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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했는데 첫사랑이 수상하다-92화 (92/189)

92화. 싹은 갈라진 틈에서 난다 (9)

대신전에서 돌아온 클로에는 가족들과 만찬을 즐기고서 제 방 침대 헤드에 기대 앉아 책을 뒤적거렸다. 일전에 제국 아카데미에 갔을 때 빌린 것들이었다.

대출 기간인 한 달을 넘기고도 벌써 보름이 지났지만, 그간 들춰볼 짬이 없어서 반납조차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찾는 사람이 있었다면 독촉장이 왔을 텐데, 아직 에티엔이 별말 없는 걸 보면…….’

그 이후로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한 터라 제 특별한 경험에 대해 고민할 짬도 나지 않았고, 이제는 스무 살로 돌아온 이 일상이 너무도 익숙해지고 만 탓에 그 연유를 찾으려는 생각을 잊고 말았더랬다.

이 책을 빌릴 때만 해도, 하룻밤 사이에 5년 뒤로 돌아갈까 전전긍긍했었는데.

‘그간 많은 일이 있었지. 정말로 데미도 그런 일을 겪은 게 맞았고…….’

하아, 클로에는 한숨을 내쉬며 책에 두었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고티유의 제 방에서 읽는 책이 데메트리안과의 독서회 때문이 아니어서 뿌듯했던 마음도 잠시, 그 생각의 꼬리는 결국 다시 그에게로 돌아가고 마는 것이었다.

혼자 있어서였을까, 클로에는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도 짜증도 느끼지 않고 곰곰이 제 생각을 살폈다.

‘데미가 루카랑 술을 마셨다라……. 아마 그날의 일 때문이겠지.’

제가 기억하는 데메트리안은 그토록 자해하듯 술을 마시는 인물이 아니었다. 루카와 단둘이 술을 마신 적 또한 없었고.

‘돌아오기 전엔 종종 그러기도 했던 걸까?’

그가 제게야 달라진 듯 군다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살아온 습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인물이었으니까. 술을 마시고 싶을 때가 있었고, 그런 때면 루카를 찾는 습관이 생겼다는 이야기였다.

그럼 그때에도, 역시 그는 무언가 괴로웠던 것일까……?

‘에이, 무슨 생각을.’

봇물 터진 듯 흘러드는 상념들을 쫓아내려는 듯, 클로에는 눈을 꾹 감고 도리질했다. 걱정해 줄 일이 아니었다. 결국 제게 어떤 고민도 나누지 않으려는 괘씸한 데메트리안 따위에게.

클로에는 흘러가는 생각의 꼬리를 묶어 두기 위해, 눈앞에 펼쳐진 글자들에 집중했다.

「베람의 불기둥이 데머럴의 숲을 해치고 리도테의 철광을 헤집었을 때, 피즈의 바람이 모든 것을 되돌렸다.」

「모든 것이 재가 되고 남은 공간에, 모든 수분이 얼었던 곳에, 모든 바위가 풍화된 곳에 오로지 태초의 대지가 남으리라.」

「에시스와 뷜을 잡아두기 위해 피레사와 베람은 힘을 합쳤다. 몇 번의 홍수와 가뭄이 반복되자 인간은 기적을 바랐고 에시스와 뷜은 인류의 행운으로 돌아왔다.」

‘흠…… 꼭 사도들이나 그 이능하고 연관된 것들뿐이네.’

황자궁 서고에서 빌려 나온 책들 중 도움이 된 책들이 모두 신의 은총과 연관된 내용이었기에 에르드교의 비사 위주로 빌려왔던 것인데, 제 추측이 맞음을 증명하듯 끼워 맞출 만한 구절들이 종종 눈에 들어온 것이었다.

사도들이 싸우거나 힘을 합치면 결국 무언가가 되돌아왔다. 시간이 돌아오는 경우도 있었고, 파괴된 것이 회복되는 경우도 있었고, 죽었던 사람이 되살아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비슷비슷한 이야기를 읽으며 클로에는 제가 셰비크에서 무슨 사도들의 계시라도 받았는지, 그런 걸 생각하게 되었다.

‘아니, 셰비크만이 아니지.’

계시랄 것이 있었다면, 그리고 그 계시를 제가 받은 게 아니라면 남은 한 사람은…….

자연스레 머릿속에 크레벨 공작저의 풍경이 떠올랐다.

‘지금쯤이면 정원에 장미도 많이 폈을 텐데. 작약도 말야…….’

클로에는 책을 신경질적으로 덮었다. 그에 대한 마음은 꾹꾹 눌러 둘 수 있었지만, 그곳의 풍경은 한번 떠오르고 나니 쉽게 잊히지 않았다.

북방의 제후국인 스체르바뇰 출신의 크레벨 공작부인은 제도의 온화한 기후를 좋아했고, 그래서 온실에는 사시사철 꽃이 가득했다. 게다가 꼭 지금과 같은 초여름이면 장미며 작약이며 하는 여름 꽃이 정원에 만발하여, 사교계의 모든 여성들은 크레벨 공작저의 다과회에 초대받기를 소망했다.

잘못한 건 그 집 아들내미인데, 왜 내가 그 아름다운 풍경을 못 보나.

클로에는 반 바퀴 굴러 천장을 보고 드러누웠다. 천장에 그려진 아기 사도들의 모습이 왠지 저를 약 올리는 듯했다.

우웅.

그때였다. 협탁에서 울리는 진동 소리에, 클로에는 제 생각이 읽힌 것만 같아 마음이 뾰족해졌다. 천장에 그려진 데메트리안의 탄생 사도, 피즈의 아기답지 않은 무표정한 낯을 흘기며 클로에는 서랍에 손을 뻗었다.

궁금하진 않았다.

그녀가 갖고 있는 통신구가 두 개였지만…… 그중 무엇이, 어떤 말소리를 싣고 왔는지 알았다.

하지만 지금 확인하지 않으면 밤새 울릴 거였고, 또 혹시 라구의 전언은 아닌지 고민하느라 괜히 마음을 허비할 거였으니까.

‘얼른 듣고 얼른 잊어버려야지.’

일종의 자기합리화를 마치고서, 클로에는 통신구를 꺼내 그 버튼을 두 번 눌렀다.

[로이. 이전에 보낸 이야기는 들었어? 아니, 안 들었어도 좋아. 오늘도 다시 말하자면…… 미안해. 내가 생각이 짧았어. 네게는 늘 짧은 생각만 보이는 것 같네……. 이제라도 대답할게. 나도 너와 같은 일을 겪었고, 나는 뭔가를 꼭 바꾸고 싶어. 그게 뭔지는……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어. 그러니 네 결정이 무엇이든 조금만 기다려 줄 수 있을까……?]

클로에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이런 목소리를 알지 못했다. 이처럼 자신 없는 듯 기어들어 가고, 자꾸만 머뭇거리고, 상대의 불응을 가정하여 걱정하는 그런 목소리.

그녀가 아는 데메트리안 크레벨은 이런 목소리를 내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데메트리안 크레벨은…….

클로에는 제 마음을 옥죄는 그 모든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글쎄. 사람에겐 다양한 면이 있으니까.

제 마음을 약해지게 만들고 마는 그가 원망스럽고, 또 한편으로 거기에 마음이 허물어지고 마는 제가 너무 싫어서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리하면 이 세상의 모두로부터 저를 숨길 수 있을 것만 같아서.

그러는 양에 툭, 제 위에 올려두었던 책이 침대 위로 떨어졌다.

‘……부군. 부군을 뵈어야지. 어쨌든 내게 호감을 느끼신 건 맞으니까. 미리 더 가까워지면 셰비크 생활이 더 나아질 거야. ……달라질 건 없으니까.’

클로에는 제 드레스룸에 고이 보관돼 있을 토끼털 케이프를 떠올리려 애썼다. 강박적으로.

* * *

클로에는 일부러 철의 날을 기다려 제국 아카데미로 향했다. 뷔욘이 유일하게 등교하는 날이었으니까.

이번 주에 일정이 없는 날이 있었는데도 굳이 오전마다 라이언이 다녀가는 철의 날에 가겠다는 것에, 미라벨은 그 심산을 대충 알아차렸다.

‘그럼 이제 데미 공자한테는 아무것도 기대 안 하려는 걸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요전에 아이펠의 장원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여전히 구체적으로 언급한 적이 없어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이 벌써 열흘이 다 돼 가는 일이었다. 데메트리안으로부터 뭔가 연락이 오는 낌새긴 했는데, 클로에는 그에 대한 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만큼 쉬운 마음도 아니겠지……. 제가 해 줄 수 있는 건, 언젠가 터놓고 말해 줄 때를 위해 조용히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아카데미도 조금 어수선하네?”

“다다음 주에 탄신연이고, 또 바로 태양절이니까. 그다음엔 방학이고…… 그럼 아마 다음 주에 시험 기간이겠네.”

클로에는 몇 년 전까지 이곳에서 공부했던 에티엔의 스케줄을 떠올리며 대꾸했다.

아니, 사실 그것은 일종의 자기기만이었다. 에티엔은 졸업한 지 벌써 2년이 되었고, 저에게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공유하는 아카데미 재학생 친구가 하나 있으니까. 그는 이미 모든 학점을 수료하여 등교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아카데미 정경을 눈에 담으며, 클로에는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뭔가 다른 미래를 기대하며 그를 떠봤으면서, 결국 원래대로의 미래를 공고히 하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제가 조금…… 떳떳하지 않았던 것이다.

클로에는 괜히 발이 닿은 땅바닥을 문질러 모래알 긁히는 소리를 냈다.

그녀들이 자리한 곳은 제국 아카데미 교정의 중심이 되는 분수 광장 한구석의 벤치였다. 정문에서 오든 후문에서 오든, 또 강의동에서 나오든 기숙사에서 나오든, 아카데미의 길은 모두 이 광장으로 이어져 있었다.

지난번에도 철의 날 이 시간쯤 도착해서 뷔욘과 마주쳤던 건데, 이 시간이 그의 수업 전인지 후인지, 그가 이번에도 도서관에 갈지 안 갈지 그 무엇도 보장할 수가 없어서 이런 기다림을 기획한 것이었다. 마주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하여 그때보다 30분은 이르게 도착하기까지 했다.

‘누구인진 모르지만 고마워요, 수백 년 전에 아카데미 설계하신 건축가님.’

과연 미라벨의 말대로 지난번과는 교정의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진작에 하복으로 갈아입은 생도들은 공부 스트레스 때문인지 그마저도 대충 꿰어 입은 모양새였다. 아무리 더워도 소매며 앞섶의 단추를 모두 올바르게 채우고 있어야 했건만, 앞섶을 풀어 헤쳤거나 팔꿈치 아래로 내려오는 소매를 걷어붙인 자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같이 공부의 무게에 짓눌려서인지 거무죽죽한 안색…….

거기에 비하면, 그녀들이 생각해도 하나의 레이스 양산을 나눠 쓴 채 그늘 아래 앉아 있는 자기들의 모습이 이질적이었다. 제복이 아닌 화사한 옷차림의 그들을 흘끔거리는 자들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거기에는 호기심보다는 학업의 괴로움이 없는 자들에 대한 부러움이 묻어나고 있었다.

“왠지, 우리가 호사를 누리고 있는 것 같네……?”

미라벨이 멋쩍게 내뱉는 말에, 클로에는 깊이 공감하면서 주변을 살폈다. 어쩐지, 교정의 나뭇잎들을 밝히고 있는 햇살이 얄미울 정도였다.

어디선가 불어온 미풍이 드레스의 앞섶에 대인 굵은 레이스와 머리칼을 스쳐 얼굴과 목가에 청량감이 돌았다. 클로에의 얼굴이 배부른 고양이처럼 풀어지는 것을 본 미라벨이 은근슬쩍 물었다.

“근데 왜 갑자기 마음을 바꿔 먹었어? 왕자님이랑은 만났던 때에만 만난다며.”

거기에는 미라벨이 지금껏 듣지 못한 모든 이야기에 대한 질문이 들어 있었다. 그러니까,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거고, 그래서 너는 어떤 미래를 꾸리기로 한 것인지…….

미라벨이 허리를 숙이고, 고개를 돌려 클로에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미라벨의 포니테일이 땅에 닿을 듯 아슬아슬하게 늘어졌다.

클로에는 반납할 책 위에 올려둔 손을 꼼지락거렸다.

미라벨의 질문이 함의하는 바를 낱낱이 알았지만, 적당히 제가 원하는 것에만 답하기로 했다.

“왕자님이랑 잘 지내는 모습을 보여 주면, 나중에 가족들이 덜 슬퍼하지 않을까 싶더라고. 어쨌든 내게 호감이 없진 않으시니까 그런 선물을 하셨을 테고 말야. 어차피 난 스칸다르에 갈 수밖에 없으니까…….”

그 호감이 훗날 뷔욘이 할 고백대로 연심인지, 아니면 그렇게 가장된 것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클로에가 말 너머에 감춰 둔 그 고민을 미라벨도 알았다.

정말 그것뿐이야? 그런 마음을 담아 미라벨의 노란 눈동자가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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