는 체를 했다.
파이겐은 직감적으로 불안을 예견했다.
“오랜만이네요. 웬일로 등교하셨어요?”
“아아, 오랜만입니다. 출석 대체 서류를 내야 해서요.”
“그런 일은 사람을 시키면 되는 일인데요.”
“뭐…….”
파이겐에게처럼 성의 있는 대꾸를 할 기력이 없었던 데메트리안은 희미한 미소를 흘리고 말았다.
“아! 그런데 말이지. 혹시 말입니다.”
데메트리안을 본 순간부터 묻고 싶었던 말을, 라이히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연기하며 입에 올렸다.
“라크루아 영애 말입니다. 아니, 정말로 스칸다르의 왕자와 그렇고 그런 사이가 맞나요?”
“……뭐?”
데메트리안은 생도 간의 예우로 저보다 네 살이나 어린 그에게 존대하던 것도 잊고 말소리를 날카로이 울렸다.
“소공작께서 절친하시니 잘 아실 듯해서요.”
“…….”
“아, 아직 공론화될 단계가 아닌 건가요?”
느물거리는 라이히 페데르의 낯짝에 파이겐은 제가 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쩌다 그런 소리가 나왔는지……?”
“어쩌다 나온 소리긴요? 아, 공작저가 제도 밖에 있어서 소문이 늦나? 얼마 전에 라크루아 영애가 왕실저에 초대를 받아 다녀왔다잖아요.”
어이쿠, 파이겐이 제 눈초리를 어떻게 가장할 생각도 못하고 데메트리안을 쳐다보았다. 요즘 들어 늘상 이런 죽상을 하고 있어서 그의 안색이 특별히 나빠졌는지도 알 수가 없었지만.
“로이, 아, 클로에야 워낙에 초대를 많이 받으니까…….”
변호하듯 울리는 데메트리안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생각해 보면 그런 그녀가 사교계 활동을 하지 않는 것부터가 이상한 거였는데. 의심할 생각도 못하고, 바보같이…….
데메트리안의 어두운 안색을 그저 피로해서라고 여긴 라이히는 입술을 삐죽이며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그의 성정만큼 가벼운 그 몸짓을 보면, 아무도 그를 원로원에서 권세깨나 있다는 페데르 후작가의 자제로 보지 못할 듯했다.
“뭐, 그 왕자가 지금껏 누굴 만난 적이나 있었나요? 따르는 영애 그리 많지만 소문 하나 없었잖아요. 가서 봐 봐요, 지금 저기서 만나고 있는 걸?”
데메트리안은 무슨 정신으로 그 대화를 마쳤는지 알지도 못한 채, 어찌 내딛는지 모르는 걸음으로 그 오솔길을 빠져나갔다.
‘어이구, 적잖이 당황하셨나 보네. 그나저나 스칸다르의 왕자라니, 무슨 일이야……?’
그를 십수 년을 지켜봐 온 파이겐은 그 위태로운 걸음걸이에서 그의 정신적인 충격을 여실히 느꼈다. 걸음걸이마저 어려서부터 크레벨의 후계자다운 것으로 수련한 그답게, 남들 눈에야 여전히 우아한 걸음일 테지만.
“정말 맞나 봐.”
“그 왕자가……”
“둘이 아무래도……”
하필이면 그 길목에는 사교계에 발 걸친 생도들이 이런저런 소문을 주워섬기는 데에 열중해 있었다. 데메트리안이 지나가는 것을 알았다면 라이히처럼 저들의 궁금증을 충족하기 위해 말을 걸었을 수도 있으니 차라리 다행이었을까…….
‘아까 그 페데르 도련님도 그렇고, 귀족 나리들 눈엔 그게 안 보이나?’
파이겐은 제 관자놀이가 다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그들이 걷고 있는 길 끝에 분수 광장이 보이기 시작했다. 양옆으로 늘어선 가로수의 끝에서, 익숙한 보라색 포니테일이 보였고…….
거기쯤에서 데메트리안은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강의동에서 내려오는 길 어귀에 선 스칸다르의 왕자와 양산을 받쳐 들고 있는 보랏빛 포니테일, 그 사이로 귤빛 머리칼이 유월의 햇살을 받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