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싹은 갈라진 틈에서 난다 (10)
클로에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보닛의 챙이 제 얼굴을 가리도록. 그리하여 제 불안한 표정을 가장 가까운 이에게 들키지 않도록.
미라벨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 자체로 나름의 대답이었으니까.
진실을 아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클로에가 그런 것으로 해 두고 싶다면, 그러면 될 일. 그 대신 미라벨은 제가 갖고 있던 클로에의 손가방에서 부채를 꺼내, 클로에와 저를 향해 천천히 부채질을 했다.
미라벨의 부채질은 아까 갑작스레 불어온 미풍보다 시원했지만, 그걸 받는 클로에의 마음은 조금, 미어지는 것 같았다.
그날 아이펠의 장원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입에 올리면, 그날 제가 겪은 실망감을 입 밖으로 내면 그 모든 것들이 굳어져 버릴까 조심스러웠다.
‘라비는 늘 내 편을 들어 주니까.’
데메트리안이 다정하게 굴었던 것, 그들의 비밀이 닿아 있음을 알고서 뭔가를 들킨 사람처럼 혼란스러워했던 것, 오히려 저를 타박했던 것, 비겁하게 굴고 속마음을 감췄던 것.
그래서 끝내 제가 그에게 실망하고 만 것…….
그 무엇 하나도 기정사실로 만들 자신이 없어 미라벨에게 서운함을 안겨주는 제가, 저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클로에는 미라벨이 눈치채지 못하게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
그때, 미라벨이 놀란 소리를 내며 광장 왼편으로 이어지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는 양에 미라벨의 포니테일이 경쾌하게 허공을 갈랐다.
“저기, 네 왕자님이다.”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자리한 강의동에서 내려오고 있는 밝은 금발의 남자를 눈 좋은 미라벨이 재빨리 발견한 것이었다.
뷔욘이 그녀들을 알아보기 전에, 클로에는 벌떡 일어나 계속 걷고 있던 사람 행세를 했다. 양산을 받쳐 든 미라벨의 몸놀림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한 과목만 수강해서일까, 하복 셔츠를 말끔히 차려입은 그의 자태를 보면 마치 시험 기간을 준비하는 생도들의 칙칙함이란 남의 일인 것만 같았다. 그의 셔츠 단추도 몇 개가 풀어져 있었지만, 다른 생도들이 일종의 반항심에서 그리한 것과 달리 그의 경우 순전히 더워서인 듯했다.
‘스칸다르에서 제일 더울 때의 날씨가 딱 이 정도인데. 그러고 보면 고티유의 여름을 나기가 꽤 피곤하셨겠어.’
여름에도 스칸다르의 기온은 보통 고티유의 늦봄 수준이었다. 일교차가 적다는 것만 다를 뿐. 그래서 짧은 소매의 의복은 없었고, 아침저녁으로 은은하게 변하는 기온에 대응할 수 있도록 얇은 로브나 가운을 겹겹이 꿰어 입곤 했다.
평소와 달리 목덜미 위에서 묶은 머리에서, 클로에는 그가 벌써 더워하고 있음을 확신했다.
“아, 영애. 이런 데서 뵈네요.”
강의동에서 이어지는 경사 낮은 계단을 따라 지그재그로 내려오던 그는, 마지막 코너에 다다랐을 때 저를 올려다보고 있는 클로에를 발견했다. 더위 때문인지 무서우리만치 굳어져 있던 그의 얼굴이 화사하게 풀어졌다.
그 극적인 변화에서 클로에는 제 다짐에 든든한 근거를 얻은 것만 같았다.
“이렇게 또 뵙네요.”
미라벨이 받쳐 주던 양산에서 한 걸음 밖으로 나와, 클로에가 생긋 웃으면서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인사해 보였다. 이전보다 훨씬 간소해진 몸짓으로써 클로에는 제가 그에게 느끼는 친근감을 표현했다.
뷔욘은 오늘도 고운 미소를 얼굴에 그려 넣으며 계단을 걸어 클로에와 같은 높이로 내려섰다.
“예, 영애께서는 오늘도 바지런하시군요.”
그래, 부군이 저에 대해 갖는 이미지도 꼭 이러했으니까. 달라진 건 없어.
클로에는 생긋 웃어 보였다.
“네, 오늘도 좋은 우연입니다.”
“오늘도 소궁정백의 심부름을 오셨는지요?”
“네에, 볼 시간도 없으면서 무슨 책을 그리 빌리는지.”
클로에는 뒤에 선 미라벨이 안고 있는 책에 시선을 던지며 투덜거리듯 말했다.
《여덟 사도의 비밀》, 《경전에 허락받지 못한 에르드 비사》, 《전왕국 시대에 남겨진 사도들의 흔적》 등의 제목을 단 그 책들은, 미라벨에게 신신당부해 둔 덕에 뒤표지만을 보이고 있었다. 에티엔이 이런 류의 책을 빌릴 것도 아니었거니와, 주신을 섬기지 않는 스칸다르의 후계자에게 보이기에는 왠지 민망했던 것이다.
“덕분에 예기치 못하게 뵐 수 있어서 제가 다 반가운 일이군요.”
뷔욘이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제가 기억하는 이 시절 그의 말소리보다 확연히 살가운 어조에, 클로에는 어찌되었건 제 미래의 부군이 저를 이전보다 가까이 여김을 확신했다.
어찌되었건…… 저를 은애하건, 그러하지 않건.
그래, 사람마다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은 다른 거니까.
마음을 표현하는 일에 관해 생각하자면, 그 흘러넘치는 마음을 제대로 표현할 줄 모르는 누군가가 떠오를 것만 같아 클로에는 부러 발랄한 목소리를 냈다.
“왕자님께서는 하교하시는 건가요?”
“예에, 그런 셈이죠. 강의도 끝났고 하니. 이제 집으로……”
“……?”
클로에에게 대꾸하던 뷔욘의 얼굴이 경미하게 굳더니, 클로에의 뒤편 어딘가에 시선을 보내는 것이 느껴졌다. 클로에가 덩달아 뒤돌아 보려고 할 때였다.
“모셔다드리게.”
뷔욘이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그의 뒤편 한 계단 위에 그림자처럼 서 있던 디에크는 짤막하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뛰듯이 그녀들을 스쳐서 떠났다.
모셔다드리라는 말은 일견 함께 있는 여성이나 어른의 편의를 돌볼 때에 하는 말이었고, 그것은 분명 저에 대한 일은 아니었다.
‘누구……?’
제가 뷔욘의 편의를 받는 여성의 정체를 무척 궁금해 한다는 티가 나지 않도록, 클로에는 교정의 풍경을 감상하는 듯한 속도로 고개를 돌려 뒤쪽을 보았다.
두건으로 제 연두빛 머리칼을 꽁꽁 감춰 둔 디에크가 다가선 것은 분수가에 걸터앉아 있던 한 영애였다. 다홍빛 머리칼의…….
‘또야?’
굳이 제국 아카데미에까지 찾아와 만날 정도로 친했던 거야?
저 역시 핑곗거리가 있기야 했지만 그를 만나러 굳이 오늘 온 거면서, 클로에는 저와 남의 유사한 행동에 대해 상이한 평가를 내렸다.
뷔욘 쪽을 바라보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려는 찰나, 클로에는 일전에 느꼈던 적의가 떠올라 반사적으로 보닛의 리본을 그러쥐어 코 밑으로 바싹 당겼다. 보닛의 챙에 제 얼굴이 얼마간 가려지게끔…….
저를 알아봤을지 곁눈으로 살피자니, 알레지오의 영애는 서신으로 보이는 것을 하나 꺼내 살짝 흔들어 보이고는 다시 제 품에 집어넣었다.
‘편지? 누구의?’
멀리서 보인 그 편지는 붉은색으로 봉랍이 되어 있었는데…… 기실 붉은 색 봉랍은, 편지의 보안을 위해 아르투젠의 귀족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쓰이는 색이어서 그것만으론 판별할 수가 없었다.
‘저 영애가 무슨 연락책 같은 건가?’
그러고서 정문 쪽으로 이어지는 길로 사라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클로에는, 문득 얼마 전부터 신경 쓰였던 사소한 질문을 저도 모르게 입에 올렸다.
“혹시 저분은.”
“영애께서는.”
다만, 그동안 침묵이 어색하리만치 길어졌던지 뷔욘의 말이 빠르게 들어왔을 뿐.
고운 미소를 지어 걸은 그의 낯은 뭔가 완고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저분은 알레지오의 영애인가요, 혹은 알레지오 후작가와 개인적인 교분이 있으신가요, 혹은 알레지오의 영애와 긴밀하신가요 등등…… 클로에가 만들어 두었던 질문은 다양했지만, 그러고 보면 그 모든 의문은 사실 제가 기대하는 미래와 전혀 무관한 것이었다.
클로에는 가볍게 털어 버리고는 방긋 웃었다.
“네, 말씀하세요.”
“다음 주 윈제르 백작부인의 살롱에 혹시 오시는지요.”
“윈제르 부인의 살롱요? 아, 네, 가죠.”
제이크 콜린스가 소개될 윈제르 백작부인의 살롱. 클로에는 그 살롱의 단골인 크레벨 공작부인과 가까운 영애로서 그 살롱에 종종 참석하곤 했었다.
그것을 뷔욘이 물어 오기를 내심 기다리고 있던 클로에는, 최선을 다해 매력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것이, 살면서 데메트리안을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사랑스럽게 보일 마음 없었던 그녀에게는 어색한 일이었지만…….
“혹시 그곳에 관심이 있으신 건가요?”
“윈제르 백작부인께서 매번 감사하게도 초대장을 보내 주시는데, 제가 감히 낄 곳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번번이 발걸음을 주저하던 차였습니다. 그런데 일전에 영애 덕에 마담 에투알의 살롱에 가 보았더니, 살롱이란 것이 퍽 재밌게 여겨져서 말입니다.”
“어머, 그러셨군요. 그럼 다음 주에는 윈제르 백작저에서 뵙겠군요?”
“영애께서 오신다면, 기쁘게도 말입니다.”
뷔욘이 눈을 사르르 접어 곱게도 웃는 것에, 클로에는 마주 미소 지었다.
그래, 달라지지 않는 건 따로 있었다. 누가 어떤 마음을 갖건, 누가 어떤 모습을 보이건…….
그때도 지금도 뷔욘은 6월의 윈제르 백작부인의 살롱에 참석할 거였고, 거기서 클로에를 만날 거였다. 마담 에투알의 살롱에 왔을 때처럼 이번에도 저를 만나러 오는 것일 수도 있었고.
그렇게 쌓은 친교를 바탕으로 2년 뒤 다시 셰비크에 가게 되었을 때에, 뷔욘을 더욱 가까이서 살피고 잘 헤아리는 현명한 비가 되면…… 그러면 되는 거였다.
‘얼마 만에 사교계 모임에 가는 건지 모르겠네.’
그러고 보면 이맘때의 저는 온갖 사교계 모임에 성실하게 따라다니곤 했었는데.
이번에도 뷔욘이 오지만 않았더라면, 스무 살로 돌아오고서 늘 그랬듯 윈제르 백작부인의 초대장에 거절의 답을 보냈을 거였다.
“왕자님께서 오신다면 그날 살롱이 정말 대성황이겠어요.”
“제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그가 난처한 듯 고개를 갸웃하며 웃었지만, 그 목소리에는 어떤 겸손의 기색도 묻어 있지 않았다. 볼모로 온 제후국의 후계자로서 늘 ‘저희 나라’, ‘저’라는 식으로 스스로를 낮췄지만, 어쨌든 일국의 정점이 될 자였으니 겸손을 모르는 것도 당연했다.
“마음 같아서는 도서관까지 모셔다드리고 싶지만…… 제 호위가 손님을 모셔다드리러 간 바람에.”
뷔욘이 제 호위와 알레지오의 영애가 사라진 쪽을 일별하며 말했다.
“별말씀을요. 말씀만으로도 그 영광을 받은 셈 칠게요. 여기서 기다리셔야 하나요?”
“교정이니 별일 있겠습니까. 다만 길이 엇갈리면 안 되니까요.”
“아, 그렇네요. 그럼.”
“네, 도서관은 저쪽이고요.”
뷔욘이 제가 가려는 길의 반대편, 북쪽으로 난 길을 손짓했다. 학생회관과 도서관, 학생식당, 교수회관 같은 것들이 모여 있는 쪽이었다.
클로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무의식적으로 그의 손길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어머.”
옆에서 한걸음 물러난 채 두 사람이 대화하는 양을 구경 중이던 미라벨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새어 나왔다.
뷔욘이 가리킨 방향, 학생회관 쪽으로 향하는 북쪽 길의 어귀에서는 데메트리안이 파이겐과 함께 걸어 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